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기업에 투자 호소한 시진핑, 내부에선 미국 기술 배척 가속

박숙자
2024년 04월 2일 오후 2:04 업데이트: 2024년 04월 2일 오후 2:07

민족주의 내세우며 기술 자립 촉구…사실상 외국기업 간첩 간주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지난달 27일 미국 경제계 리더들과 만나 중국의 대외 개방 의지를 피력하며 양국 간 협력을 강조했다.

하지만 다음 날인 28일 중국 방첩 당국이 외국 기업의 스파이 활동을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의 단편 영화를 공개했다.

중국 당국이 이 같은 모순된 행보와 관련해 중국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이 극단적 민족주의, 반간첩법,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시진핑이 지난달 27일 미국 경제계·학계 인사 10여 명과 만나 “개혁·개방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중국은 경영 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중국 당국은 외국산 기술 제품을 자국산 제품으로 대체하는 속도를 높이고 있다.

지난달 8일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중국 정부가 2022년 9월 각 정부 부처에 ‘79호 문건’을 하달했다. 하드웨어를 포함한 외국산 제품을 퇴출할 것을 요구하는 이 문건은 사실상 ‘미국 기술 제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A제거(消A)’ 문건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문건은 델, IBM, 시스코 등 미국 하드웨어 제조업체를 1차 퇴출 대상에 포함했고, 금융·에너지 분야 등 국유기업에 2027년까지 IT 시스템 내 외국 소프트웨어를 모두 중국산으로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베이징 당국이 국내 과학기술 산업의 성장을 더욱 적극적으로 촉진하는 동시에 이들 산업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외국 기업들을 억압할 것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현지 경쟁이 심화되고 소비자 지출이 둔화되면서 미국 기업들의 중국 내 매출이 감소하고 있다. 미국 맥킨지글로벌연구소에 따르면, 미국 기업의 중국 내 수익이 기업 전체 수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06년 16%에서 2020년 10%로 감소했다.

애플의 중국 내 판매 실적도 급락했다. 애플의 2023년 4분기 중화권 순매출은 전년 대비 13% 감소했고, 올해 첫 6주 휴대폰 판매량은 24%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중국 현지 브랜드인 화웨이 휴대폰 판매량은 전년 대비 64% 증가했다. 지난해 화웨이가 메이트 60 프로를 출시한 이후 중국 정부는 공무원의 아이폰 사용을 금지했다.

2022년 2월 10일, 캘리포니아주 프리몬트에 있는 테슬라 프리몬트공장의 항공 사진. | JOSH EDELSON/AFP/연합

블룸버그에 따르면, 테슬라 상하이 공장의 2월 출하량은 1월 대비 16%, 전년 동기 대비 19% 급감했다.

테슬라의 판매량이 둔화됨에 따라 테슬라보다 훨씬 저렴한 BYD와 같은 본토 전기차 제조업체의 판매량이 급증했다. 지난 1월 BYD의 판매량은 43% 증가했다.

대만발명협회(TIA) 라이롱웨이(賴榮偉) 전무이사는 에포크타임스에 “현재 중국의 상황은 하드웨어든 소프트웨어든 첨단 기술과 관련된 것이라면 모두 본토의 것을 요구한다”며 “중국 당국은 자국 기업, 자국민이 만든 제품만 믿는 상황”이라고 했다.

왕궈천(王國臣) 대만 중화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에포크타임스에 “중국 당국이 화웨이의 휴대폰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면서 애플은 물론 삼성 등 다른 나라 제품의 시장은 위축되고 있어 외국 기업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했다.

시진핑 총서기가 미국 기업 CEO들을 만난 다음 날(28일) 중국 공산당 서열 3위인 자오러지(趙樂際)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이 보아오포럼에서 진정한 다자주의를 촉구한다며 “패권주의의 폐해가 심각하다”고 했다. 미국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우회적으로 미국을 비판한 것이다.

“미국 기업은 간첩”

중국 당국은 해외 투자를 호소하면서도 외국 기업을 ‘잠재적 간첩’으로 보는 모순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3월 ‘중국발전고위급포럼’ 개막을 며칠 앞두고 중국 공안이 미국의 기업 실사업체인 민츠그룹의 베이징 사무소를 급습해 중국인 직원 5명을 연행했다. 이들은 현재까지도 석방되지 않았다.

올해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다. 시진핑 총서기가 미국 기업인들을 만나 유화 제스처를 취한 다음 날인 28일, 중국 국가안전부는 외국 기업의 스파이 활동을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의 단편 영화를 공개했다.

중국 방첩 당국인 국가안전국이 공개한 ‘숨은 국가안보 위험에 대한 은밀한 조사’라는 8분 22초 분량의 이 영화는 ‘해외 스파이 정보기관이 시장조사 및 기업 컨설팅을 빌미로 중국에서 국가기밀을 탈취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 방첩기관인 국가안전부가 28일 공개한 단편 영화의 한 장면(사진). | 중국 국가안전부 영상 캡처

지난달 말, 중국 전인대 상임위원회는 5월 1일부터 시행되는 ‘국가기밀보호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국가정보법(2017년), 데이터 보안법(2021년), 반간첩법 개정안(2023년)에 이은 또 하나의 ‘국가 안보’ 관련 법안이다.

라이롱웨이는 “중국 정부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일련의 제도를 수정한 것은 경제 발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며 “이는 전 세계에 중국에서 자칫 국가 안보와 관련된 법을 위반할 경우 감옥살이를 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정치적 리스크

시진핑은 집권 3기에 접어든 후 많은 관례를 깼다. 지난 30여 년 동안 매년 열렸던 국무원 총리의 양회(전인대와 정협) 기자회견을 취소하고, 과거 보아오포럼의 마지막 날에 열렸던 총리와 외국 기업 고위 임원 간의 비공개 토론도 올해는 취소했다. 2024 보아오포럼에도 리창 총리 대신 전인대 상임위원장인 자오러지가 참석했다.

이와 관련해 시진핑이 ‘유일 존엄(一尊)’의 위상을 강조하고 국무원의 역할을 축소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1980년대 이후 상임위원 7명의 집단지도 체제를 유지하면서 총리가 경제를 책임져 왔다. 하지만 시진핑 집권 이후 리커창 총리부터 리창 총리까지 국무원 총리의 경제 권한은 시진핑에게로 넘어갔다.

라이룽웨이는 “예전에는 경제는 우편향, 정치는 좌편향이었는데, 지금은 경제도 좌편향됐다”며 “경제 발전이 정치를 중심으로 이뤄진다면 분명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했다.

* 이 기사는 쑹탕, 이루 기자가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