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윈 따라가기] 원소절의 유래와 연등제―2010년 션윈공연 ‘등무(燈舞)’를 보고

2010년 3월 5일

2010년 션윈 전세계 순회공연 중 정월 대보름의 화려한 등불축제를 소재로 한 남성 무용작품 ‘등무(燈舞)’가 있었다. 배경 화면에 당나라 장안성을 높이 걸린 등불들 사이로 씩씩한 젊은이들의 신바람 나는 등불춤이 저절로 명절 분위기를 자아낸다.

 

ⓒ大?元

 

하지만 작품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는데 바로 중국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하는 행사가 왜 우리나라에서는 사월초파일로 변경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여기서는 원소절의 유래와 등불에 담긴 의미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원소절의 유래

 

(1) 원소의 의미

 

원소절(元宵節)에서 ‘원(元)’은 으뜸 또는 처음을 뜻하는데 옛날에는 정월을 원월(元月)이라 했다. ‘소(宵)’란 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원소(元宵)’란 단어를 풀이하면 정월의 밤을 말하는데 보통은 달이 가장 밝은 정월 보름을 지칭한다. 우리말로는 정월대보름이라 하지만 중국에서는 상원절(上元節) 혹은 등절(燈節)이라고도 한다.

상원이란 말은 도교에서 내원한 용어로 정월 보름을 상원절, 7월 보름을 중원절, 10월 보름을 하원절이라고 한다. 상원(上元), 중원(中元), 하원(下元)이 각기 천(天), 지(地), 인(人)을 주관한다고 여겼다.

등절((燈節))이란 말은 이날 등불을 밝히는 화려한 경축활동을 벌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2) 원소절의 유래

 

원소절의 유래에 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다. 역사적인 기록에 따르면 지금부터 약 2천 년 전 서한(西漢)시기에 시작됐다. 고조 유방의 뒤를 이은 한나라 제 2대 황제 혜제(惠帝)가 젊은 나이에 사망한 후 모친인 여(呂)태후가 권력을 농단하며 여씨 일족이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여태후가 사망한 후 주발, 진평 등의 원로 공신들이 일어나 일거에 ‘여씨의 난’을 제압하고 유방의 아들인 유항(劉?)을 새로운 천자로 옹립하니 바로 성군(聖君)으로 유명한 한문제이다.

문제는 여러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백성들의 삶을 평안히 하는데 전력을 기울였고 한제국은 다시 부강해지기 시작했다. 마침 여 씨 일족을 몰아낸 날이 음력 정월 보름이었기 때문에 매년 이날 밤이 되면 문제가 평복을 입고 궁궐 밖으로 나가 백성들과 함께 즐겼다고 한다. 때문에 문제는 정월 보름을 원소절로 지정했다는 설이다.

또 다른 설명에 따르면 한 무제(武帝) 때 방사(方士) 유기(謬忌)의 말을 쫓아 태일신(太一神)을 경건히 모셨는데 감천궁(甘泉宮)에 태일의 사당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큰 정벌이나 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 심지어 동지에도 태일신에게 성대한 제사를 지냈다.

 

특히 정월 보름에 지내는 제사가 가장 융성했다고 하는데 황혼 무렵부터 시작해 밤새도록 화려한 등불을 켜고 제사를 지냈다. 이때부터 정월 보름에 등불을 다는 풍습이 전해졌다고 한다.

이 외에 중국 민간에 전해지는 많은 전설이 있는데 여기서는 그 중 한 가지를 소개한다.

 

상고(上古)시기 사람들의 생활은 지금과는 달리 매우 불편했다. 잠시나마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거주하려면 끊임없이 일을 하지 않으면 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늘 홍수, 가뭄 등의 천재지변이 발생하고 맹수들의 위협과 전쟁 등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

 

한 천녀(天女)가 오색 깃털을 지닌 아름다운 새로 변해 인간 세상에 내려가 경치를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인간들이 사는 마을 근처에 있던 나무 위에서 노래를 부르던 순간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맞아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大?元

옥황상제가 이 사실을 알고는 크게 진노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 했다. 이에 상제는 조서를 내려 정월 보름에 인간들에게 큰 재앙을 내리기로 하고 화신(火神)인 축융(祝融)에게 천병천장(天兵天將)을 거느리고 인간 세상에 내려가 불을 지르게 했다.

이때 옥황상제의 딸이 이 소식을 들은 후 부황의 진노로 무고한 사람들이 불에 타 죽는 것을 불쌍히 여겼다. 이에 보름이 되기 며칠 전 마을에서 가장 현명한 노인의 꿈에 나타나 장차 닥칠 겁난에 대해 알려주었다. 잠에서 깬 노인은 이것이 꿈이 아님을 알고 황급히 사람들에게 알리고 지혜를 모았다.

마침내 보름날이 되자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잠들지 않고 미리 준비해둔 등불과 촛불을 꺼내 집집마다 환하게 불을 밝혔다. 또 광장에 맹렬한 장작불을 피워 세상이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게 했다. 축융이 상제의 명을 받고 수많은 천병천장을 거느리고 불을 지르기 위해 세상에 내려와 보니 뜻밖에 마을이 온통 불바다로 변해 있었다.

 

자신의 할 일이 필요 없어졌다고 느낀 축융은 하늘 궁궐로 돌아가 상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일이 있은 후 사람들은 보름이 되면 등불을 밝히거나 불을 놓아 밤하늘을 환히 밝히게 되었다.

2. 등불에 담긴 의미

 

그렇다면 등불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등(燈)’이란 ‘화(火)’와 ‘등(登)’의 결합이다. 여기서 등(登)은 원래 의미의 ‘오르다’가 아니라 제기(祭器)의 일종인 ‘두(豆)’가 변형된 것이다. 두(豆)는 본시 제사 지낼 때 고기 등을 올려놓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즉, 등(燈)의 본래 의미는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불을 밝히기 위해 사용하던 등불이다.

사실 ‘신(神)’이란 글자를 풀어보면 신단을 형상화 한 ‘시(示)’와 광명을 뜻하는 ‘신(申)’의 결합이다. 고대에는 신(申)만으로 신을 표시했다. 여기서 신(申)이란 번개가 번쩍일 때 나타나는 광명을 표현한 것이다. 때문에 빛과 광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성함을 상징한다.

이런 의미 때문인지는 몰라도 불가(佛家)에서는 등불을 부처님의 광명과 깨달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등을 밝히는 행위는 향을 사르거나 부처님께 좋은 차나 꽃을 공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에 대한 숭경을 표현하는 의미가 있다.

불경에서 등불에 관련된 내용이 많이 있지만 여기서는 두 가지만 들어본다.

 

(大?元?料室)

(1) 난타의 등불 공양

 

5세기 위(魏)나라 때 나온『현우경賢愚經)』「빈녀난타품(貧女難陀品)」에는 ‘난타’라는 가난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위국 기원정사에 계실 때 국왕 등 많은 사람들이 등불을 공양했다. 이를 본 ‘난타’라는 가난한 여인이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가난하고 천한 몸으로 태어나 모처럼 부처님을 뵙게 되었음에도 아무것도 공양할 것이 없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다.

 

너무나 가난해 아무것도 공양할 수 없었던 난타는 온종일 먹지도 않고 구걸에 나서 겨우 한 푼의 기름을 샀다. 이에 자신이 산 기름으로 정성껏 등을 만들어 부처님께 공양했다.

당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던 아난이 등불 때문에 부처님께서 주무시지 못할 것을 염려해 자정이 된 후 등불을 끄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등은 모두 꺼졌지만 난타가 올린 등만은 아무리 끄려 해도 오히려 더욱 밝아졌다.

 

이를 본 부처님이 “그만두어라, 아난아. 그 등불은 한 가난한 여인이 간절한 정성으로 켠 것이라 네 힘으로는 그 불을 끌 수 없을 것이다. 그 여인은 지금 비록 가난한 모습이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면 수미등광여래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를 보면 인도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부처님께 등불을 올려 공양하는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연등불의 수기(授記)

연등불은 석가모니 이전의 원시부처님으로 본래 제타위국의 태자로 태어났다. 태자가 태어날 때 해와 달이 필요 없을 정도로 온 세상이 밝아지는 신비한 모습을 본 부왕은 그의 이름을 연등(燃燈)이라 지었다. 연등태자는 어릴 때부터 몹시 총명하고 인자했기 때문에 부왕은 물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부왕이 사망한 후 삶의 무상(無常)을 깨달은 연등 태자는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숲속에 들어가 고생스럽게 수련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수행한 후 마침내 지극히 높은 깨달음을 이룩해 성불할 수 있었다.

 

연등불(燃燈佛, DIpamkara)은 자신이 깨달은 불법 진리로 수행자들을 가르쳤고 그의 설법을 들은 많은 이들이 깨달음을 얻어 나한이 되었다.

그러다 연등불이 자신의 고향인 제타위국으로 향하자 수많은 수행자들이 뒤를 따르며 긴 행렬을 이뤘다. 처음에 혹 왕위를 빼앗으러 오는 것이 아닐까 염려했던 제타위 국왕은 연등불의 숭고한 모습을 보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최고의 정성으로 부처님을 맞기로 했다.

왕은 7일 동안 정성을 다해 거국적인 공양 준비를 끝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개인적으로 꽃을 바치지 못하게 했다. 이 때 무구광이란 어린 수행자가 마침 제타위국을 지나고 있었다. 그는 연등불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는 자신도 최대의 공경을 담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싶었다. 하지만 제타위국에서는 국왕의 지엄한 분부가 있어 어디서도 꽃을 살 수 없었다.

다행히 한 여인이 꽃을 가득 담은 꽃병을 들고 무구광 동자 앞을 지났다. 무구광이 거액을 사례하며 꽃을 사고자 하자 여인이 그 연유를 물었다. 무구광 동자가 꽃을 사서 부처님께 공양을 드린다고 하자 여인은 그의 정성에 감동해 두 송이 꽃을 맡기며 자신을 대신해 부처님께 꽃을 드려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연등불은 제타위 국왕과 백성들에게 에워싸여 제타위국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무구광 동자는 연등불께 나아가 꽃을 공양하고자 했지만 인파가 너무 많아 도저히 헤치고 나아갈 수 없었다. 그의 지극한 정성을 본 연등불이 신통으로 땅을 질펀하게 만들자 사람들이 양편으로 갈라섰다.

이에 무구광 동자는 연등불 앞에 나아가 다섯 송이 꽃을 부처님께 뿌렸다. 꽃들은 모두 공중에 머물다가 해를 가리는 우산[日傘]으로 변해 모든 사람들을 덮었고 두 송이 꽃은 부처님의 두 어깨 위에 머물러 있었다. 무구광 동자는 이때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어 땅에 깔며 연등불께 자신의 머리를 밟고 가도록 했다.

연등불은 무구광 동자의 순수한 마음을 알고 마침내 머리카락을 밟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동자에게 “그대는 장차 부처가 되어 나처럼 지혜와 자비로 모든 하늘과 사람들을 제도할 것이다. 그 때 이름은 석가모니이다.”라고 수기를 내렸다. 무구광 동자는 이때부터 극진히 연등불을 섬겼고, 연등불이 열반할 때까지 계율을 받들고 정법(正法)을 수호했다.

 

 ⓒ大?元

 

3. 중국의 연등행사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연등(燃燈 등불을 밝히는 것)행사는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인 서한 시기부터 유래됐으나 본격적으로 민간에까지 널리 전해진 것은 불교가 뿌리를 내린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이다.

특히 중국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당(唐)나라 때에 이르러 원소절에 등불을 밝히고 이를 감상하는 활동이 더욱 흥했다. 황궁은 물론이요 도성 곳곳에 등불을 만들어 걸었는데 크고 높게 걸린 등불로 된 바퀴, 등불로 만든 누각(燈樓), 등불로 만든 나무(燈樹) 등이 있었다.

당나라 때의 시인 노조린(盧照?)은 일찍이 《십오야관등(十五夜觀燈)》이란 시에서 원소절의 휘황찬란한 정경을 “한(漢)나라에 별이 떨어진 것 같고, 달은 누대에 의지하여 걸린 듯하구나”라고 노래했다.

원소절 경축기간을 보자면 한(漢) 대에는 하루에 불과했으나 당(唐) 대에는 3일로 증가했고 송(宋) 대에 이르러서는 5일로 연장되었다. 명(明) 대에는 가장 길어 무려 10일에 달했는데 정월 초파일부터 등불을 켜기 시작해 17일 밤까지 지속됐다.

 

대낮부터 늦은 밤까지 환하게 타오르는 등불은 풍년과 태평성대를 상징한다. 특히 온갖 색을 칠해 만든 정교한 연등은 연말연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청(淸) 대에 이르면 경축 기간이 3일로 축소되었지만 용춤, 사자춤 등 백희(百戱)의 내용을 포함해 행사가 더욱 다채로워졌다.

4. 우리나라의 연등행사

 

한편 우리나라에 연등행사가 널리 전해진 것은 당의 문물과 제도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태종무열왕 김춘추 이후의 일로 보인다. 이후 정월 대보름 연등행사는 신라의 국가적인 행사가 되었고 국왕이 친히 황룡사에 나아가 축제를 즐겼다.

 

실제로 삼국사기 경문왕(景文王) 6년(866)과 진성여왕(眞聖女王) 4년(890)에 국왕이 정월(正月) 15일에 황룡사(黃龍寺)로 행차해 연등을 관람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정월 보름에 연등행사를 가졌으며 국왕이 직접 사찰에 행차할 정도로 불교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전통은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에 이르러 더욱 성행했다. 연등회는 팔관회와 더불어 고려의 2대 명절로 정착됐으며 연등도감(燃燈都監)이라는 기관을 설치해 연등행사를 주관하게 했다. 연등회는 태조 왕건이 후손들에게 남긴 훈요십조에도 언급될 정도로 중요한 국가행사이자 여론과 소통하는 장이 됐다.

 

왕궁은 물론 서울, 시골 가릴 것 없이 정월 보름이 되면 이틀 동안 화려한 등불을 밝혔고 이때만은 야간 통행금지를 없애 누구나 축제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러다 고려 성종 때에 이르러 유학자들의 반대로 잠시 연등행사가 폐지되었지만 현종 원년인 1010년에 다시 부활했다. 대신 이때는 어쩐 일인지 정월 보름이 아닌 2월 보름으로 날짜가 변경되었다.

나중에 무신정권이 들어선 후 최충헌(崔忠獻)의 아들인 최이(崔怡)가 사월 초파일이 석가모니의 탄신일이라는 명분을 들어 연등행사를 이날로 옮겨 거행했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국시로 삼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백성들의 가장 큰 축제였던 연등행사를 없애진 못했다. 사월 초파일이 되면 왕궁에서 다양한 등을 만들어 불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종로에서는 각 상점마다 특이한 모양의 등을 만들어 사월 초파일을 맞이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불교계를 중심으로 정월 대보름이 아닌 사월 초파일에 연등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하지만 등불을 밝히는 의미와 행사의 규모는 예전보다 많이 쇠락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