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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윈 따라가기]제공(濟公)이 신부를 빼앗은 까닭은? (上)

2010년 07월 12일

▲ 중국인들에게 활불이라 불리며 공경받는 제공화상./사진출처=따지웬DB

 

동서고금 인류 역사를 통틀어 유명한 인물을 꼽자면 항하(恒河)의 모래알처럼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남녀노소와 신분을 불문하고 많은 이의 공감과 지지를 받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때문이다.

5천년 중국 역사 속에는 세대와 신분을 넘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인물이 더러 있다. 이 중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 바로 ‘인간 활불(活佛)’ 제공(濟公)화상이다. 그가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 많은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제공을 활불이라 부르며 공경한다.

2009년 션윈(神韻)공연 중에는 이 제공스님을 소재로 한 작품이 있었다.

‘제공이 신부를 빼앗다(濟公?親)’라는 제목인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다.

하루는 제공스님이 영은사(靈隱寺) 앞을 지나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천목(天目·다른 공간을 볼 수 있는 제3의 눈)으로 바라보니 장차 산봉우리가 떨어져 내려와 산 아래 마을을 덮친다는 것을 알았다. 깜짝 놀란 스님은 마을을 찾아가 큰소리로 장차 닥칠 환란을 말해주며 빨리 대피하라고 알렸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미친 중이 헛소리를 하는구먼!”이라며 손가락질만 할 뿐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곧 닥쳐올 위험을 감지해 마음이 초조한 제공 앞에 마침 어느 집에서 새 신부를 맞이하는 행렬이 지나갔다. 이에 한 가지 꾀를 낸 제공은 다짜고짜 행렬에 뛰어들어 신부를 들쳐 엎고는 줄행랑을 쳤다. 사람들은 미친 중이 신부를 빼앗아가는 것으로 여기고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추격했다. 그런데 스님을 쫓던 사람들이 마을 입구를 막 벗어날 무렵 갑자기 산이 무너지면서 산봉우리가 떨어져 내려 마을을 덮쳤다. 이때 걸음이 느린 한 여인이 큰 바위에 깔릴 뻔하자 이를 본 제공스님이 신통력을 펼쳐 산봉우리를 밀쳐버렸다. 산봉우리는 약간 기울어져 여인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제공의 기지 덕에 모두 위험한 고비를 벗어났다.

위 이야기에서처럼 제공스님은 천하를 돌아다니며 도처에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곤 했다. 도둑맞은 사람들에게 물건을 되찾아 주는가 하면 가난한 병자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었다. 이 때문에 제공은 중국 민중들에게 ‘활불(活佛)’로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션윈 따라가기’ 이번 호에서는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제공스님에 대해 살펴보자.

평범하지 않은 출생-나한의 전생

 

제공(濟公·1148년~1209년)스님의 본명은 이수원(李修元) 또는 이수연(李修緣)이다. 절강 태주부(臺州府) 천태현(天臺縣) 출신으로, 법명은 도제(道濟)이다.

이수원의 고조부 이준욱(李遵勖·988~1038)은 송(宋) 태종의 부마이자 진국군(鎭國軍)절도사였다. 그의 집안에는 3가지 특징이 있었다. 대대로 벼슬을 했고,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결백하고 뛰어난 업적을 쌓아 ‘송사(宋史)’에까지 이름이 실렸으며, 대대로 열심히 부처님을 믿고 선을 행했다.

북송(北宋·960~1126)이 멸망한 후 그의 집안은 이준욱의 식읍(食邑)이 있던 천태현 영령촌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수원의 부친인 이무춘(李茂春)은 당시 조정의 부패상을 목격하고는 관직을 버리고 조용히 은거하며 독실하게 부처님을 믿었다. 그는 순박하고 베풀기를 좋아했으나 마흔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제공의 부모는 늦도록 자식이 생기지 않자 밤낮으로 부처님께 치성을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모친 왕(王)씨의 꿈에 나한이 나타나 한 떨기 오색(五色) 연꽃을 주었는데, 왕 씨가 그 꽃을 받아먹은 후 오래지 않아 곧 아이를 가졌다.

소흥 18년(1148년) 음력 2월 초이틀, 마침내 기다리던 아들을 얻은 부부는 기쁜 나머지 큰 잔치를 열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다. 당시 성공(性空)이란 고승이 축하연에 찾아와 ‘수연(修緣·수련의 인연이란 뜻)’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 특별한 사명을 띠고 속세에 내려온 나한이라고 한다. 즉, 여래 부처님의 앞자리에 있던 큰 붕새가 하늘의 법을 어기고 속세로 달아나자 붕새의 행방을 찾고자 파견된 항룡나한(降龍羅漢)이 바로 제공이라는 것이다. 속세에 떨어진 제공은 천신만고 끝에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다.

성장환경

 

영녕촌(永寧村)은 고성(古城) 북문 밖에 있었고 제공의 집은 자계(?溪·하천 이름)에 있었다. 당시 그의 집안은 역대로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유한 편이었고 천태현에서는 명문가였다. 고조부의 식읍이 영녕촌에 있던바, 자계 서쪽 연안에는 거대한 전답도 있었다.  이곳은 지금도 이가양(李家?)이라 불린다.

명문가 자제지만, 이수원은 다른 부잣집 자제들이 빠지기 쉬운 나쁜 습관에 물들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마을 북쪽에 위치한 적성산(赤城山) 서하동(瑞霞洞)에서 책을 읽었고 불가(佛家)와 도가(道家) 교육을 받았다. 천태산은 중국의 대표적인 불교 성지일 뿐더러 도관도 많았다. 게다가 누대에 걸쳐 선을 행하고 독실하게 부처님을 믿던 가풍의 영향으로 이수원은 어릴 적부터 속세를 떠나 수련하고자 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출가

 

이수원은 어린 나이에 양친을 차례로 잃는데, 3년 상을 치른 뒤 열여덟이었다. 이후 약관의 나이에 불문(佛門)에 들어간다. 처음 간 곳은 국청사(國淸寺)지만 나중에 임안(臨按·남송의 수도로 지금의 항주)에 가 영은사(靈隱寺) 혜원(慧遠)에게 의탁했다. 당시 유명한 선종의 고승이던 혜원(慧遠)은 첫눈에 그의 내력을 알아보고는 제자로 삼아 ‘도제(道濟)’란 법호를 내렸다. 선천적인 근기가 워낙 좋아, 도제는 입문하자마자 도를 깨닫고 큰 지혜를 얻었다.

그런데, 도제는 다른 승려들과 차이가 컸다. 자신의 지혜를 감추려고 일부러 히죽거리며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고 심지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다. 남루한 옷을 걸치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도와주곤 했다. 그의 행색이 마치 미친 것처럼 보였던지라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승려(濟?僧)’라 불렀다.

세속의 사람들과 사찰의 다른 승려들은 도제의 뛰어난 능력과 개성을 질투했다. 많은 승려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어떤 이는 늘 헐뜯고 모함했다. 한번은 사찰 실무자인 한 승려가 방장인 혜원화상에게 편지를 보냈다. 도제가 선문(禪門)의 계율을 위반했으니 절에서 내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혜원은 “법률이란 원래 속인을 위해 만든 것이니 어찌 출가인에게 일률적으로 시행할 수 있겠는가!”라며 “불문(佛門)이 광대한데 어찌 한 미친 승려를 용납하지 못하랴!”라는 답장을 내려 보냈다. 이 일이 있은 후 영은사에서는 누구도 도제의 문제를 언급하지 못했다.

(다음 호에 계속)
 

 

글/ 임영철(동아시아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