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에 강한 반감을 느낀다. 그러나 남존여비는 사실 남성은 고귀하고 여성은 비천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존(尊)'과 '비(卑)'는 <역경(易經)>의 음양 평형 개념에서 유래한다. 남존여비의 의미는 ‘남성에게는 남성의 특징이 있고 여성에게는 여성의 특징이 있으니 가정에서 남녀의 역할이 서로 다르게 마련이고, 각자 그 소임에 충실하면 자연히 가세(家勢)가 흥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남존여비'의 진짜 의미 '남존여비'의 출전은 <역경>이다. <역경 계사전>에는 '하늘은 존(尊)하고 땅은 비(卑)하니 이것으로 하늘과 땅이 정해지고, 낮고 높음이 펼쳐짐으로써 귀하고 천함이 자리 잡는다(天尊地卑,乾坤定矣。卑高以陳,貴賤位矣)… 건(乾)의 도는 남자를 낳고 곤(坤)의 도는 여자를 낳는다(乾道成男,坤道成女)'라는 구절이 있다. 이 중 '존(尊)'은 높다는 의미이고 '비(卑)’는 낮다는 의미로, 방위를 나타내는 단어다. '천존지비'란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으며,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는 의미로, 자연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설문해자>에 의하면 '존(尊)'은 고(高)와 뜻이 통한다. <광야(廣雅)>는 '비(卑)'를 '비(庳)'와 같다고 설명한다. <광운(廣韻)>에 따르면 '비(庳)'는 아래(下)를 의미한다. <역경>은 우주와 천체의 운행 원리를 묘사한 경전으로서 그 핵심 사상은 음과 양의 평형으로 귀결된다. 평형과 조화 상태에서 벗어난 사물은 결국 모두 정상 궤도를 이탈하게 되고, 우주 만물은 최종적으로는 조화와 평형 상태로 돌아오게 된다. <역경>의 또 다른 핵심 사상은 음과 양이 각자 제자리를 지킨다는 것이다. 하늘은 하늘 자리에, 땅은 땅 자리에, 음(陰)은 음의 위치에, 양(陽)은 양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천지, 음양, 남녀는 옛 사람들이 세상을 '분류'하는 방식이다. 사람의 이치도 천지간의 이치를 본받았으니, 남존여비는 곧 '천존지비(天尊地卑)'에서 파생된 것이다. ‘남존여비’의 본래 뜻은 '남녀는 서로 다르다'는 것으로, 이는 자명한 구분이자 자연 그대로의 상태다. '남존(男尊)'의 의미는 대자연의 특별한 산물인 남성이 '도(道)'에 부합하려면 반드시 하늘과 같이 당당하고 공정해야 하며, 자강불식(自強不息‧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쉬지 않는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비(女卑)'의 의미는 대자연의 특별한 산물인 여성이 '도'에 부합하려면 반드시 땅처럼 겸손하고 포용해야 하고, ‘후덕재물(厚德載物‧덕을 두텁게 해 만물을 포용한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존여비'는 음과 양이 각자 제자리를 지키는 자연의 조화를 제창한 것이다. 그러므로 '남존여비'란 남녀가 평소 생활 및 혼인관계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도리를 말하는 것으로, 남녀가 불평등하다는 함의를 담고 있지 않다. 남성의 품행이 고상하다면 여성도 자연스럽게 그를 존중하고 따를 것이다. 남성은 정직하고 고상하며, 여성은 겸손하고 관용적이면 그 가정은 조화롭지 않을 리 없다. 이러한 가정과 사회라면 여성도 자연히 차별받지 않고 상응하는 지위를 누리게 된다. 남녀가 유별하니 각자 소임에 충실하라 맹자는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父子有親) 하며,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로움이 있어야(君臣有義) 하며, 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夫婦有別) 하며,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질서가 있어야(長幼有序) 하며, 친구 사이에는 신의가 있어야(朋友有信) 하나니, 이는 인륜의 대도다”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오륜(五倫)이다. 남편은 하늘과 같고, 아내는 땅과 같다. 하늘에는 해와 달이 뜨고 구름이 오가며 비가 내려 땅을 윤택하게 한다. 땅은 산과 강을 품고 만물을 길러 세대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번성하게 된다. 남편은 가정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아내는 후대를 낳아 기르고 교육한다. 이는 음양의 이치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으로, 남녀가 제 특성에 따라 임무를 분담한다. 이렇듯 각자가 소임에 충실하면 가정이 자연히 화목하게 된다. 반대로, 만일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땅은 말라붙게 되고 인류의 생활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편이 가족을 부양하지 않으면 아내는 기댈 곳을 잃게 되고 가정은 정상 궤도를 이탈하게 된다. 초목이 땅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갓난아이 역시 어미 곁을 벗어날 수 없으니, 그 속의 이치가 참으로 오묘하다. 이로부터 우리는 부부 각자가 서로 다른, 그리고 서로 대체할 수 없는 책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는 ‘주나라의 세 태비(周朝三太)’, 즉 시조모 태강(太姜), 시모 태임(太任), 며느리 태사(太姒)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주나라 왕실의 세 군왕, 즉 태왕(太王), 계력(季歷), 문왕(文王)의 아내였다. 이 세 군왕은 모두 어질고 총명했고, 그 아내들은 모두 성심으로 남편을 공경했다. 세 태비는 천하의 국모로서 나라를 교화하고 군왕을 도와 주나라 800년 태평성세의 기틀을 닦았다. 또한 중국의 빛나는 유교 문화를 낳았다. <열녀전(列女傳) 모의전(母儀傳) 주실삼모(周室三母)> 편에서는 이런 기록이 있다. 태사는 문왕 부인이 된 후 한층 더 현숙해졌다. 시조모 태강과 시어머니 태임의 훌륭한 덕망을 흠모해 그들의 덕행을 이어나갔다. 근면하고 검소한 그녀는 힘써 자녀들을 교육하고 성심성의껏 문왕을 도왔으며, 궁 안의 일들을 조리정연하게 처리했다. 이에 문왕은 아무런 근심 없이 나랏일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고, 덕정(德政)을 널리 베푸니 문화가 크게 흥했다. “문왕은 바깥을 다스리고, 문모는 안을 다스렸다(文王治外,而文母治內)”는 말처럼, 태사는 ‘문모(文母)’로 칭송받았다. 인덕(仁德)의 내조자 장손황후 “좋은 아내를 둔 것은 나라에 좋은 재상을 둔 것과 같다.(家之良妻,猶國之良相)” 그 인품을 칭송받는 역사 속 황후들 가운데서도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아내 장손황후는 단연코 가장 훌륭한 황후라고 할 수 있다. 장손무기(長孫無忌)는 장손황후의 오빠다. 그는 이세민과 절친한 사이로, 이세민이 천하를 얻도록 보좌했다. 당 태종이 장손무기에게 재상직을 맡기려 하자 장손황후가 오히려 말렸다. “소첩이 황후 자리에 올라 있으니, 그 존귀함이 이미 지극합니다. 소첩의 형제와 조카들이 조정에 나아가기를 진실로 바라지 않습니다. 한나라 때 여후(吕后)와 곽광(霍光) 가문의 전례가 좋은 교훈이 됩니다. 부탁하옵건대 제 오라버니를 재상으로 삼지 마시옵소서.” 이처럼 장손황후가 재삼 만류함으로써 당 태종은 장손무기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같은 빈 직책만을 하사했다. 장손황후의 친딸 장락공주가 시집갈 당시, 당 태종이 하사한 혼수품이 당 고조의 딸 장공주 때보다 곱절이나 많자 위징(魏徵)은 당 태종에게 직접 이의를 제기했다. 이를 안 장손황후는 위징을 질책하기는커녕 크게 칭찬했다. 장손황후의 안배하에 장락공주는 지나치지 않은 정도의 혼수를 가지고 출가했다. 장손황후는 평소 언행의 도리와 예법을 성실히 지켰고, 조정의 정사에 간섭하는 법이 없었다. 또한 인품이 반듯하고 도리가 있었다. 당 태종은 황후를 무척 신임해서 나라의 큰일과 상벌에 관한 사항을 자주 상의했다. 장손황후가 특수한 신분임에도 나랏일에 간섭하고자 하지 않은 것은 남녀 간에는 구별이 있으며 각자 소임에 충실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사람이 신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는 날이 바로 자신을 단속하는 도덕을 잃는 때다. 정결은 도덕을 수호하는 초석이자 도덕 가운데서 가장 지켜내기 어려운 부분이다. 악마가 정결을 허물어버리면, 사람의 활짝 열린 욕망이 음란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인다. 악마는 공산주의 유령, 공산사령(共産邪靈)을 지칭한다. 그것은 ‘증오’와 우주 저층 공간의 부패한 물질이 결합해서 만들어낸 사악한 생명이다. 6. 악마가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부패시키려 음란은 부추긴다 악마가 조종하는 매체가 집요하게 정결을 부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현대사회는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성이 개방됐다. 여론에 휩쓸린 정부 역시 법률을 수정해 정결을 포기하게 함으로써 국민의 영혼과 육체를 타락하게 했는바, 이는 이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 성병은 음란에 대한 징벌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문화 속에는 모두 ‘음란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가르침이 있다. 그것은 주로 성병이라는 직접적인 징벌로 나타난다. 이 성병은 음란에 대한 대가를 쉽게 알 수 있게 해주는 특수한 징벌이다. 현대 의학 역시 이 점을 충분히 입증한다. 그것은 다른 질병과는 확연히 다른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성병이 여타 질병과 전형적으로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사람에게는 성병 감염을 예방할 ‘선천성 면역’이 거의 없다. 백신도 없다. 성병에 걸린 후에도 ‘획득성 면역’이 생기지 않는다. 다시 감염되면 병이 재발하기 때문에 평생 예방해야 한다. 성병은 성 접촉으로 전염된다. 성병의 원인이 되는 미생물은 외부 저항력이 낮아서 인체를 떠나면 바로 죽는다. 따라서 간접적으로 전염될 가능성은 아주 낮다. 성병은 배우자와 자녀에게도 위험을 끼칠 수 있다. 부부가 동시에 치료하지 않으면 반복해서 발병하며, 기형아를 낳을 수도 있다. 이상은 모두 의학 상식에 속하는 내용이다. 매독, 임질, 에이즈 등의 성병은 다른 질병과 달리 성 접촉에 의해 전염된다. 따라서 성병 감염은 전적으로 성생활의 건전성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하면 정결을 지키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 무신론자들은 어떤 일을 하든 모두 자신의 주관에 따라 한다. 그들은 신불(神佛)을 믿지 않고 인과응보의 천리(天理)를 믿지도 않는다. 머리 석 자(尺) 위에 신령이 있음은 더욱 믿지 않는다. 그러니 성병이 음란을 겨냥한 현세현보(現世現報: 현세에 악보를 받음) 현상임을 알 턱이 없다. 사실 공산주의 무신론자들은 완전히 사령(邪靈)에게 통제당해 자아를 상실한 피해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성병이 전염되는 것처럼 여러 사람에게 독해(毒害)를 전파한다. 현재 성병은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유행하는 흔한 전염병이 됐고, 전염 범위도 확대되고 발병 연령도 낮아지고 있으며, 항생제에 내성을 갖춘 균이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에이즈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2019년 2월 28일 자료에서 뽑은 다음 자료들을 통해 성병의 유행 상황과 중요한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매일 100만 명 이상이 성병에 감염되고 있다. 매년 3억 5700만 명이 클라미디아, 임질, 매독, 트리코모나스 등의 성병에 새로 감염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
‘음란’은 정결의 반대 개념으로, 성적 욕망이 홍수처럼 넘쳐 재앙이 될 지경인데도 통제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음란은 독과 같아 일찍이 거의 모든 고대 문명이 파멸한 주요 원인이다. 속담에 “만 가지 악 중에서 음란이 가장 나쁘다”고 했다. 인류가 신이 준 계명을 준수하지 못한다면 신 역시 인간을 포기할 것이고, 그러면 인류 문명은 급속히 쇠락해 훼멸에 이르게 된다. 5. 음란은 인류 문명을 훼멸하는 독약 (1) 중국 역대 왕조의 멸망을 부추긴 음란 중국 역대 왕조의 멸망은 예외 없이 모두 부패, 타락, 음란에서 시작됐다. 《봉신연의(封神演義)》는 한 왕조가 어떻게 음란으로 인해 멸망했는지를 보여주는데, 주왕(纣王)이 자기 민족을 창조한 여와(女娲) 신상(神像)에 음란한 시를 써서 모독죄를 범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후 달기(妲己)가 나타나 조정에 재앙을 가져오고 나중에 절대다수의 귀족이 음란하고 사치하고 부패했다. 결국 여러 제후가 주나라 무왕(武王)의 인도하에 반란을 일으켜 상(商) 왕조를 무너뜨렸다. ‘봉화로 제후를 희롱하다’는 전고(典故)는 2천 년 넘게 전해오는, 음란이 왕조의 멸망을 야기한 고사다. 《사기》에 따르면 포사(褒姒)가 잘 웃지 않자 주(周)나라 유왕(幽王)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녀를 웃기려 한다. 하지만 포사는 시종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일찍이 유왕은 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봉화대와 큰 북을 설치해 놓았는데, 어느 날 유왕이 봉화를 올렸다. 그러자 제후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도성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적군이 아니었다. 포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제후들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유왕은 아주 기뻐하면서 이때부터 여러 차례 봉화를 올렸다. 나중에 제후들은 봉화를 믿지 않게 됐다. 주유왕 11년(기원전 771년) 신(申)나라 연합국과 서이(西夷)인 견융(犬戎)이 합세해 유왕을 공격해왔다. 유왕은 봉화를 올렸지만 구원하러 달려온 제후는 없었다. 결국 견융은 유왕을 여산 아래서 죽이고 포사를 포로로 잡아갔다. 서주(西周)는 이렇게 멸망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서주가 멸망한 주요 원인을 “유왕이 무도하고 음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1] 한편 위진남북조시기(220~589년)는 삼국양진남북조라도도 하는데, 중국 역사상 300~400년에 걸친 혼란기였다. 왕조의 교체도 그 어느 때보다 빨랐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예외 없이 조정이 부패하고 군주가 황음무도했다. 북제(北齊) 4번째 황제(561~565년)인 무성제(武成帝) 고담(高湛)은 몹시 잔인하고 황음무도한 인물이었는데, 여기서는 그중 한가지 사례를 들어보자.[2] 《북제서(北齊書)·열전》에 따르면 북제의 문선제(文宣帝) 고양이 사망한 후 동생인 고연이 황제가 됐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도 사망하자 고담이 제위를 이었다. 고담 역시 고양의 친동생이었다. 그는 호씨(胡氏)를 황후로 책립하던 날 밤에 고양의 황후였던 이조아(李祖娥)의 궁에 들어가 음란한 짓을 강요했다. 이 씨가 거부하며 “폐하께선 천자이신데 어찌 시동생과 형수의 도리를 돌보지 않으십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고담은 화를 내면서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당장 주살하겠다”고 했다. 당시 이 씨에게는 아들 고소덕이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화를 입을까 봐 두려워 어쩔 수 없이 고담의 말에 따라야 했다. 이후 고담은 공개적으로 이 씨의 궁에 출입하며 그녀를 후궁 대하듯 했다. 머지않아 이 씨가 임신을 해서 딸을 낳자 몰래 아이를 버렸다. 고담이 이 소식을 듣고 화가 나서 궁궐에 들어가 칼등으로 이 씨를 때리면서 욕을 했다. “네가 내 딸을 죽였는데 내 어찌 네 아들을 죽이지 않으랴!” 곧장 고소덕을 끌고오게 해 이 씨가 보는 앞에서 때려죽였다. 이 씨가 큰 소리로 울부짖자 고담이 더욱더 화가 나서 이 씨의 웃옷을 벗기고 직접 채찍으로 때렸다. 이 씨가 까무러치자 고담은 이 씨를 자루에 담아 도랑에 버리게 했다. 나중에 건져올렸을 때 이 씨는 이미 숨이 끊어질 지경이었다. 며칠 후 궁녀들이 이 씨를 소 수레에 실어 묘승사로 보내 비구니가 되게 했다. 무성제 고담은 간사한 소인배들을 총애했고 자신도 조정에서 음란한 짓을 일삼았으며 멋대로 종실과 대신들을 죽였다. 순식간에 조정이 아수라장이 되고 사회도 혼란에 빠져 국력이 신속히 쇠퇴했다. (2) 음란은 세계 문명국가의 재난과 훼멸의 원인 3쳔여 년 전에 세워진 바빌로니아는 당시 상당히 문명이 발달한 나라였다. 그러나 성 풍속은 상당히 특이하고 음란했다. 심지어 방탕하기 그지없던 알렉산더 대왕마저 놀랄 정도였다. 성경에서 바빌로니아를 음란의 소굴처럼 묘사한 것은 도덕 파괴의 오욕(汚辱)을 대표하기 때문인데, 이는 이 나라의 특수한 제도에서 비롯됐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바빌로니아 여인은 모두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신성한 창녀’가 돼 낯선 남자들과 성관계를 가져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신전 안에서는 창녀가 아니라 신성한 대역으로 간주됐다. 즉, 아프로디테 여신을 대신해 신전 내에서 음행을 했다. 바빌로니아는 ‘신성한 창녀’ 외에도 또 정식으로 매춘하는 창녀가 있었고, 보통 부녀자라 해도 성 관념이 아주 개방적이었다. 당시 여인들은 혼전 성관계가 아주 유행했다. 하지만 혼인 후에는 일부일처제를 유지했고 남편에게 충절을 표현해야 했다. 만약 여성이 간통죄를 범했을 때는 가벼우면 나체로 수영하게 하고 무거우면 물에 빠뜨려 죽였다.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매일 음욕 속에서 살았으며 남자들은 매일 신전에 가서 음행을 했다고 한다. 욕망의 나락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외부 종족의 침입에 저항할 정신이 없었다. 결국 바빌로니아는 페르시아에 멸망하고 말았다. 고대 이집트가 멸망한 원인 또한 다르지 않다.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은 바로 클레오파트라 7세였다. 그녀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 12세와 클레오파트라 5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당시 이집트의 전통에 따라 이복동생과 결혼해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근친결혼과 남편의 성 기능 문제로 후사가 없었다. 그러다 로마 집정관 카이사르의 눈에 들어 그의 애인이 됐고 아이까지 낳았다. 카이사르가 사망한 후 그녀는 또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의 정부가 됐다. 하지만 안토니우스가 전투에서 패배한 후 클레오파트라는 아들과 함께 피살당했고, 그로 인해 고대 이집트 왕국은 사라졌다. 근친결혼은 후대로 갈수록 번식능력을 떨어뜨려 결국 자손이 끊어지고 제국이 사라지는 원인이 된다.[3] ...
속담에 ‘한 대(代) 좋은 아내가 없으면 십 대 걸쳐 좋은 자식이 없다’는 말이 있다. 여성은 자식을 낳고 기르고 가르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신이 준 도덕을 유지해 인류사회가 부패하지 않게 하는 책임도 맡고 있다. 고대에 맹자 어머니가 아들 교육을 위해 이사를 세 번 하고 또 ‘베틀의 날실을 잘랐다(孟母斷機)’는 이야기가 있다. 또 악비의 어머니가 아들 몸에 나라에 충성하길 바라는 글자를 새긴 이야기도 있다. 어머니는 늘 자녀에 대한 관심과 뛰어난 덕성으로 자녀엑 지대한 영향을 준다. 정결(貞潔)은 여성의 자기 사랑, 그 자체이자 생명 본원의 요구다. 또한 신이 자신의 형상을 본떠 사람을 만들 때 주입한 생명 요소일 수도 있다. 따라서 순결한 여자라면 누구라도 정조를 자신의 생명보다도 더 중하게 여긴다. 4. 여성은 인류 도덕을 수호하는 구심점이다 사물이 발전하는 데는 사회가 변하든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의 관념이 변하든 물리화학적 변화가 있든 그 변화 과정에 모두 관건적인 요인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도덕이 세대를 거쳐 전승되는 데도 핵심축(linchpin)이 필요한데, 바로 여성이 그런 역할을 한다. (1) 정조 윤리 도덕 관점에서 ‘정조를 지킨다(守貞)’는 것은, 결혼 전에는 순결을 지킴을 뜻하고 혼인 이후에는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 접촉을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1] 전통문화 속에서 이 의미는 개인적인 요구에서 사회적인 요구로 확대됐다. 즉, ‘정조’는 여성의 개인적 순결에서 사회적 ‘성실’, ‘충성’이란 개념으로 확장됐다. 다시 말하면 남녀 모두에게 요구하는 기본적인 인격 요소가 됐다. 정조에 관한 인식과 관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또 종교(정교)·문화(전통문화)와 관계없이 모두 일치한다. 이는 여성이 인류 도덕을 수호하는 특수한 역할과 특별한 작용을 담당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여성은 인류 도덕을 수호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조물주는 정조와 관련해 여성에게 특수한 요구를 했다. 유혹과 욕망에 쉽게 빠지지 않도록 정조를 목숨처럼 여길 것을 요구했다. 신이 사람을 만들 때 처녀의 몸에는 표시를 하고는 감정에 쉽게 이끌리지 않도록 영예와 수치심을 첨부했다고 한다. (2) 정결의 영예 인류 역사상 전통문화에서는 여성의 숭고한 절조(節操)에 대한 기록이 많다. 남편을 위해 평생 수절했거나, 순절한 여성을 표창하고 그 부덕(婦德)을 기려 패방(牌坊‧일종의 ‘열녀문’)을 세워주었다. 이는 진시황 때부터 시작됐다. 《사기 화식열전》에는 “파(巴‧지명)에 청(淸)이라는 과부가 있었다. 그 선조가 주사(朱沙) 광산을 얻어 대를 이어 이익을 독점하니 가산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청은 과부였으나 가업을 유지하고 재산으로 자신을 지켜내 침범당하지 않았다. 시황제가 정조 있는 부인으로 여겨 손님 대하듯 예우했고, 그녀를 위해 여회청대(女懷淸臺)를 만들었다”[2]는 기록이 있다. 이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정조 있는 부인을 기리려고 비석을 세우거나 기록을 남긴 사례에 속한다. 정결 자체는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감정의 본원적인 요구이다. 또한 신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 주입한 생명 요소다. 순결한 여자는 정조를 목숨보다도 더 중하게 여긴다. 청나라 때 여자의 정절은 보편적인 관념이었다. 군왕은 그것은 임금에 대한 충성만큼이나 중시했다. 예를 들어 항주부지(杭州府志)의 기록에 따르면 항주 일대에만 매년 정절부인이 50여 명이 나왔다. 기록에 따르면 이런 열녀가 있었다. 강희제 시대에 인화현(仁和縣) 사람 임방기(林邦基)가 증(曾)씨 성을 가진 처를 얻었다. 증씨는 시부모를 공경했으나, 혼인한 지 12년이 되도 자식을 낳지 못했다. 나중에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임방기가 너무 슬퍼한 나머지 중병에 걸렸다. 임종 전에 증씨에게 “내가 죽은 후 당신은 나를 따라 함께 가겠소?”라고 물었고, 증씨는 눈물로 맹세했다. 증씨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몇 차례나 목을 매달아 자진하려 했지만 매번 가족들에게 발견돼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시아버지가 이 사실을 관아에 알렸다. 현령이 남편을 대신해 효를 다해야 하니 죽지 말라며 ‘절효쌍전(節孝双全‧정절과 효 둘 다 완벽하다는 의미)’이란 편액을 걸어 널리 알리게 했다. 5년 후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증씨는 장례를 치른 후 14일간 곡기를 끊어 죽었다.[3] 정결(貞潔)은 태평성세와 왕조의 흥성기를 결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즉 태평성세일수록 정결을 강조한다. 《청사고(清史稿)》 열녀전에도 이런 일들이 아주 많다. 절개를 지킨 아내 때문에 남편이 영광을 얻은 사례도 많다. 청나라 건륭 52년 유근(劉謹)이란 벼슬아치가 병사하자 그의 아내 탕씨가 순절했다.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자 유근에게는 ‘홍려사경(鴻臚寺卿)’이라는 시호와 은 백 냥을, 그리고 탕씨에게는 특별히 ‘특지정표(特旨旌表)’를 내렸다. 아내 덕분에 남편이 영예를 누린 이 일화는 중앙 관청에서도 특별한 사례다.[5] 사실 고대에는 서방이나 동방이나 여성의 정조에 대한 요구가 유사했다. 혼인 전에는 처녀성을 지키고 혼인 후에는 절개를 지켜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
모든 부모는 내 자녀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최상의 자녀 교육 방법을 찾기는 쉽지 않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 부모의 지혜와 교육 경험을 통해 성공적인 자녀교육 방법을 알아보자. 1. 독립성을 억압하지 않았다 게이츠는 어렸을 때 독립을 원했고 그의 부모는 그에게 많은 자유를 줬다. 13살이었을 때 오랫동안 집을 떠나기도 했고 심지어 워싱턴 대학에서 컴퓨터를 사용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어린 게이츠는 반항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엄마에게 계속 말대꾸하며 대들었는데 화가 난 아버지가 컵에 든 물을 게이츠의 얼굴에 쏟아부었고 급기야 아동 상담사에게 데려간 적도 있다. ‘타임’지의 전기 저자 월터 아이작슨은 그의 글에서 게이츠가 트집을 잡으며 어머니에게 도전하는 모습을 그렸다. 한번은 식탁에서 게이츠의 어머니가 게이츠에게 "무엇을 하고 있니?"라고 물었다.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게이츠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이어 그는 어머니에게 "생각도 안 해봤어요?"라고 되물었다. 얼마 후 게이츠의 부모는 심리학자에게 상담했다. 몇 번의 상담 후에 심리학자들은 그의 부모에게 게이츠에게 더 많은 공간을 주라고 제안했다. "그는 어떤 것에 대해 굉장히 깊이 생각한다. 집에서 만약 그의 생각을 깨려고 한다면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고 아버지 게이츠는 그의 저서 <삶을 위한 출석>에서 말했다. 후에 아버지는 아이의 말대꾸를 나름의 논리를 담은 주장이라고 인정해 줬다. 게이츠는 2016년 라디오 인터뷰에서 심리 상담을 통해 부모에게 승리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 후 순종적인 아들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2. 잘하지 못하는 것을 배우라고 응원하다 게이츠는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그의 부모는 수영, 축구,럭비와 같이 그가 잘하지 못하는 것들을 배우러 가라고 요구했고, 또 음악 수업(게이츠가 트롬본을 시도)에 가도록 격려했다. 부모는 대개 아이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아이가 잘하지 못하는 활동을 시키지 않는데 게이츠 부모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아들에게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마음가짐을 길러주고 실패와 좌절의 중요성을 배우도록 했다. 게이츠는 포춘(Fortune)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왜 이런 의미 없는 것들을 배워야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리더가 되었을 때 내가 잘 아는 것만 고수하지 않고 모르는 많은 것들을 시도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3. 부모의 기대를 강요하지 않았다 1975년 하버드대학 3학년이 된 게이츠는 자퇴를 결심하고 앨런과 공동으로 창업할 것을 결정했다. 아들의 엄청난 결정에 게이츠 부모는 몹시 놀라고 당황했다. 그들도 많은 부모들처럼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빌 게이츠의 부모는 아들의 선택에 동의하고 지지를 보냈다. ...
사람은 불성(佛性)과 마성(魔性)을 지닌 채 세상에 온다. 만약 마성을 잘 억제하고 불성을 드러낼 수 있다면 행복해지는 반면, 마성을 방종하면 고통의 심연 속으로 떨어지거나 심지어 스스로를 훼멸하게 된다. 만약 마성을 없애고 불성이 주재하게 한다면 생명이 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는 민족이나 인종과 관계없이 자신들의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전통문화나 종교가 있다. 그리고 전통문화나 종교에서는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류를 창조했다고 알려준다. 하느님이나 여와가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었고, 신불(神佛)과 프로메테우스 및 여타 신이 다양한 민족의 사람을 창조했다. 하지만 더욱더 중요한 것은 신이 사람을 만든 동시에 사람이 지켜야 할 행위 준칙과 규범을 제정해 줬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도덕’인 바 사람이 의지해 생존하는 법칙이다. 정결(貞潔)은 바로 이 도덕의 초석이자 인류 도덕의 핵심이다. 정결은 풍속과 사회의 건강과 조화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다시 말해 태평성세(太平盛世)나 왕조의 전성기를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바로 ‘정결’이다. 반면, 음란은 마치 독약처럼 인류의 오랜 문명에 재난을 안긴다. 1. 정결(貞潔) ‘貞(정)’이란 점을 쳐서 신령에게 묻는 것이다.[1] ‘潔(결)’이란 깨끗함(淨)이다. 정결(貞潔)은 정결(貞絜)이라고도 한다. ‘絜(결)’은 명주실을 만들 때 지저분한 것들을 잘라냄을 뜻한다. ‘潔(결)’은 사람이 정조에 아무런 오점이 없음을 뜻한다. 중국 고대의 예교(禮敎)에서 제기하는 것은 순정하고 고결한 도덕 관념이다.[2] 바꿔 말하면 오직 신을 믿으면서 신의 뜻에 따라 실천하는 사람만이 순결하고 고상한 도덕을 가진 사람인바 이를 정결하다고 한다. 2. 정결은 인류 행복의 근원 (1) 인류의 행복 현대인들은 행복이란 지속 시간이 비교적 긴, 일종의 영혼의 만족이라고 본다.[3] 인류는 줄곧 이런 행복을 추구해왔을 것이다. 아울러 이런 바람을 실현하기 위한 각종 방식을 찾는 와중에 세상 풍속이 날로 떨어지는 시대가 되자 완전히 주객이 전도됐다. 즉 이른바 행복을 만족시키기 위해 닭을 잡아 계란을 취하는 우를 범하여 오히려 행복을 철저히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통문화에서는 사람이 각자 타고나는 복인 ‘덕(德)’을 갖고 이 세상에 오며 덕을 잘 지켜야만 자신의 행복을 보호할 수 있다고 한다. 반면, 욕망과 탐욕은 사람을 유혹해 복을 잃게 한다. ‘행복’이란 말의 원래 뜻을 알면 개념을 좀 더 깊이 이해할 것이다. ‘행(幸)’의 원래 뜻은 세인을 각성시키는 데 쓰는 형벌 기구, 즉 죄인에게 채우는 족쇄와 수갑이다. ‘복(福)’의 원래 뜻은 술을 올려 신에게 제사 지내며 부귀와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선조들의 행복관을 보면 ‘행’이란 제왕이 내리는 것으로, 죽음에 이르러 사면받아 살아나는 것이고, ‘복’이란 하늘이 주는 것으로, 신의 가호로 부귀와 안녕을 누리는 것이다.[4] ...
옛 서적에 인과응보에 관한 실화가 많이 등장한다. 여기서는 이 관점에서 이소룡 부자가 요절한 비밀을 파헤쳐 본다. 많은 사람이 이소룡이 중국인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그는 194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미국인으로, 말하자면 재미 화교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활약한 최초의 화교 배우였다. 그가 주연한 쿵푸영화 <당산대형(唐山大兄)>이 큰 호평을 받았고, 이어서 출연한 <정무문(精武門)>, <맹룡과강(猛龍過江)>, <용쟁호투(龍爭虎鬪)>및 <사망유희(死亡游戱)>가 영화계를 뒤흔들었다. 그는 곧바로 국제적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이소룡은 대만 금마장 최고연기자상, 홍콩 금상장, 영국 영화제작자협회의 전설대상(传奇大奖) 등 많은 상을 받았다. 1967년에는 스스로 절권도를 만들어 중국 전통무술 쿵푸를 널리 알렸으며, 미국 <블랙벨트>잡지에서 선정한 20세기 10대 무술가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전 복싱 헤비급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는 “이소룡은 위대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 나는 정말로 그의 무술을 좋아하며 그를 만나고 싶다. 그는 그의 시대를 초월했다”라고 평가했다. 한편 미국 유도의 대부로 불리는 제니 레벨은 “그의 공격 속도는 일반인보다 두 배는 빠르고 권법과 보법 및 발기술도 뛰어나다. 만약 무술가에 왕이 있다면 소룡은 왕 중의 왕으로, 그 시대에 가장 뛰어난 정상급 고수다”라고 평가했다. 이소룡은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서양인들에게도 부르스 리란 이름으로 아주 익숙하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한마디로 당대 쿵푸의 대명사와도 같았다. 그의 영화는 전 세계 화인들은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큰 영향력이 있었고, 그의 이름은 무술영화 내지는 중국 쿵푸의 상징이 됐다. 요절한 이소룡 부자(父子) 하지만 이소룡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33세에 영화 <사망유희>를 촬영하던 중 홍콩 구룡의 집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1973년 7월 20일이었다. 이 사건은 대중들에게 큰 충격과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설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피살당했다고 하고, 어떤 이는 병으로 죽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약물 부작용으로 사망했다고 하며, 또 어떤 이는 ‘복상사’했다고 한다. 한편 이소룡의 아들인 브랜던 리(李國豪, Brandon Lee, 1965년 2월 1일~1993년 4월 1일)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그가 8세 때 아버지 이소룡이 사망했다. 브랜던 리는 부친으로부터 재능과 끼를 물려받았고, 그의 모친 역시 무술에 조예가 깊었는데 브랜던 리는 어렸을 때부터 모친에게 무술교육을 받았으며, 성년이 되자 그의 무술 실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 나중에 보스턴 에멀슨 영화학교에 진학해 영화와 연출을 전공했다. 그는 부친의 뒤를 이어 배우가 됐고 TV영화 <쿵푸영화(功夫圈 Kung Fu: The Movie)>에서 이소룡의 대역으로 데뷔했다. 브랜던 리는 준수한 외모와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할리우드 영화사들의 주목을 받았고 이소룡의 공백을 메꿔줄 인물로 평가받는 등 전도가 유망했다. 특히 1400만 달러가 투자된 영화 ‘크로우(The Crow)’에서 그는 감독의 요구에 따라 고난도 동작들을 직접 연기했다. 하지만 한창 영화를 촬영 중이던 1993년 4월 1일 밤 12시 30분 총성 1발이 울렸고, 복부 관통상을 입은 브랜던은 출혈 과다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28세 때다. 그의 죽음은 부친 이소룡의 비극을 재연한 것으로, 한창 떠오르던 쿵푸 스타가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렇다면 이소룡 부자는 왜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었을까? 우선 이소룡의 부친 이야기부터 해보자. 인질을 납치해 살해한 이소룡의 부친 이해천 ...
중국요리(흔히 ‘중화요리’라 불린다)는 다채롭기 그지없다. ‘중국요리 5품(색, 향, 맛, 의미, 형태)’의 특색이 남에서 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식탁 위에 성대하게 펼쳐졌다. 유명한 ‘동파육(東坡肉)’ ‘사자두(獅子頭)’ ‘궁바우지딩(宮保雞丁)’ ‘만한전석(滿漢全席)’ ‘봉황정상(龍鳳呈祥)’ 외에도 홍루몽에 나오는 ‘우유복령상(牛乳茯苓霜)’ 등 산해진미 배후에는 모두 깊이 연구할 것이 있고 스토리가 있다.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여긴다’는 말이 있다. 수천 년을 이어온 중국의 음식문화는 넓고 깊다. 식자재 선택에서 가공, 요리, 조리기구는 물론 보건양생과 식사예절에 이르기까지, 더 나아가 식사 분위기와 미적 정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면에서 풍부하고 독특한 내용이 있다. 여기에는 오래된 지혜와 깜짝 놀랄 내용이 포함돼 있다. 바로 이렇게 깊이 있는 내포 때문에 중국은 각지의 일반 요리와 궁정의 대연회를 범상치 않게 만들었고 직간접적으로 아시아 및 세계 음식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 전통 음식문화의 이론과 철학 1. 천인합일(天人合一) 천인합일 사상이 중국 전통 음식문화에 배어 있다. 음식을 만들고 먹음에 계절을 거스르지 않고 기후에 순응해 계절에 맞지 않는 음식을 멀리했다. 주나라 시대에는 궁중에 식의(食醫)가 있어 음식의 맛은 물론 온도와 분량 등을 관장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영양사에 해당한다. <주례·천관(天官)·식의(食醫)>에서는 “무릇 밥은 봄기운처럼 따뜻하게, 국은 여름 기운처럼 따끈하게, 장(醬)은 가을 기운처럼 서늘하게, 음료는 겨울 기운처럼 차갑게 한다. 무릇 조미(調味)는 봄에는 신맛을, 여름에는 쓴맛을, 가을에는 매운맛을, 겨울에는 짠맛을 돋우는데, 맛의 조화는 단맛으로 맞춘다”고 했다. 즉 음식을 요리할 때 사계절의 기후를 보며 오미(五味)도 절기에 따라 조절해야 한다. 2. 의식동원(醫食同源) “약으로 보(補)하는 것은 음식으로 보하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음식과 약은 하나로, 사실 그 근원 역시 천인합일이다. 곡물과 채소와 과일이 생장하는 것은 본래 대자연의 조화로서 사람을 위해 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국 전통 의학과 농업은 음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황제내경>에서는 “오곡(다섯 가지 곡식)으로 기르고, 오과(5가지 과일)로 도우며, 오축(5가지 가축)으로 더하고, 오채(5가지 채소)로 채워 기(氣)와 영양을 함께 섭취함으로써 정기를 보한다”고 했다. 이 이치를 두고 청나라 때 명의 서대춘(徐大椿)은 <용약여용병론(用药如用兵论>에서 “성인이 백성의 생명을 유지할 방도를 온전히 보호했다”고 평했다. 한편 당나라의 명의 손사막이 지은 <천금요방(千金要方)>의 제1권은 ‘식치(食治)’다. 즉 음식으로 치료하는 분야를 따로 다뤘다. 이시진의 <본초강목>에는 약재 이외에도 300여 가지 일상 음식의 치료 효과를 기록했고 아울러 다양한 약선(藥膳) 처방을 제시했다. 3. 중화의 미(中和之美) ‘중화의 미(中和之美)’란 중국 전통문화에서 추구하는 미적 표준이다. 즉, 적절하고 평온하고 균형 잡히고 조화로우며, 진하지도 않고 옅지도 않으며, 강(剛)하지도 않고 유(柔)하지도 않은, 딱 알맞은 경지를 말한다. 요리를 잘하는 것 역시 각종 식재료와 조미료를 균형을 맞춰 조리하는 데 있으며 최종적으로 좋은 맛은 다양한 요소를 적절히 배합한 결과다. 춘추시대 사상가 안자(晏子)는 고깃국을 끓이는 것으로 조화를 해석했다. “조화(和)는 국을 끓이는 것과 같다. 불, 물, 식초, 젓갈, 소금, 매실로 어육(魚肉)을 조리하는데, 장작으로 불을 지펴 끓인다. 재부(宰夫·궁중의 요리사)가 부족한 것은 채우고 지나친 것은 덜어내 조화를 맞추면 군자가 이를 먹고 마음이 화평해진다.” 《좌전·소공20년》에 수록된 내용이다. 4. 음식과 치국(治國) 노자는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다(治大国,若烹小鲜)”고 했다. 이렇듯 ‘치국(治國)의 도(道)’를 요리하는 것에 비유한 고대 선현들의 견해는 가히 독창적이다. 《상서(尙書)·열명하(說命下)》에서 “국을 맛있게 끓이려면 소금과 매실을 잘 써라(若作和羮,尔惟盐梅)”고 했다. 이는 소금과 식초만 잘 써도 국을 맛있게 끓일 수 있다는 말인데, 치국의 도에 비유한 말이다. 후대의 사람들이 노자의 ‘작은 생선’ 논리에는 견해를 달리할 수 있지만, 재료를 적절히 사용하고 불을 잘 조절하면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은 모두 동의한다. 소금은 짠맛을 띠고 매실은 신맛을 띠는데, 이 두 가지는 마치 각기 다른 능력을 지닌 현명한 인재와 같다. 임금이 현명한 자를 등용하면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은 편안해진다. 안자는 군신관계 또한 국을 끓이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신하는 임금이 옳다고 해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 일이 바르게 되고, 임금이 아니라고 해도 옳은 것은 옳다고 해야 일이 잘못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정사가 평화롭고 예에 어긋나지 않게 되고 백성은 다투는 마음이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역시 잘 끓인 국은 오미가 갖추어져 평온하다. 삼가 신명께 올리니 다툼이 없게 된다”고 했다. 5. 공자의 ‘식도(食道)’ ...
한때 대학원에 진학해 석박사 과정을 밟고 싶어서 어느 원로 중의사에게 자문을 한 적이 있다. 박사 학위를 소지한 그는 내게 진지하게 충고해줬다. “학문과 임상은 완전히 달라. 만약 의사가 돼 세상을 구하고 싶다면 임상에 종사해야 하네. 환자가 바로 자네의 스승이고 치료과정이 바로 자네의 의술과 학술이라네.” 결국 나는 임상을 선택했다. 마음을 비우고 한명 한명 환자(스승)를 대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때때로 영감을 주곤 했다. 59세 어느 여자 환자의 이야기다. 그녀는 장기간 고혈압약을 복용해왔고 심박동 조절기도 달고 있다. 1년 전 양약을 먹고 나서 구토가 났는데 5번 토한 후 더는 음식이 들어가지 않아 병원에 입원했고, 열흘 후 신부전 판정을 받았다. 그때부터 매주 2차례씩 투석을 하고 있다. 그녀는 소박하게 생활하고 음식도 담백하게 먹었을 뿐만 아니라 의사가 시키는 대로 약도 제때 복용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처음 진료하러 왔을 때 눈 밑이 갈회색이었고 얼굴에 주름살이 아주 많았으며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손발은 싸늘했고 왼손 동정맥루(AVF) 연결 부위가 붓고 딱딱했다. 손목과 손바닥도 부었고 말을 할 때면 투석환자 특유의 냄새가 났다. 간절한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선생님 투석을 안 할 수는 없을까요?” 이것은 정말 큰 문제로, 투석환자 다수가 인정하다시피 투석이란 무기징역처럼 평생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 나는 그녀에게 되물었다. “한약을 드셔볼래요? 침구치료와 한약을 결합하면 효과가 더 빨라요!” 그녀는 마치 저주를 받은 듯 깜짝 놀라면서 “양방에서는 한약을 먹지 말라고 하던데요”라고 했다. ‘적을 없애달라면서 무기를 쓰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에게 한의학을 어느 정도 이해할 시간을 줄 필요가 있었다. 검사지표는 BUN 81, 크레아티닌 9.9였다. 이 외에도 어지럼증, 심계(가슴 두근거림), 피로, 등과 허리가 시리고 아픈 증상이 있었고,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답답함도 있었다. 침구치료: 양허(陽虛‧양기가 부족한 증상)가 뚜렷해서 우선 양기가 상승하도록 백회에 침을 놓았다. 또 신장의 독소를 풀어주기 위해 축빈, 태계, 내관혈에 자침하고, 신기를 보하는 기해, 관원, 용천에 자침했다. 부정맥에는 내관, 간사, 극문에 돌아가면서 침을 놓았고 우울증에 태충, 합곡에 자침했다. 쥐가 잘 난다고 해서 종아리 승산혈에 자침하고 어지럼증과 빈혈에 내관, 혈해, 삼음교를 자침했다. 손이 부어 팔사혈에 침을 놓고 전신면역계통 조절에 합곡, 족삼리, 삼음교에 자침했다. 1주일에 2차례씩 침구치료를 한 지 1달 후 어두웠던 눈꺼풀이 밝아졌고 정신상태도 많이 좋아졌다. 혼자 소변을 볼 수 있게 됐고 소변량도 증가했다. 그뿐만 아니라 치료에 믿음이 생겨 자발적으로 한약을 먹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팔의 종창은 효과가 일시적이라 양방에 가서 처리하게 했다. 투석혈관(동정맥루)을 교체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녀는 재수술을 완강히 거부하며 차일피일 시간을 끌었다. 양방에서도 수술을 다시 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 부득이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손바닥에 관을 삽입한 부위가 부어 있었으나, 딱딱하지는 않고 피부색이 좀 어두울 뿐이었다. 나는 증상이 완화되도록 주먹을 쥐었다 펴는 동작을 꾸준히 하라고 했다. 3달 동안 19차례 침구치료를 거친 후 그녀의 검사지표는 크게 호전됐다. 혈색소 10.3 BUN 40, 크레아티닌 6.69에 신사구체 투과율 6.75였다. 상태가 좋아지자 양방 의사도 투석을 주 2회에서 1회로 줄이는 데 동의했다. 그녀는 마치 감형을 받은 것처럼 뛸 듯이 기뻐했다. 투석에서 불편한 증상이 나타나면 침치료와 한약 횟수를 늘려 처리했다. 그러자 입에서 나던 냄새도 사라졌고 삶의 질이 크게 좋아졌다. 하지만 투석의 곤경에서 벗어나는 소원은 아직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지속적으로 치료하고 있다.
아침에 부모가 매일 아이에게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하면, 반년이 지나지 않아 아이의 예의 바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사진=셔터스톡) 아이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는 한 초등학교 교장이 있었다. 교장은 사람들과 잘 지내는 아이들은 사회에서 절반은 성공한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의와 친절은 소통의 시작이며 사람의 마음을 여는 열쇠라고 믿었다. 교장은 ‘오늘날 점점 버릇없이 변해가는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학부모들에게 강의했다. 그의 결론은 간단했다. 예의 바른 아이로 키울 수 있는 방법은 부모가 매일 아침 가족들에게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하는 것이다. 그는 “매일 하는 이 짧은 아침 인사로 아이들은 반년도 안 돼 예의 바른 아이로 변신한다”며 “단 이 말을 반드시 큰소리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장은 이것이 간단해 보이지만 매우 효과적이라며 아이의 예의 문제는 반드시 고쳐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의에 참석한 학부모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간단한 말 한마디가 아이들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듯한 학부모의 표정을 본 교장은 웃으며 말했다. "이 말은 우습게 보지 마세요. 나는 매일 사용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으면 내일 여러분도 제가 말한 대로 해 보세요. 여기 계시는 분들은 대부분 아이 엄마인데,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가족들의 아침밥을 짓느라 고생하시죠. 그래서 사소한 일을 간과했을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 가족이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교장은 이어 “아침에 일어나 '좋은 아침이에요'라고 온 가족이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인사해 봐요. 남편과 아이들은 우선 깜짝 놀랄 것입니다. 속으로 ‘오늘 이게 웬일이지? 무슨 일이 생겼나? 엄마가 왜 이렇게 정중하게 인사할까?‘라고 생각합니다. 가족들은 쑥스러워 당신에게 아침인사를 건너지 못하고 얼버무릴 것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처음에는 좀 쑥스러울 뿐이지요”라고 말했다. “여러분이 이렇게 매일 아침, 남편과 아이에게 큰 소리로 인사한다면 분명 집안 분위기가 달라질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에게 인사하는 사람에게 거부감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존중받는 느낌이 들 겁니다. 오히려 아이들은 엄마한테 이렇게 예의 바른 대우를 받았는데 엄마를 외면하고 응답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의상 틀림없이 어머니께 인사를 합니다. 처음에는 얼버무리듯이 하다 점점 목소리가 분명해질 것입니다.” 교장은 이렇게 되면 매일 아이에게 예의 바르게 하라고 훈계할 필요가 없어지는데 이미 가정에서 습관이 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교장은 이 습관이 왜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데 아이들은 예의 바른 환경에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부모의 언행을 모방해 자연스럽게 좋은 습관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일은 단순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하다. 처음에는 민망할 수도 있지만 오래되면 좋은 습관이 될 수 있다. 부모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어른의 밝은 한마디 아침 인사는 온종일 아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고 즐겁게 해 준다.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마음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어느 여인인들 검고 무성한 머리카락을 갖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한의학에서는 두발은 ‘혈지여(血之余) 신지화(肾之華)’라 해서 혈(血) 및 신장과 관련성을 중시한다. 즉 두발에 아름다움을 더해줄 뿐만 아니라 건강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고대 여인들은 귀밑까지 드리워진 탐스러운 머리와 폭포처럼 길고 검은 머리를 지녔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두발을 관리했을까? 사실 옛날 사람들의 모발 관리는 ‘청결 유지’라는 점에서 오늘날과 아주 흡사하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한 가지를 더 중시했다는 점이다. 신체 청결에 대해 현대인들은 전부 ‘씻는다(洗)’는 말을 쓰지만, 선인들은 두발을 씻을 때는 따로 쓰는 용어가 있었다. 즉 두발을 씻을 때는 ‘목(沐)’이라 했고, 발을 씻는 것은 ‘세(洗)’, 손을 씻는 것은 ‘관(盥)’, 몸을 씻는 것은 ‘욕(浴)’이라 했다. 이 용어들을 잘못 쓰면 웃음거리가 됐다. 이처럼 단순히 씻는 동작 하나에도 다양한 표현이 존재했다. 그뿐만 아니라 진한(秦漢) 때의 군자들은 모두 ‘사흘에 한 번 두발을 씻고, 닷새에 한 번 몸을 씻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다 한나라 때 이르러 관원들은 닷새에 한 번씩 ‘휴목(休沐‧두발을 씻으며 쉬는 날)’이란 휴가를 줬으니 용모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즉 두발 청결을 아주 중요하게 보았다. 유교 경전인 <예기(禮記)>에는 군자가 두발을 씻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다. “기장 삶은 물에 목욕하고 낯을 씻으며(沐稷而靧粱), 빗은 전질을 쓰고(櫛用樿櫛), 머리를 말릴 때는 상아빗을 쓴다(髮晞用象櫛).” 남자들이 머리를 씻는 데도 이렇게 다양한 도구가 필요했으니 용모를 중시하는 여인들은 오죽했으랴. 더 기발한 방법들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여기서 일단 <홍루몽> 제58회에 나오는 이야기를 한번 보자. 일찍이 연극에서 노래를 부른 적이 있는 방관(芳官)이 보옥 처소의 하인이 됐다. 그녀의 계모는 시기심이 많아서 늘 자기 친딸이 머리를 씻고 남은 물로 그녀의 머리를 씻게 해서 다툼을 유발했다. 이를 보다 못한 보옥 거처의 여자 하인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이때 조용히 있던 한 사람이 화로유(花露油) 1병에 계란, 화장비누(香皂), 머리끈 등을 가져다 방관에게 주고 따로 씻게 했다. 그 후 청문(晴雯)이 방관을 도와 두발을 씻기고 말린 후 머리끈으로 머리를 단장했다. 이 일화는 청나라 때 일반 여인들의 세발용품과 대략적인 과정을 보여준다. 옛날에 유행했던 두발용품은 화로유, 계란, 화장비누 등인데, 이 중 화장비누는 요즘의 샴푸처럼 두발을 청결히하는 데 사용했다. 그렇다면 화로유와 계란은 대체 어떤 용도로 썼을까? 화로유(花露油) 화로유는 <홍루몽>에 나오는 계화유(桂花油)의 일종으로, 머리를 씻은 후 발라주는 일종의 모발 자양제이자 천연 향수다. 당시 여인들은 대부분 타래머리를 올려야 했는데, 기름을 뿌려 두발을 부드럽게 해주면 예쁘고 정교한 모양을 만들기에 편리했다. 일찍이 <시경>에도 “어찌 머릿기름으로 치장할 수 없으랴마는 누굴 위해 그러리오(豈無膏沐 誰適爲容)”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고목(膏沐)이란 기름을 써서 두발을 매끄럽게 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이처럼 3천 년 전에도 이미 머릿기름을 사용했다. 초기에는 동물성지방을 이용했지만, 한나라 때 서역에서 참기름이 들어왔다. 송나라 때는 각종 꽃의 진액을 추출해 기름에 넣었는데,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향발목서유(香发木樨油)’였다. 이는 목서(계수나무) 꽃으로 만든 기름, 즉 계화유(桂花油)를 운치 있게 표현한 말이다. 이시진의 <본초강목>에서는 “(목서를) 들기름과 함께 쪄 익혀서 쓰면 모발을 윤기 나게 할 수도 있고 화장품을 만들 수도 있다”고 했다. 남송의 <사림광기(事林廣記)>에는 계화유를 만드는 방법이 상세히 기재돼 있다. “이른 새벽 반쯤 핀 계수나무꽃을 잘라 깨끗이 씻은 후 생화 1말에 들기름 1근 비율로 섞어 자기항아리에 담고 기름종이로 밀봉한다. 이 항아리를 무쇠솥에 넣고 한 식경 정도 찐 후 불을 끄고 건조한 곳에 열흘간 둔다. 마지막에 계수나무꽃을 꺼낸 후 손으로 짜면 맑은 향기가 널리 퍼지는 계화유가 나온다. 여기에 밀랍을 넣고 졸이면 천연 화장품이 된다.” 계란 흰자위 그렇다면 계란은 대체 어디에 사용했을까? 사실 옛날 사람들이 진짜 원했던 것은 계란 흰자위다. 계화유는 가격이 비싸 쉽게 구할 수 없었던 반면 계란은 흔했기 때문에 보통 여인들의 모발 관리에 필수품이 됐다. 청나라 때의 <염사(奁史)>란 책에는 도처에서 여자들이 계란 흰자위를 이용해 머리를 관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여자들은 머릿기름이 더러워지면 두발을 적신 후 계란 흰자위를 바르고 잠시 후 씻어냈다. 이렇게 하면 머리카락이 산뜻하고 깨끗해진다. 또 장시간 계란 흰자위를 사용하면 머리카락이 검어지고 윤기가 흐른다. 그야말로 천연 모발 보호제였다. 앞에서 언급한 몇몇 세발용품 외에도 고대 여인들은 일상생활에서 모발을 세척하고 보호하기 위해 사용한 천연 재료들이 매우 많았다. 가장 널리 쓰인 것이 조각(皁角)이다. 강남콩 모양으로 생겼는데, 강력한 세척력을 지닌 식물이다. 껍질을 벗기면 안에 매끄럽고 부드러운 즙이 나오는데, 이것을 빨래하는 데 썼다. 또 물에 담가 찧은 후 거른 액은 샴푸가 됐다. 선인들은 천연을 귀히 여겼으며, 대자연에는 모발을 세척하고 보호하는 기능을 가진 나무가 많았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참깻잎은 모발을 씻는 샴푸로 썼고 이를 퇴치하는 데도 썼다. <가숙사친(家塾事親>에는 “깻잎 달인 물로 부인의 머리를 빗으면 이를 없앤다”는 기록이 있다. 이 외에도 사람들은 무궁화잎, 측백잎, 복숭아나무 가지, 뽕나무 껍질 등을 사용했다. 지금까지 설명한 방향성 계화유에서부터 천연식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어느 정도 가공이 필요한데, 일상적으로 쓰는 물품 중에서 별다른 가공 없이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 가장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쌀뜨물이다. 쌀뜨물에는 풍부한 비타민이 함유돼 있어 머리카락이 세지 않게 예방할 수 있다. 이렇게 두발을 청결하게 관리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고대 여인들은 머릿결 관리를 아주 중요시해 매일 빗질을 했다. 홍루몽에는 두 여인이 머리를 빗질하는 내용이 아주 상세히 묘사돼 있다. 20회에서, 가보옥은 여자 하인 사월(麝月)의 머리가 가렵다는 말을 듣고는 비녀를 빼고 머리를 풀게 한다. 그러고는 참빗으로 빗질을 해준다. 또 42회에는 대옥이 여러 사람과 담소를 나누다 하인의 머리카락이 풀어지자 급히 화장대로 달려가 민자(抿子‧머릿기름을 바르는 작은 솔)를 꺼내 머릿결을 정리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
천지 만물의 생기는 해마다 봄에 생겨나서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열매 맺고 겨울 휴면기에 이르면 조락하고 낙엽은 마침내 뿌리로 돌아간다. 이 엄숙한 계절은 사람의 생각을 가라앉혀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만든다. 사람은 저마다 일생 중에서 좋은 종착지를 찾는데, 석양이 떨어질 때면 누구나 따뜻한 보금자리가 있어서 비바람을 피하고 몸을 보전할 곳이 있기를 희망하게 된다. 어느 명문가 규수가 28세에 의사에게 시집을 갔다. 당시 친지들이 모두 기뻐하면서 그녀에게 부귀하게 살 팔자라 부자 신랑에게 시집갔다고 부러워했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은 사업 욕심이 너무 강해 늘 큰물에서 놀고 싶어 했다. 심지어 사업 영역을 의료계 밖에까지 확대해 많은 투자를 했다. 반면 아내는 병원이 바빠 돕다가 매일 어깨너머로 의료기술을 배웠다. 그러고는 독학으로 공부해 중의사 고시에 응시했다. 총명했던 그녀는 의사자격증을 얻었고, 그 후 빠르게 자신의 환자군(群)을 가짐으로써 진료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그러자 부부는 각자의 일을 하느라 바빠졌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수수께끼와 같아서 흔히 사람을 농락하곤 한다. 길(吉)한 것 속에 흉한 게 있고 흉한 것 속에 길한 게 감춰져 있어서다. 어느 날 그녀가 나를 찾아와 개인적으로 진료를 청했다. 불과 1년 사이에 10년은 더 늙어보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녀에게 물어봤다. “괜찮으세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어디가 불편한가요?” 그녀는 얼굴 근육이 떨려 실룩거리면서 “우리 부부 사이에 제삼자가 나타났어요. 병원에 근무하는 아주 지독한 간호사랍니다”라고 했다. 그녀는 그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의 관계를 묵인해줬다. 그런데 남편은 뜻밖에도 이혼을 하자면서 위자료로 4천만 위안을 내라고 했다. 세상에, 어디 이럴 수가 있는가! 나는 이 말을 듣고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 팔자는 정말 귀하군요. 너무 부귀한 팔자예요! ” 알고 보니 남편은 그녀 모르게 이름을 도용해 많은 수표를 남발했고 이렇게 쌓인 빚이 4천만 위안이 넘었다. 실제 사정이 드러나자 채권자들은 그녀의 병원 앞에 찾아와 온갖 협박을 했고 심한 욕을 해대며 빚을 갚으라고 윽박질렀다. 결국 그녀의 진료 수입은 전부 채권자들이 가져갔고 한 푼도 남지 않았다. 이때 실타래처럼 엉킨 문제들을 단칼에 잘라버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난관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마치 겨울이 지났지만 봄은 아직 오지 않고, 해가 지고 밤이 된 지 오래지만 태양은 뜨지 않는 상황이었다. 견디기 힘든 난관일지라도 지나야 했다. 그녀는 법원을 찾아가 이혼을 신청했다. 자신의 굴레를 벗도록 법원에서 정의를 활짝 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혼소송은 시간을 질질 끌기만 했고 끝내 승소하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판사는 그녀에게 사적으로 화해하라고 했다. 이런 곤경에 처하자 그녀는 정신이 거의 붕괴될 지경이 됐다. 사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매일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 그녀는 파도를 넘으려 했지만, 사나운 파도는 갈수록 더 심해졌다. 그때마다 그녀는 신에게 절규하며 도움을 청했다. 그녀는 또 정신과 상담을 받고 심리학 수업도 들어봤지만, 상처받고 피로한 마음은 끝내 안식을 얻지 못했다. 이미 바닥까지 떨어진 그녀였지만, 뜻밖에도 더 놀라운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난소암에 걸린 것이다. 나는 비극적인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선 백회와 신정혈에 침을 놓았고 끊임없이 합곡과 신문혈을 문질러 줬다. 또 휴지를 한 장 뽑아서 그녀에게 눈물을 닦게 했다. 사람마다 장단점이 있듯이 의사에게도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 있다. 운명의 병은 침구로도 치료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우선 그녀에게 살아갈 용기를 북돋워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신적인 문제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데, 음악과 예술을 이용하면 영혼을 뛰어넘어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 이에 나는 그녀에게 션윈예술단 공연을 보도록 권했다. 막이 오르자 수많은 하늘의 신들, 부처, 보살, 나한, 천왕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한 편의 눈부신 장면이 펼쳐진다. 그녀는 공연을 보고 깜짝 놀랐다면서 “마치 천국 같았어요! 신불의 세계에 직접 와있는 것 같아 정말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어요! 에너지도 아주 대단했고요”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흐르는 눈물을 보면서 마치 그녀 마음속의 모든 쓰린 일들, 곤경, 두려움이 순식간에 위로로 변한 것 같았다. 그후 그녀는 매년 가장 비싼 표를 사서 션윈예술단 공연을 감상한다. 그녀는 “션윈공연을 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짜 부귀한 운명”이라고 말한다. 비록 겨울 찬바람은 여전히 뼛속까지 파고들지만, 그녀는 눈 속에 우뚝 선 매화처럼 의연하게 버티고 있다. 결국 그녀는 남편과 이혼에 성공했고 다년간 병마와 싸우면서도 전력으로 전남편의 빚을 갚고 있다. 험난한 길이지만, 그녀는 용감하고 굳세게 걸어가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가족 간의 협조를 상당히 중시하고 의지하는 편이다. 퍼스트레이디 멜라니아를 비롯해 12세 아들 배런과 전처소생 네 자녀는 모두 위험을 무릅쓰고 아버지를 돕기 위해 나선 동지다. 그들은 트럼프가 격렬한 정치 경선에 나서고, 백악관에 들어가고, 최종적으로 미국 대통령이란 중책을 맡는 것을 지지했다. 트럼프 집안의 자녀들이 금지옥엽으로 귀하게만 자랐을 거라는 외부의 통념을 깨고 대통령의 강력한 배경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트럼프의 가정교육과 관련이 있다. 그는 사랑과 믿음이 충만한 아버지이자 자녀들에게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했다. ▼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가 페이스북에 올린 어릴 때 ‘사발머리’ 사진 자녀를 영광으로 여긴 트럼프 젊은 시절 트럼프는 늘 아이들과 체육대회에 참가하곤 했다. 트럼프가 아들 에릭과 함께 전미 테니스 대회를 참관하거나 이방카와 야구대회에 참가한 예전 사진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현재 37세인 이방카는 2004년 ‘뉴욕 매거진’과 가진 인터뷰에서 “매일 아침 등교하기 전에 우리는 모두 1층에 내려가 아버지와 포옹하며 키스를 하곤 했어요”라고 했다. Happy, happy birthday Dad! I love you very much. Wishing you your ...
여러분이 듣는 음악이 건강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아는가? 클래식은 몸과 마음을 조화롭게 만들어 치유하는 힘이 있다. 이디스 주크(Edith Zook)란 83세의 미국 할머니는 평소 부정맥을 앓아 가끔 기절하기도 했다. 2006년 1월 15일 일리노이주의 어배너에서 심장수술을 받았다. 수술 도중 한 하피스트가 그녀의 치료를 돕기 위해 요한 파헬벨의 ‘D장조의 카논’을 연주했다. 주크의 주치의 아라본 코체릴(Araham Kocheril)이 하프 소리의 진동수가 효과적으로 부정맥을 조절해준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버드 의대 에이리 골드버거(Ary Goldberger) 교수는 “건강한 심박동은 고전음악의 리듬에 아주 가깝다”고 했다. 음악의 신비한 효과를 체험한 환자는 주크만이 아니다.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음악요법은 조산아의 심박동을 정상화하고 식사 및 수면에도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중풍이나 뇌손상으로 인한 환자의 언어 능력 회복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한다. 어떤 환자는 다른 여러 자극에는 반응하지 않지만, 음악에는 감수성이 있다. 이는 인체에서 소리를 전달하는 신경이 통감신경(痛感神經))과 같기 때문인데, 의사들은 음악을 이용해 분만이나 치과 치료 시의 통증을 줄이거나 암으로 인한 통증과 암치료 부작용을 경감한다. 이는 음악에 대한 중국 고대의 인식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옛날 사람들은 ‘바르고 우아한 음악’은 사람을 교화하고 영혼을 정화하고 심신을 조절해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 한자의 약(藥)은 음악을 뜻하는 악(樂) 위에 풀 초 자를 더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음악은 병을 치료하는 약초와 마찬가지다. 중국 전통음악에서는 궁, 상, 각, 치, 우 5음(五音)을 사용하는데 이는 서양음악의 도, 레, 미, 솔, 라에 상응한다. 또 사람의 비, 폐, 간, 심, 신 오장과 사(思‧생각), 우(懮‧우울), 노(怒‧분노), 희(喜‧기쁨), 공(恐‧두려움) 등 오정(五情)에도 대응한다. 황제내경에서는 “하늘에는 5음(音)이 있고 사람에겐 5장(臟)이 있으며, 하늘에는 6율(律)이 있고 사람에겐 6부(腑)가 있으니, 이는 사람이 천지와 상응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오음은 오정을 통해 오장을 조절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상음(商音)은 폐를 맑게 한다. 따라서 상음을 들으면 감기 예방 및 호흡기 건강에 도움을 준다. 동시에 폐는 비(悲)를 주관하는데 슬프고 우울한 정서는 폐를 상하게 할 수 있다. 이럴 때 상음조의 음악을 들으면 기분 전환에 아주 좋다. 하지만 모든 음악이 건강에 좋은 것은 아니다. 메탈이나 힙합, 펑크 록 등의 현대음악은 인체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러시아의 의학자 블라디미르 아니시니모프(Vladimir N Anisimov)가 창조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 약 5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록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가장 짧았는데 남자는 43.6세, 여자는 37.6세에 불과했다. 반대로 90세까지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가장 활동적인 직업 5가지 중에 고전음악이 4개를 차지했다. 바로 하피스트, 작곡가, 바이올리스트 및 첼리시트였다. 버클리 대학의 연구에서도 메탈이나 힙합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동년배 미국인들 중에서 수명이 가장 짧았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할까?
자소엽에 얽힌 이야기 어느 날 화타가 제자들을 데리고 여관에 투숙했다. 우연히 식당에서 비단옷을 입은 소년들이 게 먹기 시합을 하는 것을 보았다. 먹고 난 게 껍데기가 식탁 위에 작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화타가 이를 보고 다가가 “게는 성질이 차서 많이 먹으면 배가 아플 수 있으니 조금만 먹게나!”라고 권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무시하는 말투로 “우리 돈으로 사 먹고 당신을 건드린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했다. 화타는 자비심으로 고개를 돌려 주인에게 말했다. “저들에게 더는 게를 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아주 위험할 수 있어요! ” 하지만 주인은 정색하며 “참 할일도 없구먼, 남의 장사 방해하지 말아요”라고 했다. 한밤중이 되자 젊은이들이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큰소리를 질러댔다. 어떤 이는 머리에 식은땀이 흘렀고 안색이 창백해졌으며 어떤 이는 땅바닥에 넘어져 경련을 일으켰다. 화타는 곧 제자를 보내 하천가에서 약초를 캐오게 한 후 줄기와 입을 달여 마시게 했다. 얼마 후 모두 좋아졌다! 그 약초는 자주색이었고 젊은이들이 약초를 먹고 편안해졌기 때문에 자서(紫舒 역주: 먹으면 편안해지는 보라색 약초라는 뜻)라고 이름을 지었다. 나중에 전해지는 과정에 자소(紫苏)로 변했다. 화타는 일찍이 수달 한 마리가 큰 물고기를 먹고 배가 너무 불러서 힘들어지자 물가에 나와서 누워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잠시 후 어렵게 물속으로 들어갔지만, 잠시 후 또 물가로 기어 올라와 자초잎을 먹었다. 이렇게 몇 차례 반복하는 것을 보고 나서 자초가 물고기 독을 풀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자소엽 관련 기록 자소는 꿀풀과의 1년생 초본식물로 맛이 맵고 달면서 따뜻하다. 폐와 비경으로 들어간다. 자소는 입이 자주색이고 뒷면이 흰색이며 백소는 입이 녹색이고 뒷면은 흰색이다. 본초강목에서는 “소는 소생한다는 의미로 편안하게 풀어주는 성질이 있다. 기를 운행하고 혈을 조화롭게 하므로 소라고 한다”라고 했다. 매운맛은 기분으로 들어가 숨찬 증상을 가라앉히고 기를 내리며 담을 없앨 수 있다. 자주색은 혈분으로 들어가 혈을 다스리고 통증을 없애며 안태기능이 있다. 또 향이 강하고 따뜻해서 추위를 흩어내고 풍을 몰아낼 수 있다. 자소엽은 매운 맛이 강해서 한기를 잘 흩어낸다. 반면 소경(줄기)는 위를 튼튼히 하고 기를 고르게 해서 안태작용이 있다. 소자(씨앗)은 기를 내리는 작용이 강해 숨찬 증상에 좋다. 자소유는 강력한 방부작용이 있으며 기름의 주성분인 페릴라 알데히드(Perilla aldehyde)로 당을 만들면 설탕의 2천 배에 달한다. 생선이나 갑각류에 중독되어 구토하고 배가 아플 때는 자소엽에 생강을 넣고 끓여 먹는다. 찬 과일을 많이 먹어서 생긴 배탈과 설사에는 자소엽에 생강, 대추를 넣어서 달여 마신다. 유방에 종양이 생겨 아프기 시작할 때 자소엽을 진하게 끓여서 자주 마시고 찌꺼기는 환부에 붙인다. 또는 신선한 잎과 줄기를 으깨어 붙인다. 갑자기 딸꾹질이 심해서 멈추지 않을 때는 자소엽을 진하게 달여서 한꺼번에 다 마신다. 심상성 사마귀에는 신선한 자소엽으로 문질러준다. 매일 1차례 15분씩 한다. 타박상으로 어혈과 부종이 풀리지 않을 때는 자소엽을 달인 후 으깨서 겉에 붙인다. 상처가 덧나지 않고 진통 살균 및 어혈을 풀어준다. ※주의 자소엽의 매운맛은 기를 흩어버릴 수 있어서 장복할 경우 진기가 빠져나갈 수 있다. 기가 허약한 사람은 자소엽에 주의하고 장이 약해서 설사를 잘하는 사람은 소자에 주의해야 한다. 또 기가 약해 땀을 많이 흘리거나 소화력이 약해 설사를 자주 하는 사람이나 화가 자주 올라와 구역질하는 사람은 복용을 금한다. 자소는 잉어와 함께 먹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