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스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군권 유지를 위해 애써 허덕이다 1. 사스 전염병 2003년, 무시무시한 비전형성 폐염(사스, SARS) 전염병이 전 세계를 위협했다. 사스는 30여 개 국가에서 만연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8천여 명이 감염되어, 8백여 명이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300억 달러의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다. 감염자 중 중국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았으며, 홍콩과 중국 대륙의 사스 병례(病例)는 전 세계 총 수의 80%를 차지했다. 그러나 다른 국가들은 중공이 정확한 통계를 숨겼다고 의심하며,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전염병 확산을 숨겨 연임을 도모하다 사스는 2002년 11월 중국 남방에서 처음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막 16대 회의가 소집되었기 때문에, 장쩌민은 자신의 중앙 군사위원회 직위 유임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중국 언론은 16대에서 양호한 정치 분위기를 조성하라는 요구를 받았고, 종종 장쩌민의 구호인 “안정이 모든 것을 잠재울 수 있다”를 계속해서 기재했다. 중공의 중앙 선전부 내부 간행물에서는 분명하게,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SARS), 즉 사스가 언급 되었지만, 중국 언론은 중공의 명령으로 계속해서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전 세계 중국어 권역에서는 “SARS”를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이라고 했지만, 중공만이 유일하게 “비전(非典: 비전형성 폐염)”이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인민들의 공포 심리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인민의 공포심을 덜어 주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조치가 필요한 것이지, 단지 명칭을 바꿔 사람들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긍정적 작용도 할 수가 없다. 인민은 진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근거 없는 소문에 의해 더욱 쉽게 두려움에 떨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과 타인을 모두 속인 방법은 확실히 장쩌민의 “안정이 모든 것을 잠재울 수 있다”는 방침을 따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광둥(廣東)에서 첫 번째 병례가 발견된 후, 장쩌민의 측근인 리장춘(李長春: 정치국상무위원, 광둥성위원회 서기)을 필두로 한 선전부는 갖가지 방법으로 사실을 숨기려 했고, 전염병은 점차 다른 성(省)까지 퍼지게 되었다. 리장춘이 광둥을 떠날 때쯤, 광둥 관료 내부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생기기 시작했다. 광둥 지역 신문에서 사스 전염병에 대한 기사를 다루었을 때, 장쩌민은 저장(浙江)성위원회 서기인 장더장(張德江)을 급히 광둥성위원회 서기로 임명해, 그가 직접 광둥성위원회 선전부장 중양성(鐘陽勝)을 감독하게 했고, 그에게 수차례 언론 통제를 명령했다. 2월 말에서 3월 초, 광둥성위원회 선전부는 아예 각 신문사에 인사 개편을 단행했다. 한 차례 인사 개편이 있고 난 후, 광둥 언론 매체는 중앙 선전부 장쩌민 측근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때부터 전염병 관련 보도는 언론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전염병 은폐는 전형적인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방법이다. 비록 언론 보도는 통제할 수 있었지만, 바이러스는 막을 방법이 없었고, 그 결과 광둥에서는 사스가 점점 퍼지기 시작했다. 2003년 2월 전 세계에 사스가 퍼진 후, 세계 각 지역 언론은 매일같이 사스 사망 병례 및 현황에 대해 보도했다. 그러나 사스의 발원지인 중국에서는, 도리어 특히 정부측 언론 매체는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했다. 2003년 3월 초, 전인대와 정협의 베이징 회의 소집 기간 중에, 광둥의 한 의사의 병세가 매우 좋지 않아서, 홍콩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는데, 그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충격적인 보도가 전해졌다. 홍콩 언론은 그제서야 사스가 이미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조치를 취하기에는 이미 시간이 너무 늦었다. 그때부터 홍콩에서도 사스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홍콩은 국제 사회에서 경제, 교통의 중심지이고, 사람과 화물의 집산지이며, 매일 얼마나 많은 비행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발병한 사람은 쉽게 추적할 수 있지만, 병원균을 추적 조사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잠복기에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또한 파악이 불가능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중공에 즉각 국내의 사스 발병 상황과 확산 범위 등을 통보하라고 요구했다. 3월 26일, 장쩌민의 주치의이자 위생부 부장 장원캉(張文康)이 세계보건기구의 압력으로 베이징에서 처음으로 전염병 상황에 대한 보고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광둥에서 792명이 감염되었고, 31명이 사망했다는 사실만 보고했을 뿐, 다른 지역의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후진타오(胡錦濤)가 지방 정부와 관원들에게 매일 전염병 현황에 대한 보고를 하라고 지시했지만, 축소, 거짓 등 왜곡 보도가 많았다. 이에 장쩌민의 측근인 장원캉이 후진타오에게 공격적인 발언을 했는데, 그는 중국 법규상 매일 전염병을 보고하라는 규정은 없다고 말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중공이 이렇게 고의적으로 전염병 확산 사태를 간과했기 때문에,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고, 결국에는 중국 남방의 광둥성에서부터, 중국 수도 베이징과 중난하이(中南海)를 포함해, 20여 개 성시(省市)로까지 퍼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중국을 왕래하던 사람들을 통해서, 전염병은 아주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다. 사실, 당시 중공과 독립적인 북미지역의 중화권 방송국 – 신당인 방송국은 2003년 2월부터 사스와 관련된 보도를 하면서 세계에 경고했지만, 애석하게도 대륙의 언론 봉쇄로 인해, 인민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직결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이와 반대로, 4월 2일, 중국 정부측 언론은 “이미 비전염성 페렴 전염병의 효과적 치료책이 마련되었다”라고 보도했다. 다음 날 위생부 부장 장원캉은 외신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장담하는데, 중국에서 업무, 생활, 여행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때 중국 전역은 이미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고, 각 대도시에서는 한약(中藥)인 판람뿌리침제(板藍根浸劑), 녹두, 흰색 식초, 소금 등을 사재기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많은 약품의 가격이 일제히 상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나오기 시작했다. 이때 어떤 사람은 <卜算子(부쏸쯔)>라는 노래를 지어 이 기이한 현상을 조롱했다. “비바람이 가고 봄이 왔는데, 사스도 같이 왔구나, 이미 봄빛이 이렇게 눈부신데, 두꺼운 마스크를 쓰고 다니네. 그러고도 불안한지, 미친 듯이 약을 먹으며, 약이 다 팔리자, 악덕 상인들이 웃기 시작하네.” 위기가 도래했을 때는, 인민이 정부 발표를 얼마나 신뢰하는 지가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비록 장쩌민 측근이 이미 사스 치료책을 마련했다고 말했지만, 베이징의 수많은 노동자, 학생들은 고향으로 되돌아갔고, 또한 주중(駐中) 외국계 기업인들도 모두 베이징을 떠났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베이징 특파원의 추측을 인용해, 사스 발발 일부터, 연일 계속해서 거의 100만 명이 베이징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동(同) 신문 보도에서는, 최근 베이징 공항, 기차역은 그 곳을 떠나려는 인파로 북적거린다고 말했다. 또한 베이징의 대학교에서는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점점 줄어들었는데, 예를 들어 민주(民族) 대학교에는 이미 2/3의 학생이 교정을 떠나 버렸다. 이런 베이징 도피 현상은 사스의 전국 확산을 더욱 부추겼다. 중국 정부측이 사스의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했다고 다시금 강조할 때, 중궈런민민제팡쥔(中國人民解放軍) 301병원 퇴직 외과 의사인 장옌융(蔣彦永)은 공개 성명을 발표해, 중국 위생부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옌융은 4월 3일까지, 총후근부(總後勤部)에 의해 사스 치료 병원으로 지정된 309병원에는 이미 60명의 감염자가 입원했고, 그 중에서 적어도 6명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 위생부 부장 장원캉이 4월 3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베이징에는 단지 2건의 관련 병례가 있고, 그 중 3명이 사망하였다. 301 병원에 복직한, 당년 71세의 한 외과 의사는 동료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의 이런 망언에 아주 화가 났다고 말했다. 2주 후 위생부 부장 장원캉이 면직되었고, 이로 인해 여론이 한 차례 술렁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