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치하서 진실을 말하다…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레이몬드 비글(Raymond Beegle)
2024년 05월 23일 오후 6:00 업데이트: 2024년 05월 23일 오후 7:31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어린 시절의 가난, 제2차 세계대전의 최전선에 있던 경험, 체포, 고문, 투옥, 중노동, 암 발병, 박해 등을 겪은 그는 이 모든 경험을 자신의 집필 활동에 쏟아부었다. 그 모든 고통들은 결국 위대한 문학 작품의 촉매제로 작용했다.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은 1918년 12월 11일 러시아 북서부에서 태어났다. 20대 청년이던 1945년, 솔제니친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을 비방한 표현이 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이후 8년형을 선고받고 소련의 정치범수용소인 굴라크로 보내졌다. 중노동과 굶주림으로 악명이 높은 굴라크행은 사실상 사형 선고와 다를 바 없었다. 이 8년의 암흑기가 솔제니친의 인생을 바꾸었다. 굴라크에서 보낸 시간들은 솔제니친의 문학 작품 전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들을 토대로 쓴 솔제니친의 글은 무척이나 사실적이라는 측면에서 뉴스 기사와도 같았다. 솔제니친은 이렇게 사실적인 글을 내세워 선지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수용소 군도

저널리즘 문학의 걸작이자 솔제니친의 최대 역작으로 꼽히는 ‘수용소 군도’는 소련 치하 굴라크 수감자들의 참상을 증언한 수필이다. 작품에는 불의에 맞서 싸우는 수감자들의 투쟁과 생존을 위한 필사의 사투가 담겨 있다.

열악한 환경에 처한 인간이 어떻게 짐승으로 변해가는지에 대한 글은 인류 역사상 허다하게 쓰였으나, 똑같은 상황에서도 짐승으로 변하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켜낸 소수의 이야기는 다뤄지지 않았다고 솔제니친은 지적한다.

“나는 여기서 그 수많은 악의 사례를 검토하지는 않겠다. 그런 사례는 이미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다.”

솔제니친은 ‘굴라크 생활에서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열렬히 주장하던 한 수감자가 정작 본인은 그러지 않았던 사례를 소개한다. 이 수감자는 빵 한 조각을 더 먹기 위해 동료 수감자들을 배신하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다.

제1원

솔제니친의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제1원’과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로, 두 작품 역시 굴라크 생활의 경험담을 녹여낸 소설들이다.

‘제1원’은 국가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과학 지식을 악용해 민간인을 감시하는 기술을 개발하도록 국가로부터 강요당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정부에 협력하여 연구소에 남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협력을 거부하여 노동수용소의 짐승 같은 상황에 처할 것인가. 과학자들 중 일부는 타인의 삶에 고통을 가져다주느니 차라리 고된 노동에 시달릴 것을 택한다.

엄청난 외로움, 후회, 두려움 속에서도 이들은 강력한 사랑의 힘을 믿고 따른다. 어디에서건 사랑을 찾아낸다. ‘제1원’ 속 주인공은 자신과 사랑에 빠진 상대방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당신만이 내게 필요한 전부입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서정적인 모순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 소설이 아닐까. 친절하면서도 단순한 성격의 남자, 이반 데니소비치는 어느 날 갑자기 간첩 누명을 뒤집어쓰고 굴라크에 수감된다. 이후 10년 동안 춥고 혹독한 환경에서 강제 노동에 동원된다.

이반이 수감된 굴라크의 신조는 “하루만 더 버티면 된다”이다. 소설은 굴라크에 수감된 이반의 여느 하루를 따라간다. 이날 이반은 아주 운이 좋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추운 곳으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 때는 배급원을 속여 죽 한 그릇을 더 먹었다. 간수들을 피해 고철 조각을 몰래 가져와 필요한 도구로 만드는 행운을 누리기까지 한다.

밤이 되고 잠자리에 누운 이반은 생각한다.

“우울하고 불쾌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으며, 어쩌면 거의 행복하기까지 한 하루였다. 이런 날들이 만 10년, 3653일이나 계속되었다. 사흘이 더 가산된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1974년 3월, 스위스 취리히 공항에서 가족과 함께 있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사진=이그나트 솔제니친 제공

출판: 세상에 나오다

생전 솔제니친은 “나는 평생 내 글을 인쇄물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감히 내 글을 읽어줄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고 회상했다. 이는 정치적인 위험 때문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솔제니친의 예상을 벗어나 예상치도 못했던 길로 그를 이끌었다. 솔제니친이 44세였던 1962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소련 문학잡지 ‘노비 미르’에 실렸다. 기적과도 같았던 이 사건으로 솔제니친은 하룻밤 사이에 전 세계적인 유명 인사로 거듭났고, 훗날 노벨상 수상자가 된다.

서방으로의 유배

소련 정부는 국제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키며 유명세를 얻기 시작한 솔제니친을 암살하려 했으나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암살에 실패한 소련 정부는 언론을 동원해 솔제니친에게 악의적인 보도를 쏟아냈고, 이에 선동된 대중은 솔제니친에게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소련 정부는 솔제니친을 체포, 투옥하기도 한다.

모진 탄압 끝에 결국 솔제니친은 소련에서 추방당한다. 서독에 도착한 솔제니친을 서방 사회는 박수와 환호로 맞이했다. 솔제니친은 서독을 거쳐 스위스 취리히에 체류한 뒤 1976년 미국의 버몬트에 최종적인 보금자리를 꾸린다.

그곳에서 솔제니친은 자신이 평생 동안 마음속으로 구상하고 생각해 왔지만 글로는 거의 옮길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쓰기 시작한다.

1978년, 하버드 연설

소련에서 태어나 한평생을 살았던 솔제니친에게 광범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서방 사회에서의 삶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1978년, 솔제니친은 미국 하버드대학교 졸업식 연사로 강단에 섰다. 연설에서 솔제니친은 자유의 이름으로 부도덕을 합리화하지 말 것을 역설했다.

“파괴적이고 무책임한 자유가 무한한 공간에서 용인되고 있다. 사회는 인간의 끝없는 타락에 거의 무방비인 것으로 보인다. 방종, 음란, 범죄, 공포로 가득한 도덕적 폭력을 가하는 문화들이 자유의 일부로 간주되고 있다.”

“인간의 영혼이란 오늘날 대중문화가 제공하는 것보다는 더 높고, 더 따뜻하며, 더 순수한 것을 갈망하는 존재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성한 영혼을 헛소문, 어리석은 생각, 공허한 대화 따위로 채우지 않을 권리가 있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소유물은 우리 자신의 영적 생명이다.”

1994년, 러시아로 돌아가다

공산주의가 붕괴된 후 1994년 솔제니친은 러시아로 돌아갔다. 두 달간 기차를 타고 러시아 전역을 여행하며 수십 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대중 강연을 연 솔제니친은 마침내 모스크바에 정착했다.

자유의 몸이 된 솔제니친은 초기 작품을 다듬고 완성하는 한편 회고록과 소설 집필에 몰두했다. 이 시기 솔제니친의 작품들에는 소련 정부와의 투쟁, 망명 생활, 그리고 이같이 어려운 시기에 자신의 원고를 숨기고 지켜준 사람들에 대한 내용들이 가득하다.

같은 시기 솔제니친은 자신의 일생일대 프로젝트인 ‘붉은 수레바퀴’를 집필해 나갔다. 솔제니친이 1930년대에 처음 떠올린 ‘붉은 수레바퀴’는 1914년부터 1922년까지를 다룬 연작 소설로 구상됐으나, 솔제니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1917년에 그치며 미완성으로 남았다.

미국 역사학자 아서 주니어는 솔제니친을 가리켜 “모범적인 고귀함과 극도의 용맹을 지닌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강력한 소설가이자 없어서는 안 될 역사가인 솔제니친은 동포들의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고 소련인과 러시아 역사의 이름으로 기괴한 제도를 장엄하게 기소한 예술가, 도덕주의자”라고 평했다.

이러한 말처럼 문학가이자 선지자, 예언자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경이로움 속에서 돌아본다. 나 혼자서는 결코 찾을 수 없었던 길에서, 절망을 뚫고 여기까지 온 경이로운 길에서, 나 역시 당신이 비춘 빛을 인류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우리들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같은 일을 하도록 부름받았다.

레이몬드 비글은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로 뉴욕 옵저버, 영국 레코드 컬렉터 등에 글을 기고해 왔다. 미국 스토니브룩 대학교와 오스트리아 그라츠의 미국 음악 연구소 교수로 재직한 바 있다. 현재는 미국 맨해튼 음악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황효정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