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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그 사람

  • ‘장쩌민 그 사람(江澤民其人)’ 소개
    ‘장쩌민 그 사람(江澤民其人)’ 소개
    진실하고 용기 있는 언론으로 해외 중국인들에게 환영 받고 있는 대기원시보(大紀元時報)가 장쩌민 전 중국 국가 주석에 대한 각종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고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장쩌민 그 사람(江澤民其人)’을 발표했다. 지금까지 장쩌민 ...
  • 서문: 장쩌민은 어떤 인물인가?
    서문: 장쩌민은 어떤 인물인가?
    만약 하늘이 사람의 운명을 정해준다면 역사적으로 일부 사람들이 부끄러운 배경을 가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2003년 3월 12일, ...
  • 장쩌민 그 사람 – 1장
    장쩌민 그 사람 – 1장
    [발단] 당나라 시기 천년 원혼이 후세에 사악하고 괴상한 인물이 되다 당나라 무덕(武德) 9년, 당고조 이연(李淵)은 차남 이세민(李世民)이 18할거세력을 소탕하고 ...
  • 장쩌민 그 사람 – 2장
    장쩌민 그 사람 – 2장
    문필로 중용받고 전기 기술로 매국노가 된 부자(父子) 장쩌민은 노래와 춤으로 유명하다. 그는 피아노, 중국 호금, 기타 등 적어도 ...
  • 장쩌민 그 사람 – 3장
    장쩌민 그 사람 – 3장
    권세에 빌붙은 허풍선, 고위직에 오르다 1. 서양식 별명 ‘클리쿤’ 1956년 초, 장쩌민은 30세 이립(而立)이 되자 모스크바 스탈린 자동차 공장에서 실습을 ...
  • 장쩌민 그 사람 – 4장
    장쩌민 그 사람 – 4장
     상하이 학생운동에서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아첨하여 한 단계 더 오르다 1. 카멜레온 상하이 시장 장쩌민은 상하이와 끊을 수 ...
  • 장쩌민 그 사람 – 5장
    장쩌민 그 사람 – 5장
    ‘세계경제도보’ 봉쇄와 6.4천안문사건 대학살을 통해 베이징 정부에 발탁 1989년은 장쩌민 정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한 해였다. 의심할 ...
  • 장쩌민 그 사람 – 6장
    장쩌민 그 사람 – 6장
    사막폭풍으로 간담이 서늘해지고 위기 속에서 좌파의 길을 고집 장쩌민이 총서기 자리에 올라간 지 일년이 조금 더 되었을 때 ...
  • 장쩌민 그 사람 – 7장
    장쩌민 그 사람 – 7장
    덩샤오핑이 남방시찰로 경제개방 실시하고, 장쩌민은 양씨를 숙청하고 정권을 탈취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정계에서 사라지면서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유력한 조수를 ...
  • 장쩌민 그 사람 – 8장
    장쩌민 그 사람 – 8장
    베이징을 손에 넣고 미사일로 대만을 위협 14차 4중 전회에서 중공은 제 3세대 지도자들에게 권력을 넘기는 작업을 마쳤다고 선포했다. ...
  • 장쩌민 그 사람 – 9장
    장쩌민 그 사람 – 9장
    덩샤오핑이 사망하자 차오스를 사퇴시키고 난폭한 독재 실시 1. 덩샤오핑의 사망 1997년은 중공 고위층으로 놓고 말하면 아주 중요한 일년이었다. 덩샤오핑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최후의 모습을 보인 것은 1993년 12월, 상하이 양푸(楊浦)대교에서와 설 전날 TV에 나온 것이었다. 덩샤오핑의 쇠약한 모습으로 홍콩 증시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중공 내부에서 덩샤오핑과 사이가 밀접했던 사람들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덩샤오핑의 사무실과 연락만 하고 덩샤오핑을 직접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던 장쩌민은 이번에 덩샤오핑의 모습을 보자 목을 조였던 밧줄이 느슨해지는 듯 했으며 이제는 살만한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장쩌민과 쩡칭훙은 어떻게 하면 더 확실하게 정권을 잡을 것인지에 대해 자주 연구했다. 그들은 자기 세력들을 배치해 기반을 독차지하는 것으로는 모자라며 인심을 널리 사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 때부터 몇 년 동안 장쩌민은 각종 부패한 수단으로 사람들을 끌어 들이고 패거리를 묶으면서 고위층 관리들을 매수했다. 장쩌민에게 있어서 ‘부패’는 또 다른 한 가지 용도가 있었는데,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으면 ‘반부패’의 명분으로 제거해 버리는 것이었다. 나중에 장쩌민이 정적을 타격할 때 이 방법은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살아있는 한 장쩌민은 일정한 제약을 받았다. 1996년 12월, 오랫동안 파킨슨병을 앓고 있던 덩샤오핑은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했다. 두 달이 지나도 덩샤오핑이 숨을 거두지 않자 장쩌민은 크게 실망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이 질질 끌면서 죽지 않고 있다가 병세가 호전되기라도 할까 봐 여간 안타깝지 않았다. 덩샤오핑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장쩌민으로 놓고 말하면 매우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1997년 2월 19일 저녁 9시 8분, 덩샤오핑이 끝내 사망했다. 장쩌민 세력들은 즉시 중공 중앙,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국무원, 전국 정치협상회와 군사위원회 명의로 ‘전당, 전군, 전국 각 민족 인민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해 장쩌민 동지를 핵심으로 한 당 중앙은 반드시 덩샤오핑이 개척한 개혁개방을 계속 추진해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덩샤오핑의 영결식에서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 위해 장쩌민은 발언할 때 목소리를 가급적 비통하게 했으며 효과를 증폭시키기 위해 또 눈물까지 몇 방울 흘렸다. 그러나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장쩌민의 진실한 마음이 어떻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그 때 장쩌민이 눈물을 훔치는 사진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되고 있다. 영결식이 끝나고 이틀이 지난 후, 군부와 무장부대는 장쩌민의 추도사를 공부해야 했고 “장쩌민을 핵심으로 한 당 중앙과 절대적으로 일치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아야 했다. 또 2월 25일 인민일보는 사설을 발표했는데 ‘장쩌민을 핵심으로 한 당 중앙’이란 문구가 9곳이나 있었다. 2. 차오스를 배척 당시 장쩌민과 쩡칭훙에 의해 낙마한 양상쿤은 이미 91세 고령이었지만 ‘불행히도’ 아직 살아있었다. 동생 양바이빙은 군사권은 잃었지만 군인들을 다스릴 권한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모두 장쩌민을 불안하게 했지만 어찌 되었건 일은 순서대로 처리해야 했으므로 차오스(喬石)의 목을 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차오스는 1924년 12월 상하이에서 태어나 16세 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상하이 학생운동을 조직한바 있다. 1945년부터 1949년 사이 상하이 퉁지(同濟)대학 지하당 총지부서기, 상하이 지하당 학생위원회 총책임자, 상하이 지하당 신스구(新市區) 위원회 부서기와 상하이 베이구(北一區) 학생위원회 서기직을 맡았다. 그러나 같은 시기 장쩌민은 어디에 붙으면 좋을지 몰라 우유부단하고 있었다. 중공이 정권을 건립한 후, 차오스는 지방에서 일하다가 1982년 중공중앙 해외연락부 부장, 중앙 조직부 부장, 국무원 부총리, 중앙 기율위원회 서기, 중공 중앙 당 간부학교 총장 등의 직무를 맡았다. 또 1993년부터 1998년까지는 제8기 전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 정치국 상무위원직을 맡았다. 중공 내부에는 차오스처럼 학생운동을 이끌다가 공업계통을 책임졌으며 해외연락을 맡았다가 다시 당조직 관리, 정보 관리, 기율 관리를 주관하다 나중에 최고위층에 들어간 사람은 아주 드물다. 장기간 지방 관리로 있었던 장쩌민은 물론 열사의 자녀인 리펑, 심지어 원로인 양상쿤, 보이보 등도 그와 비길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경험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장쩌민은 모두 차오스의 상대가 아니었다. 장쩌민은 베이징에 온 뒤, 차오스가 두 세력의 원로인 덩샤오핑, 천윈이 모두 좋아하는 인물임을 단기간 내에 알게 되었다. 중앙 기관의 사람들도 진정한 능력으로 승직했다고 차오스를 평가했다. 찔리는 데가 있던 장쩌민은 이것은 간접적으로 자신을 질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차오스를 증오했다. 사실 차오스는 1985년에 이미 후치리(胡啓立)와 함께 원로들에게 내부적으로 후계자로 지정되었다. 차오스의 침착하고 착실하며 민감하고 과감한 성격은 원로들의 호평을 받았다. 6.4사건 때, 총서기 자오쯔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덩샤오핑은 차오스를 그 대신 발탁하려고 했던 바 있다. 장쩌민은 자신의 위치가 차오스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차오스 배후에는 또 법률 계통과 인대위원회의 펑전(彭眞), 완리가 있었다. 장쩌민을 더 불안하게 한 것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차오스를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차오스는 개혁파와 보수파 원로들의 마음에 동시에 들어 13차 당대표대회 때 후계자로 내정되었다. 또 중공 14차 대표대회에서 차오스는 전체에서 한 표 모자라는 316표로 정치국위원으로 당선되었는데, 그 한 표는 바로 질투심이 강한 장쩌민의 표였다. 베이징에는 장쩌민이 내려가고 차오스가 올라오기를 바라는 민심을 보여주는 ‘강낙석출(江落石出)’이라는 말이 떠돌아 장쩌민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양씨 형제들이 낙마하기 전, 장쩌민은 항상 불안해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그가 중공 최고 보좌에 앉은 것은 덩샤오핑이 발탁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원로들이 서로 타협한 결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덩샤오핑은 망설이던 끝에 동의는 했지만 나중에 여러번 그를 잘라버리려 했고, 진정으로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리셴녠도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아첨 때문이라는 것을 장쩌민 역시 알고 있었다. 장쩌민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1989년 6월 21일에 찍은 사진을 보았다. 거기에는 제13기 4중 전회 때 승직된 6명 상무위원 장쩌민, 리펑, 차오스, 쑹핑(宋平), 리루이환, 야오이린(姚依林)이 있었고 당시 군사위부주석 양상쿤이 가운데 서있었다. 덩샤오핑의 생각은 뻔했다. 양상쿤이 덩샤오핑을 대신해 대권을 쥐게 될 것이고 장쩌민은 오리구이 요리 접시에 있는 당근처럼 있어도 없어도 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양씨 형제가 제거되었고 덩샤오핑도 세상을 떠났기에 장쩌민은 담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는 덩샤오핑이 죽은 뒤 자신이 가장 높은 자리에 있기때문에 중공의 ‘핵심’으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오스는 장쩌민의 생각을 알아주지 않고 잘못을 보면 여전히 사정없이 지적하고 비평했다. 이는 장쩌민으로 하여금 항상 목에 뼈가 걸린 것처럼 불편한 느낌이 들게 했다. ...
  • 장쩌민 그 사람 – 10장
    장쩌민 그 사람 – 10장
    부패로 군을 다스리니 군부가 호화방탕한 생활로 무너지다 장쩌민은 자신이 군부에서 위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노장령들은 모두 전쟁터에서 싸운 경험을 갖고 있고 군부 인맥을 손에 틀어쥐고 있었다. 이는 또한 장쩌민에게 가장 부족한 점이었다. 마오쩌둥, 덩샤오핑은 대군을 통솔한 경력이 있기에 군인들이 기꺼이 복종했지만 장쩌민만은 정치적인 배경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에 대해 아무런 경험도 없었으며 심지어 총 한번 만져 보지 못했다. 정상적인 현대사회 제도 하에서 집권당은 민주 선거를 통해서야 비로소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 사회상의 서로 다른 목소리들은 집권당을 감독하기 위한 것이며 국가를 잘 운영하지 못하면 최고 지도자는 탄핵 당할 수도 있다. 그러한 국가들에서 군대는 어느 한 집권당에도 속하지 않고 오직 국가에 속하며 국민의 이익과 국토를 수호하는 것을 천직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당파 사이의 투쟁과 당 내부의 투쟁은 군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어느 당파가 당선되든 군대는 반드시 국가에 충성해야 하며, 헌법 규정에 따라 국가 최고 권력기구의 지시에 복종한다. 이는 서방 민주국가들의 경우 당파 싸움이 극심하지만 국가 정세가 여전히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이다. 그러나 중국은 다르다. 중국에는 사실 당에 속하는 군대가 있을 뿐, 국가에는 군대가 없으며 군대는 한 당의 사욕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중공은 줄곧 “당 지부를 연대 위에 설립해야 한다”고 요구했으며 마오쩌둥도 일찍이 “당이 총을 지휘한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때문에 당내 정치투쟁의 승부는 누가 먼저 군사권을 장악하는 가에 달렸다. 군사권을 완전히 손에 장악하지 못하면 사실 미래를 보장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장쩌민은 언제나 마음이 든든하지 못했다. 그러나 장쩌민의 방법은 따로 있었다. 1. 관직으로 인심을 매수 군부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진급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가를 위해 피 흘려 싸운 영광스러운 공로를 대표하기 때문이었다. 마오쩌둥 시대에 원수(元帥)로 봉해진 장군들은 모두 생사를 넘나들며 세운 공훈으로 진급했으므로 매우 소중히 여김과 동시에 긍지를 느꼈다. 평화 시대의 군인들은 실력이나 우월한 조건이 없다면 장군이 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장쩌민이 올라온 뒤에는 아첨이 군부에서 진급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되었다. 장완녠(張萬年), 궈보슝(郭伯雄), 유시구이(由喜貴)의 진급이 바로 그러했다. 특히 47군 군장 궈보슝은 가장 전형적이 사례로, 장쩌민이 낮잠을 잘 때 보초를 선 것 때문에 군사위원회 부주석의 자리에 올랐다. 군부에서 군인 계급 제도를 회복한 1988년 이래, 중앙군사위에서는 총 96명 고위급 장교들에게 상장(上將) 계급, 경찰관 직위를 수여했다. 1988년 9월 14일, 덩샤오핑은 17명 고위급 장교에게 상장 계급을 수여했을 뿐이었지만 장쩌민은 1993년부터 2004년까지 상장 계급, 경찰관 직위만 무려 79개나 수여했으며 더욱이 소장, 중장 계급은 장난치듯이 마구 수여했다. 그 중 1993년 6월 7일, 장쩌민은 6명 고위급 군관들에게 상장 계급을 수여했고 이듬해 6월 8일에는 한 번에 19명을 상장으로 만들었다. 1996년 1월 23일, 장쩌민은 갑자기 흥이 났던지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오늘은 상장 계급을 몇 명에게 수여하면서 즐기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기회가 없어 아첨하지 못했던 주위 사람들이 얼른 좋다고 맞장구를 쳐 그 즉시 4명이 진급하게 되었는데 제2 포병부대 정치위원회 수이융쥐(隋永擧)가 바로 그날 중장에서 상장으로 되었다. 1997년 10월 24일, 장쩌민은 단 하루에 152명 장군을 진급시켰다. 고위급 간부 자제 그리고 그들과 관련 있는 사람들은 장쩌민이 끌어안는 주요 대상으로 되었다. 예를 들면 허룽(賀龍)의 아들 허펑페이(賀鵬飛)는 문혁 4인방이 제거된 후에야 군에 입대해 군인이 된지 십 여 년에 불과했으나 단번에 해군 중장 부사령으로 진급했다. 1997년까지 장쩌민이 직접 진급시킨 장군은 530명이나 되었다. 1998년 3월 27일, 중앙군사위에서는 10명 고위급 장교와 경찰관들을 상장으로 진급시켰고, 1999년 9월 29일에는 2명을 상장으로 진급시켰으며, 2000년 6월 21일에는 16명 고위급 장교, 경찰관들을 상장으로 진급시켰다. 2002년 6월 2일, 또 7명이 상장으로 진급했는데 군부 노장들은 생방송에서 장쩌민이 한쪽 손으로 증서를 나눠주는 모습을 보며 “장쩌민은 최소한도의 상식도 없고 너무 엄숙하지 못하다”라고 분개했다. 퇴임하기 전야인 2004년 6월 20일, 장쩌민은 또 15명 장교들에게 상장 계급, 경찰직위를 수여했으며 그 중에 그의 측근인 유시구이(由喜貴)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진급한 사람들은 그것을 영예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들도 자신이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인심을 매수하기 위한 장쩌민의 수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진급식에서 매우 엄숙하지 못했으며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과거의 노장들은 모두 능력에 따라 진급했기에 매우 높은 위망이 있었으며 군령을 하달하면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별의별 수단을 가리지 않고 올라간 사람들이 대부분인지라 서로 승인하지 않고 헐뜯으며 명령을 집행할 때도 협력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 방해하거나 질투했다. 이런 인격을 가지고 어떻게 군대를 통솔할 수 있겠는가? 이런 군대는 아무리 현대화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해도 참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 장쩌민 그 사람 – 11장
    장쩌민 그 사람 – 11장
    대홍수에서 용맥(龍脈)을 사수하고 인명을 초개처럼 여겨 1. 작은 홍수 '큰 피해' 1998년, 중국 양쯔강 유역에 보기 드문 큰 홍수가 발생했다. 중공 언론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번 홍수를 ‘백년 만에 발생한 대홍수’라고 보도했지만 수리 전문가들은 이번 홍수가 사실 그리 큰 홍수가 아니라고 말했다. 홍수의 크기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은 하천 수위가 최고치에 도달했을 때의 유량이다. 양쯔강 이창(宜昌) 관측소의 자료에 의하면 홍수가 발생한 기간인 8월 16일 최고 유량은 63,600㎥/초로, 평균 5년에 한 번 기록되는 최대 유량 60,300㎥/초를 조금 초과했을 뿐이며 평균 20년에 한 번 기록되는 최대 유량 72,300㎥/초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홍수는 의외로 큰 피해를 가져왔다. 정부의 내부 통계에 따르면, 약 두 달간의 홍수로 4억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직접적인 경제 손실은 3,000억 위안에 달했다. 중국 내에서는 이번 홍수 피해 원인이 천재(天災)인지 인재(人災)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많은 전문가들은 인위적인 비중이 더 크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장쩌민이 바로 이번 홍수 피해를 가중시킨 주범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2. 용맥(龍脈)을 사수하라 1998년 8월 6일, 양쯔강 상류가 여름철에 들어서 네 번째로 위험수위를 초과하여 후베이성 이창까지 곧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후베이 서기 자즈제(賈志杰)와 성장 장주핑(蔣祝平)은 양쯔강에 설치된 수문을 열어 징(荊)강으로 물을 빼는 방안을 중앙에서 비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정오가 되자 사시(沙市 역주 - 이창보다 양쯔강 아래쪽에 위치해 있음)의 수위가 44.68m에 도달해 1954년 특대형 홍수 때의 최고수위인 44.67m를 초과했고 징강 주변 주민들은 안전지대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16시간 이내에 33만 명 시민과 1만 8천 마리 소가 대이동을 끝냈지만 양쯔강 수문은 열리지 않았다. 국무원이 제정한 양쯔강 홍수방지 계획서에는 “사시의 수위가 44.67m에 도달하면 반드시 수문을 열어 징강으로 물을 빼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징강 주변 주민들은 12일과 16일에도 모든 준비를 마치고 대피소로 이동했으나 수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17일 9시, 사시 수위가 사상 최고 수위인 45.22m에 도달해 1954년의 최고 수위를 0.55m를 초과했다. 그 전날인 8월 16일 22시 30분, 원자바오는 수문을 열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사시에서 현지 기상청과 수리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4시간 전인 18시 20분에 이미 양쯔강 연안에 주둔해 있는 군부에 “군민이 단결하여 양쯔강 제방을 사수(死守)하자”는 명령을 내려 양쯔강 수문을 여는 방안을 거절했다. 사실 장쩌민은 7월 21일에 벌써 양쯔강 제방을 사수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날 밤 12시, 장쩌민은 원자바오 부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양쯔강 연안 각 성에서는 홍수 대비를 잘하고..., 제방을 사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7월 28일, 세 번째 최고 수위가 우한(武漢) 삼진(三鎭)을 위협하고 있을 당시 신화사는 “장쩌민이 이번 일을 주목하고 있다”고 하면서 “원자바오에게 전화로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제방도 살아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8월 14일에도 장쩌민은 후베이성에 내려가 “반드시 목숨 걸고 양쯔강 제방을 지켜야 한다”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양쯔강 수위가 위험수위를 초과해 계속 급격히 상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방을 사수하자’는 구호는 높아만 갔다. 양쯔강 연안 지역에서 여러 차례 징강으로 물을 빼자고 제안했지만 장쩌민은 허락하지 않았다. 사실 선진국들에서는,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사전에 협의를 거친 인근 하천으로 물을 빼는 것은 홍수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이는 사회, 경제, 생태 환경에 파괴가 가장 적으면서 돈이 가장 적게 드는 방법이다. 징강에 물을 빼는 수문은 1952년에 완공되었으며 1854년 특대형 홍수 때 세 번이나 개방돼 관건적인 시각에 양쯔강 수위를 0.96m 낮출 수 있었다. 전문가들은 1998년에 징강 수문을 열었더라면 마찬가지로 사시의 최고 수위 45.22m를 44.26m로 낮출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으며 양쯔강 제방도 그처럼 위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람들은 왜 장쩌민이 전문가들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장쩌민이 당시 중난하이에서 인기 있는 한 점쟁이가 “용맥(龍脈)을 보호해야 한다”고 한 말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쩌민은 징강에 물을 빼기 위해 제방 수문을 열면 스스로 ‘용맥’을 끊어 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랑이 해인 1998년은 마침 장쩌민이 정권을 잡은 뒤 처음 맞는 본명년(本命年 역주 - 중국인들은 자기 띠가 돌아온 해를 본명년이라 하며 고비를 넘겨야 하는 해로 생각한다)이었기에 장쩌민은 더욱 점쟁이의 말을 따르려고 했다. 중공은 ‘무신론’을 주장한다고 하지만 풍수를 믿고 점을 치는 고위층 당간부들은 부지기수이다. 마오쩌둥이 금위군(禁衛軍)을 ‘8341’로 명명한 것이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마오쩌둥이 베이징으로 들어가기 전, 한 도인이 그에게 ‘8341’ 네 숫자가 길하다고 알려주었다. 마오쩌둥은 무엇 때문인지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여전히 망설임 없이 금위군 이름을 그 숫자로 결정했다. 사람들은 마오쩌둥이 죽은 뒤에야 ‘8341’이란 숫자가 그가 83세까지 살 수 있고, 1935년 준의회의 때부터 1976년까지 최고 권력을 41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공 고위층 간부들은 장쩌민도 풍수를 믿고 음양과 운명을 믿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6.4천안문사건을 탄압한 후, 장쩌민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주 풍수를 보았고 베이징에서 세 가지 일을 했다. 첫째, 바이양뎬(白洋淀, 베이징 남부에 있는 호수)에 물을 추가로 부었다. 베이징은 6대 제왕의 수도로 동쪽, 서쪽, 북쪽 삼면이 산에 둘러 싸여있고 남쪽에 물이 있어 풍수로 보면 그야말로 보배 땅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중공 통치가 조성한 생태위기로 베이징의 남쪽에 위치한 바이양뎬이 말라버릴 위기에 처했다. 장쩌민은 ‘허베이 명주’로 불리는 바이양뎬을 되살린다며 물을 부었는데 사실은 베이징의 좋은 풍수를 유지해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
  • 장쩌민 그 사람 – 12장
    장쩌민 그 사람 – 12장
    파룬궁 수련생들의 평화적인 청원과 먹구름으로 뒤덮인 중국 대지 1999년은 정말 평범하지 않은 한 해였다. 전 세계의 화약고나 다름 없었던 발칸반도에서는 세르비아 군이 알바니아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하는 종족간 충돌이 일어나 150만을 헤아리는 알바니아인들이 고향을 떠났다. 코소보 75개 도시와 마을에서 대규모 난민학살이 자행됐으며 당시 집단 처형된 알바니아인은 5천 명이상에 달한다고 밝혀졌다. 당시 세르비아 대통령이었던 밀로셰비치의 만행은 전 세계를 들끓게 만들었지만 중국에서만은 언론 통제로 이 사건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며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유엔은 군사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 등 나토 회원국은 인도주의의 입장에서 출발, 3월 24일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공습을 개시했다. 1. 분노를 삭이는 외교 나토군이 공습을 시작한 시기는 중국 전인대가 막을 내린지 두 주일 지난 때였다. 주룽지 총리는 전인대 기자회견에서 미국 방문과 관련하여 “미국이 화가 났다면 나는 이번에 그 화를 풀어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때 미국과 WTO 가맹 문제를 가지고 담판한다면 중국은 많은 방면에서 엄청난 양보를 해야 했다. 이렇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슬슬 머리를 들기 시작한 국내의 민족 감정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렇다고 미국에 가지 않는다면 중국은 또 좋은 기회를 놓칠 것 같았다. 그리하여 정치국에서는 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집중 토론했다. 리펑과 첸치천(錢其琛)은 ‘미국의 화를 풀어주는 것’은 도움을 청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동시에 나약함을 나타내는 것이라며 주룽지의 미국방문을 반대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달랐다. 그는 회담이 성공하면 공로가 자연히 총서기인 자신에게 돌아와 집권 기간에 그럴듯한 성과가 있게 될 것이나, 설사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자신보다 위망있는 주룽지의 인기를 한풀 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장쩌민과 막료들 사이에 오간 이야기를 들어보면 장쩌민은 주룽지가 실패하고 돌아오길 더 원했다. 자신이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경제 국면을 수습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장쩌민은 절대 주룽지를 등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하이에서 부터 장쩌민은 줄곧 주룽지의 인기를 질투했다. 매번 기자 회견이나 회의에서 주룽지는 언제나 성의 있고 감동적인 발언을 했으며 바르고 인정미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이는 진실하지 않은 장쩌민과 더욱 비교가 되었다. 홍콩과 대만의 아름다운 여기자들마저도 주룽지에게 존경하는 눈길을 보냈다. 주룽지의 태도는 명확했다. 그는 WTO에 가입하면 중국의 농업, 전신(電信)과 금융업이 충격을 받을 것이고 저효율적인 국영기업은 공평한 경쟁 속에서 대량 부도사태를 맞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너무 많은 양보는 피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주룽지에게 “중미 간 농산물협정 외, 전신, 금융 분야에서 모두 미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번에 미국에 가면 즉시 농산물협정에 조인하고 다른 것도 점차 대답할 것이라고 클린턴과 ‘구두협정’을 멋지게 맺어보세요”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주룽지의 ‘분노 삭이기 외교’는 큰 좌절을 당했다. 중국측은 장쩌민의 요구대로 많은 양보를 했지만 미국은 중국을 시장경제체제라고 승인하지 않았으며 또 기타 부가조건을 많이 제출했다. 결국 주룽지는 WTO 협정을 체결하지 못한 채 귀국하고 말았다. 한편 중공 원로들은 주룽지의 일방적인 양보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당시 은퇴하고 있었던 차오스(喬石)는, 이번 일이 장쩌민의 꿍꿍이라는 것을 알아 채고는 매우 분개하면서 “국가 이익이 언제 어디서나 제1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완리, 쑹핑(宋平) 등 원로들은 이를 새 ‘21개조약(역주 -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뒤, 중국에 있던 독일의 권익을 계승할 것을 요구하는 21개 조항을 위안스카이 정부와 체결했다)’이라고 장쩌민을 질책했다. 장쩌민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주룽지가 자신의 지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교활하게도 모든 책임을 주룽지에게 가볍게 떠밀어 버렸다. 4월 21일, 주룽지가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자 장쩌민은 그를 피해 중앙사무실 사람들을 거느리고 후베이성으로 회의하러 갔으며 국무원 부총리 리란칭(李嵐淸)도 랴오닝성으로 가도록 시켰다. 그리하여 주룽지가 비행기에서 내리자 맞아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중에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장쩌민은 마치 전과 다른 사람처럼 주룽지에게 왜 정치국의 결정을 어겼냐고 따졌고, 일부러 주룽지와 함께 출국했던 우의(吳儀)를 “끝까지 원칙을 지켰다”며 칭찬해 주룽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주룽지의 체면이 형편없이 된 것을 보자 장쩌민은 속이 시원했다. 2. 중공은 파룬궁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정권을 잡은 후 ‘9자’만 만나면 반드시 일이 생겼다. 1949년에 정권을 잡았고, 1959년에는 티베트 ‘반란’을 진압했으며, 인도와 전쟁이 일어났으며, 1969년에는 러시아와 전쟁했고, 1979년에는 베트남과 전쟁이 있었으며, 1989년에는 티베트의 ‘반란’을 진압한 뒤 잇따라 6.4 민주화운동을 탄압했고, 1999년에는 파룬궁(法輪功) 박해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장쩌민과 중공 고위층이 탄압 전에 파룬궁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 그렇지 않다. 또 탄압과 박해가 1999년에 시작되었고 그 전에는 중공이 파룬궁과 평화적으로 지냈다고 여기고 있는데 이것도 사실과 어긋난다. 사실 중공 고위층은 일찍부터 파룬궁을 알고 있었으며 그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 좋지 않은 심보를 품은 사람들 때문에 줄곧 많은 풍파가 있었다. 리훙쯔(李洪志) 선생은 1992년 5월에 법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베이징 쯔주위안(紫竹院) 공원에도 매우 큰 연공장이 있었다. 쯔주위안 근처에는 퇴직 간부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모두 군부나 국무원, 중앙기관에서 퇴직한 고위층 간부들이었다. 그들은 장쩌민, 주룽지, 뤄간, 리란칭 등의 선배였으며 중공이 말하는 진정한 ‘선배 무산계급 혁명가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심지어 2만 5천리 장정에 참가한 이들도 있었기에 15차 당대표대회 상무위원들은 모두 그들의 부하였거나 훨씬 후배들이었다. 국무원에 주(周)씨 성을 가진 한 퇴직간부는 전에 주룽지의 상급이었으며 주룽지를 보면 샤오주(小朱, 역주 - 중국에서는 자기보다 나이어린 성년을 친절하게 부를 때, 성씨 앞에 샤오[小]자를 붙임)라고 불렀다. 이런 퇴직 간부들은 한가했기에 기공을 연마하는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그들은 서로 자주 만났으므로 소문이 빨리 퍼졌으며 연공을 하게 된 후, 현재 고위층에 있는 후배들에게 파룬궁을 소개했다. ...
    2014년 09월 4일 편집부
  • 장쩌민 그 사람 – 13장
    장쩌민 그 사람 – 13장
    주위 권고를 뿌리치고 파룬궁 박해에 팔을 걷고 나서다 장쩌민이 정권을 잡은 15년 동안(수렴청정 2년 포함), 중국에는 홍콩, 마카오 반환, WTO 가맹, 파룬궁 탄압 등 역사에 기록될 만한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장쩌민은 다른 사건과는 별로 관련이 없었지만 파룬궁 탄압에서만은 특별한 관련이 있었다. 파룬궁 탄압은 장쩌민 정치생애의 전환점이었다. 6.4사건 후 베이징 정부에 발탁되어 험악한 정치투쟁 중에서 점차 권력을 공고히 한 장쩌민이었지만 파룬궁 탄압으로 예상치 못한 큰 굴레를 짊어지게 되었다. 장쩌민은 다른 사람들의 권고를 듣지 않고 탄압 기구를 가동한 시각부터, 자의적이 아니게 모든 국가사무를 파룬궁 탄압과 연결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고 자신의 운명도 파룬궁 탄압과 함께 묶어 꼼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기독교 신자들이, 속세의 인간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의 힘으로 강대한 로마 제국의 300여년 박해에도 넘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파룬궁도 평화적이고 이성적인 항쟁을 지속해 과오를 승인하지 않는 장쩌민을 진퇴양난에 빠뜨렸다. 때문에 1999년 이후 장쩌민의 사상과 행위를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파룬궁 박해부터 알아야 한다. 1. 죄를 뒤집어 씌우다 4.25청원이 있은 후, 중국 전역에서는 파룬궁에 대한 조사가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언론에서는 선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공안은 정보를 수집했고, 당 조직에서는 사상 교육을 준비하는 등 탄압을 위한 작업들이 철저히 진행되었다. 장쩌민은 이 일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고 추진시켰다. 파룬궁 창시자 리훙쯔 선생이 1998년 미국으로 이민을 간 관계로, 장쩌민은 심지어 미국과 5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감소시키는 것을 대가로 리 선생을 소환하려고까지 했다. 이에 대해 리 선생은 1999년 6월 2일, ‘나의 약간의 소감’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선(善)하라고 가르치는 동시에 무상으로 사람들을 도와 질병을 제거하고 보다 높은 사상경지에 도달하게 했을 뿐이며 금전과 물질적인 보수를 전혀 받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선해지게 하고 도덕이 고상해지게 하여 사회와 국민에게 좋은 역할을 했는데, 설마 이 때문에 나를 소환하려 하는 것인가?... 내가 알기로는 소환하는 사람은 모두 전범(戰犯)이거나 인민의 공적(公敵)이며 더 있다면 형사 범죄자이다. 만약 이렇다고 한다면 나는 내가 어느 한 조항에 부합되는지를 모르겠다.” 리 선생은 또 “사실 나는 거듭 사람들에게 진(眞), 선(善), 인(忍) 원칙을 기준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으므로 나 자신도 당연히 본보기를 보여야 했다. 나 그리고 파룬궁 제자들이 이유 없이 비난과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지만 모두 대선(大善), 대인(大忍)의 흉금으로 대했으며 정부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우리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소리 없이 참고 있었다... 사실 나는 일부 사람들이 왜 기어코 파룬궁을 반대하는지 잘 알고 있다. 바로 언론에서 말한 것처럼 파룬궁을 배우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1억이란 숫자는 확실히 적지 않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많은 것도 문제인가? 좋은 사람이 많을수록, 나쁜 사람이 적을수록 더 좋은 것이 아닌가?”라고 밝혔다. 장쩌민은 리 선생이 권고하는 글을 보았지만, 비열하고 소인배적인 시각으로 다른 사람을 가늠하는데 길들여진 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또 자신이 전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있는데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매수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99년 6월 7일, 장쩌민은 파룬궁 문제를 단기간에 해결하기 위해 중앙 정치국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장쩌민은 파룬궁이 생기고 급속히 전파되고 있는 것은 “국내와 해외 적대세력이 우리 당과 군중을 쟁탈하고 지반을 쟁탈하는 정치투쟁”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내린 결론에 그 어떤 증거와 논증 과정을 제시한 적이 없는 장쩌민은 이번에도 평화적이고 이성적인 파룬궁이 억만 군중의 몸과 마음을 개변시킨 사실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모든 공산당원, 공청단원, 재직• 퇴직 공무원들에게 파룬궁 수련을 금지시키고 ‘사상적으로 분명히 선을 그을 것’을 요구했다. 장쩌민은 4월 25일 저녁, 그가 쓴 편지에 대한 정치국 회원들의 반응으로부터 대다수 정치위원, 심지어 상무위원들마저 파룬궁 탄압을 반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룽지가 있는 부서에서도 파룬궁을 적으로 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자신의 명령을 집행해 주는 부서를 따로 만들기로 결정했으며 정부, 법률기관, 경제부문의 구속을 받지 않게 하려고 했다. 장쩌민은 여기까지 생각하고 리란칭(李嵐淸)을 찾았다. 당시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중 장쩌민 본인을 제외한 기타 6명은 파룬궁 탄압을 반대했다. 중공 고위층에서 악명 높은 보이보(薄一波)는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모두 탄압을 반대한다는 소식을 듣자 일부러 나서서 장쩌민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태도를 표명했다. 장쩌민은 사이 좋은 리란칭을 설득하려고 작정했다. 장쩌민은 당성(黨性)과 망당망국(亡黨亡國)론으로 리란칭에게 압력을 가해 끝내 그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되어 장쩌민은 파룬궁 문제를 처리하는 전문팀을 구성하고 리란칭을 팀장으로 임명했으며 총과 붓으로 인민을 통제해야 한다는 중공 이론에 근거해 뤄간과 딩관건(丁關根)을 부팀장으로 임명했다. 장쩌민은 또 공안부 부부장 류징(劉京) 등을 합류시켜 함께 파룬궁 문제를 해결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연구하고 국가기관과 지방 정부에 긴밀한 협조를 요구했다. 이 기구는 6월 10일에 설립되었기에 ‘610사무실’이라고 불렀다. ‘610사무실’은 ‘중앙문혁소조’와 마찬가지로 법률적인 근거 없이 세워진 100% 불법조직이었다. 610사무실이 세워진 목적은 법률의 단속을 피하고 경제와 인사 심사를 피해 파룬궁을 탄압하려는데 있었다. 이 불법조직의 총 두목은 사실 장쩌민으로, 중요한 밀령은 그가 하달했다. 장쩌민은 증거가 남을까 봐 두려워 밀령을 하달할 때 도장을 찍지 않았지만 610사무실의 사람들이 명령을 집행하는 데 아무런 지장도 되지 않았다. 독재체제 하에서 장쩌민은 부당한 수단으로 법률의 구속을 받지 않는, 모든 국가 기관을 능가하는 ‘610사무실’을 조직했으며 법을 집행하는 사법기관을 협박해 법을 어기게 함으로써 20여 년 동안 지속해 오던 법제화 발전을 철저히 중단해 버렸다. 이는 중국 사회에 짐작하기 어려운 악영향을 조성했다. 장쩌민은 길길이 날뛰면서 큰 소리를 쳤으나 구체적인 대책은 내놓지 못했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또 쩡칭훙을 찾아 암암리에 계책을 의논하고 중앙사무실과 국무원사무실을 통해 6월 14일에 ‘탄원 파룬궁 수련생들을 접견한 중앙, 국무원사무실 탄원사무실 책임자들의 견해’를 발표했는데 그 중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었다. ...
  • 장쩌민 그 사람 – 14장
    장쩌민 그 사람 – 14장
    뒷거래로 국토를 판 민족의 반역자  '천고의 죄인'   지금은 러시아 땅이 되어버린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네르친스크, 묘가(廟街, 역주 - ...
  • 장쩌민 그 사람 – 15장
    장쩌민 그 사람 – 15장
    '반부패 운동' 통해 정적 제거하고, 천수이볜 총통 당선에 힘 써 장쩌민의 가장 큰 ‘공로’는 공산당 통치 역사상 처음으로 ‘부패한 관리를 등용해 ...
  • 장쩌민 그 사람 – 16장
    장쩌민 그 사람 – 16장
    극악무도하게 살인하고 황당한 거짓말을 하다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파룬궁 탄압에 걸었던 장쩌민은 이미 돌아올 ...
  • 장쩌민 그 사람 – 17장
    장쩌민 그 사람 – 17장
    ‘3개대표론’을 자화자찬하고 음흉하게 ‘분신자살사건’을 조작 1. ‘3개대표론’ 2000년 3월 초, ‘인민일보’의 사설에 처음 ‘3개대표론’이라는 단어가 출현했는데 이는 장쩌민이 ...
  • 장쩌민 그 사람 – 18장
    장쩌민 그 사람 – 18장
    호색한이라 처첩이 한 무리고, 소인배가 출세하니 친인척이 날뛰네 2002년, 후난성 사오둥(邵東)에서 발견된 ‘국모 쑹쭈잉(國母宋祖英)’이라는 기이한 책은 장쩌민을 노발대발하게 ...
  • 장쩌민 그 사람 – 19장
    장쩌민 그 사람 – 19장
    운 없이 피고되고, 피바람을 일으켜 군권(軍權)을 잡다   1. TV 방송 몇 년 동안, 장쩌민은 거짓된 정보 유출, ...
  • 장쩌민 그 사람 – 20장
    장쩌민 그 사람 – 20장
    사스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군권 유지를 위해 애써 허덕이다 1. 사스 전염병 2003년, 무시무시한 비전형성 폐염(사스, SARS) 전염병이 전 세계를 위협했다. 사스는 30여 개 국가에서 만연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8천여 명이 감염되어, 8백여 명이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300억 달러의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다. 감염자 중 중국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았으며, 홍콩과 중국 대륙의 사스 병례(病例)는 전 세계 총 수의 80%를 차지했다. 그러나 다른 국가들은 중공이 정확한 통계를 숨겼다고 의심하며,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전염병 확산을 숨겨 연임을 도모하다 사스는 2002년 11월 중국 남방에서 처음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막 16대 회의가 소집되었기 때문에, 장쩌민은 자신의 중앙 군사위원회 직위 유임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중국 언론은 16대에서 양호한 정치 분위기를 조성하라는 요구를 받았고, 종종 장쩌민의 구호인 “안정이 모든 것을 잠재울 수 있다”를 계속해서 기재했다. 중공의 중앙 선전부 내부 간행물에서는 분명하게,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SARS), 즉 사스가 언급 되었지만, 중국 언론은 중공의 명령으로 계속해서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전 세계 중국어 권역에서는 “SARS”를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이라고 했지만, 중공만이 유일하게 “비전(非典: 비전형성 폐염)”이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인민들의 공포 심리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인민의 공포심을 덜어 주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조치가 필요한 것이지, 단지 명칭을 바꿔 사람들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긍정적 작용도 할 수가 없다. 인민은 진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근거 없는 소문에 의해 더욱 쉽게 두려움에 떨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과 타인을 모두 속인 방법은 확실히 장쩌민의 “안정이 모든 것을 잠재울 수 있다”는 방침을 따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광둥(廣東)에서 첫 번째 병례가 발견된 후, 장쩌민의 측근인 리장춘(李長春: 정치국상무위원, 광둥성위원회 서기)을 필두로 한 선전부는 갖가지 방법으로 사실을 숨기려 했고, 전염병은 점차 다른 성(省)까지 퍼지게 되었다. 리장춘이 광둥을 떠날 때쯤, 광둥 관료 내부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생기기 시작했다. 광둥 지역 신문에서 사스 전염병에 대한 기사를 다루었을 때, 장쩌민은 저장(浙江)성위원회 서기인 장더장(張德江)을 급히 광둥성위원회 서기로 임명해, 그가 직접 광둥성위원회 선전부장 중양성(鐘陽勝)을 감독하게 했고, 그에게 수차례 언론 통제를 명령했다. 2월 말에서 3월 초, 광둥성위원회 선전부는 아예 각 신문사에 인사 개편을 단행했다. 한 차례 인사 개편이 있고 난 후, 광둥 언론 매체는 중앙 선전부 장쩌민 측근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때부터 전염병 관련 보도는 언론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전염병 은폐는 전형적인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방법이다. 비록 언론 보도는 통제할 수 있었지만, 바이러스는 막을 방법이 없었고, 그 결과 광둥에서는 사스가 점점 퍼지기 시작했다. 2003년 2월 전 세계에 사스가 퍼진 후, 세계 각 지역 언론은 매일같이 사스 사망 병례 및 현황에 대해 보도했다. 그러나 사스의 발원지인 중국에서는, 도리어 특히 정부측 언론 매체는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했다. 2003년 3월 초, 전인대와 정협의 베이징 회의 소집 기간 중에, 광둥의 한 의사의 병세가 매우 좋지 않아서, 홍콩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는데, 그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충격적인 보도가 전해졌다. 홍콩 언론은 그제서야 사스가 이미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조치를 취하기에는 이미 시간이 너무 늦었다. 그때부터 홍콩에서도 사스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홍콩은 국제 사회에서 경제, 교통의 중심지이고, 사람과 화물의 집산지이며, 매일 얼마나 많은 비행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발병한 사람은 쉽게 추적할 수 있지만, 병원균을 추적 조사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잠복기에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또한 파악이 불가능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중공에 즉각 국내의 사스 발병 상황과 확산 범위 등을 통보하라고 요구했다. 3월 26일, 장쩌민의 주치의이자 위생부 부장 장원캉(張文康)이 세계보건기구의 압력으로 베이징에서 처음으로 전염병 상황에 대한 보고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광둥에서 792명이 감염되었고, 31명이 사망했다는 사실만 보고했을 뿐, 다른 지역의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후진타오(胡錦濤)가 지방 정부와 관원들에게 매일 전염병 현황에 대한 보고를 하라고 지시했지만, 축소, 거짓 등 왜곡 보도가 많았다. 이에 장쩌민의 측근인 장원캉이 후진타오에게 공격적인 발언을 했는데, 그는 중국 법규상 매일 전염병을 보고하라는 규정은 없다고 말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중공이 이렇게 고의적으로 전염병 확산 사태를 간과했기 때문에,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고, 결국에는 중국 남방의 광둥성에서부터, 중국 수도 베이징과 중난하이(中南海)를 포함해, 20여 개 성시(省市)로까지 퍼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중국을 왕래하던 사람들을 통해서, 전염병은 아주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다. 사실, 당시 중공과 독립적인 북미지역의 중화권 방송국 – 신당인 방송국은 2003년 2월부터 사스와 관련된 보도를 하면서 세계에 경고했지만, 애석하게도 대륙의 언론 봉쇄로 인해, 인민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직결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이와 반대로, 4월 2일, 중국 정부측 언론은 “이미 비전염성 페렴 전염병의 효과적 치료책이 마련되었다”라고 보도했다. 다음 날 위생부 부장 장원캉은 외신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장담하는데, 중국에서 업무, 생활, 여행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때 중국 전역은 이미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고, 각 대도시에서는 한약(中藥)인 판람뿌리침제(板藍根浸劑), 녹두, 흰색 식초, 소금 등을 사재기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많은 약품의 가격이 일제히 상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나오기 시작했다. 이때 어떤 사람은 <卜算子(부쏸쯔)>라는 노래를 지어 이 기이한 현상을 조롱했다. “비바람이 가고 봄이 왔는데, 사스도 같이 왔구나, 이미 봄빛이 이렇게 눈부신데, 두꺼운 마스크를 쓰고 다니네. 그러고도 불안한지, 미친 듯이 약을 먹으며, 약이 다 팔리자, 악덕 상인들이 웃기 시작하네.” 위기가 도래했을 때는, 인민이 정부 발표를 얼마나 신뢰하는 지가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비록 장쩌민 측근이 이미 사스 치료책을 마련했다고 말했지만, 베이징의 수많은 노동자, 학생들은 고향으로 되돌아갔고, 또한 주중(駐中) 외국계 기업인들도 모두 베이징을 떠났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베이징 특파원의 추측을 인용해, 사스 발발 일부터, 연일 계속해서 거의 100만 명이 베이징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동(同) 신문 보도에서는, 최근 베이징 공항, 기차역은 그 곳을 떠나려는 인파로 북적거린다고 말했다. 또한 베이징의 대학교에서는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점점 줄어들었는데, 예를 들어 민주(民族) 대학교에는 이미 2/3의 학생이 교정을 떠나 버렸다. 이런 베이징 도피 현상은 사스의 전국 확산을 더욱 부추겼다. 중국 정부측이 사스의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했다고 다시금 강조할 때, 중궈런민민제팡쥔(中國人民解放軍) 301병원 퇴직 외과 의사인 장옌융(蔣彦永)은 공개 성명을 발표해, 중국 위생부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옌융은 4월 3일까지, 총후근부(總後勤部)에 의해 사스 치료 병원으로 지정된 309병원에는 이미 60명의 감염자가 입원했고, 그 중에서 적어도 6명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 위생부 부장 장원캉이 4월 3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베이징에는 단지 2건의 관련 병례가 있고, 그 중 3명이 사망하였다. 301 병원에 복직한, 당년 71세의 한 외과 의사는 동료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의 이런 망언에 아주 화가 났다고 말했다. 2주 후 위생부 부장 장원캉이 면직되었고, 이로 인해 여론이 한 차례 술렁거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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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지에 높게 걸린 음양보경(陰陽寶鏡) 장쩌민 퇴임 후 그의 도적패를 숙청하다 (하) 5. 교육 위기: 백년대계의 파괴 교육은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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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간지옥에서 끝이 난 장쩌민 운명 2005 을유년 초봄, 한국 경기도 의왕시 청계산에 위치한 청계사와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에 위치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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