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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윈스타 인터뷰] 얼후 연주자 치샤오춘

2010년 06월 18일


         ▲ 션윈예술단의 얼후 연주자 치샤오춘./ 사진제공=션윈예술단


 


우아하고 고상한 얼후(二胡) 연주자 치샤오춘(戚曉春·사진). 션윈(神韻)예술단 전 세계 순회공연에 처음 참가했을 때 그녀는 서른을 갓 넘긴 나이였다. 그러나 그녀의 얼후 연주는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과 충격을 줬다. 관객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그녀의 연주는 관객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됐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치샤오춘이란 이름은 얼후 애호가들 사이에 반드시 알아야 할 연주가로 자리 잡았다.



미국의 세계적인 첼리스트 크리스틴 발레브스카(Christine Walevska)는 “치샤오춘은 매우 뛰어난 아티스트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좋은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평가했다. 한국의 서예대전에 해당하는 대만 서법미전(書法美展)에서 3차례나 대상을 수상해 ‘서예계의 기적’이라 불리는 대만사범대학의 두중가오(杜忠誥) 교수는 “그녀의 얼후 연주는 내가 들어본 것 중 최고였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탄위관지 여입화경(歎爲觀止 如入化境 너무나 완벽해서 감탄하며 구경하는 것을 그친다는 의미)”이란 말로 치샤오춘의 연주를 묘사하며 “정말이지 한 번 더 듣고 싶다”고 했다.



깊이 있는 음악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치샤오춘은 오히려 담담하게 말한다.



“물론 음악을 배우려면 타고난 소질이 있어야 해요. 제게도 소질이 있겠죠. 모두들 제 음감이 좋다고 하거든요.”


 


하지만 세인을 놀라게 하는 뛰어난 음악가인 그녀에게도 얼후를 포기해야 했던 과거가 있었다.


 


성공과 좌절, 얼후의 길을 포기하다



치샤오춘은 중국에서 가장 번화한 상하이(上海) 출신이다. 그럼에도 차분하고 침착했다. 말투에서도 가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솔직하고 담백했다.



치샤오춘은 아버지로부터 여섯 살 때 얼후를 배우기 시작했다. 중학생이었던 1991년에는 ‘상하이의 봄(上海之春)’ 국제얼후대회에서 연주상을 수상했다. “연주에 대해 매우 진지했었다”고 회상할 정도로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다.



그러나, 얼후계의 스타로 성장하리라는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녀는 전 ‘국립음악원’인 상하이음악학원에 진학한 뒤 점차 얼후에 대한 애정이 식어갔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 중국은 이미 개혁개방이 진행됐어요. 전반 사회 도덕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을 목격했죠. 모두들 이름을 날리기 위해 다투고 싸우며 뒤에서 남을 해치고 아귀다툼을 하는 일이 아주 많았어요.”
예의와 법도가 무너진 사회에서 ‘개인의 노력’은 더 이상 실질적인 의미가 없었다. 성공을 위해 서로 다투고 권력이 예술에 간섭하는 험악한 현실이었다. 사람들은 명예를 얻기 위해 독주회와 공연 기회를 서로 다투며 아첨하고 굽실대거나 심지어 양심과 영혼을 팔아먹었다. 



“어쨌든 저는 포기했습니다. 더는 제고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일종 자포자기한 상태로 연습을 하지 않았죠. 당시 생각에는 어쨌거나 이름을 날리고 싶지 않았고 무슨 일을 해도 혼자 먹고 살 수만 있다면 그만이라고 여겼어요. 당시 저는 음악회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고 음악이 내게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홍진(紅塵)의 탁류 속이었다. 치샤오춘은 연주를 포기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저는 그다지 낙관적이거나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에요.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 곧 포기를 선택하고 더 이상 위로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이거든요.”



얼후를 포기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명예란 뜬 구름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악(仙樂)과도 같은 그녀의 얼후 소리는 끝내 매몰되지 않았다.



뛰어난 연주로 션윈의 휘황을 펼치다



1999년 중국 공산당은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마수를 뻗쳐 천지를 뒤덮는 잔혹한 박해를 시작했다. “파룬궁에 대한 공산당의 박해가 아주 심했어요. 파룬궁 수련생들은 모두 자신의 특기를 살려 파룬따파의 아름다움을 표현했죠.” 당시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던 치샤오춘은 얼후를 다시 잡았다. 음악을 통해 세인들에게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예술의 형식으로 사람들에게 신(神)의 광명과 수련의 평화롭고 아름다움을 펼쳐 보이고 싶었어요. 인간세상에서 선량과 순정함을 보여준다면 이런 에너지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또, 관중들에게 불법(佛法)과 수련에 대해 좋은 연분을 맺게 할 수 있을 거 같았어요.” 그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그의 연주 실력은 매우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치샤오춘의 연주는 세간에선 찾아보기 힘든 영혼을 꿰뚫는 거대한 힘이 있었다. 어떤 이는 연주가 끝난 후 급히 그녀를 찾아와 물어보거나 얼굴을 보고 싶어 했고, 어떤 이는 음악 속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느끼고 자신이 원래 신과 서약을 맺고 내려온 생명임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기도 했다.



“음악이 감동적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수련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자신의 심성 제고를 엄격하게 요구하며 자신의 좋지 않은 잡념을 제거하고 순정해질 것을 요구합니다. 관중들이 연주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사실 우리가 순정하고 잡념을 없어 신이 노래의 내포를 가지해주고 풍부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게 무슨 뛰어난 능력이 있다거나 혹은 저의 얼후 연주에 그런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떤 이는 치샤오춘과 같은 테크닉은 중국대륙에도 많이 있지만 어쩐 일인지 그녀가 활을 켜기만 하면 참을 수 없는 눈물이 흐른다고 했다.



“때문에 사실 진정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숙련된 테크닉이 아닙니다. 테크닉은 연주자라면 다 있지만 일정한 층차에 도달한 후 진정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배후의 내포입니다. 그렇다면 수련하는 사람은 악기를 연주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구비한 셈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심성이 비교적 높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욱 편안하고 순정할수록 신은 더 큰 힘을 펼쳐 주십니다.”



「예기」악기(樂記)에는 “천지의 도에 밝은 뒤에야 예악을 일으킬 수 있다. 성인은 악(樂)을 만들어 하늘에 응하고 예(禮)를 제정해 땅에 짝하니 예악이 밝게 갖추어지면 천지가 그 역할을 다 한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 사람들이 천 년 전 고서에 기록된 믿기 어려운 신화들을 션윈예술단 공연을 통해 볼 수 있다는 것은 보기 드문 행운이다.



신이 선사한 음악, 일생을 바꾸는 공연



치샤오춘은 얼후 연주에 능할 뿐만 아니라 곡을 창작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문화혁명 시대에 공산당의 박해를 받았음에도 시종 굴하지 않았던 린시링(林希翎)여사는 션윈 공연을 본 후 “얼후 연주자이자 애호가로서 치샤오춘의 ‘고도(苦度)’를 최고로 평가한다. 내가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던 투과력을 지녔고 사람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얼후 연주였다. 치샤오춘이 연주하는 ‘고도’는 고금의 얼후 곡목을 초월하는 극히 뛰어난 작품이다”라고 말했다.



“작곡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수련상태가 비교적 좋을 때면 신이 도와주시니까요. 신은 당신이 곡을 쓰고자 하는 생각이 있는지를 보고 당신에게 줄 겁니다.”



기자가 그녀에게 연주를 통해 관중들에게 어떤 것을 느끼게 하고 싶은지 묻자 그녀는 잠시 사색에 잠긴 후 말했다.



“불가(佛家)에서는 연분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제 연주를 통해 연분을 맺는 것이지요. 관중들이 제 얼후 연주를 통해 대법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진상을 아셨으면 합니다. 물론 더 많은 분들이 션윈을 보러 오시길 희망합니다. 션윈 프로그램은 단지 중국의 전통문화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내포가 담겨 있으니까요. 오직 당신이 이 마당에 들어와서 자신의 관념을 내려놓고 조용히 그곳에 앉기만 하면 당신의 미래와 당신의 인생이 모두 변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