[역대 주한 중국대사 列傳⑥] 한국대사로 부임한 일본통…청융화 5대 대사

최창근
2021년 9월 2일
업데이트: 2021년 9월 2일

‘무(武)’ 아닌 ‘문(文)’으로 무장된 인민해방군 자임
첫 국장급 주한 대사, 여전히 주북한 대사보다는 격 낮아

제5대 주한국 대사 청융화(程永華)는 2대 대사 우다웨이(武大偉)와 닮은꼴이다. 중국 외교부 내 ‘재팬스쿨(일본 전문가 그룹)’로서 2003~2006년 주일본대사관 정무공사를 역임한 점, 주한 대사 이임 후 주일본 대사로 승진·전보된 이력이 겹친다. 고향이 둥베이(東北) 지방이라는 점도 같다.

청융화는 1992년 한-중 수교 이래 첫 외교부 사장(司長·국장)급 대사였다. 초대 장팅옌(張庭延), 2대 우다웨이, 3대 리빈(李濱), 4대 닝푸쿠이(寧賦魁)는 모두 부사장(부국장)급이었다. 이를 두고 당시 한국 언론은 ‘이례적인 격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다만 북한에 외교부·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 부부장(차관)급 대사를 파견하던 중국의 관례는 바뀌지 않아 한국 홀대론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 부임 전 청융화는 주말레이시아 대사로 근무했다.

1954년생인 청융화의 고향은 지린(吉林)성 창춘(長春), 일본 침략기 만주국(滿洲國) 수도 신징(新京)이다. 일본인 주도로 건설한 도시답게 도시 곳곳에는 ‘일본색’이 짙게 남아 있었다. 창춘에서 태어난 인연은 나중에 일본과 이어졌다.

청융화는 창춘외국어학교 일본어과에 진학했다. 1963년 저우언라이(周恩來) 국무원 총리의 지시로 개교한 학교는 둥베이 지역 유일 외국어학교였다. 창춘외국어학교 재학 중이던 1972년 9월,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일본 총리가 중국을 전격 방문했다. 1945년 일본 패망 이후로 지지부진하던 중-일 국교 정상화가 목적이었다. 당시 일본은 대만(중화민국)과 국교를 맺고,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는 외교 관계가 없었다.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来)를 만난 다나카 가쿠에이는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하기로 했다.

저우언라이는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언필신 행필과(言必信行必果·말한 것은 반드시 신의가 있어야 하고,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메모를 건넸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이에 화답했고, 그해 9월 29일, 베이징(北京)에서 ‘중일공동성명(中日共同聲明)’을 발표함으로써 중-일 간 국교는 정상화됐다.

戰後 중국 1세대 일본 유학파… 창가학회, 공명당과 인연

중-일 수교 이듬해인 1973년, 학교를 졸업한 청융화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중국 정부가 선발한 전후 1세대 일본 유학생 5인 중 1인이었다. 훗날 주일본대사관 참사관을 거쳐 중일우호협회 비서장·부회장을 역임하는 쉬진핑(許金平), 국가안전부 소속으로 2012년 주광주총영사로 한국에 부임하는 텅안쥔(滕安軍) 등이 유학 동료였다.

도쿄(東京)도 마치다(町田)시에 자리한 와코대학(和光大學)에서 1년 연수 후, 1975년 일본 창가학회(創價學會·SGI)가 설립한 소카대학(創價大學·창가대학)에 입학하여 일본어, 역사, 문화, 지리, 문학 등 종합문화 과정을 공부했다. 당시 창가학회는 중국 공산당의 지배가 장기화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대륙에서 포교 강화를 위해 중일 수교를 지원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중국 유학생도 적극 수용했다.

중국 정부도 일본 국립대학이 중국 유학생을 받아들이지 않는 형편 속에서 일본 전문가 양성을 위해 창가학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유학생을 파견했다. 문화대혁명(1966~76)이 진행되고 있던 중국 내에서 고등교육이 중단된 사정도 있었다. 도쿄 하지오지(八王子)시에 있는 소카대학 캠퍼스에는 유학시절 청융화 등 중국 유학생이 심은 벚꽃 나무가 아직까지도 꽃을 피우고 있다.

1977년 대학 졸업 후 청융화는 주일본중국대사관에 근무했다. 1978년 ‘중일평화우호조약’ 체결 시 실무자로 보조했다. 이후 1983년 귀국하여 외교부 아주사 일본담당처 3등 서기관이 됐고, 2등 서기관으로 승진했다.

청융화 전 주한 중국대사(당시 주일 중국대사)가 2017년 중일 국교정상화 45주년 기념식에서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AP/연합

1989년 두 번째 도쿄에 부임하여 주일대사관 2등 서기관·1등서기관으로 일했고 1992년 귀임하여 외교부 아주사 일본처 부처장·처장으로 일본 문제를 전담했다. 1996년 세 번째 주일본대사관으로 발령받아 참찬(參贊·참사관)이 됐고 공사참사관으로 승진했다. 2000년 본국으로 돌아온 청융화는 외교부 아주사 부사장으로 승진했고 2003년 주일본 공사로 부임하여 네 번째 일본 근무를 했다.

주일 공사 시절인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로 중일 관계가 경색됐다. 당시 왕이(王毅) 대사(현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는 중국 정부를 대변하여 강경 대응을 하였고, 청융화는 공관 차석으로서 그를 보좌했다.

일본 업무 외길… 駐 말레이시아 대사 거쳐 서울로

3년을 도쿄에서 보낸 청융화는 2006년 주말레이시아 대사로 임명돼, 첫 재외공관장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다 2008년 10월, 주한국대사로서 서울에 부임했다.

외교관으로서 청융화는 ‘문장해방군(文裝解放軍)’론을 주장했다. 지난날 ‘무장해방군’에 대비되는 말로 ‘무(武)’가 아닌 ‘문(文)’으로 무장된 인민해방군이라는 뜻이다. 겉보기엔 문약해 보이지만 가슴에 칼을 하나 품은 외교관의 특징을 표현한 것이다.

청융화 부임 전 한국 내에서는 반중 정서가 고조됐다. 2008년 4월 발생한 베이징올림픽 성화봉송식 중국 유학생 폭력사건에 이어, 9월 중국산 분유에서 멜라민이 검출돼 이전부터 문제시되던 ‘중국산 식품 안전 문제’가 재차 부각됐다. 이는 온·오프라인 상 반중 감정 확산으로 이어졌다.

10월 23일, 서울 부임 직전 베이징에서 한국 특파원단을 만난 청융화는 “반한감정은 상호 이해의 부족으로 나타난 것이다. 만약 인터넷 등에서 일부 날조된 얘기가 퍼진다면 즉각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조사해서 양측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0월 26일, 한국에 부임한 청융화는 11월 10일, 이명박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고 특명전권대사로서 공식 임무를 시작했다. 신임장 제정식에서 청융화는 “주한대사로 부임한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그 책임이 막중함을 느낀다. 앞으로 중국 정부의 요구에 따라 최선을 다해 일하며 한-중 간 각 분야에서의 교류와 협력을 추진하고 양국 간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의 심화와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고 밝혔다.

그해 12월 11일, 청융화는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을 방문했다. 장하이타오(張海濤) 공동 대표이사, 저우랑후이(周郎輝) 상하이자동차그룹 부총재 등과 함께였다. 방문 시에는 대사관 관용차량으로 구입한 쌍용자동차의 ‘체어맨 W 리무진’을 이용했다.

청융화(사진 가운데) 당시 신임 주한 중국대사가 2018년 12월 11일 쌍용자동차의 경기도 평택공장을 방문해 직접 구입한 체어맨W 리무진 앞에서 쌍용차와 상하이차 임원들과 기념사진 촬영에 응했다. | 쌍용차 제공

2004년 쌍용자동차 대주주가 되어 경영권을 인수한 상하이자동차는 시설 투자, 고용보장 등을 서면으로 약속했지만 지켜진 것은 없었다. 인수 후 2000여명을 해고했다. 국내 자동차 판매량도 부진한 형편이었다.

평택공장을 시찰한 청융화는 “쌍용자동차는 중국기업이 한국에 투자한 가장 큰 기업으로 중국 정부에서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쌍용자동차는 한-중 양국 경제무역협력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국 정부는 쌍용자동차에 대해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며 필요하다면 한국 정부와 협력해서 쌍용자동차가 발전할 수 있도록 협의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청융화의 말은 공언(空言)이 됐다. 2009년 상하이자동차는 쌍용차 매각을 발표했고, 2010년 한국 시장에서 완전 철수했다. 상하이자동차의 쌍용자동차 인수와 매각은 인수 시 약속 불이행, 기술 탈취 논란을 불렀다.

쌍용자동차 관련 약속은 공허한 메아리로… 상하이차 기술탈취 논란 일으켜

상하이자동차는 추후 4년 간 신차개발비용 등 1조 2000억 원 투자, 차량 30만대 생산을 약속하면서 인수에 성공했다. 상하이차는 투자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신차개발이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서 연간 차량 생산량도 15만대에서 9만대로 줄었다. 반면 20여년간 합작 생산만 하던 상하이차는 쌍용차 인수 뒤인 2007년 자체 브랜드 로위(Roewe)를 출범, 18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며 미국 ‘포춘’ 500대 글로벌 기업에 선정되는 등 급성장했다.

2009년 4월 15일, 청융화는 민간 싱크탱크 희망제작소 초청으로 ‘희망찬 내일을 함께 열어간다’ 주제로 연설했다. 청융화는 당시 국제경제와 금융형세를 결부시키면서, 위기는 위난과 기회의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것을 기본 내용으로 하여 중국 정부의 금융위기 대응을 위한 조치와 정책들이 거둔 성과를 중점적으로 소개하였고, 중국이 위기대응을 위한 국제협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과 한-중간 위기 공동 대응에 관한 견해를 이야기했다.

문제는 질의응답 시간에 발생했다. 라디오방송사 ‘희망지성(希望之聲·SOH)’ 기자가 “공산당 탈당이 5300만 명 이뤄지고 있다. 여러 가지 국내적인 상황이 있는데 올해 중공 정권이 최악의 고비를 맞고 있다”고 말하자, 청융화는 “제가 먼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희망지성 국제방송국이 앞으로 사실대로 보도하길 바란다. 거짓말하지 말길 바란다. 이것은 초등학교 학생 수준도 안 되는 것 같다”고 답했다.

청융화 당시 주한 중국대사가 기자회견 중 중국의 민감한 화제에 관련해 질문을 받자 머뭇거리고 있다. | SOH

중국 측이 민감하게 여길 티베트 문제에 대한 질문도 있었다. 청융화 대사의 답변은 강경했다. 티베트의 민주화를 이룬 것이 중국이라는 주장이었다. “1951년 달라이 라마로 대표되는 티베트 지방 세력과 중국은 티베트를 평화적으로 해방시키는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이후에 농노제와 연관된 세금 징수 문제의 개혁이 중국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파룬궁 탄압 등 중국의 인권탄압에 대한 질문에 대해 두 차례나 답변을 회피했다. 일부 방청객들이 “일국 대사가 공식 석상에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중국 당국은 파룬궁을 탄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자 답변을 피하며 자리를 빠져나갔다.

2009년 12월, 시진핑(習近平) 당시 중국 국가부주석의 방한이 예정됐다. 방한에 앞서 개최된 기자회견에서 청융화는 “이번 방문은 한-중 양국 간 ‘전략적 협력 파트너 관계’를 심화시키고 내실화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중 양국은 많은 공통이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의 발전에 대해 낙관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청융화의 설화는 끊이지 않았다. 2009년 북한은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화폐 개혁 단행 후인 2009년 12월 21일, 당시 캐슬린 스티븐스(Kathleen Stephens) 주한미국 대사와 저녁 식사를 겸한 간담에서 청융화는 북한의 화폐개혁은 경제에 대한 국가 통제를 다시 강화하려는 ‘경솔한 시도(ill-advised attempt)’라고 비판했다.

그는 “사람들이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 ‘지니(genie·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를 다시 병에 넣기는 매우 어렵다. 중국인들이 자기 집과 차를 샀는데 정부가 사유 재산권을 인정하지 않던 시절로 시계를 되돌리려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지적했다.

동석한 천하이(陳海) 당시 대사관 정무참사관(현 주미얀마 대사)은 자신의 북한 근무 경험을 들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북한 관리들은 경제와 무역의 원리에 대해 무지하다. 북한 고위 관료 중 누구보다 서방 경제에 많이 노출된 강석주 내각 부총리가 우다웨이 중국 6자회담 대표와의 대화에서 무역적자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중국에서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체한 지 100년이 지나도록 조선은 명 왕실에 조공을 보내고 명의 풍습과 전통을 고수했다. 작은 나라인 한국은 ‘변화에 굴복하면 생존할 수 없다’는 공포 때문에 급격히 변하는 환경에 대응할 때 위축된다. 한국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전통이 있다.”

청융화와 천하이의 발언은 2011년 1월, ‘위키리크스(WikiLeaks)’가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보고서를 폭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위키리크스에 공개된 청용화 주한 중국 대사 발언 부분 | 화면 캡처

역대 최장수 일본 대사, 재임 중 외교 마찰로 곤욕

청융화는 2010년 2월, 단행된 외교부 인사에서 외교부 부부장급으로 승진하여 주일본대사로 전보됐다. 부임 해부터 중-일 관계는 악화일로였다. 중국-대만-일본의 영유권 분쟁 지역인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열도 문제 때문이었다.

2010년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 주변에서 일본 해상보안청 경비선이 중국 어선 선장을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12년에는 일본 정부가 센카쿠 열도를 국유화하면서 양국 관계는 최악이 됐다. 2016년에도 유사 문제가 재발했다. 청융화는 새벽에 일본 외무성으로 초치(招致) 되는 등 곤욕을 치러야 했다. 우여곡절 속에서도 청융화는 2019년까지 대사 자리를 지키며 역대 최장수 주일본 중국대사 기록을 썼다. 2019년 5월 7일, 도쿄 뉴오타니호텔에서 개최된 이임 리셉션에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부부, 야마구치 나쓰오(山口那津男) 공명당 대표 등 1000여명이 참석했다.

청융화는 외교관 퇴임 후 2020년 6월 중일우호협회(中日友好協會) 상무(常務)부회장이 돼 현재까지 중-일 관계 업무를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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