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위기에 中 설계업체 휴업·임금체불 확산…“폭동의 전조”

강우찬
2023년 08월 26일 오후 3:14 업데이트: 2023년 08월 26일 오후 3:14

중국 대형 부동산 개발업체의 채무불이행(디폴트) 위기가 고조되면서 설계 업체로 불똥이 튀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는 상하이의 한 국가종합 A급(갑급) 건축설계 업체가 3개월 휴업에 들어갔으며, 이 업체가 사실은 ‘상하이건축설계연구원’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파문이 확산됐다.

상하이건축설계연구원은 1953년 개업한 60년 역사의 국유기업으로 중국 최대 규모 설계업체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헝다그룹과 비구이위안 등 부동산 개발업체 경영난이 관련 업종의 국유기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공포감이 확산됐다.

소문의 진원은 중국 소셜미디어인 웨이보에 게재된 한 장의 통지문이었다.

이 통지문은 “전반적인 사업환경의 영향으로 회사 업무가 크게 감소해 경영이 어렵다”며 “현재 마무리해야 할 새로운 설계 프로젝트가 없어 6월 29일부터 3개월간 전 직원 업무 중단 결정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통지문에서는 휴업기간을 3개월이라고 했지만 정확한 업무 재개 일자를 명시하지 않은 채 “프로젝트를 수주하면 업무 재개를 위해 사측에서 연락하겠다”고만 밝혔다. 사실상 무기한 휴업이었다.

문제는 하단에 찍힌 회사 직인 중 회사 이름을 밝힌 부분이 누군가에 의해 일부만 가려져 상하이의 한 건축설계 사무소라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는 점이다. 소문이 퍼지면서 이 회사가 업계 탑클래스인 ‘상하이건축설계연구원’이라는 이야기까지 나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상하이의 설계업체가 경영난으로 3개월 휴업에 들어갔다는 소문의 불씨가 된 통지문. 직원들에게 3개월 업무 중단을 알리는 내용이 담겼다. | 웨이보

논란이 확산되자, 현지매체 화샤(華夏)시보가 취재에 나섰다. 이 매체는 비슷한 이름의 여러 업체를 조사한 끝에 휴업에 들어간 업체가 민영 중견 기업으로 건축사 등 12명의 전문가를 포함해 40명의 직원을 거느린 ‘상하이 위엔둥(远东) 건축설계원’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이 회사 관계자는 “업무 중단 통지문은 전 직원이 아니라 한 개 부서에만 발송한 것으로 나머지 부서는 정상 운영 중”이라며 “우리 회사는 본사와 5개 지점에서 14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매체가 밝힌 취재 과정에서 이 회사의 상하이 시내 주소지는 텅 빈 채 문이 잠겨져 한동안 사람이 찾은 흔적이 없는 등 실제로 일부 지점을 폐쇄했거나 주소지를 허위 등록했을 정황이 포착됐다.

이와 관련 한 업계 관계자는 “설계업체는 부동산 개발업체의 경기에 큰 영향을 받는다”며 “건설산업 활황 때는 개발업체가 많고 설계업체가 적어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설계업체에선 ‘3년 일하면 차 사고, 5년 일하면 집 산다’고 했는데 이제는 옛말이 됐다”고 말했다.

휴업 통지문이 대형 국영기업 불황 소문으로 확산된 것은 단지 회사 이름이 가려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국 설계업계에서는 올해 초부터 직원들에게 임금을 주지 못하는 기업들이 증가해왔다.

67년 역사의 유명 설계업체 ‘난징시건축설계연구원’은 이달 중순, 3개월간 직원 급여가 밀린 사실이 현지 언론에 보도되며 주목을 받았다.

중국 국가종합 갑급(A급) 설계업체인 난징시설계연구원이 석 달째 직원 급여를 주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이번 소식을 보도한 중국 장쑤TV 화면. | 장쑤TV 화면 캡처

이 회사의 한 직원은 지역 방송인 장쑤TV에 “5월부터 석 달치 월급을 못 받았다. 5대 보험(양로·의료·실업·산재·출산), 주택자금도 납입이 끊겼다는 통보를 받았다. 생계가 어려워지고 병원마저 못 가게 생겼다”며 “도움을 청하러 이렇게 방송에 나왔다”고 하소연했다.

또다른 직원은 “회사에서 돈이 없어 임금을 못 준다고 했다”며 “우리 회사 직원이 260명 넘는데 월급 들어왔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월급을 나중에 입금해준다는 것은 그렇다 쳐도 보험료 미납으로 보험이 해지되는 것은, 다들 알겠지만, 보통 문제가 아니다”라고 털어놨다.

직원들은 “다들 지금 불안해하고 일할 때 기운이 하나도 없다”며 “처음에는 밀린 월급을 나눠서 지급하겠다고 하더니 입금하지 않았고 이제는 아무런 설명도 없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자본금 5035만 위안(약 91억원)으로 중국 건설부인 ‘주택도시농촌건설부’에서 발급하는 국가종합 A급 자격을 갖춘 설계업체다.

2022년 1월 기준 중국 내 국가종합 A급 설계업체는 88곳으로, 이들 업체는 급여나 근무조건, 장래성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어 중국 건축 관련 학과 졸업생들이 가장 취업하고 싶어 하는 직장이기도 하다.

난징시의 A급 업체 입금체불에 이어 중국 경제수도 상하이의 국영 A급 업체 3개월 휴업 소문이 중국 건축업계를 뛰어넘어 취업시장에까지 파장을 미친 이유다. 사상 최고로 치솟으면서 당국에서 발표를 중단한 청년실업률이 더해지면서 경제에 대한 비관론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는 상황이다.

난징시 설계업체 임금체불은 취재가 시작되면서 관계당국이 개입하면서 사측이 20일까지 우선 한 달분 급여를 입금하고 의료보험에 한해 미납된 보험료를 납부하고 보험 해지 사태를 막겠다고 약속하면서 일단락됐다.

현지 언론 확인 결과, 20일 이후 여전히 두 달치 급여가 미지급되고 의료보험을 제외한 나머지 4대 보험료는 체납돼 직원들의 불만이 계속되고 있다.

1989년 중국 베이징 톈안먼 학생운동에 참가했다가 투옥 후 미국으로 건너와 현재 워싱턴에서 회계사 겸 중국 평론가로 활동하는 경제학자 리헝칭(李恒青)은 “부동산 업계는 중국 경제 30%를 지탱해왔다”며 “부동산 거품이 붕괴되면 영향을 받지 않을 중국 기업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리헝칭은 “직원 급여 체불은 당연하게도 기업들이 돈이 없어서 생기는 일이다. 체불 사태가 민영기업에서 국유기업으로 확산하는 것은 그 첫 단계다. 그다음은 연쇄적인 도산”이라고 지적했다.

2023년 월 19일 중국 전자기기업체 BBK 일렉트로닉스 직원들이 회사 입구 앞에서 무릎 꿇고 체불된 임금의 지급을 요구하고 있다. | 웨이보 화면 캡처

지난 19일에는 중국 스마트폰 브랜드 오포(OPPO)를 자회사로 둔 BBK 일렉트로닉스(步步高) 직원들이 회사 입구에서 무릎을 꿇고 “밀린 급여를 제발 입금해달라”고 사정하는 영상이 소셜미디어에서 확산했다.

중국 경제 전문가인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의 에이켄 경영대학원 프랭크 셰(謝田·셰톈) 종신교수는 “중국에서 급여 체불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시위와 집단 파업은 이미 심각한 사회 문제로 번지고 있다”고 말했다.

셰 교수는 “중국 사회는 이미 균형추를 잃었다. 사회 각 기능이 더는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런 사태는 대규모 동란 혹은 폭동의 전조다”라고 말했다.

중국 매체 차이신(財新)의 주간지인 차이신주간에 따르면, 지방정부 채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불어나면서 중국 서남부 지방정부들은 공무원 수를 약 20% 줄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