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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미국 중간선거가 끝났다. 공화당은 상원의 통제권을 지켜냈고, 민주당은 하원을 장악했다. 따라서 앞으로 2년 동안 미국의 정치 상황은 ‘벽 하나, 원(院)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벽’은 국경 장벽을 건설하거나 중남미 이민자 행렬을 저지하려는 트럼프의 정책을 뜻하고, ‘원’은 이러한 백악관의 정책을 저지하려는 하원을 뜻한다. 이런 정치 구도는 나아가 2020년 대선 판세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의 경우, 이번 하원 탈환은 경선 우세 때문이 아닌, 주로 내부 극단적 진보파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여기에서 극단적 진보파란 바로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밀레니엄 세대와 Z세대이다. 민주당 분열시키는 '블루 웨이브'와 '워크어웨이' 올 3월부터 뉴욕타임스는 ‘블루 웨이브에 대해서(About That Blue Wave)’라는 기사를 통해, 블루 웨이브(Blue Wave·민주당 바람)가 미국 전역을 휩쓸고 있다고 전했다. CNN 등이 줄줄이 그 뒤를 이어서 보도했다. 이런 언론들만 보면, 블루 웨이브의 기세가 매우 맹렬해 공화당을 집어삼킬 것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류 언론들이 보도하고 싶지 않은 혁명이 현재 소셜네트워크상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바로 ‘#WalkAway’라는 해시태그를 단 탈민주당 운동이다. 올해 5월 6일, 잘 알려지지 않은 한 헤어 스타일리스트가 범상치 않은 ‘#Walkaway(탈민주당)’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는 뉴욕 출신의 동성애자인 브랜든 스트라카(Brandon Straka)로, 이 날 그는 선언문을 작성하고 동영상을 제작해 페이스북, 유튜브, 트위터 같은 소셜네트워크에 공개했다. 스트라카의 동영상은 진보주의자(신자유주의자)면서 민주당원인 그가 어떻게 민주당과 좌파에 실망했는지, 왜 민주당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가 만든 #Walkaway 홈페이지에서 민주당 이탈에 관한 이야기를 많은 사람과 공유하기를 원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보면, 그들에게는 민주당과 좌파의 소위 ‘신자유주의’에 매우 실망했다는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민주당은 비(非)시민권자들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많은 주(州)에서 신분증 없이도 투표할 수 있도록 선동했다. 흑인 유권자들의 ‘워크어웨이 캠페인’ 5월 이후, 소셜네트워크에 #Walkaway 해시태그가 달린 각종 트윗 계정이 많아졌는데, 그중 민주당을 테러리스트라 부르는 #WalkAway from Domestic Terrorists라는 해시태그가 붙은 트윗 계정도 있으며, 이들은 모두 많은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다. 그중 흑인 유권자들의 ‘워크어웨이 캠페인(#WalkAway movement)’이 가장 눈에 띈다. 켄디스 오웬(Candace Owens, 트위터 아이디는 @ReaCandaceO, 흑인 여성 정치평론가)은 이 캠페인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변인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소셜네트워크에서, 민주당은 줄곧 흑인 유권자를 이용해 권력을 얻었지만, 보답은 매우 적었다며 많은 팔로워를 일깨웠다. 그녀는 “한 집단의 표가 한 정당에 90% 이상 쏠리면 그 집단은 더는 중요치 않게 된다. 우리의 예측 가능한 투표로 인해 어느 당도 우리가 속한 집단에 한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됐다. 이 현상에는 극적인 변화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워크어웨이 캠페인을 무시하는 듯한 어조로 쓴 ‘바이러스처럼 확산되는 #WalkAway 쇼, 그러나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는 제하의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사실 이 워크어웨이 캠페인은 민주당의 기본 텃밭에 영향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민주당을 떠남과 동시에 트럼프에 대한 흑인 유권자들의 지지율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미국 여론조사 회사인 ‘라스무센 리포츠(Rasmussen Reports)’가 8월 14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에 대한 흑인 유권자의 지지율이 31%에 달했는데, 이는 1년 전보다 13%포인트 올랐고, 이전 10대 공화당 대선 후보의 최고 기록보다도 19% 높은 수치이다. 공화당에 던진 돌에 제 발등 찍힌 민주당 10월,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이 공화당을 타격하기 위해 준비한 큰 돌멩이 두 개에 결국은 민주당 자신들의 발등이 찍힌 셈이 됐다. 그중 하나는 캐버노 대법관 지명 당시 언급된 36년 전의 ‘성폭행’ 사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조직에 의해 동원된, 미 중간선거 전 미국 국경에 몰려들려고 한 온두라스 7900 ‘난민’이다. 크리스틴 블래시 포드 심리학 교수는 브렛 마이클 캐버노 대법관 후보가 36년 전 자신을 성폭행하려 했다고 고발했다. FBI 조사 결과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발표됐지만, 민주당은 승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발을 이어갔다. 그러나 친(親)민주당 의회전문지 더힐(The Hill)은 이 일의 심각한 결과를 놓고 ‘민주당이 블루 웨이브를 말살했다(Democrats just killed the blue wave)’는 기사를 발표했다. 이 기사는 “캐버노 대법관 청문회에서의 민주당의 부당 행위는 어리석은 짓으로,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과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일부 오래된 민주당원들에게 공포와 혐오를 느끼게 함으로써 스스로 블루 웨이브를 죽이는 꼴”이라고 했다. 보도에 따르면, 7900 온두라스 ‘난민’ 캐러반이 미국으로 밀려오는데, ‘국경 없는 사람들(People without Border)’이라는 조직이 그들을 지원하고 있다. 이 난민 캐러반은 원래 11월 6일 전에 미국에 들어와 중간선거에 참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멕시코 등 온두라스 캐러반의 경유 국가들에 이들을 저지해주길 바란다는 경고 신호를 보냈고, 그 때문에 난민 행렬이 지연돼 제때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러자 언론은 이를 ‘이민자들의 인권 박해’라는 주제로 대대적으로 기사화했으며, 민주당과 언론은 슬픈 화면으로 분위기를 조장해 공화당을 비난하고 공화당을 끌어 내리려 했다. 뜻밖에도 <조지 소로스(George Soros)가 ‘국경 없는 사람들’의 자금줄>이라고 밝힌 언론 보도도 나왔다. 소로스가 민주당의 자금원이자 강력 지지자인 것은 미국에서는 다 알려진 사실인지라 자연스레 ‘소로스 음모론’으로 이어졌으나, 이는 공화당 유권자들이 더욱 뭉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적지 않은 민병 조직이 자발적으로 ‘미국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국경으로 향했다. 국경을 열어 이민자들을 환영한 민주당은 일부 이민자의 지지를 받았지만, 자신들의 텃밭을 흔들어놓았다. 하버드-해리스(Harvard-Harris) 연구에 따르면, 미국 흑인들은 사실 이민자를 무제한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가장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백인 79%가 이민자들의 사회 기여도를 기준으로 합법 이민을 우선시하기를 희망하며, 흑인 85%가 이 주장에 완전히 동의했다. 힐러리 클린턴은 2016년 대선 때, 자신이 백악관에 입성하면 서명한 첫 대통령령은 국경을 개방하는 것이고 마음을 열어 모든 이민자를 환영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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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무역전쟁의 여파로 중국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투자금 회수 및 글로벌 산업 체인의 이전이라는 역풍과도 마주하고 있다. 산업 체인의 이전으로 중국을 포함한 일부 개발도상국에는 자본 유출과 실업 문제가 뒤따르고 있다. 미국은 세제 개혁과 당국의 감독이 느슨해지면서 글로벌 투자자들의 조세 피난처가 됐다. 지난 8월 기준, 미국 내 새로운 일자리는 20만 1000개였고 실업률은 3.9%에 불과했다. 하지만 중국의 심각한 실업 문제는 해외 자본이 대거 철수하면서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다. ‘중국 특색’ 실업률 통계 중국 당국은 검열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무역전쟁과 실업률, 외환보유액, 주식시장 및 부동산 시장과 관련된 내용을 부정적으로 다루는 뉴스는 ‘민감 사안’으로 검열 대상이다. 그렇지만 중국 내 실업의 심각성을 측정해볼 수 있는 방법은 여전히 다양하게 존재한다. 지난 8월 중순, 국가통계국의 발표에 따르면 중국 내 도시 지역의 실업률은 7월 기준 5.1%로 이전 달보다 0.3% 증가했다. 중국 경제 전문학자들은 이런 통계 수치는 신뢰하지 않는다. 이들은 국가통계국에서 발표한 수치들을 가리켜 ‘중국 특색 통계’라고 부른다. 올해 4월부터 정부 당국은 '보고된 도시 지역 실업률'을 사용하던 기존의 실업률 측정방식을 '설문 조사된 실업률'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한편, '설문 조사된 실업률'이 기존의 '보고된 도시 지역 실업률' 보다 더 신뢰성이 높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아홉 가지 이슈에 반영된 설문 조사 실업률 종합 분석'이라는 보고서를 전문가 집단에 의뢰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 특색’ 실업률 설문 조사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했을 리 없다는 것을 모르는 전문가는 없다. 정부가 발표한 해당 통계 수치는 도시 지역의 실업률만을 다루며 수억 명에 달하는 지방의 생산가능인구 실업률은 무시하고 있다. 2017년 ‘청년 미디어 협회’로도 알려진 ‘메테오 기자 연합’이 실제 실업률에 대한 설문 조사를 시행해 그 결과를 '중국의 실업률-숨겨진 진실'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발표한 바 있다. 해당 기사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2016년 기준 중국의 총인구는 13억 8300만 명이며, 이 중 16세에서 59세 사이의 인구는 9억 747만 명이었다. 고등학교, 대학교, 직업학교에 등록된 학생 6860만 명을 제외하면 생산가능인구의 수는 8억 3887만 명으로 총인구의 60.7%에 해당한다. 통계에 따르면, 경제활동인구는 7억 7463만 명이었다. 이 조사연구는 한가지 중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바로 농사를 짓는 농민은 은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평생 ‘경제활동 인구’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60세 이상 농민의 수는 1억 2928만 명으로 이 수치는 총 경제활동인구 수에서 제외돼야 하는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실제 생산가능인구 수는 6억 4675만 명으로 현재 아무런 교육과정에 있지 않은 생산가능인구 수와 비교해 1억 9212명이 차이 난다. 이러한 측정치에 따르면 실제 중국 실업률은 22.9%가 된다. 올해 인구 통계 수치는 2016년 때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실제 실업률은 올해 3월 촉발된 미-중 무역전쟁의 효과를 감안하지 않고도 여전히 22%를 웃도는 것이다. 무역전쟁의 이중 영향, 해외 자본 철수와 실업률 급증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중국 내 해외 자본 철수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중국 당국이 이에 대해 완강한 저항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나, 중국 상무부는 지난 9월 20일 정기 기자 회견을 통해 2000억 달러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미국의 관세 부과로 전자기기 산업 및 섬유와 같은 경공업을 포함한 6가지 산업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영향을 받을 기업 중 외국계 기업이 50%를 차지했다. 상무부는 미국의 관세 부과가 중국 및 미국 기업과 소비자에게는 물론 세계 산업 체인의 안정성에도 해를 끼친다고 주장한다. 특히 세계 산업 체인의 안정성과 관련한 마지막 언급은 해외 자본이 중국에서 철수하고 있거나 혹은 철수를 고려 중이라는 사실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9월 13일 주중 미국상공회의소와 주상하이 미국상공회의소가 430개 이상의 중국 내 미국 기업을 상대로 시행한 설문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설문 조사에 참여한 기업의 35%가 중국에서 동남아시아로 생산공장을 이전했거나 혹은 이전을 고려 중이라고 답했다. 일본의 교토통신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일본 기업의 69%가 중국에서 다른 국가로 이전했거나 현재 이전을 위한 과정에 있으며, 나머지 40%는 자금 철수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닛케이 9월 16일 자 보도에 따르면, 타이완 기업의 경우 나이키, 아디다스, 언더아머 등의 브랜드 신발을 생산하는 타이완 공장들이 생산라인을 동남아시아와 인도로 이전했다. 미국 정부의 엄청난 관세 보복을 피하고자 중국 기업 및 공장들조차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실제로 수많은 중국 공장들이 자국 생산라인을 해외로 이전하고 있다. 아시아 최대 물류 기업인 홍콩의 케리 로지스틱스 네트워크사도 현재 중국에 있는 생산라인을 말레이시아, 베트남, 미얀마, 심지어 라오스로도 이전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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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중국 공산정권은 세 번의 혼합소유제 개혁(혼합개혁)을 50곳에 걸친 실험적 국영기업에 도입했으며, 이들을 제2차 공공-민간 합자회사라고 명명했다. 처음 두 번의 개혁과 관련된 19개 실험 기업은 중앙정부가 직접 주도했지만, 세 번째는 지방정부가 운영하는 국영기업들을 주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개혁에서 민간기업들은 국가와의 합자를 적극적으로 추구했고, 국영기업은 이를 적극 수용했다. 새로운 공공-민간 합자회사 추진 동기가 ‘기업의 지배구조와 경영수준 개선’이라는 당국의 공식적인 설명과는 달리, 공산 정권은 국가 부문과 민간 부문 모두에 걸친 부채 압력으로 국영기업 혼합개혁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2009년 중국 당국은 중앙정부로부터 조달한 4조 위안(약 655조 5600억 원)과 지방 금융 플랫폼으로부터 조달한 20조 위안(3277조 6000억 원) 이상에 달하는 경기 부양 패키지를 주로 기반시설과 부동산 쪽에 투입했다. 그러나, 이 부양책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당국의 해법은 계속 돈을 찍어내 기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것이다. 계속 자금 공급이 늘어나지 않으면, 기업은 만기 도래한 대출금을 갚지 못해 파산하고 실업은 늘어난다. 중국 당국은 주식 시장과 부동산을 자금의 저수지로 활용해 천문학적인 금액이 부동산에 흘러가도록 한다. 이 과정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 때문에 수월하게 이뤄진다. 데이터에 따르면 중국의 주택담보대출은 2007년 말 5조 700억 위안(약 934조 3440억 원)에서 10년 뒤인 2017년 말에는 50조 5000억 위안(약 8277조 4550억 원)으로 거의 10배 증가했다. 정부의 노력으로 부채의 일부가 기업과 정부부처로부터 대중들에게로 전가된 것이다. 골드만삭스의 연구는 2016년도와 비교해 지난해 중국 국내총생산(GDP) 대비 기업부채는 181%에서 178%로 감소했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부채는 62%에서 67%로, 가계부채는 34%에서 39%로 증가했다고 밝혔다. 부채 상환 불이행이 빈번하다. 대출자들은 2015년에 126억 위안(약 2조 655억 원), 2016년에 237억 위안, 2017년에 392억 위안을 상환하지 못했다. 2018년에는 1월~4월 넉달 만에 130억 위안을 체납해 2015년 전체 체납액을 상회했다. 국제사회는 중국 금융의 구조적 리스크를 주시해 왔으며, 다양한 경제 지표 전망에 따르면 중국 금융의 구조적 리스크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발생 전 미국의 위험 수준을 넘어섰다는 사실을 중국 내의 전문가들도 싫더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혼합소유제 개혁 통해 금융폭탄 뇌관 제거 중국 은행감독위원회 궈수칭(郭樹淸) 위원장은 최근 6월 중순에 루자쭈이 금융 포럼에서 중국 금융의 구조적 리스크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은행이 보유한 부실채권의 규모(위험성이 가장 큰 부동산 대출 및 국영기업 대출), 막대한 지방정부 부채(최근 중국 국영 언론사가 올해 22조 위안의 지방정부 부채가 디폴트될 수도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그리고 그림자 금융 플랫폼 폐쇄 문제 등이 있었다. 당국이 내놓은 해결책은 금융폭탄의 뇌관 제거, 방향성있는 파괴 작업, 스트레스 테스트 등으로 요약된다. 중국 정부는 국영기업에 대한 혼합소유제를 기업 부채비율을 낮추고 은행 부실채권을 줄이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 국영기업의 부채비율을 낮추는 방법에는 다음 세 가지가 있었다. 부실자산 처리, 직원 해고, 그리고 세 번째가 자기 자본 확충인데 이는 다양한 형태의 자본유치와 혼합소유제 개혁의 진전을 위해 부채를 주식으로 전환케 하거나, 자본 다각화 개혁, 그리고 시장을 통한 증자 등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부실자산을 처리할 길이 없으며, 직원 해고는 실업을 유발하고 안정 유지에 애쓰는 정권의 노력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따라서, 세 번째 방법이 사용 가능한 최상의 해결책이다. 2015년에 중국 정부는 ‘국영기업 개혁계획’을 발표했는데, 이는 국영기업의 부채비율을 낮추고 민간기업들이 국영기업과 합자하도록 함으로써 국영기업을 강화하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었다. 제1차 실험 개혁에 참여한 기업 중 하나인 중국연합통신(中國聯通, China Unicom)을 예로 들어 보자. 2017년 8월, 중국연합통신은 혼합개혁을 완료했는데 4대 인터넷 거대기업인 텐센트, 바이두, JD닷컴과 알리바바를 포함해 모두 14곳의 민간기업으로부터 총 780억 위안(약 12조 7888억 원)의 투자금을 유치했다. 그 밖에 중국인수보험, 중국중차(CRRC), 중국국유기업구조조정기금과 같은 국유기업들도 자금을 투자했다. 위의 예에서, 국가소유 자본금이 압도적으로 많은 상태는 여전했고, 투자한 민간기업들에게는 아무 권한도 주어지지 않았다. 회사 경영은 개선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부채 비율은 크게 떨어졌다: 자산 대비 부채비율은 2017년 6월 62.6%에서 2018년 같은 시기에 46.5%로 낮아졌다. 또 다른 제1차 혼합개혁 대상이었던 중국동방항공은 개혁계획 완료후 자산 대비 부채비율이 2016년의 74.08%에서 약 70%로 떨어졌다. 다른 회사들도 비슷한 결과를 경험했다. 혼합개혁의 다른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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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P2P(개인 간 금융거래) 붕괴 사태로 중국에 '민스키 모멘트'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미국 경제학자 하이먼 민스키의 이름에서 유래된 ‘민스키 모멘트’란 자산 가치가 갑자기 붕괴하는 시점을 말한다. 현재 중국에서는 민스키가 내놓은 두 가지 주요 지표인 과도한 부채, 높아지는 레버리지 비율이 심각할 정도로 표면화되고 있다. 중국 금융위기가 전개 단계에 이르렀고 민스키가 설명한 장기 디레버리징 사이클 국면에 접어든 것은 틀림없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이 민스키 모멘트에 곧 이르게 될 것이라고 단언하던 경제 전문가들이 주장의 근거를 갖게 된 것이다. 중국은 '민스키 모멘트'를 어떻게 지연시킬까? 서구식 개념을 도입해 중국의 국내 문제를 해석하다 보면 중요한 제도적 요인들을 간과할 위험이 있다. 민스키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 체제하의 시장 경제를 배경으로 민스키 모멘트를 주장했으나, 중국은 미국과는 달리 전체주의적 정치 통제하의 불완전한 시장 경제를 기반으로 한다. 미국과 중국의 경제 체제 간에는 현저한 차이점이 여럿 존재한다. 미국의 시장 경제는 기본적으로 사유재산권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역할은 규제 기관이나 시장 감시자 정도에 그친다. 이러한 체제에서 정부는 석유나 토지 등과 같은 다양한 자원에 대해 통제력을 행사하지 않을뿐더러 다국적 기업을 소유하지도 않는다. 자극제 역할을 할 새로운 경제 정책을 내놓는다거나 특정 부문에서의 개발을 제한할 뿐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세금 감면을 통해 미국으로 자본을 재유치하고자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정부 자신이 시장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국 정부는 국유화를 통해 경제를 지배하고, 땅과 삼림, 광물 등의 자원을 독점한다. 중국 당국이 국영기업을 지휘하고 모든 토지는 궁극적으로 정부 소유다. 또한 중국 정부가 시장의 규제자이기 때문에 정부는 선수이자 심판으로서 중국 경제에 실질적으로 참여한다. 서구의 경우, 중앙은행은 정부와는 별개의 기관으로 존재하며 독립적으로 금융정책을 펼친다. 인플레이션 통제도 중앙은행의 임무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가 정부와 협력해야 했던 2008년 금융 위기 때를 제외하면, 미국 정부는 일반적으로 연준의 일상 업무에 관여하지 않는다. 연준은 주로 금리의 인상 및 인하를 컨트롤하면서 미국 경제를 통제한다. 반면 중국 중앙은행은 자치권이 없고 온전히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 귀속된다. 2011년 월스트리트 저널 기사 ‘누가 중국의 금융정책을 결정하는가?’에 인용된 한 내부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중국의 금융 정책은 다양한 정부 기관, 수수께끼 같은 존재의 위원회, 그리고 공산당의 보편적 영향 사이에서 나온 결과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중국은 의사결정을 내리는 주체가 개인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주요 국가들이 중국과 경제 정책을 조정하기란 매우 힘들어진다. 세 번의 임기를 지낸 저우 샤오촨 중앙은행 총재는 '정치적 자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의 금융정책 의논 과정에서 종종 배제되곤 했던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근원적 차이점으로 인해 중국 정부는 그 어떤 서구 정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를 조종하고 개입하는 권력을 누리고 있다. 중국 금융업계의 시스템 리스크, 과도한 악성 부채를 껴안고 있는 은행, 은행 대출 중에도 가장 리스크가 큰 부동산 담보 대출과 국영기업 대출, 올해 연이은 채무불이행을 촉발한 어마어마한 지방정부 부채와 그림자 금융 시스템 하의 다양한 금융 플랫폼과 관련된 채무불이행 위험 등, 눈앞에 닥친 수많은 금융 재앙을 고려하면 이런 식의 정부 개입이 불러올 부정적인 면은 명확해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중국 정부가 리스크 헤지를 위해 통화 도구에 계속해서 의존해온 결과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중국이 금융 쇼크를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은 서구보다 훨씬 더 우세하다. 예를 들면, 오래된 금융 도구와 관련된 문제가 발생하면 중국 정부는 리스크에서 벗어나려고 새로운 통화 정책을 계속해서 내놓을 수 있다. 최근 몇 년간은 국제적으로 확장하는 데 의존해왔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일대일로’ 투자로 ‘공간으로 시간 벌기’ 전략을 채택해 아프리카를 미중 무역전쟁의 제2의 전선으로 설정하고 중국의 경제 전략적 지위를 다시 포지션닝했다. 또한 P2P 사태 등을 지시하고, 지방 정부의 재정 위기를 지연시키며, 자금 전환 능력이 약화되는데도 오히려 자금 전환을 꾀하는 등 ‘시간으로 공간을 버는’ 지연 전략을 이용하기도 한다. 경기 하락 시기에 중국은 어떻게 리스크를 해결했나 중국 당국은 막강한 권력에 수반되는 무게를 견뎌야 한다. 60조 위안(약 9800조 원)에 달하는 지방 정부 부채, 부동산 거품, 수백만 명의 투자자가 저축금을 잃게 된 P2P 사태 등 어느 때건 폭발할 수 있는 금융 위기의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이 모든 위기를 예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위기는 이미 설치된 폭탄과도 같아 제어된 방식으로 폭발하기 만을 바랄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는 정부가 이런 선택지조차 없다. 경제 위기가 발발한 후 여파에 대한 경감 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은 마음대로 경제에 개입할 수 있는 통제받지 않는 권력에 의존해서, 상황을 평가하고 피해 규모가 가장 작을 것으로 예측되는 위기를 취사선택할 수 있다. 이번에 중국 정부는 P2P 산업이 붕괴하도록 방관하면서 금융 시스템에 가해지던 압력을 일부 이를 통해 해소하고 있다. P2P 사태로 손실을 본 사람들이 자살을 기도했다는 보도가 최근 며칠간 집중적으로 보도되었다. 하지만 놀랄 일도 아닌 것이 6월 중순 궈슈칭 중국 은행 감독 위원회 위원장이 루자쭈이 금융포럼에서 연설한 내용에 중국 당국의 의도가 드러난다. 그가 제안한 위기 대처방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금융 폭탄의 뇌관을 제거하고, 제어 폭파해서, 압력 실험을 시행한다.’ 궈슈칭 위원장은 특히 P2P 투자자들에게 10% 이상의 수익이 있는 투자가 있을 것이란 생각 자체를 완전히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수많은 폭탄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상황에서 해체 작업은 차근차근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P2P를 정부의 첫 '제어 폭발물'로 설정하면서 두 가지 고려를 했다. 첫 번째는 1조 3000억 위안(약 213조 원)에 이르는 P2P 대출 업계는 중국 금융 부문 자산 총액 252조 위안(약 4경 1300조 원)과 비교하면 매우 적은 부분이라는 것이다. 다른 부문에 비해 P2P 대출 붕괴로 인한 영향이 훨씬 적다. 두 번째, ‘금융 난민’의 수가 수백만, 수천만에 이르러도 정권에 유의미한 위협이 될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중국 당국은 이러한 접근법에 굉장히 익숙하며 이러한 방법을 수차례 사용해왔다. 예를 들면, 주룽지 전 총리 시절, 악성 부채에 대응하기 위해 네 개의 주요 자산 관리 기업들이 설립됐는데, 이들은 악성 부채를 쪼개고, 재포장해 중국 금융시스템 작동 원리를 이해해 중국 시장으로 진입하기를 필사적으로 원하던 해외 투자 은행들에 매각했다. 원자바오 총리 시절에는, 중국 정부가 자산 구조조정을 통해 악성 부채로 신음하던 몇몇 국유 상업 은행들을 자산 구조조정을 통해 재건하고자, 전략적 투자자로서의 해외 은행을 유치하기도 했다. 두 경우 모두 금융 공황이 성공적으로 완화됐다. 경기 부양을 위해 4조 위안(약 650조 원)을 시장에 투입했던 중국 정부는 2009년 세계 최대 화폐 발행국이 됐다. 이후 화폐 공급과잉을 해지하기 위해 주식 시장과 부동산이라는 두 가지 '통화 보유고'에 의존해왔다. 2015년 주식 시장은 5.28 포인트 하락했고 시장 가치는 4조 위안 감소했다. 지난 6월 19일, 중국 주식시장이 급격히 추락해 2조 위안 이상의 시장 가치가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2009년 이래 중국 경제가 둔화하기 시작하면서 정부는 거의 모든 은행 대출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됐다. 수차례의 부동산 투기 광풍 결과, 이전 시기에 축적된 레버리지 대부분이 부동산 매입자에게로 전환됐다. 그 결과 수년에 걸친 ‘부동산 재고 정리’는 자산 소유주와 정부를 기득권자로 바꾸어 버렸다. 부동산 가격이 하락한다면 지방 정부, 부동산 개발업자, 그리고 부동산 매입자가 모두 국유 상업 은행의 자본을 빌려 쓴 채무자이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어마어마한 양의 은행 악성 부채를 감당해야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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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중-아프리카 협력포럼 정상회의’가 9월 3일 베이징에서 개막됐다. 중-미가 아프리카에서 힘겨루기를 하면 중국의 승산은 얼마나 될까? 기세로는 중국이 이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기세를 뺀 투자 효과와 수익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3일 2018년 중-아프리카 협력포럼 베이징 정상회의 개막식에서 "중국은 정부 지원, 금융기관과 기업 융자 등을 통해 아프리카에 600억 달러(약 66조 7천500억 원)를 지원하고, 동시에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아프리카의 빈국 및 최빈국에는 2018년 만기인 정부 간 무이자 대출 채무도 면제하겠다"고 밝혔다. 이 말이 나오자마자 중국 인터넷 여론은 일제히 ‘돈 뿌리기’라며 비난을 쏟아냈다. 이번 ‘돈 뿌리기’의 배후에는 사실 베이징의 국제 경제 전략 변경에 관한 고려가 숨겨져 있다. '정면 대치' 힘 부족하자 새로운 전장 개척 중국 당국의 600억 달러 투자 명세표와 시점을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이 아프리카에 투자하는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미국의 신(新)아프리카 전략 조정 시기를 틈타 기선을 잡으려는 것이고, 둘째는 중국이 무역전쟁에서 미국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하지만,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 새로운 전쟁터를 개척하고 아프리카에서 대국 간의 힘겨루기를 하려는 것이다. 먼저 600억 달러 한도를 정한 이유를 말해보자. 8월 31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은 중국에 맞서기 위해 해외 투자에 수십억 달러 추가'라는 글을 게재했다. WSJ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몇몇 잘 알려지지 않은 정부 기구를 새로운 기구인 ‘국제개발금융공사(IDFC)’로 통합하고, 새 투자 기구에 600억 달러의 자금을 운용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IDFC의 중심은 미국의 해외투자 기구인 해외민간투자공사(OPIC)가 될 예정이다. 이는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미국 기업들의 개발 및 신흥시장 투자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다. 또 IDFC가 정식으로 설립된 후 미국의 해외 개발 담당 기구인 미국 국제개발처(USAID)가 운영하는 프로그램 일부를 인수할 예정이다. 이러한 권한을 갖게 되면, 미국 회사는 다른 나라에 중대한 인프라와 발전 프로젝트를 제공하는 융자 선택에서 중국과 상당한 경쟁을 할 수 있다. 중국과 미국의 아프리카 전력(電力) 건설에서의 힘겨루기는 일찌감치 오바마 대통령 때 시작됐다. 오바마 임기 마지막 해에 '2016 아프리카 전력법'을 내놓았고, 또 미국이 2000년 내놓은 '아프리카 성장 기회법'을 대폭 개정해 세계 무역 체계의 규칙과 일치시켰고 유효기간은 2025년 9월로 연장했다. 이 두 법안은 미국의 '신아프리카 전략'의 양대 축이 됐다. 이에 맞서 중국은 2017년 아프리카 최대의 수력발전소 '기베3'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는데, 싼샤(三峽) 공정보다 규모가 더 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이후 아프리카 정책 기조에 중대한 조정을 했다. 그는 미국의 인프라가 낡았기 때문에 미국 중심의 인프라 개발에 주력하기로 생각했으며, 올해 예산안에서는 아프리카를 주로 지원하는 '평화를 위한 식량 계획'을 완전히 폐기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미·중 무역전쟁 과정에서 미국은 아프리카가 중국의 '일대일로' 계획의 중대한 거점임을 알게됐다. 이 때문에 비슷한 기능을 가진 몇 개 기관을 통합해 국제개발금융공사(IDFC)를 설립하고, 지출 한도를 확대해 개발금융자금 600억 달러를 지원하도록 하는 하원의 법안을 지지했다. 이 법안은 이미 하원에서 순조롭게 통과돼 상원의 표결만 남았다. 중국이 아프리카에 600억 달러를 뿌린 것은 바로 미국의 이 600억 달러를 겨냥한 것이다. 베이징은 결코 이 점을 숨기지 않았다. 미국이 6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선언하자, 중국의 언론들은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가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커지자 미국은 곧 몇 개 융자기관을 통폐합하는 법안을 확정해 이에 대항한다”고 발표했다. 중국이 ‘제2의 전장’으로 아프리카를 택한 이유 미중 무역전쟁은 현재 ‘미지근한’ 대치 상태다. 11월 6일은 미국 중간선거일이다. 트럼프는 국내에서 민주당 및 언론의 지속적인 포위 공격을 받고 있다. 중국은 공화당의 중간선거 패배가 새로운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면서 기회를 찾고 있다. 지난 달 28일 베이징 세미나에서 전 중국공산당 상무부 부부장이자 현 국제경제교류센터 부이사장인 웨이젠궈(魏建國)가 중국 정부의 이런 의도를 분명하게 설명했다. 즉, 앞으로 5년간 중국이 아프리카에 수출하는 상품은 5000억 달러에 달하므로 아프리카가 미국을 대신해 중국 최대의 수출시장이 될 것이며, 미국은 5000억 달러 상당의 중국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할 수 있지만, 중국이 미국 상품을 수입하는 것은 모두 1500억 달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웨이젠궈는 중국의 대(對)아프리카 수출은 대(對)미국 수출과 다르다는 점은 인정했다. 아프리카가 수출 대체 역할을 할 것이란 기대 외에도 베이징 당국은 지극히 현실적인 계산을 하고 있다. 중국과 아프리카 경제무역 협력이 진행된 지 여러해 됐기 때문에 대출을 통해서든, 무역 방식을 통해서든 적지 않은 아프리카 국가의 자체 금융 시스템에 이미 일부 위안화가 축적됐다. 달러화에 대한 위안화 약세, 외환보유액 3조 위안 유지가 어려운 상황에서 위안화 국제화 노력은 부담을 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안화가 국제통화기금(IMF)의 5대 기축통화가 된 이래, 60개국 이상이 외환보유고에 위안화를 포함하고 있다. 이 가운데 아프리카 14개국이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쓰겠다고 밝혔고, 나이지리아 등도 위안화를 결제통화로 채택하고 있다. 아프리카 전장에서 중국의 승산은 얼마나? 필자의 견해로는 기세만 보면 중국이 이길 것 같다. 아프리카에서 중국의 투자는 투자자가 정부이며, 원가를 따지지 않고 크게 투입하고, 원조와 투자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중국공산당의 '강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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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처음으로 자금세탁방지 정책을 시행한 것은 마약거래에 대해서이다. 후에 미국 내 사법 시행과 국제사회의 정치적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그 목표를 조정했다. 몇 십 년 동안 입법, 사법, 집행 세 방면에서 많은 변화를 거쳤다. 마약 거래에 초점을 맞춘 미국 자금세탁방지 정책은 입법부가 은행에 자금세탁방지 정찰을 맡긴 것으로 처음 시작됐다. 재미있는 것은, 자금세탁방지법의 기초를 다진 1970년 ‘은행비밀법(Bank Secrecy Act, BSA)’이 뜻밖에도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은행이 특정 미국 법률집행기관에 ‘비밀법’이란 명칭을 붙인 거래처의 정보를 누설하는 법률을 요구한 것이다. 이 법안의 입법 목적은 범죄혐의자가 금융기관의 취약 부분을 남용하는 것을 제재해 불법적인 수익 발생을 막는 것이다. 법률집행기관의 금융거래 자료 수집을 위해, 1만 달러 이상 현금거래 시 신고해야 하며, 해당 부문에 관련 저금·예금인출·현금환전 혹은 기타 지급이나 현금이동을 신고해야 한다. 이 밖에 신고한 현금거래 보고에 거래처 신분 및 자금 출처를 밝혀야 한다. 만약 금융기관이 신고하지 않거나 거짓 신고하면 범죄이다. 이 법안의 주목적은 ‘은행비밀법’ 제도의 개혁이다. 은행의 거래처 정보 보안이 그 전보다 강화됐다. ‘은행비밀법’으로 미국이 세계 제일의 자금세탁방지제도를 수립한 국가가 됐지만, 이 법안 역시 완벽한 자금세탁방지법은 아니었다. 바로 1986년 ‘자금세탁규제법(Money Laundering Control Act)’이 명실상부한 자금세탁방지법이다. 이 법안 정식 시행의 배경은 법에 근거하고, 4개 죄명으로 세분화할 수 있는데 ▲금융거래 자금세탁 죄 ▲수송화폐수단 자금세탁 죄, ▲스파이 이용 자금세탁 죄 ▲화폐교역 자금세탁 죄(크로스보더 자금세탁죄) 등이다. ‘자금세탁 규제법’과 ‘은행비밀법’ 두 법률은 미국 자금세탁방지법 체계의 핵심이다. 이후 자금세탁방지법은 계속해서 수립됐다. 1988년 ‘자금세탁 규제 개선 법안(MLPIA)’이 국회를 통과했으며, ‘은행비밀법’에서는 ‘금융기관’ 정의가 확대됐다. 자동차·비행기·선박의 중개판매인 및 처리 부동산, 우편서비스의 인원도 금융기관의 범주에 포함됐다. ‘은행비밀법’의 시행으로 인한 은행에 신고된 화폐 보고 수량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며, 검거된 자금세탁 범죄자와 자료 수량은 서로 맞지 않았다. 1994년 수립한 미국 ‘자금세탁방지법(Money Laundering Suppression Act)’에서는 은행의 과중한 부담을 줄이는 내용을 덧붙였다. 재무부가 금융기관 간의 거래를 면제해 현금거래 신고 부담이 줄어들었다. 미국은 마약퇴치에서 반테러로 전략 전환 1999년, 미국은 첫 번째 ‘국가자금세탁전략(The National Money Laundering Strategy)’을 발표해 자금세탁방지를 국가 전략 차원으로 올렸다. 그 후 미국 정부는 매년 그해 ‘국가자금세탁전략’을 발표해왔다. 이러한 전략이 기록물은 아니지만 미국의 자금세탁방지 입법과 법의 집행에 중요한 지침 역할을 한다. 2001년, 9.11 테러사태 이후 미국 상원과 하원은 반테러 강화를 위해 10월 24일 ‘테러 차단과 방지를 위해 적절한 수단을 동원해 미합중국을 단합하고 다지기 위한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으며 이 법안명칭의 영문 첫 글자를 따면 ‘USA PATRIOT ACT’이기에 ‘애국자법’으로 불린다. ‘애국자법’은 총 10편 156절로 구성되며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는데 제3편은 ‘국제자금세탁 척결 및 2001년 테러자금조달 금지를 위한 법안’으로 테러자금조달을 집중 겨냥하며 국제자금세탁 및 테러자금조달 행위의 방지, 규명 및 기소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는 글로벌 테러자금조달 및 테러 공격을 위한 자금조달에서 매우 중요하다. 요약하면 ‘애국자법’은 ‘은행비밀법’ 및 ‘자금세탁규제법’의 관련 규정을 수정하고 금융기관에 대한 새로운 의무를 많이 추가했다. 이는 자금세탁방지프로그램을 관철하기 위한 기존의 집행정책과 방식에 대한 실질적인 개정, 더 엄격한 고객 식별 기준, 신중 의무의 이행 강화를 포함하며 특히 미국 은행과 외국의 셸 은행(껍데기만 남은 은행) 사이에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금지해 서로 자금세탁을 돕는 것을 막는다. 미국, 스위스 은행 금고를 강제로 열다 그러나 단지 미국의 은행이 자금세탁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 글로벌 자금세탁 범죄활동을 타격할 수는 없다. 국내 자금세탁방지법체계의 제정과 함께 미국 또한 스위스 은행업 시스템에 압력을 가해 스위스 은행이 소위 비밀문제에서 양보하도록 촉구한다. 1987년, 스위스는 ‘정치적 공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세계 각국의 은행들이 구독하거나 교환할 수 있다. 1998년 스위스의 ‘자금세탁방지법’이 발효되어 은행과 중개기관들이 수상한 상황을 포착하면 정부에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상황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는 행위는 범죄로 간주하게 된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스위스 은행은 어쩔 수 없이 테러와 관련된 조직과 사람들의 계좌정보를 제공했다. 2003년 6월, 스위스 정부는 마지못해 OECD 산하 FATF(자금세탁방지기구)에서 제정한 자금세탁방지규정을 수락했지만 1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2004년 7월 1일부터 정식으로 발효시켰다. 이 규정에 의하면 스위스 은행의 익명계좌를 통해 해외로 일정 금액 이상 송금하는 고객에 대해 반드시 그 신원을 공개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스위스가 최초로 익명계좌 개인정보 보호정책을 깨는 것으로 스위스 은행업의 개인정보를 보호하는 전통이란 단단한 얼음도 빠른 융해기에 들어섰음을 상징한다. 2008년 국제금융위기로 재정이 곤란한 일부 서방 강대국들이 잇달아 스위스에 강한 압박을 넣기 시작했다. 미국은 UBS가 미국 고객의 탈세를 도왔다고 기소하고 그들에게 자국의 익명 예금자 정보를 제공하도록 촉구했으며 또한 과거 다년간 미납세금 그리고 차후 납부해야 할 세금을 대신해 원천 징수할 것을 요구했다. 힘든 협상을 거쳐 UBS가 7억8천만 달러를 지급하는 것으로 소송을 마무리하고 탈세 협의를 받는 4000여 개 계좌정보를 미국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2011년, 스위스와 영국은 스위스가 대신해 영국 고개의 예금 세금을 원천 징수하는 데 합의했다. 이어서 러시아도 스위스와 러시아인 계좌정보 공개 관련 협약에 합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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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위안화가 SDR(Special Drawing Rights‧가상의 국제준비통화)에 편입된 것은 위안화가 국제통화기금(IMF)의 규칙에 부합하기 때문이 아니다. IMF에 의해서든 미국에 의해서든 그것은 정치적인 고려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지난 4월, 로이터 통신은 데이비드 립톤 IMF 수석부총재가 한 언론에 “중국이 위안화를 SDR에 편입시켜달라고 IMF에 요구했고, IMF는 위안화가 편입될 수 있도록 앞으로 기준을 조정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위안화의 SDR 편입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동의한 후에 확정됐으나, 중국 관영언론은 마치 미국에 대승을 거둔 것처럼 전과를 부풀리고 있다. 이 ‘전과’가 얼마나 건실한지 아래에서 분석해보겠다 중국몽 1: 위안화 SDR 편입으로 각국 중앙은행과 투자자가 위안화 보유 비중을 확대할 것이다 홍콩매체 봉황망(鳳凰網)은 ‘위안화 자산, 어떤 변화 생기나’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SDR 편입으로 예상되는 세 가지 변화를 제시했다. 하나는, 적어도 1조 달러의 외화보유액이 중국의 자산으로 전환될 것이란 전망이다. 또 하나는, 향후 5년 이내에 외국회사가 중국에서 발행한 위안화 표시채권, 즉 판다채권이 500억 달러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중앙은행 외화보유액 관리기관과 기관투자자는 위안화 표시자산을 사재기할 것이란 전망이다. 봉황망만 이렇게 예상한 것이 아니다. 여러 언론에서 같은 소식을 전했는데 이를 종합하면, SDR에 편입됨으로써 안전한 화폐라는 지위를 얻게 되고, 그러면 국제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위안화 사용이 늘어날 것이 분명해지고, 그러면 전 세계 기금배분의 구조가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즉 위안화가 자산배분(asset allocation)으로 작용할 때의 비율이 대폭 상승하게 된다는 것이다. 스탠다드차타드 은행 베키 류 아시아 금리 프리미엄 전략가는 한 인터뷰에서 “SDR 편입 후 5년 동안 중국은 4조~7조 위안의 국제자산을 위안화 채권시장으로 배분하게끔 유도할 것이며, 내년에 유입될 해외자금은 5천억 위안에 달할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IMF의 SDR은 일종의 ‘종이황금’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각국에 분배해 사용하도록 만든 일종의 국제통화기금 할당액으로서 실제로 유통이 가능한 화폐가 아니다. SDR의 용도는 ▲기존 보유자산이 부족할 경우, 지정된 화폐 인수국에서 해당 국가의 화폐로 바꿔 지불하는 수단 ▲IMF 회원국의 경상수지가 적자일 때 IMF 지정국에 SDR를 주고 사용 가능한 화폐를 받아 적자를 메우고 IMF에서 정한 대출금과 이자 지급 ▲IMF 내부 거래 등 세 가지다. IMF가 위안화를 SDR에 편입시킨 것은 개혁의 일부분으로 보인다. 국제무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위안화를 편입시켜 SDR의 구조를 더 합리적이게 하고 SDR의 대표성과 일반성을 강화함으로써 더 흡인력 있는 보유자산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단이다. 그러나 SDR은 세계화폐시스템에서 비주류에 속한다. 따라서 위안화 편입으로 세계 자산배분의 구조가 바뀔 수 있을지는 각국 중앙은행과 기관투자자가 위안화 자산의 비중을 실제로 확대할 것인지, 그 여부에 달렸다. 중국몽 2: 위안화가 달러의 지위에 도전할 것이다 중국인의 영혼 속에는 ‘뛰어넘고자 하는 의식’이 있다. 영국을 뛰어넘고 미국을 따라잡자는 식이다. 이런 의식은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온다. 위안화의 SDR 편입은 국제화로 나아가는 작은 한 걸음일 뿐이지만 중국의 많은 평론에서는 ‘위안화가 달러의 지위에 도전할 것’이라고 한다. 과거 중국에서는 달러가 위안화의 도전으로 국제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빼앗길까 우려하는 미국이 위안화의 SDR 편입을 저지해왔다는 여론이 계속 조성됐다. 그러나 위안화의 SDR 편입은 국제 결제통화로서의 명분을 얻었을 뿐이며 달러에 도전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너무 멀다. 달러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국제 결제통화, 가치저장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주요 국가의 외화보유액이 달러라는 점 외에 국제무역거래 중 3분의 2는 달러로 결제된다. 국제금융시장에서 대부분의 도매거래는 달러로 거래하고, 각국 중앙은행의 금융정책도 달러를 이용한다. 국제차관 및 채권시장에서의 거래 역시 대부분 달러 혹은 달러화 채권이다. 현재 외국인이 보유한 중국주식과 채권은 2천억 달러 정도지만 달러화 자산은 16조 위안 규모로 위안화의 80배다. 위안화가 정말로 달러와 경쟁할 수 있을까. 중국은 시간문제로 보고 있다. 일부 중국경제 분석가들은 위안화가 달러에 도전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다소 겸손한 입장이지만, 속뜻은 언젠가는 위안화가 달러를 도전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의미다. 그때가 15년 이후가 될 수도 있고 더 늦을 수도 있다. 올해 이코노미스트는 “현재 위안화는 세계무대에서 아직 작은 역할이지만, 달러도 20세기 초에는 그랬다”고 다소 비아냥대는 조로 평했다. 경제 예측의 범위가 100년을 넘어간다면 예측이 아니라 예언이다. 그러나 20년 내의 경제 예측은 가능할 수도 있다. 강한 화폐가 되려면 두 가지가 뒷받침돼야 한다. 하나는 강한 국가경제력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신용이다. 이 점에서 중국은 20세기 미국과 같은 발전을 이뤄내기 힘들다. 우선 중국경제의 체질(기술력, 자원력)이 미국만 못하다. 미국과 같은 국가신용 보장제도 역시 부족하다. 게다가 중국경제는 현재 장기침체기에 진입했다. 국내제조업이 전반적으로 쇠퇴하고, 거액의 악성 부채가 다시 나타나고 유령은행이 잇따라 부도나는 등 금융이 위태롭고 실업률 또한 높아지고 있다. 앞으로 5~10년 안에 밑바닥을 탈출할지도 의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각국 중앙은행과 기관투자자가 달러를 버리고 위안화를 선택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매우 어렵다. 앞으로 100년 이내에 세계에는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인가. 지난 100년간의 중국만 봐도 신해혁명부터 지금까지 세월의 격차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 기간에 정권이 몇 차례나 바뀌었고, 화폐는 중화민국 때 위안다토우(袁大頭))를 발행하고 국민정부의 지폐를 거쳐 위안화로 바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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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PP는 중국과 어울려주지 않는다. 이는 중국을 너무나도 자극하는 일이다. 몇 년 전부터 중국 정부는 TTP가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음모라고 주장해왔고, 그 영향은 이미 중국 사회 곳곳에 스며들었다. 그로 인해, 이번 TPP 타결 소식이 전해졌을 때 굳이 중국 정부가 나서지 않아도 중국 각계각층에서 강렬한 반응이 나타났다. 다양한 반응에서 드러난 한 가지 공통점은 중국이 고립됐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립의 원인과 결과, 그 대처방안에 대해서는 견해가 제각각이다. 이번 현상은 외부의 관측자에게 중국과 외부의 관계를 통찰할 좋은 기회다. 견해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봤다. 견해 1: 고립의 원인은 중국이 국제규범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중국은 10여 년 전 WTO에 가입했지만 아직 국제사회의 규칙을 잘 지키지 않아 다른 국가로부터 미움을 사고 있다. 그래서 미국 등으로부터 소외당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는 다시 세 가지로 의견이 엇갈린다. 하나는 중국경제가 이로 인해 쇠약해지고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의견은 해외 웹사이트에서 많이 제기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TPP로 촉발된 위기감이 ‘부도개혁’의 원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주로 국내에서 보는 시각이다. 이러한 ‘부도개혁론’은 이달 8일 재경망(財經網)에서 게재한 ‘TPP는 경제적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아니다. 효력발효는 빨라야 2017년부터다’라는 기사가 대표적이다. 기사에서는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수석연구원이자 백악관 경제보좌관을 지낸 매튜 굿맨(Matthew Goodman)과 인터뷰를 통해 ‘부도개혁론’을 제기했다. 골자는 TPP는 내부정치와 투명성에 있다는 것. 따라서 중국이 가입하려면 계속해서 국내 개혁을 실행해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굿맨은 TPP 참가국 중 시장을 완전히 개방하지 않은 나라도 있다면서 베트남을 예로 들었다. 예외 조항이 많아 타결까지 별도의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 따라서 중국이 TPP 가입을 희망한다면, 중국에도 준비시간이 주어지리라는 분석이다. 다만, “중국은 몇 가지 선택권이 있다”며 “첫째, TPP에 가입하는 것을 장기적으로 바라본다. 둘째, 전면적으로 경제협정을 추진한다(RCEP). 셋째, 중국과 미국 쌍방 투자 협정(BIT)에 대해 빠른 결정을 내린다. 넷째, 아시아와 태평양의 자유무역(FTAAP)에 대한 판단을 빠르게 한다”고 덧붙였다. 기사의 목적은 ‘TPP에 가입해 중국 부도를 개혁하자’임이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중국이 결국 TPP에 가입하게 되리라는 전망이다. 7일 펑파이(澎湃)뉴스는 기사에서 ‘TPP가 일단락되고 나서, 중국은 뒤따르는 것 외에 선택권이 없다’고 주장했다, 사실 ‘뒤따른다’ 역시 부도개혁을 의미한다. 이 기사에서는 TPP가 상품의 무역자유화라는 목표 외에도 서비스무역•지식재산권•환경보호•노동기본권•경쟁중립성 등을 목표로 포함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중국은 WTO 가입 후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런 목표를 실현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단기간 안에 이러한 조건들을 받아들이기란 확실히 어렵다. 이 기사에서는 ‘음모론’에 대해 반박하며, “WTO 가입 전에도 음모론과 우려감이 중국을 괴롭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차이점은 좇겠다는 생각이 작아지고 맞서겠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분명한 점은 좇아가는 것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위의 내용은 모두 정론이다. 양펑덩(楊鵬等)의 기고문 ‘TPP 총론: 역사 변동 정세가 시작될 것이다’에서는 위기를 지나치게 부각한 면이 있지만, 이 또한 중국이 부도 위험 상황에서 개혁하길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TPP 조항의 궁극적 목표는 중국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견해 2: TPP는 미국이 세운 자본제국의 음모다. 중국은 계속 ‘똥 막대기’를 저어야 한다. 이러한 견해는 TPP가 중국에 고의성을 갖고 있다고 여긴다. 이것은 ‘경제적 NATO’이며 중국을 봉쇄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가진 거의 모든 사람은 ‘투자자-국가 간 분쟁해결’(ISDS)에 대해 의견이 많다. ISDS가 국가보다 다국적 기업에 더 큰 권한을 준다고 생각한다. ISDS로 다국적 기업은 국가의 법률과 정책변화로 인한 손실에 배상을 요구할 수 있으며,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과도하게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는 TPP에서 가장 무서운 장치이며, 이로 인해 미국이 가장 큰 이익을 볼 것으로 여긴다. 최근 중국 온라인에서 퍼진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TPP의 놀라운 비밀'이라는 게시물이 바로 이러한 견해의 대표적 사례다. 이 게시물에서는 미국이 TTP로 자기만의 집단을 형성한 이유를 거대한 대중 무역 적자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위키리크스 창시자 줄리언 어산지가 올해 밝힌 내용을 인용해 “TPP와 WTO의 가장 큰 차이는 포함하고 있는 범위나 협정의 강도가 아니며 관세의 높낮이는 더더욱 아니다. 핵심은 다국적 기업에 대한 법적 규제의 차이”라고 말했다. TPP에 따르면 회원국의 주권이 제약을 받는다. 무역분쟁이 생길 경우 뉴욕 국제사법재판소에 중재를 요청하고 판결에 따라야 한다. 어산지는 한 인터뷰에서 “TPP가 토론하는 것은 자유무역이 아니라, 다국적 기업의 지배”라고 말했다. 게시물에서는 TPP 법안이 미 하원에서 통과되고 회원국의 승인을 받게 되면 미국을 포함한 회원국은 자국 법률에 반드시 TPP 협정 정신을 포함시켜야 하며 뉴욕 국제사법재판소는 전 세계 최고의 법정이 된다면서 “미국의 이러한 조치는 각 회원국이 주권을 팔도록 하여 빗발치는 저항을 불러일으켰다”고 해석했다. 또한, 게시물에서는 “이러한 TPP는 중국을 고립시키려는 것이 명백한데 중국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국적 기업이 결정한 조항은 주권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으로 이것은 매국이다!”라며 TPP가 중국을 끼워주지 않는 문제에 대해 “나라의 주권을 팔아야 한다면, 중국은 절대 참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전재한 후 “어떻게 하나하나 와해시킬 것인가”를 논했다. 싱가포르대 동아시아연구소장 정융녠(鄭永年)은 ‘TPP가 세계에 가져온 것은 하나의 새로운 자본제국 경제이다’라는 책에서, 아직 형성중인 TPP는 일종의 주권국가의 자본경영 방식을 초월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이 자본제국과 현재 자본 세계화는 다르다. 이것은 더 깊은 단계의 자본제국이다. 즉, 민족과 국가를 초월하고 민족과 국가의 영향을 받지 않거나 민족과 국가의 영향에서 벗어난 자본제국이다. 싱가포르대 아시아법률연구센터 왕장위(王江雨)는 엄청나게 긴 강연인 ‘대중국 자유무역 구역에서 태평양 전체의 협의’에서 TPP는 두 명의 피해자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중국, 다른 하나는 WTO다. 이에 따르면 중국은 적절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국가와 무역협정을 체결하고 한•중•일 자유무역을 구축하며, TPP에 가입하는 방안이었다. 그 목적에 대해서는 “우리는 가서 똥 막대기 젓듯 훼방할 수 있다. 더 높은 가격을 요구하고, 당신이 측정한 가격에 대해 하나도 동의하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시간을 끌며 방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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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억만장자이자 아시아 제일의 부자 리카싱이 최근 중국에서 자금을 철수한 이후, 중국 경기가 좋을 때크게 이익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둔해지자 떠나는 그를 향해 정부 언론은 비도덕적이고 배은망덕하다는 비난을 했다. 저명한 경제학자 허칭롄은 오늘날 중국에서 벌어지는 권력과 자본 사이의 마찰을 살펴봤다. 리카싱의 ‘도피’는 중국 내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이 논쟁은 권력과 자본 사이의 싸움으로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중국에서 투자의 3가지 딜레마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첫 번째 딜레마는 홍콩 투자가 대외적인 이름에도 불구하고 항상 국내 자본으로 간주돼 왔다는 것이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할 때부터 1990년대까지 해외투자 전체에서 홍콩이 가장 중요했고, 대만이 뒤를 이었다. 홍콩의 지리적 위치와 특수한 경제적 역할은 중국공산당이 홍콩을 ‘해외’ 투자로 취급하게끔 한 정치적 고려사항의 일부였다. 그 전에 중국공산당이 서방으로부터 포괄적인 봉쇄를 당하고 있던 때에는 홍콩이 ‘대외창구’ 역할을 수행해, 해외 자본 및 기술의 유통체계 뿐만 아니라 수입·수출의 무역기지였다. 중국은 1979년 개혁개방을 시작했다. 홍콩 기업들은 주요 투자자뿐만 아니라 중국이 개방될 수 있도록 선도자 및 다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홍콩은 해외투자의 70%를 차지했으며, 대만과 일본이 뒤를 따랐다.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홍콩은 중국의 수출입항의 지위를 점점 상실했고, 역외 금융업은 서서히 약화됐다. 홍콩은 공산당 임원들이 자본을 해외로 옮겨서 배치하는 근거지로 일명 ‘돈세탁 창구’가 됐다. 1978년부터 2001년까지 공산당은 정치적 이유로 홍콩 투자를 해외자본으로 분류했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기 전이나 그 직후였기 때문이다. 2001년 이후에도 홍콩 투자를 해외자본으로 간주하는 것이 공산당에게 이익이었다. 이익 단체들에 홍콩은 돈세탁에 중요한 경로였다. 오늘날에도 홍콩 최고 경영인들과 홍콩에서의 중국 투자는 공산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돈의 유입은 자유지만 유출은 안 된다 두 번째 딜레마는 자본 흐름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투자 자본의 유입은 자유이지만 유출은 그렇지 않다. 올해 중국공산당은 중국 주식시장 침체에 강제적으로 개입했다. 결국, 중국에서 돈을 빼냈다는 혐의로 사람들을 체포했다. 일반적으로 정부의 부적절한 금융시장 개입 및 자유로운 자본 흐름을 악의적으로 제한하는 행동으로 판단된다. 해외자본 흐름이란 국가 및 지역 간의 자본 유출입을 가리킨다. 투자·채무(債)·원조·구매자 신용·판매자 신용·외환차액(FX)거래, 증권발행 및 순환 등을 포함한다. 국경을 넘는 해외자본 흐름은 유입과 유출로 나누어진다. 중국이 WTO에 가입했을 때, 미국과 유럽 같은 주요 회원국들은 중국이 금융시장을 개방하고 해외자본의 유입을 허락하도록 요구했다. WTO 회원국 중에 해외자본 유입을 환영하면서 자본 유출을 제한하는 것을 환영하는 국가는 없다. 자본 흐름을 제한하는 중국공산당의 정책은 새로운 판례를 만들었다. WTO에는 이 정책에 대한 대항조치가 없다. 이는 해외자본에 관해 또 하나의 우려를 낳았다. 중국이 어느 날 자본 유출을 제한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다른 국가들은 중국이 완전한 자본 이동성 원칙을 시행해, 자유로운 자본 유입을 환영할 뿐만 아니라 유출될 수 있도록 하길 바라고 있다. 부자라는 ‘원죄’(原罪) 세 번째 딜레마는 민간 투자 자본을 보유한 중국인의 신변이 위협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민간 자본은 늘 ‘원죄’ 취급을 받았다. 중국에는 민영 기업들이 권력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이해가 깔렸다. 고위직 임원들과의 관계로 만든 ‘중간영역’에서 비즈니스를 함으로써 성장해나간다. 그들의 부는 깨끗하지 못하다. 정부는 민간 부문의 ‘왕’들이 탈세 및 사기성 부기 등 정부가 허락해준 빈틈을 활용한다고 간주한다. 빈틈은 대단히 많다. 정부가 돈이 부족한 경우는 별로 없다. 민영 기업이 정부 고위직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부가 돈이 부족하거나, 민영 기업들이 의존했던 정치인이 부패혐의로 체포되거나 은퇴할 경우, 자본가들은 더는 안전하지 못한 것이다. 중국은 사모 활성을 위해 2014년 국영기업 개혁안을 발표했다. 많은 민간 기업인들은 공산당의 표적이 될 것을 우려하게 됐다. 중국을 떠나기 시작하고 다수의 해외투자를 하게 됐다. 이로 인해 최근 몇 달간 외화 보유액이 급격히 감소해 외환 통제가 강화됐다(이코노미스트지 9월 28일 기사에 의하면 6천억 달러 상당의 유출이 발생했다고 한다). 담보 브로커 수십 명이 돈을 국외로 빼돌린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자본과 권력 간의 관계는 극도의 긴장 상태에 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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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영기업이 민영화된다면 소유권은 혼합소유제로 혹은 여전히 국영으로? 이런 문제는 몇 년 동안이나 설왕설래했던 문제들이다. ‘국영기업 개혁 심화에 대한 지침’이라는 제목의 양면성을 가진 다큐가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와 국무원에서 마침내 나왔다. 어떤 분석가들은 이 다큐에 대해 국영기업개혁제안의 목적이 국영기업을 확장하고 강화하려는 데 있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정부가 자유시장경제에 기초하여 국영기업 민영화를 촉진시키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오는 이유는 개혁안이 포함하고 있는 상충하는 언급 때문이다. 혼합소유제 국영기업 개혁안의 하이라이트는 주요목표로 '혼합소유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산의 다각화를 위해 다른 국가소유자본이나 비국가소유자본을 적극적으로 소개한다. 국가소유자본은 절대적 통제, 상대적 통제 또는 자산참여를 유지할 수 있고, 시장에서 기업경쟁력제고를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제안 2조에서 계속하기를 “공적인 소유가 여전히 우세한 지위이다. 그것이 기본적인 경제 시스템을 대표하며, 그것의 강화와 발전이 초점이다. 공공적이지 않은 경제는 종속적인 지위이다.” 2조에서 '혼합소유제'는 사기업들이 국영기업의 주를 살 수 있고, 주주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이어진다. 그러나 국영기업자산의 대부분은 국가소유자본으로 구성된다. 사기업은 다만 종속적 지위이며, 그들은 의사결정 권력을 가질 수 없다. 개혁안이 나온 뒤, 오해를 피하기 위해, 국영 신화사는 “우리는 명백하게 민영화를 반대해야 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기도 했다. 시장지향 개혁안의 두 번째 중요한 포인트는 국영기업을 “시장 지향 운용 메커니즘”으로 훈련시키고 “당의 지도를 강화하는 것”이다. 다큐는 시장지향을 14번 언급하면서 그것이 주요 주제임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14조는 이렇다. “당이 국영기업의 정치적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 국영기업의 기업지배구조에서 당의 법률적 지위를 명확히 하라.” “당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이 마오 아래에서의 정치 경제적 지향이었다. 자오쯔양 총서기는 정치와 비즈니스를 분리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그래서 기업에 대한 당의 통제를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이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물거품이 되었다. 민간기업 개혁 개혁안의 세 번째 포인트는 “큰 발전 가능성과 성장잠재력”을 가진 사기업이 개혁의 중요 타깃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18조의 제안은 국가 소유자본이 다양한 방식으로 민간기업에 투자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 시장 지향적 접근을 통해 핵심영역, 즉 공공서비스, 하이테크, 환경보호와 전략산업 등에서 큰 발전가능성과 성장잠재력을 가진 사기업에 자산투자를 함으로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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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최대 부호 리카싱(李嘉誠) 청쿵프라퍼티홀딩스(長江實業地産) 회장의 중국시장 철수를 둘러싸고 중국에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또한 이번 사건으로 중국의 권력(정계)과 자본(재계) 사이에 긴장이 고조됐다. 지난달 12일 관영 신화사 계열 국책연구기관 ‘료왕싱크탱크’(瞭望智庫)에서 중국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국자위) 상업기술품질센터 뤄톈하오(罗天昊) 연구원이 ‘리카싱을 도망가도록 놔둬선 안 된다’는 제목의 논평을 발표했다. 이 논평으로 리카싱 철수에 대한 비난여론이 들끓자 같은 달 21일 인민일보는 “리카싱이 어려움을 함께 할 수 없다면 만류할 필요 없다”며 진화에 나섰다. 리카싱에 대한 험악한 분위기가 외국인 투자 유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속내였다. 이번 사건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된다. 하나는 자본유입은 환영하되 자본유출을 적대하는 중국의 이중적 태도를 드러냈다는 점, 다른 하나는 권력과 자본의 대리전 양상을 띈다는 점이다. 중국자본과 홍콩자본의 밀월관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실시한 1979년 당시 개방은 곧 외국자본 유치를 의미했다. 이후 1990년대까지 외국자본 유치의 핵심은 홍콩자본이었고 그 다음이 대만자본이었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세계 각국의 화교자본으로 가능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당시 중국입장에서 홍콩자본은 당연히 외국자본이었다. 홍콩은 1997년 7월 중국에 반환됐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선언한 1978년부터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전까지 홍콩은 중국에 반환되기 전이었거나 반환 초기였다. 홍콩의 지정학적 위치와 경제적 특수성도 홍콩자본이 중국자본과 구분되는 요인이었다. 필자는 ‘중국 통치위기의 기원: 경제편’에서 홍콩의 지정학적 우위를 분석한 바가 있다. 중공 집권 후 홍콩은 중국의 국제 브로커가 됐다. 서방세계와 단절된 중국의 유일한 대외창구이자 외국자본과 기술을 들여오는 수출입 기지였다. 홍콩 상인들은 대중국 투자를 주도하며 중국의 대외개방을 이끄는 안내자 역할을 했다. 당시 중국이 유치한 외국자본의 70%가 홍콩자본이었고 이어 대만, 일본자본 순이었다. 상황은 2001년 중국의 WTO가입 후 달라졌다. 중국의 수출입 기지로서 홍콩의 위상은 점차 약화됐다. 역외금융업도 서서히 쇠퇴했다. 따라서 중국자본과 홍콩자본을 구분할 근거도 약해졌다. 그러나 중국은 홍콩자본을 여전히 외국자본으로 취급했다. 중공 이익집단에게 돈세탁과 자본도피의 창구가 필요했던 까닭이었다. 홍콩으로 유입된 중국 지하자금은 돈세탁을 거쳐 홍콩자본으로 둔갑했다. 필자는 ‘인민일보 10대 외자 출처의 비밀’라는 기고문에서 2013년8월12일자 인민일보 기사 ‘외국자본은 중국에서 이탈한 적이 없다’(外资并未大规模撤离中国)에 실린 그래프를 분석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따르면 중국으로 유입된 외국자본 중 홍콩에서 유입된 자금이 397억1500만 달러로 전체의 65%를 차지했다. 그러니까 중국 권력층인 중공으로서는 홍콩자본과 홍콩의 재벌기업이 피붙이 같은 존재였다. 자수성가한 홍콩 중견기업도 중공의 지원을 받고 성장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였다. 중국경제가 어려워지자 미련없이 철수한 리카싱에 대해 중국 권력층이 격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본이동을 보는 중국의 이중적 태도 최근 중국정부는 폭락하는 증시를 지탱하기 위해 시장에 개입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이를 지나친 개입이라고 지적하면서 중국증시를 ‘사나운 개가 물고 있는 고기만두’에 비유했다. 중국정부를 사나운 개로 묘사하며 경계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리카싱을 도망가게 놔둬선 안 된다”는 논설은 불에 기름부은 격이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중국정부가 국제 자본이동을 통제하려 한다고 질타했다. 국제 자본이동은 투자•대출•원조•수출입•여신거래•외환거래•증권발행 및 유통 등의 방법으로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자본이 이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자본이동은 방향에 따라 자본유입과 자본유출로 나뉜다. 국제사회의 통념상 자본유입과 자본유출은 모두 자유롭다. 미국과 유럽각국 등 WTO회원국은 2001년 중국의 WTO가입을 승인하면서 추후 금융시장 개방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아무도 중국이 자본유입만 환영하고 자본유출은 적대하리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 이전까지 그런 국가는 없었기에 뾰족한 대응책도 없었다. 현재 국제 자본시장은 중국에 자유로운 자본이동을 허가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중국에서 자본이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사회적 통념으로도 존재한다. 중국여론은 민간자본에 대해 원죄의식이 있다. 정경유착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민중은 대다수의 민영기업이 권력과 결탁해 무풍지대에서 성장하며 자산을 축적했다고 본다. 정부는 정부대로 특혜가 없었으면 민영기업이 성장하지 못했다고 여긴다. 이런 특혜 하에 중국 민영기업에서는 탈세•조세회피•회계장부조작이 관행으로 굳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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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는 중국 정부가 ‘증시 보위전’을 벌이는 걸 알고 있지만, 또 다른 사실에 대해서는 소수 경제계 인사만이 알고 있다. 8월부터 시작해 보위전의 주요 전장은 이미 외환시장으로 옮겨졌다. 이에 신흥 경제범죄는 ‘악의적 공매도’뿐 아니라 ‘악의적 환투기’도 추가됐다. 작전 상대는 외부 세력이 아니라 중공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권력자, 관료, 재계 부호이다. 줄줄 새는 정부 자금 중국 정부가 세계에서 환영을 받는 이유는 정부가 보유한 두둑한 자금, 즉 보유외환 때문이다. 사실 이 자금은 중국 정부의 자산이 아니며, 중앙은행이 외환관리제도를 이용해 국내 외국 자본, 외무기업 및 외환을 보유한 각종 기관, 개인 예금주에게서 ‘빌려’ 온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낮은 비용으로 빌릴 수 있기 때문에, 대다수 중국인을 포함해 중국 정부나 외국 투자자는 이를 중국 정부의 자산, 즉 ‘중국 인민의 자산’으로 여겼다. 당시 일부 사람이 외환보유액을 모든 중국 인민에게 고르게 나눠주자고 주장하자, 저우샤우촨 중앙은행장이 어쩔 수 없이 전면에 나서 진실을 설명했다. “외환보유액은 모두 중앙은행의 부채와 대응한다. 다만 사람들이 믿지 않을 뿐이다.” 현재 이 ‘대차관계’에 말썽거리가 생겼다. ‘채무’ 측이 형세를 비관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6월부터 중국 정부가 강력한 ‘증시 구제’ 조치를 취한 이래로, 그들은 집정자가 중요한 순간에 본색을 드러내는 걸 발견했다. 즉, 그는 시장 규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않고, 약속이나 한 듯 ‘집단행동’에 나서, 외환시장에 몰려들어 달러를 환전해 ‘대출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중앙은행의 달러 보유액은 계속 유출돼,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중국 외환보유액, 3000~4000억 달러 감소 시 심각한 자금 부족 직면할 것 정상적인 상황에서, 중국의 외환 거래량은 일일 100억 달러 정도이다. 2014년 6월, 중국의 외환보유액은 3조 9,900억 달러에 달했지만, 1년이 채 안 된 올해 7월 말, 외환자산은 3조 6900억 달러로 3000억이 줄어들었다. 올해 8월 11일 이후, 외환시장 거래량은 일일 300억 달러 이상을 유지했다. 8월 하순, 3일간의 기록은 매우 놀라운 정도이다. 8월 26일 489억 달러, 8월 27일 385억 달러, 8월 28일 512억 달러가 거래됐다. 만약 이렇게 빠른 유출이 평소 상태가 된다면, 중앙은행은 외환 고갈에 직면해 더는 통화 유동성을 내보내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자금량 지원이 필요한 증시는 자금 단절에 직면하고 부동산 거품도 터질 것이다. 이 결과를 막기 위해, 중국 중앙은행은 할 수 없이 각종 방법을 동원해 자금 유출을 완화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시장에 위안화를 주입해 시장 유동성을 보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대규모 달러로 위안화를 사들여 위안화 환율을 보증한다. 또한 각종 방법을 동원해 외화 환전의 난이도를 높이고 있다. 9월 1일, 중국 중앙은행은 외환 선물계약 설정에 관한 부가 조건을 선포해, 투자자가 위안화 공매도 시 드는 비용을 증가시켰다. 신규정은 고객에게 위탁받아 외환 선물을 구매하는 금융기관이 중앙은행에 거래 대금의 20%를 외환준비금으로 1년 동안 납부하도록 요구했다. 이 규정은 10월 15일에 효력이 발생한다. 이 규정을 실질적으로 공매도자에게 8:1의 비율로 달러를 구매하게 한 것이다. 중국자본 은행업계의 고위층에 따르면, 중국은행, 중신은행을 포함한 일부 대형 중국자본 금융기관이 기업고객의 대규모 외환거래에 대한 내부 심사를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동시에, 중국 금융감독 기관 및 법 집행 기관은 불법수단을 통해 타인의 해외 자금 유출을 대리하는 기관을 대대적으로 단속하고 있다. 위의 모든 조치는 금융 위험을 방비하기 위해서이다. 채무 측 반부패 공포에 떨어 중국 정부가 외화 유출을 통제할 때 나름대로 논리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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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제 사회는 대체로 중국 경제가 ‘쇠퇴’한다고 보고 있다. 기존의 ‘번영’과 비교할 때, ‘쇠퇴’는 정말 천양지차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소로스는 “중국 경제의 쇠퇴는 제3차 세계대전을 야기할 것”이라는 밝혔고, 뉴질랜드 재무장관은 중국-뉴질랜드 경제는 샴쌍둥이와 같아서 “중국 경제가 경착륙하면 뉴질랜드의 쇠퇴 위기는 더욱 커질 것”이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다만 쇠퇴의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어떤 이는 반(反)부패로 인한 정국 불안이 경제 쇠퇴를 야기했다고 생각하고, 다른 이는 중국 정부의 증시 간섭이 직접 경제 위기를 불러왔다고 여긴다. 사실 이런 논의들은 중국 경제를 진지하게 생각한 게 아니다. 중국 경제는 체질상 번영을 지속하기 어렵고, 중국은 세계 경제를 구하는 노아의 방주가 아니다. 유럽·미국·남미·아프리카의 같은 꿈: 중국 정부가 지갑을 여는 것 많은 중국인이 중국의 실업률 증가와 나날이 힘들어지는 서민 생활로 인해 중국 지도자가 주창한 ‘중국의 꿈(中國 夢)’이라는 허상을 비웃고 있을 때 국제 사회는 또 다른 ‘중국의 꿈’을 꾸고 있었다. 즉 ‘중국 정부가 자금을 풀고 투자해 자국의 경제 성장과 취업률 상승을 이끈다는 것’이다. 이 꿈은 공허한 것 같지만 오히려 현실적이다. 세계에서 중국 같은 경제 이야기를 가진 곳은 여태껏 없었다. 30년 동안 국민 소득이 연평균 10% 성장했고, 중국 인민 수억 명이 빈곤에서 벗어났으며, 빈털터리에서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전 세계 GDP의 15%, 전 세계 GDP 성장의 25%를 담당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나라의 위정자가 4조가 넘는 중국의 세계 최대 외환보유액 중 일부만이라도 자신에게 나눠주기를 오매불망 바라고 있다. 실제로 중국 정부는 지갑 끈을 열어 대규모 해외 투자를 진행 중이다. ‘2013년 중국의 대외직접투자 통계 공보’에 따르면 2013년 말까지 1만 5300명의 경내 투자자가 184개 국가와 지구에 2만 5400개의 대외직접투자 기업을 설립했다고 한다. 유엔무역개발회의 데이터에 따르면 2013년 중국은 미국의 3383억과 일본의 1357억에 이어 이미 세계 제3대 대외 투자국이 되었다. 2005년부터 2014년 상반기까지 중국의 해외직접투자 누계액은 5153억 달러, 프로젝트 투자 누계액은 3551억 달러였다. 투자업계에서는 2014년 중국의 해외투자가 일본을 초과해 1조 달러를 돌파할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중국의 해외투자는 부국과 빈국을 모두 동일시하는데 이는 투자은행계의 분포를 보면 알 수 있다. 직접투자와 프로젝트 투자 중 에너지 산업이 약 50%의 비중을 차지하며, 금속광산업도 직접투자의 주요 대상이다. 또한 해외 프로젝트 투자의 또 다른 중점은 산과 물에 길과 다리를 놓는 교통산업이다. 이는 모두 개발도상국에 투자가 돌아갔는데 중국의 기간시설 건설능력은 ‘비교적 우위’에 있어 중국 투자가 현지 기간시설의 개선과 취업률 증가를 이끌기 때문이다. 미·영·독은 최근 중국의 투자가 가장 빠르게 늘어나는 나라이다.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중국의 대미 직접투자는 714배 증가했다. 현재 미국 50개 주 가운데 35개 주가 중국의 직접투자를 받았고, 이중 투자를 가장 많이 받은 3개 주가 바로 뉴욕 주·캘리포니아 주·텍사스 주이다. 중국의 투자 범위도 상당히 넓은데 에너지·부동산·제조업·금융·서비스업·정보·전자·생명공학·녹지 프로젝트 등 다양하며 미국에 8만 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독일도 중국 투자의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2012년 독일은 중국의 대유럽 FDI 항목 중 38%를 독점해 영국과 프랑스의 합계를 뛰어넘었다. 중국의 양국 투자율은 각각 22%, 5%였다. 독일 투자청(GTAI) 데이터에 따르면 2013년 중국이 독일에서 직접 투자한 프로젝트 수는 139개였다. 이는 미국과 스위스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수치다. 독일 Das Statistik-Portalke Next 사이트에서 인용한 데이터를 보면 2014년 말까지 중국은 독일에 2500개의 기업을 세워 독일에 1만 2000개의 일자리를 제공했다. 투자업계가 중국 시장에서 거둔 수익도 적지 않은데 2014년 투자은행은 중국 시장에서 60억 달러라는 기록적인 수익을 거뒀다. 물론 미국과 EU 국가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중국 이외에 어디에서 이렇게 성장하는 ‘파이’를 찾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희망의 빛이 눈앞에서 빛나고 있다. 독일 메르카토르 중국연구 센터가 미국 컨설팅 업체인 로디움 그룹과 협력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중국은 세계 최대 해외 투자자가 될 것이며, 중국의 전 세계 역외 자산은 현재 수준의 3배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즉 현재의 6조 4000억 달러에서 약 20조 달러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중국은 이미 중요한 글로벌 투자자가 됐으며, 10년 후 대외직접투자의 증가를 이끄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으로 희망한다”고 말했다. 기대가 높을수록 실망도 커지는 법이다. 중국의 경제 쇠퇴에 전 세계가 크게 실망한 이유는 중국이 세계 경제를 구할 것이라고 너무 크게 기대했기 때문이다. 베이징, 세계 경제 구할 능력 없어 중국 정부의 본심은 세계 제2대 경제 강국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세는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특히 시진핑-리커창의 상황은 후진타오-원자바오보다 훨씬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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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이 눈물 흘리며 톈진에 묻다. 22년 전에 일어난 칭수이허 대폭발은 선전시 안마오 위험물 보관운송회사에서 공공연히 위험물 보관 규정을 어겼기 때문에 일어났다. 당시 소방안전을 책임졌던 왕주밍 공안국 부국장은 권력 지대추구를 이용해 직접 그 기업의 이사장을 맡았다. 이 비극적 사고는 ‘중국 대형사고 계시록’에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돼, 유독 화학물질 운영업계의 필독서가 되었다. 하지만 당신들은 왜 아직도 나의 오래된 길을 걷고 있는가? - 이 글을 선전과 톈진의 대폭발에 희생된 영혼에 바친다. 각종 정보를 살펴보면, 8.12 톈진 빈하이 대폭발은 1993년 선전 칭수이허 대폭발과 매우 유사하며, 비극을 일으킨 주요 원인도 동일하다. 즉 권력 지대추구의 비호 아래, 기업이 유독 화학물질 취급 규정을 위반한 것이다. 톈진의 아픔은 선전의 잊을 수 없는 상처 톈진 대폭발의 참혹한 현장 사진을 본 후, 난 22년 전인 1993년 8월 5일, 선전 칭수이허에서 일어났던 대폭발을 곧바로 생각해냈다. 내가 기억하는 당시 사고는 하늘로 솟아오른 2개의 버섯구름과 핏빛으로 물든 하늘, 심하게 휘어진 철로, 근처의 건축물 잔해와 어슴푸레 보이는 잘린 팔다리 등이었다. 첫 번째 폭발 진동은 홍콩까지 전해졌다. 당시 우리 집은 원진두 세관 근처였는데, 문과 창문이 모두 흔들렸고, 윙윙대는 소리가 몇 분간 계속되면서 땅이 흔들렸다. 난 큰 사고가 난 걸 직감하고 불빛을 따라 현장으로 달렸다. 하지만 현장은 이미 봉쇄됐고, 멀리서 폭발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폭발의 충격이 방향을 바꾸자 불덩어리가 하늘로 치솟았고, 칭수이허 창고지역 뒤편의 칭산은 검은 연기와 불빛으로 휩싸였다. 현장 안전요원은 구경꾼들에게 즉시 떠나라고 권고했다. 만약 당시 바람이 가스 저장탱크 외부의 철근을 통과해 2층까지 들어왔다면, 선전 특구는 지도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당시 선전 칭수이허 폭발은 주거지와 비교적 먼 창고지역에서 일어났고, 구조에 나선 3천 명의 무장경찰이 맹렬한 화염 속에서 시멘트 방화벽을 세워, 폭발이 기타 위험물 보관 창고로 파급되는 걸 곧바로 막았다. 비록 사망자 수는 정보에서 발표한 수보다 훨씬 많았지만, 톈진에 비해서는 적었다. 톈진 폭발사건의 심각성에 SNS 시대의 파급 효과까지 더해져 조성된 사회 공포와 그로 인한 분노는 선전 칭수이허 대폭발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미 드러난 각종 소식을 살펴보면, 이 사고의 원인과 사후 대응, 반영돼 나온 문제는 22년 일어난 선전 칭수이허 대폭발과 기본적으로 비슷하다. 1993년~2015년의 22년 동안, 중국은 WTO 가입, ‘평화굴기’로 상징된 경제번영 및 ‘세계 공장’의 발전과 쇠락을 경험했다. 세계는 1989년 잠깐의 대중국 경제제재 이후 다시 한 번 중국을 열정적으로 껴안았고, 현재 또다시 냉대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 22년 동안, 중국은 수백 명의 억만장자를 배출해 전 세계에 널리 발자취를 남겼다. 유일하게 변하지는 않은 것은 체제와 점점 더 격렬해지는 권력 지대추구이다. 석유 중화학 공업은 중국 경제의 고속 성장을 이끈 원동력 중 하나이다. 중화학 공업에는 적지 않은 인화성, 폭발성 위험물이 사용되기 때문에, 생산 시설은 환경 평가를 거쳐야 하고, 생산 경영은 공안부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중국의 환경 평가는 일찍부터 부패의 온상이 되었고, 위험물 경영 심사도 지대추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 중국에는 2,489개의 유사한 중화학 공업 프로젝트가 거주지에 분포돼 있다. 이는 2,489개의 시한폭탄이 숨겨진 것과 같아, 중국인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의 위협 아래 도망갈 곳이 없는 상황이다. 톈진 8.12 대폭발 배후의 권력 그림자 톈진 빈하이 대폭발 사고 후, 가장 의심스러운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루이하이 국제 창고 부지는 규정을 명백히 위반 2001년 국가 안감국은 ‘위험 화학물질 경영기업의 개업 조건과 기술 요구’를 정식 발표했는데, 그중 중대형 위험 화학물질 창고는 주변 공공건물, 간선도로, 광공업 기업 등에 최소한 1000m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명확히 규정했다. 언론 폭로에 따르면, 루이하이 국제는 4만 6226㎡ 면적의 야적장을 사용했는데, 500m 부근에 주요 간선도로인 하이빈 고속도로와 진하이 경전철이 있었고, 600m 근처에 완커하이강청 3기 주민 주택이 위치했다. 시간상으로 볼 때, 루이하이 국제 위에진루 야적장이 위험물 야적장으로 개조된 것은 2014년이며, 그전에 이미 주변의 하이빈 고속도로, 완커하이강청, 진하이 경전철 등 프로젝트는 모두 준공된 상태였다. 위의 내용은, 루이하이 국제 야적장 개조 프로젝트에서 부지 선정에 필요한 환경 평가 과정이 규정을 위반해 조작됐다는 걸 설명한다. ‘톈진 루이하이 물류 환경 문서’에 따르면, 루이하이에 환경평가를 한 곳은 톈진시 환경보호 과학연구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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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인 서양화 주장, 계몽 운동과 어려운 문체 대신 일상 생활 쓰이는 말을 그대로 작품에 쓰자는 '백화 운동' 추진 역사상 인류사회에서 역사적 인물 한 사람을 놓쳐서 끝없는 아쉬움을 남긴 많은 사례가 있다. 일의 공로가 주가 되어 놓친 역사적 인물 장쥐정(張居正)을 예로 들자면 사람들은 만력(萬曆) 중기 이후 명나라 통치 사정이 점점 나빠졌기 때문에 ‘세상에 다신 없을 장쥐정’이라는 감탄을 내뱉었다. 그러나 생각에서부터 역사의 갈림길을 바꾸고 싶어하는 일반 사람들은 그의 가치를 알기 어렵다. 다음은 <중국인 후스즈>를 읽은 감상이다. 후스와 천두슈, 중국 현대화의 양대 표지 후스의 사상에 대해 연구한 학술 논문은 꽤 많다. 하지만 이 시대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열심히 책을 읽는 사람들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류나이슌(劉乃順)과 티엔총슈에(田崇雪)라는 두 명의 작가는 후스의 일생을 장편의 문학 다큐멘터리 극본으로 쓸 예정이다. 다시 말해 TV드라마라는 형식을 통해서 더 많은 중국 사람이 후스를 알게 하고 이해하도록 하고 싶은 것이다. 작가는 역사 재현이라는 취지로 이 책은 결코 해학적으로 서술한 책 따위가 아니라 대략 모든 이야기가 모두 본질을 가지고 있다. 역사에 흥미는 있지만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어하지 않는 현대 중국인에게 이 책은 한 권의 좋은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책 속 후스와 진독수(陳獨秀) 두 사람의 길은 다르지만 우정의 끈은 끊어지지 않은 ‘은원지교’에 매우 흥미가 있다. 진독수는 만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5·4운동은 중국 현대사회 발전에 있어 필연적인 산물이다. 맞든 틀리든 간에 그 몇 사람에게 잘못을 돌리면 안됐다. 그러나 채원배(蔡元培)선생, 스즈(適之)그리고 나는 바로 그때 사상언론에서 주요 책임을 지는 사람이었다.” 이 말도 물론 괜찮다. 하지만 사상에 영향을 준 결과로 말하자면 진씨(陳氏)의 영향이 매우 크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1910~1920년대에 자유주의, 무정부주의, 니힐리즘 그리고 사회주의 등 각종 사조가 한꺼번에 중국에 들어왔고, 당시와 그후 20여년간 중국 청년 지식인 대부분은 전 세계에 성행하는 좌경 사조와 사회주의 사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후스가 살던 시대는 때마침 중국 현대화가 사거리 프로세스를 배회하던 시기였다. 여기서 ‘사거리’라는 것은 중국 지식 엘리트들이 서양의 양대 정치 사조에 취사선택하던 시기를 말한다. 그때, 영미 제도를 숭상하는 자유주의 정치사조, 프랑스대혁명과 러시아10월 혁명을 숭배하는 사회주의 정치 사조가 동시에 중국에 들어왔고, 당시 중국 지식계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그 후 중국 정치노선의 선택, 즉 영국과 미국이 대표하는 건전한 발전과 프랑스와 러시아가 대표하는 격동적인 발전 방식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후스는 미국에서 10년 동안 유학하는 동안 실험주의 철학의 대가인 두웨이(杜威)를 스승으로 모시며 자유주의에 점차 깊이 스며들었고 평생 미국 민주정치에 정례를 표했다. 줄곧 미국을 근대화의 성공 전형으로 여겼으나 낭만주의에 심정을 관철시킨 한결 같은 프랑스대혁명에는 비판적인 태도를 지니며 ‘낭만병’을 ‘게으름병’이라고 꾸짖었고, “정확한 방법은 정확한 건축 재료 위에 짓는 것이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만년 까지 후스는 처음의 소망을 바꾸지 않았다. ‘미국 개국은 단지 3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인데, 300여 년 동안 그렇게 큰 지역을 개척하였고, 문화 수준이 가장 높고 사람들의 생활이 가장 안락하며, 국력이 가장 큰 국가가 된 것은 인류 역사의 기적이다!’ 일생을 후스와 친하게 지냈던 진독수는 오히려 프랑스대혁명의 열정적인 숭배자였습니다. <프랑스인과 근세문명>이라는 책에서 그는 ‘근대문명의 특징은 가장 고대의 도리(道理)로 변할 수 있어서 민심과 사회가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중요한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인권설이고, 두 번째는 생물진화설이며 세 번째는 사회주의다. 이 세 가지 근대문명은 모두 프랑스 사람이 하사한 것이다. 세계에 프랑스가 없다면 어쩌면 오늘날 어둠에 대해서 여전히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고 썼다. 진독수는 프랑스인의 혁명 정신을 추앙했고, 프랑스 문학 또한 매우 찬양한다. <유럽문예담>에서 프랑스 문학 예술의 각 유파 예를 들어 고전주의, 현실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를 중국에 소개하였고, 프랑스문학에 대한 중국인들의 흥미를 일으켰다. 러시아 10월 혁명이 발생한 후, 진독수는 열정이 충만하게 <러시아혁명과 우리 국민들의 착오>라는 책을 발표했다. ‘이번 혁명은 민주주의의 승리다’고 찬양했고, ‘18세기 프랑스의 정치혁명, 20세기 러시아의 사회혁명 당시 사람들은 모두 온갖 욕설에 대치하였으나, 그 후의 역사가들은 모두 그들을 인류 사회 변동과 진화의 관건으로 여겼다’고 단언했다. 후스와 진독수 두 사람은 1910~1920년대의 중국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후스는 자유주의를 깊게 믿었고, 미국의 민주를 추앙하며, 5·4시기에 실험주의를 힘껏 홍보했다. 표면적으로는 그의 지도 교수인 두웨이의 실험주의 철학 이론을 널리 퍼뜨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미국 민주제도 이론의 정수를 발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중국인들에게 미국의 민주제도를 소개할 때, 후스는 특히 미국 민주의 정수는 여전히 국민에 의한 정치이며, 이것은 마침 그 당시와 그 후에 미국 민주제도를 연구한 사람들이 비교적 쉽게 지나칠 수 있는 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진독수는 프랑스대혁명에서부터 러시아의 10월 혁명까지, 루소의 급진적 민주주의부터 레닌의 사회주의까지 걸어왔으며,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 및 초대 서기가 되었다. 그는 단지 러시아의 방법을 모방하는 방법과, 혁명이라는 수단을 이용해 낡은 세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제도를 강력하게 추진해야만 중국이 출구를 찾을 수 있다고 깊게 믿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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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부호가 미국으로 도망치는 사례는 부지기수지만 중난하이의 이번 주인을 걱정하게 만든 건 링완청(令完成)과 궈원구이(郭文貴) 두 사람이 단연 으뜸이다. 앞서 링완청은 형인 링지화가 훔친 2700건의 기밀문서를 건네받아 외국으로 도망쳤지만 아직 행적이 드러나지 않았다. 궈원구이는 중국 정부의 일급기밀을 손에 넣었다고 자처하면서 보쉰 기자와의 인터뷰에 여러 차례 응한 후 종적을 감췄다. 현재 궈원구이의 종적은 확실치 않지만 링완청의 행적은 ‘뉴욕타임스’ 포시드 기자에 의해 만천하에 드러났다. 중국 차이신망은 ‘뉴욕타임스’가 제공한 단서를 토대로 Google 맵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검색해 중국 사람들에게 공개했다. 이미 확인된 세부 내용 아래 세부 내용은 출처를 명기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1. 링완청의 호화주택 상세 내용 포시드 기자는 ‘링지화 동생 미국으로 잠적, 정치적 보호 찾나’라는 기사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부동산 기록을 살펴보면 링완청은 시에라네바다 산맥 아래 7800제곱피트(약 725㎡)의 주택을 보유했다.” 단 주소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링완청의 호화주택 주소는 다른 기사에서 이미 언급되었다. 올해 3월 7일 중국 ‘시나 해외 블로거’ 야오훙언은 ‘미국 호화주택은 공짜로 줘도 살 수 없다’(blog.sina.com.cn/yaohongen)라는 글에서 이 호화주택의 주소를 폭로했다. “Wang Cheng으로 검색하면 그가 보유한 캘리포니아 루미스의 부동산을 찾을 수 있다. 소유권(Ownership)을 보면, Li Ping이라는 사람과 함께 각각 50%씩 소유하고 있다. Wang Cheng과 Li Ping은 누구인가? 물론 유명인으로, 누구와 관련됐는지 쓴다면 아마 이 글은 게재하지 못할 것이다. 주택 주소는 6105 Terracina Ct, Loomis, CA 95650으로 루미스는 캘리포니아의 주도 새크라멘토의 동북부에 위치한다.” 야오는 블로그에서 링완청이 미국에서 링완청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Wang Cheng이라는 이름의 비자를 사용한다고 폭로했다. 차이신망의 보도에 따르면 외부 사람들은 링완청이 ‘왕청’이라는 가명으로 사업한 것을 알고 있다고 한다. 그의 아내 리핑은 산시 사람으로 CCTV 앵커 출신이다. 따라서 위의 두 사람은 의심할 여지 없이 링완청 부부이다. 2. 도주 시기는 2014년 9월 이전에 이미 결정했다 올해 8월 4일 차이신망은 이렇게 폭로했다. “56세의 베이징 상인 링완청은 지난해(2014년) 가을 실종됐다. 당시 일부 소식은 그가 링지화의 아들 링후젠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고 전했다.” 이때 나는 이를 거의 믿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다음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차이신망은 2014년 11월 26일 ‘링완청의 부 이야기’ 기사에서 이렇게 밝혔다. “둘째 형 링정처가 2014년 6월(정확한 날짜는 6월 19일) 중앙기위 감찰부 사이트에 심각한 기율위반으로 조직의 조사를 받은 지 4개월 후 55세의 베이징 상인 링완청도 인신의 자유를 잃었다.” 외부 사회에서는 이 내용을 인용해 그의 ‘해외 도피’를 부정했다. 차이신망이 ‘인신의 자유를 잃었다’고 한 것은 그가 해외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걸 뜻하는지도 모르겠다. 시끌벅적한 생활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이민생활을 ‘이민 감옥’에 갇혔다고 말하곤 한다. 올해 8월 4일 차이신망은 장위안안 워싱턴 특파원의 ‘링완청 미국 은둔 확인, 캘리포니아에 725㎡ 저택 소유’ 기사를 보도했다. 그중 일부 내용을 보면 링완청 부부가 미국으로 달아난 시간을 추측할 수 있다. “부동산 판매망에서 발췌한 내용을 보면 링완청 부부는 2013년 9월 250만 달러에 이 부동산을 매입한 후 약 반년 후인 2014년 1월 22일 389만 달러에 매물로 내놓았다. 이후 가격이 떨어지자 팔지 않았고 2014년 5월 23일 매물을 취소했다. 2014년 9월 16일 다시 매물로 내놓았지만 275만 달러에 팔지 않았고 2014년 11월 3일 매물을 취소한 후 더는 팔지 않았다.” 링정처가 6월 19일 조직의 조사를 받은 후 2개월 후인 9월 16일 링완청은 미국에 나타나 부동산 매도를 계획했다. 아직 해결해야 할 몇 가지 퍼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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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의 강력한 증시 구제를 살펴보면 그 방법은 정말 다른 나라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이다. 마침내 7월 9일 증시 방향이 급변해 주가지수가 빠르게 상승했고, 7월 13일까지 상승세를 유지했다. 중국의 주식 사태가 그리스 채무 위기보다 심각하다고 우려하던 언론은 순식간에 국제 언론에서 사라졌다. 여론이 이런 증시 구제가 중국 정부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닌지, 중국의 미래 경제 발전에 정말 이로운 것인지 토론하기 시작할 때 나는 오히려 다른 문제를 생각했다. 응급조치의 시작에서 볼 때 베이징은 사실상 금융위기에 대응하는 예행연습을 한 차례 겪은 것과 같다. 증시 구제 조치로 드러난 정부의 독재 본색 이번 증시 구제는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단계는 증감위, 중앙은행에서 할당했기에 조치도 비교적 적었다. 6월 28일 중앙은행이 공포한 기준금리 및 지준율 인하는 상당한 조치로 여겨졌지만, 증시는 오르지 않고 오히려 하락했다. 7월 6일 이후 3일간 증시가 폭락하자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들었다. 증시 상황이 국가 안보 분야로까지 격상된 것이다. 증감위, 은감위, 중앙은행, 재정부, 국자위 등이 증시 구제에 나섰을 뿐 아니라 공안부도 ‘악의적인 공매도 세력을 철저히 조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렇게 강력하게 증시를 구제하는 데는 물론 시진핑 주석의 명령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국가적 시스템’을 발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7월 8일 정오, 증감위는 긴급히 ‘증감발 (2015) 51호’를 공포해 두 가지 조치를 내놓았다. 첫째, 6개월 이내에, 상장기업의 지배주주와 주식을 5% 이상 보유한 주주 및 이사, 감사, 고위층은 2차 시장을 통해 해당 기업의 주식 수를 줄일 수 없다고 규정했다. 위의 관련 인원이 규정을 위반하고 해당 기업의 주식 수를 줄이면, 엄격한 처벌을 받는다. 둘째, 각 증감국은 최근 6개월 내 해당 기업의 주식 수를 줄인 대주주 및 이사, 감사, 고위층을 면담하고, 그중 5억 이하로 줄인 주주는 누적 감소 금액의 10% 이상으로 주식 보유를 높이고, 5억 이상으로 줄인 주주는 누적 감소 금액의 20% 이상으로 주식 보유를 높일 것을 명확히 요구했다. ‘국가적 시스템’의 위력은 역시 대단했다. 곧바로 상장기업 655곳이 주식 수를 높이거나 재구매할 계획을 발표했고, 기타 금융기관도 소문을 듣고 즉시 움직였다. 중커증권과 자오상증권은 1억 6300만 위안을 들여 상장기업 3곳의 주식을 사들였다. 중국증권금융주식유한공사가 증자, 채권발행, 동종업 대출 등 다양한 방식으로 획득한 유동성 지원은 7월 9일까지 수천억 위안에 달했다. 국영기업의 반부패를 두려워한 국영기업 관리층은 지난해부터 증시를 통해 주식을 매매했고, 당해 경영자매수라는 국영기업 개혁을 통해 가로챈 주식을 ‘판매해’ 올 상반기 총 5천억을 현금화했다. 이 주식은 원래 고위층이 국영기업 개혁을 이용해 아무런 투자 없이 이익을 챙긴 것이다. 지금 당 중앙이 이런 주식 일부를 토해내 국난을 넘기고, 대부분 주식을 남긴 것은 그들의 사정을 봐준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 고위층의 지도 아래, ‘국가팀’은 일치단결해 주식을 사들였고, ‘공매도’하는 시장세력(즉 외부세력)과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대결을 벌였다. 마침내 2015년 7월 A주 증시 사태에서 승리해 주가지수를 떠받쳤고,(매도를 제한했기 때문에 ‘증시를 떠받쳤다’라고 할 수 없다) 중소 투자자를 포함한 국내 투자자의 믿음을 안정시켰다. 2008년 금융위기가 미국에 도래했을 때 ‘월스트리트저널’은 ‘당 지부가 월스트리트에 공수한다’는 사설을 통해 오직 중공만이 미국 증시를 구할 수 있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7년이 지난 후 당 중앙이 중국 증시에 내려와 주가지수를 성공적으로 떠받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붕괴되던 증시 회복, 시 주석 전능 이미지 공고 7월 5일, 베이징의 다양한 증시 조치가 실패하자, ‘만일 2015년 증시가 붕괴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라는 문장이 인터넷에 떠돌았다. 문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예측했다. “만약 주식시장, 부동산시장, 실물경제 및 은행 시스템에 위기가 나타나면, 다음에 충격을 받을 곳은 분명히 환율이다. 중앙은행은 예외 없이 주식시장과 환율시장 양측에 조치를 취할 것이고, 그 결과 위안화의 국제화는 여기서 끝날 것이다. 홍콩은 다시 한 번 막대한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중국은 열 차례 넘게 불마켓이 전복됐지만, 시의 결단력과 그가 이끄는 증시 조치의 용맹함은 결코 양 전임 총서기가 따라올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번의 최대 특징은 경찰과 국안이 증시 구제에 개입한 것이다. 7월 9일, 신화사는 “당일 오전 멍칭펑 공안부 부부장이 부대를 이끌고 증감위에 도착해, 증감위와 함께 최근 악의적으로 주식과 주가지수를 공매한 단서를 조사하고, 위법 행위는 강력히 제재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공안과 국안이 증시 구제에 개입해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을 했는지, 외부에서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7월 12일 보쉰이 전한 소식에 따르면, 7월 9일 오후 6시까지 국안국은 대형 지하 금융기관 286곳을 조사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약 3조 위안의 현금을 압류해, ‘국내 금융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죄명으로 국고에 환수했다는 것이다. 다만, 다른 소식통이 없는 탓에 한동안 근거 없는 소문으로 여겨졌는데, 어쨌든 참고해 볼 만 사항이다. 최근 주가 하락은 매우 위급해 뉴욕 증시까지 하락했다. 일부 국제 옵서버들은 중국 증시로 인해 세계 금융위기가 다시 폭발할 것으로 여겼고, 그 결과 ‘전능’하다고 여겨진 시진핑의 통제 능력에 강한 의심을 품었다. 하지만 7월 A주 증시 구제로 사람들은 시의 강세와 결단력을 다시는 의심하지 않았고, 시의 강세가 중국의 운명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증시 구제에 긍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대부분 중국인)은 증시 구제로 한 차례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한다. 일부 평론가들은 완곡하게 이번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이런 위기를 맞아서는 안 된다고 제안했다. 증시 구제를 찬양하는 목소리가 높지 않은 이유는 이번 증시 사태는 ‘정책성 불마켓’이 자초한 화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기에, 관영 언론은 무안하게 이 사실을 회피하면서, 오직 “중요한 순간에 당이 당과 전 국민을 인도해 재난을 성공적으로 종식시켰다”라고만 말할 뿐이다. 7월 A주 증시 구제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위기가 정권 교체를 일으키는 촉매제가 되는 동시에, 중국이 시장화 개혁을 통해 시장경제 체제 국가의 해외 투자자가 되길 희망한다. 그들은 중국이 시장화 수준을 높여 국제 사회에 융합되고, 세계 각국과의 무역 거래를 막는 장애물을 감소시키길 바란다. 이런 견해는 7월 13일 ‘파이낸셜 타임스’의 ‘중국의 증시 구제 조치가 위안화 개혁을 위협한다’는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기사에는 일부 사람들의 실망을 언급했다. “정권을 잡은 중공은 결국 중국 경제와 금융 시스템 주요 부분의 통제권을 포기할 수 없었다… 중국에 있는 외국 투자자도 종종 원망을 한다. 그들은 자신이 좋지 않은 감독 분위기에 처했다고 느끼며, 관료주의의 높은 시장 진입 장벽은 여전히 그들을 슬프게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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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국인 수백만 명이 당국의 주식 거래 장려로 주식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사실 중국 주식시장은 시작부터 중국공산당의 통제 아래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증시로 국영기업의 금고를 채우고, 국영기업 CEO들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한 일종 ATM(현금자동인출기)으로 여긴다. 그 와중에 소액투자자들의 저축이 고갈되어 버리는 것이다. “국영기업들을 가난에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증시가 필요하다.” 주룽지 전 총리가 재임 중 한 말이다. 중국 공산당은 증시를 이용해 3년 안에 국영기업을 가난에서 탈피시키려는 목표를 세웠다. 경영이 부실하고 유지가 힘든 국영기업들을 증시에 상장시키면서 일이 시작됐다. 이러한 방침으로 주식제도 개혁과 주식상장은 오랫동안 국영기업에 제한되어 있었다. 개인 소유 기업은 대중의 투자를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으로 국영기업은 증시를 투자 기회로 활용했다. 모(母)기업의 계열사들이 현금 흐름을 끌어오는 ATM기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증시는 “10년 만에 100년에 이룰 진보”를 이뤄냈다. 타이캉 생명보험 천동셩 회장에 따르면 주룽지는 모든 기업들이 증시에 상장되는 것을 허락하는 큰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더 나아가 당시 주요 아젠다가 자본시장 개혁이어서 모든 지방정부에 목표치가 할당되고, 모두가 그것을 시행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이것이 중국의 자본시장이 성립하게 된 방식이라고 천 회장은 말했다. 중국 증권시장은 탄생부터 국영기업들의 재정적 어려움을 풀어주기 위한 펀드를 조성하기 위해 탄생했다. 그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라며 “왜 우리가 우리 자본시장을 잘 운용할 수 없는가? 총리가 하라고 하면 국영기업들이 상장되기 때문이다”고 지적했다. 증권시장은 자금세탁 기구 중국 국영기업의 중요한 개혁은 소위 자사주 매점 방식이다. 외부 세계에서는 이것을 이사들이 권력을 이용해 국가 자산을 분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국영기업의 최고 중역인 공산당 고위 지도층과 그 가족들이 이 개혁의 최고 수혜자들이다. 시진핑이 최근 국영기업 이사들의 호시절을 끝내버렸다. 지난 2년간 중국 당국은 국영기업은 궁극적으로 당이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그리고 2014년 11월에 ‘주요국영기업개혁 국가위원회’가 발족했다. 18대 전국인민대표회의 후 반부패 캠페인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국영기업 임원이 해고되면서, 국영기업 임원들은 자신의 보유 주식이 부패로 분류될까봐 노심초사했다. 그들은 서둘러 주식을 현금화했다. 2014년 10월 17일까지 중국의 상장기업 임원들의 주식 보유는 상당히 감소했으며, 470억 4300만 위안(70억 6800만 달러)이 현금화 됐다. 2015년 전반 6개월 동안 국영기업은 또다시 5000억 위안(810억 달러 )을 추가로 현금화했다. 역사적 기록이다. 이들 임원들이 국영기업과 증시를 자금세탁기구로 이용했음을 보여 준다. 주주들의 투자금 고갈 1992년 이래 중국 증시는 10번 이상의 큰 부침을 경험했다. 대체로 득보다 실이 컸던 투자자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시장에서 도박을 계속하고 있다. 2008년에 A주(외국투자자들에게 개방된)시장이 70% 이상 하락했다. 상하이 증권뉴스가 중국 전역의 2만 5000명 이상의 투자자들에게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90% 이상이 돈을 잃었다. 돈을 잃은 사람의 60% 이상이 주가의 70% 이상 손실을 보았다. 6%의 투자자만 이익을 냈다. 2013년 중국증시는 아시아에서 최악의 실적을 내고 있었다. 시나닷컴이 2014년 1월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2013년에 약 65%의 주주들이 손실을 보았다. 주식투자로 인해 32.2%의 투자자들의 생활수준이 심각하게 저하됐으며, 9%는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2015년 전반 6개월 동안 중국 투자자들의 손실은 상상을 초월한다. 5월 마지막 2주 동안에 시장에서 13조 2600억 위안(2조 1480억 달러)이 증발했다. 투자자당 평균 손실액이 14만 7000위안(23814 달러)에 이르러, 연간 국민소득의 거의 3배에 이른다. ‘2015 전반기 증시 투자자들의 손실’이라는 보고서가 제시한 통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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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은 혁명을 끝없이 반복하기 위해 결성된 정치 조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혁명을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혁명은 중국에서 이미 진행 중이며, 그 결과가 곧 나타날 것이다. 현 정권의 큰 모순 중 하나가 창당 이념과 실제 행동이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 학생들은 마르크시즘(최소한 중국 공산당판 마르크시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 당수에 관한 정치 수업을 전부 들어야 한다. 사실 중국의 권력 있는 부호들은 마르크스와 마오쩌둥에 대한 지지에 기득권을 가지고 있다. 이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일종의 정치적 보험으로, 현 정권의 합법성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하지만 중국 인구 14억 중 60%로 추정되는 빈곤층에게 중국 공산당의 사상은 빈약할 뿐이다. 게다가 20년 가까이 일말의 변화도 없었던 사회 구조 속에서 극빈곤층은 신분 상승의 길이 막힌 반면, 부호들은 끊임없이 국가와 공공 자산을 제멋대로 약탈하는 상황 속에서, 빈부격차는 격화되기만 할 것이다. 정통 마르크시즘에서는 엘리트 부르주아 약탈자를 공산혁명의 대상으로 본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이 이러한 엘리트 부르주아 약탈자로 전락한 지도 벌써 오래이다. 이제 사회 최하위층에게 중국 공산당이라는 역사상 최악의 독재 정권을 타도할 정치적 타당성이 생긴 것이다. 중국의 현 정권의 이념 원칙이 오늘날 양날의 칼이 되었음에도, 중국 공산당은 이를 절대 포기할 기색이 없다. 덩샤오핑 전 최고 지도자는 재임 중 경제 및 타 개혁에 대해 개방적이었으나 마르크시즘과 마오쩌둥 사상을 부정한 적은 없다. 혁명 지도자를 찾아 중국 국민들은 마르크스 혁명과는 다른 종류의 혁명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다. 이들은 마르크시즘이라는 무기를 버리고 대신 보편적인 민주주의 가치를 수용했다. 일부는 언론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가 즉시 제도화되는 완전한 민주혁명을 바란다. 또 한편에서는 중국 공산당을 타도하여 부에 대해 균등한 기회를 가지더라도, ‘사회 안정’을 위해 당의 구성은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다. 후자는 ‘민주 혁명’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현 정권과 가장 연루되어 있는 이들이다. 트위터나 웨이보 상에 개혁에 대한 의견 표현이 많은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현재 이렇게 혁명에 대한 의견이 확산되고 잠재적 혁명 대중이 늘어나고 있지만 정작 이 개혁을 이끌어나갈 조직이나 지도자는 아직 없다. 이는 창당 과정에서도 등장했던 ‘조직’에 중국 공산당이 병적으로 민감하기 때문이다. ‘검열’, ‘폐쇄’, 체포’는 중국 공산당이 중국 내 모든 조직을 진압하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북클럽, 비영리단체, 대학 곳곳에 정보원들이 배치되어 있다. 또한 공맹(OCI: Open Consititiution Initiative)이나 중국지방도서관(China Rural Library)와 같은 시민단체와 해외지원 비정부기구가 폐쇄되었고, 쉬즈융, 우간과 같은 다소 유명한 활동가들마저 연행되고, 석방권도 제한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 중국 공산당의 검열이 철저했지만 한 정치 운동가가 중국 혁명 대중을 이용하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당서기는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충칭에서 당 서기로 재임할 당시 사회적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보시라이는 마오쩌둥의 영향을 받은 좌익 사상을 공표하고 문화대혁명 방식으로 ‘혁명 가요 부르기’ 및 ‘조직 폭력배 소탕’ 캠페인을 추진하여, 약해진 충칭 시민의 공산주의 정신을 일시적으로 부활시켰다. 다수 중국 공산당원들과 일반 시민들은 보시라이의 말을 신뢰했고 그가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줄 지도자라고 믿었다. 중국 공산당이 경쟁자를 용납하지 못하는 탓에, 시진핑 주석은 보시라이가 인기 있던 초기에 ‘비조직적 행동’과 부정부패를 이유로 그를 숙청했다. 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이었을 뿐이다. 혁명 대중들은 이미 카리스마 있는 유명 지도자를 맛보았고, 모든 상황은 언제든지 다시 수면으로 떠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청의 최후 중국 반체제 인사인 류샤오보씨가 2010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은 혁명의 씨를 말려버렸고 정부는 특히 ‘혁명’ 조성에 매우 민감해졌다. 지난 6월 14일자 인민일보의 특집 기사 5개가 독재 정부를 타도하는 운동인 ‘색깔 혁명’이 사회에 악영향을 끼친다며, 민주주의 체제는 중국에 억지로 융합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기사에 따르면 중국은 ‘색깔 혁명’의 침투와 확산에 주의해야 하며, ‘해로운’ 서양 세력들이 그 동안 끈질기게 중국 공산당을 잠식하고 축출하고자 했으므로 서양 제도와 서구화에 대한 미신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정부는 ‘사회 안정’ 촉진을 위한 지출 전략을 고수하고 있지만, 이는 중국 경제 침체와 실업률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면서 소용이 없어질 것이다. 사실, ‘혁명’이란 단어가 중국 인터넷 상에 더 잦은 빈도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혁명의 움직임은 이미 시작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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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은 언제 지방 정부에 요구하나? 미국에서 이민자가 귀화하기 전 정부 부서와 자주 접촉하는 걸 제외하고 미국인이 정부와 만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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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첫 번째 레비타운이 뉴욕 롱아일랜드에 건설됐다. 이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커뮤니티였다.… 지방 도시가 건립한 새로운 학교 시스템, 오락시설 및 배후의 관리부서 등 일련의 문제는 수많은 미덕이 만들어지는 조건을 또다시 만들었다.… 19세기 새로운 주, 지역 및 신흥 도시가 정치 민주화를 위한 새로운 각축장이 되었던 것처럼, 수많은 신규 도시와 다양한 지역 문제는 20세기 중반, 미국의 정치적 흥미와 활력을 모두 일깨웠다. - 다니엘 부어스틴 ‘미국인의 민주역정’ 공립학교 관리의 지역사회 참여 제도 미국인이 지역사회 공립학교의 관리에 참여하는 것은 자치의 주요 내용이다. 미국 공립학교 운영비는 주로 현지 주민의 부동산세 및 일부 주 정부의 재정 보조로 이뤄진다. 매 도시에는 현지 주민이 뽑은 교육위원회가 학교 관리에 참여한다. 교육위원은 모두 현 학군의 납세자이며 과거 학부형일 수도 있다. 내가 사는 소도시의 교육위원 중 마흔이 안 된 한국계 의사가 있는데 아시아 대표라 할 수 있다. 학교와 관련된 큰일은 모두 교육위원회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 학교와 교육위원회의 의견이 불일치하면, 학군 내 주민 표결을 공고하고 통지한다. 해당 지역에 사는 주민은 학부형이 아닐 수 있지만, 그들이 내는 세금은 학교 운영비를 지원한다. 중국인에게 입학은 매우 큰 일이며, 특히 외부에서 온 임시 거주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미국에는 그런 문제가 없다. 월세든 자가든 상관없이, 취학 연령 청소년은 모두 현지 학교에 입학할 권리가 있다. 내 아들이 미국에 막 왔을 때, 입학 등록을 위해 학교에서 공고한 날(개학 3일 전)에 학교를 찾아갔다. 등록에 필요한 서류는 집문서, 월세 계약서, 수도·전기료나 가스요금 명세서 중 하나면 충분했다. 이 문서에 거주자의 이름이 있으면, 현지 주민임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외국 학생은 등록하면 곧바로 반 시간 정도 수학 테스트를 받는데, 학생 수준에 따라 일반반 또는 우열반에 편입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왜 수학을 선택했을까? 공식과 계산 방정식에는 언어 장벽이 없기 때문이다. 전체 과정은 더욱 놀라운데, 테스트 완료 후 30분도 안 돼 입학 통지서와 과정표를 받을 수 있다. 외국 이민자인 내 상황은 중국 시골에서 대도시로 올라온 임시 거주자들과 비슷하다. 임시 거주자의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내내 매우 큰 문제이다. 그래서 수속을 마친 후에도 내가 입학 수속을 제대로 마쳤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역사회 주민의 ‘폭넓은 관여’ 내가 기억하기엔, 최근 몇 년간 학군 주민이 표결한 상황은 3건이었다. 첫 번째는 주 정부가 학교에 주는 보조금이 줄어들자, 학교에서 아침에 스쿨버스가 지나는 정류장을 줄이고자 한 것이다. 예컨대, 내가 사는 지역에는 원래 4개 정류장에 5분씩 정차했지만, 이제 정류장이 1개로 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똑같은 버스로 똑같은 시간에 2번 왕복할 수 있어, 1년에 약 280만 달러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이 결정은 6~8학년 학부형들의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정류장이 줄면 아이들이 버스를 타러 10분 이상 걸어야 하는데, 눈 내리는 겨울에는 너무 힘들다는 이유였다. 이후 학부형 3백여 명이 연합 반대서명을 내자, 교육위원회는 현지 주민 공청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스쿨버스 정류장을 유지하려면, 부족한 280만 달러의 예산을 부동산세 증세를 통해 메워야 하기 때문이다. 공청회는 토요일 6시 중학교 도서관에서 열렸고, 주민 2백여 명이 참석했다. 학부형 대표가 왜 스쿨버스 정류장을 줄이면 안 되는지 발표하자, 내용을 준비해 온 일부 지역 주민대표가 이렇게 의견을 표했다. 1. 큰 눈이나 눈보라가 내릴 경우 학교는 보통 휴교를 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눈보라를 무릅쓰고 등교할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 2. 아이들이 빗속에서 몇 분 걷는 건 그리 나쁜 일이 아니다. 아이들이 겪을 수많은 일 중, 비바람은 그저 작은 일에 불과하다. 3. 세금을 올릴 경우, 학군 내 모든 가정은 일부 학생의 등교 거리를 줄이기 위해 매년 100달러 이상을 부담해야 한다. 이는 등교할 아이가 없는 가정에 매우 불공평하다. 4. 세금을 올리게 되면, 이후 내릴 가능성이 별로 없다. 지역 내 다른 공공사업도 많기 때문에, 끊임없는 증세가 가져올 부작용도 고려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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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느끼려면, 광활한 농촌으로 가야 한다. 중국의 빈곤과 절망을 알려면, 중국의 농촌을 봐야 한다.” 중국에 관한 각종 소식 중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수십 년 동안 ‘농촌의 고향이 몰락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는 점이다. 어느 곳에 있는 농촌이든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지역 불량배나 조직 폭력배가 횡횡하고, 쓰레기와 오염이 심각하다. 실업자들이 점차 증가하고, 사람들이 모여 도박하는 것이 농촌의 주요 생활상이 되었다. 도덕은 땅에 떨어졌고 교육 등 공공사업은 무너졌다.’ 농촌의 붕괴 현상에 통감한 사회 각층은 ‘향신제도를 재건하자’고 부르짖었다. 즉 중공이 없애버린 농촌 자치모델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것이다. 토크빌이 칭찬한 ‘미국 공동체 정신’은 미국의 ‘국민에 의한 정치’를 가리킨 것이다. 내가 사는 곳은 풍경이 아름답고 조용하며 정돈된 미국의 지방 도시이다. 국내에 미국의 민주제도를 소개할 때 토크빌이 중시한 ‘국민에 의한 정치’를 소홀히 한 것 같아, 이야기 방식을 통해 미국의 자치를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미국식 민주의 영혼 국민에 의한 정치 1863년 11월, 링컨 미국 대통령은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영어 원문은 ‘(The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will never die)’이며, 이를 해석하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이다. 물론 해석만으로 영문의 깊고 정제된 뜻을 모두 표현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 생동감 있게 그렸다고 할 수 있다. 선거제도, 삼권분립, 사법제도, 뉴스와 언론자유 등 정부제도 방면에서 미국 정치제도를 소개한 책은 중문으로 많이 번역됐다. 하지만, 자치라는 관점에서 미국 민주정치의 토대를 설명한 책은 2백 년 전 토크빌이 저술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를 뛰어넘는 책이 아직 없다. 다른 저자와는 달리, 토크빌은 정치제도 측면에서 민주를 고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관계, 인간의 사상 감정 및 민심 등으로 구성된 사회 현상에 깊숙이 들어가 미국의 민주를 고찰했다. 토크빌은 미국에서 민주가 순조롭게 발전한 것은 일련의 자연, 정치 및 사회 조건에 기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중에는 미국의 자연환경과 법치, 민심이 포함되며, 이 세 가지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민심이다. 최상의 지리적 위치와 법률 제도가 있다 해도, 민심의 지지가 없으면 정치 체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민심은 나쁜 지리적 환경과 최악의 법치 제도가 조성한 불리한 영향을 완화할 수 있다. 토크빌의 명저가 세상에 출간된 후, 세상에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고 미국 정치에도 거대한 변화가 수없이 나타났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토크빌이 찬양한 ‘미국 공동체 정신’이 여전히 세계 초강국인 미국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사는 중국인이라면, 자신을 차이나타운에 가두지 않는 한, 미국 곳곳에 있는 지역 사회를 느낄 수 있다. 아름다운 지방 도시와 지역 사회가 미국의 광활한 국토에 널리 분포해 있다. 지역 사회의 생활에 깊이 들어가면, 미국의 지방 도시야말로 강력한 자유의 집합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모든 도시, 마을은 똑같은 원칙 위에 세워졌다. ‘각 개인은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일에 최고의 결정권자이며, 자신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데 가장 적임자이다. 지방 도시(지역 사회)의 구성원으로,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그들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며, 의무의 이행과 권리의 행사는 똑같이 중요하다.’ 이는 심오한 민주 이론이 아니라, 민주를 실천하는 방법이다. 나는 지역 사회의 공공업무 토론회에 몇 번 참석한 적이 있는데, 이는 미국인들이 ‘로버트 토의절차 규칙’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토론에 참가한 미국인(이민자 포함) 중 대부분은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그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즉, 그들이 그 책의 규칙을 실천한다기보다는 그 책의 저자가 미국 지역 도시의 자치 경험과 그 경험에서 시작된 각종 토의절차 규칙을 책으로 집대성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지역 주민들은 왜 철도역을 거부했나 차를 몰고 이 도시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노인 거주지를 지날 때마다 생각나는 일이 있다. 만약 현지 주민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집단행동과 재판에 나서지 않았다면, 이곳은 시끌벅적한 화물 운송역이 됐을 것이다. 내가 사는 도시에는 공용 황무지가 있다. 이를 본 한 운송기업이 그곳에 화물 운송역을 만들려고 했다. 지방 정부는 역이 들어설 경우 도시 경제가 활성화되고, 취업률이 높아지며, 도시 재정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 이를 대대적으로 알리며 주민들이 찬성하길 바랐다. 하지만 철도역을 만들려면 철도를 보수해야 하고, 철도가 경유하는 몇몇 지역과 기차역이 있는 지역 주민은 소음에 영향을 받을 게 분명했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주민들은 서로 연락해 의견을 나누고, 마침내 철도역에 반대하는 걸로 의견을 모았다. 중국인이 보기에는 이상할 것이다. 일부 주민이 정말 지방 정부의 사업을 막을 수 있는 건가? 이는 미국 법률이 부여한 대중 참여와 환경 결정의 권리이다. 20세기 중반, 미국인도 오염 문제에 상당히 시달렸지만,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정부의 책임만을 기다리지 않았다. 자치 전통이 강한 미국 시민은 환경보호의 대중 참여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대중의 압력 아래, 미국은 1946년 ‘연방행정절차법’을 제정했다. 이 법률의 핵심은 당사자가 공청 제도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후 대중이 환경 정책에 참여하는 데 기반이 되었다. 몇 년 후, 지방 정부는 또다시 철도역 방안을 제기했다. 과거 이를 반대하던 주요 인사 중 몇 명이 도시를 떠났기 때문에, 주민들은 새롭게 힘을 모아야 했다. 그래서 당시 참가자는 지역 신문에 ‘먹구름이 또다시 머리 위에 몰려들었다’라는 제목으로 이를 알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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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전 베이징 6·4 사건은 소련-동유럽 격변(서양사회에서 1989년에 일어난 일련의 혁명을 이렇게 부른다.)의 신호탄이 되었고, 이를 통해 중국 지식분자와 대학생 집단은 세계 민주화 운동에 큰 공헌을 했다.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에서 예언한 듯이 “인류의 이데올로기 논쟁은 이미 종점에 달했고, 자유·민주가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후 20여 년의 정치 변화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강권, 독재에서 민주로 향하는 것은 일방통행이 아니며, 민주화나 계몽 전제주의로 향하던 일부 국가들이 독재로 회귀하는 재난에 직면했다는 걸 발견했다. 러시아 독재 회귀와 민심 현 단계에서 서로 손잡고 모방하는 비민주국가 중, 이란은 정교 합일 국가이며, 중국은 민주화를 겪어보지 못했다. 중국은 그저 개방적 자세 속에서 1980년대 반(半)계몽 전제주의를 겪다가, 현재 어두운 독재로 회귀하는 길을 미친 듯이 달리고 있다. 반면, 러시아는 역사상 서구화를 겪은 경험이 있고, 90년대 이후 민주화 길에서 일정 시간을 겪었다. 러시아를 분석해 보면, 사회 전환 과정 중 민주화가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현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푸틴이 독재로 회귀한 것은 물론 그의 KGB 경력과 큰 관계가 있다. 이런 인간은 독재와 강권을 선호하고, 게다가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부터 스탈린까지 수백 년간 양성된 독재문화의 뿌리가 매우 깊어, 중국에 버금갈 정도이다. 나는 ‘푸틴주의는 어떻게 만들어졌나(2014년)’라는 글에서, 푸틴주의는 대국의 쇼비니즘과 독재정치가 만든 검이지만, 오히려 민심을 거쳐 단련됐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중국과 달리 민주제도라는 외형이 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말하는 ‘국민의 선택’이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정치적 정확성의 상징이다. 하지만 독재국가에서 민심은 강권에 의해 쉽게 휘말리곤 한다. 내가 앞의 글에서 중점적으로 서술한 내용은 이렇다. “러시아 정치의 뚜렷한 방향 전환은 푸틴이 집권한 후에 시작됐다. 푸틴이 집권하기 전, 러시아는 한동안 독재와 작별하고 민주로 향했다. 1999년부터 푸틴은 능숙한 정치 통제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점차 독재와 패권 정치로 회귀시켰고, 자신을 선거에서 뽑힌 대통령에서 독재자로 변신시켰다. 주목할 만한 것은, 푸틴이 정치에서 중대한 변화가 있을 때마다 러시아 주류 민심의 지지를 얻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푸틴은 러시아 민족의 대국 쇼비니즘 전통을 교묘히 영합하고, 러시아인이 수백 년간 권위에 의존한 것을 이용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정치 이상을 실현해, 오늘날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되었다.” 다시 말해, 푸틴의 지지자는 농민계층과 청년 세대였고, 반대자는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의 중산계층에 집중됐다. 이중 전자의 수가 후자를 훨씬 초과했다. 중국에는 이런 견해가 유행한다. “중공의 독재 기반은 주로 1950, 1960년대 생이며, 주력은 광장에서 춤추는 아주머니들이다. 이 세대가 사망하면, 젊은이는 자연히 민주의식을 지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말에는 사실적 기반이 결여됐다. 중국 마오 좌파 중 적지 않은 수가 80, 90년대 생이기 때문이다. 푸틴의 사회 기반 중, 골수 지지자는 ‘청년 근위대’라고 부른다. 이는 과거 소련 대조국전쟁 시기 청년조직의 명칭으로, 전투에서 용감히 싸운 청년의 상징이었다. 2005년 러시아 집권당인 ‘통일 러시아’는 청년 조직을 이 이름으로 개명해, 오늘날 러시아 최대 청년 정치조직이 되었다. ‘청년 근위대’의 ‘업적’은 적지 않은데, ‘반(反)색깔혁명’에서 비상 선봉의 역할을 맡았고, 반(反)푸틴 시위를 거행한 청년들과 격렬한 충동을 일으켰다. 또한 에스토니아가 소련 홍군 해방 기념비를 이전하는 데 항의하고, 미국 정보부의 은닉처라며 모르몬교 교회를 공격했으며, 푸틴의 우크라이나 출병을 지지했다. 청년 근위대는 항상 푸틴이 가리키는 데로 움직였다. 청년 근위대 구성원은 소련 해체 후 태어난 사람들이 많은데, 이 청년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교육받았는지는 아직 체계적으로 연구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중국 민주인사에게 ‘이데올로기 세뇌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지’ 명확히 경고하고 있다. 포퓰리즘과 반미 양대 기둥에 의존한 ‘차베스 사회주의’ 베네수엘라는 민주제의 외형 아래 포퓰리즘이 사회를 휩쓰는 전형을 보여준다. ‘중국 인민의 좋은 친구’ 차베스는 포퓰리즘과 반미에 의존해, 베네수엘라에 ‘사회주의’를 건설했다. 남미를 연구하는 정치학자들은 이를 ‘차베스 혁명’이라고 부른다. 이 ‘혁명’은 사회주의 협동조합을 만들고, 의료와 교육 시스템을 개선하며, 권력을 인민에게 돌리기로 약속했다. 차베스가 중국 정부처럼 통계 데이터를 조작하지 않았다면, 그는 약속을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 각종 사회 계획을 통해 10년 내 3백만 명에 가까운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빈곤층이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5%에서 26%로 떨어졌다. 또한 기본적으로 문맹을 퇴치해, 식자율이 96%에 달했다. 외교 정책을 보면, 차베스는 ‘미 제국주의’ 세력과 양립할 수 없는 자세를 취하면서 스스로 ‘반미영웅’의 이미지를 만들어, 적지 않은 지지를 받았다. 현재 베네수엘라는 남미 최대 부패국가 중 하나이자 전 세계 순위 138위이며, 이 나라에 ‘볼리바르 자산계급’이 나타났다고 하지만, 그 구성원에는 ‘특별비용’을 징수하는 정부 관료와 석유를 매매하는 중개인, 암시장과 회색 시장에서 활약하는 사람, 돈세탁 및 마약을 밀수하는 조직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차베스는 앞서 말한 두 가지 성과를 앞세워 자신이 ‘사회주의’를 건설했으며, 그의 사회주의만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난 과연 그가 마오쩌둥의 수제자인지 여러 번 생각해 봤지만, 결국 그의 이데올로기 출처가 매우 다원화됐다는 걸 발견했다. 볼리바르, 예수, 마르크스, 인디언 등이 모두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베네수엘라 빈곤층에게는 빵과 복지가 가장 중요할 뿐, ‘차베스식’ 사회주의가 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차베스에게는 무슨 주의를 택하든 중요하지 않고, 각종 속임수를 통해 권력을 보유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사실 이는 베이징 정권과 다를 게 없다. 그들에게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의 본의가 뭔지 중요하지 않고, 이를 이데올로기 도구로 삼아 반대파를 제거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차베스는 이미 고인이 됐지만, 그가 남긴 문제는 현재 베네수엘라를 괴롭히고 있다. 차베스는 석유자원의 풍부한 이윤에 의지해 빈곤층의 분배액과 복지를 높이고, 그들의 경제생활 수준을 올렸다. 하지만 빈곤층에게 젖병만 제공할 뿐 그들이 발전할 기회를 주지 않은 정책은 석유 가격이 하락하면서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베네수엘라의 중상류층은 차베스가 사회의 혁신과 발전 동력을 말살했다고 그에게 굉장히 반감을 가졌다. 이후 차베스가 임기 중 광범위하게 정치를 억압하고 인권을 침해한 행적이 대량으로 폭로됐다. 미국 애머스트대학의 베네수엘라 문제 전문가 하비에 코랄레스는 “차베스는 법률을 사용, 남용, 무시하는 세 가지 방법으로 대통령의 권력을 확대하고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을 억압했다. 그는 반대파뿐 아니라 정부 내부의 반대 목소리까지 탄압했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원유 가격을 올린 다음 주변국에 소규모 보조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주변국의 민주화 발전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이는 ‘뉴욕타임스’ 기사 제목 ‘차베스는 해탈했지만, 베네수엘라는 여전히 발버둥 치고 있다’와 다름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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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중국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 뉴스간행 부문은 최근 특별 관리 업무에서 중앙 뉴스 부서의 지방 기구 1141곳을 통폐합하고, 법규를 위반한 1435명을 해고했다고 발표했다. 중국의 뉴스 시스템을 안다면 이는 중국 언론의 ‘뉴스 임대’를 뒤늦게 처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처리 대상이 중앙 언론의 지방 기자센터로 선정된 것은 그들이 ‘사업 편성, 기업 경영’으로 불리는 언론 시스템의 부패를 집대성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뉴스 임대’ 중국의 뉴스 임대 현상은 이미 중국 언론계의 암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 현상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언론 방송권을 이용해 보도 대상에 긍정적인 보도를 내보내고(업계에서는 이를 ‘대가성 뉴스’라고 부른다) 찬조금이나 광고료를 끌어들이는 방법이다. 이렇게 모은 돈은 언론과 개인이 나누는데 언론은 큰 몫을 챙기고 기자 개인은 수수료 명목으로 작은 몫을 챙긴다. 이러한 금액의 분배 비율은 언론사마다 다르고, 수수료 처리 방법도 모두 제각각이다. 일부에서는 이를 ‘원고 구성료’라고 부르고, 일부에서는 ‘광고료 공제’라고 부른다. 이러한 뉴스 임대는 언론의 직업윤리를 위반한 것이지만, 그들은 범죄로 여기지 않는다. 필자는 ‘중국의 뉴스 임대 현상에 대한 우려’라는 글에서, 중국 언론이 돈과 권력의 이중 압박에 몸부림친 건 최근의 일이 아니라, 1980년대 후반 ‘언론 시장화’부터 시작됐다고 말한 바 있다. ‘언론 시장화’란 정부가 재정 부담을 없애기 위해, 언론을 경제적으로 독립시켜, 재정 지원을 일부 또는 전부 줄이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은 서양 선진국의 관례에도 부합하지만, 양자 간 차이점은 서양 언론은 뉴스 자유와 출판 자유를 통해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중국 언론은 이처럼 매우 중요한 생존 조건이 결여돼 있다. 그래서 국내 언론계는 정부의 지속적인 통제 아래 놓인 언론 시장화를 ‘언론을 걷어차 바다에 빠뜨리면서, 언론의 손발까지 묶으려 한다’고 묘사한다. 손발이 묶인 수영선수가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듯이 중국 언론은 정치와 경제의 이중 압박에 직면해 있다. 1990년대 중반 지방 각지에 언론을 설립하는 게 유행하면서 대가성 뉴스 경쟁도 치열해졌다. 기업은 영향력 높은 언론에 광고비를 지출하려 했고 영향력이 크지 않은 언론(중앙급 비인기 언론도 포함)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 때문에 이러한 언론의 기자는 어쩔 수 없이 ‘뉴스 임대’를 시작했다. 즉, 지방 기업과 기관의 불미스러운 사건, 예컨대 사고, 부패행위, 위조품 생산 등을 잡아냈다. 한 마디로, 언론이 당사자의 오점을 잡아 협박하면, 당사자는 돈을 지불해 관련 보도를 막을 기회를 사는 것이다. 이는 중국 언론계의 ‘뉴스 임대’가 나쁘게 변한 것으로, 언론의 직업윤리를 저버린 데다 명백한 범죄행위이다. 중앙 언론의 지방 기자센터는 어떻게 자금 수탈의 경로가 됐을까? 중앙 언론의 지방 기자센터는 왜 뉴스 임대의 집대성이 됐을까? 이는 중국의 언론 제도가 조성한 것이다. 마오쩌둥 시대와 덩샤오핑 개혁 초기 신화사, 인민일보 등 소수의 중앙급 당 언론은 각지에 기자센터를 설치해 여론을 살피는 창구로 삼았고, 관련 책임자는 지방 정부를 감찰하는 책임을 맡았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중앙 각 부서는 잇달아 신문을 창간해, 적지 않은 ‘중앙급 언론’이 나타났다. 언론이 ‘사업 편성, 기업화 경영’의 길을 가자, 각 중앙급 언론은 전국 각지에 기자센터를 우후죽순으로 설립했다. 이 기자센터의 주요 사명은 ‘재원’을 개척해, 본사에 각지의 이익을 제공하는 주요 통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지방기자가 뉴스 보도와 여론 감시라는 기치를 내걸고, 금품을 교묘히 취하거나 강탈했다. 언뜻 보기에는 기자 개인이 언론의 직업윤리를 위반한 것 같지만, 그 배후에는 본사의 ‘수익지표’ ‘상벌시스템’의 압력이 있었다. 기업에는 긍정적인 보도가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았기에, 기자센터는 지방 정부 특히 산업계의 ‘뉴스 임대’를 생존 도구로 삼았다. 산시성에 광산사고가 빈번하자, 2005년 이전, 이곳은 한때 언론계의 뉴스 임대 중심지가 되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광산사고가 발생하면 ‘가짜 기자’가 현장에 도착했다고 한다. ‘가짜 기자’ 중 적지 않은 수는 각 중앙급 언론의 산시 기자센터에서 고용한 계약직이었다. 이들의 업무는 주로 광고와 찬조금을 끌어오는 것으로, 광산 사고 등을 이용해 ‘뉴스 임대’를 진행했다. 이는 각급 중앙 언론의 산시 기자센터가 생존하는 방식이었다. 만약 계약직원의 꼬리가 잡히면 기자센터와 신문사는 그를 ‘가짜 기자’라고 몰아붙여 관계를 부인했다. ‘산시 가짜기자 사건 조사: 누가 가짜기자에게 자생할 온상을 주었나’ 등 보도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집중 보도했고, 이후 중앙 언론 지방 기자센터의 부패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06년, 중국신문출판총국은 ‘중화공상시보’ ‘중국공업보사’ ‘중국식품질량보’ 등 4개 신문사의 기자센터가 “뉴스 보도를 이유로 기층부서와 군중에게 사기를 치거나, 재물을 갈취하는 위법활동을 벌였다”고 통보했다. 당시 중앙 언론의 지방 기자센터가 기장 집중적으로 처리됐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만으로 각 기자센터의 뉴스 임대 현상을 근절할 수 없었다. 앞서 말한 ‘중앙급 언론’의 신분이 그다지 견고하지 않은 데다, 정부 부서에서 설립한 신문이었기 때문이다. 2014년 ‘정청급 기자 뤄반의 강호은원록’ 기사는 외부사회에 이런 상황을 제대로 알려주었다. 인민일보 허난성 기자센터장인 뤄반은 ‘인민일보’라는 황금 간판을 위협도구로, 인민망의 기사 송고권을 멋대로 조종하는 축재 도구로 삼았다. 그는 각 칼럼 당 100만 위안의 외주비를 받고, 칼럼 기사를 외부에서 불러온 인원에게 하청 주었다. 허난 지방기업이 그들의 손에 걸렸다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보내 그들에게 ‘협조’해야 했다. 기업 경영부서가 나서서 사정할수록, 인민망 허난 사이트에서 요구하는 금액은 더 높아졌다. 허난 신문출판국은 해당 사이트에 전혀 관여할 수 없었는데, 뤄반은 정청급 관료였고 ‘인민일보’는 언론계의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뤄반의 재물 착취가 하늘을 찌르자, 허난성의 뉴스 사기는 완연한 백색공포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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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쯔중쥔 여사(중국 전통 사회학자)의 글을 보았다. “100년이 지났지만 발전이 없다. 위에는 여전히 서태후가 있고, 아래에는 여전히 의화단이 있다.” 이 소박한 말에는 중국 사회의 전환(핵심은 사회 계층구조의 전환)이 실패했다는 걸 보여준다. 소위 ‘실패’란 중국의 사회 계층에서 하층민 수가 과도하게 많고, 중간 계층 수는 총인구에서 매우 적다는 걸 뜻한다. 중국 사회 계층구조의 전환 실패 사회 전환에는 정치 전환, 경제 전환, 사회 계층구조 전환 등 몇 가지 부분을 포함한다. 사회의 계층구조가 변화하면, 소비구조(생산구조를 태동함), 문화형태, 가치관 등도 상당히 변화한다. 현재 중국이 직면한 최대 실패는 사회 계층구조의 변화에 실패한 것이다. 즉, 하층민에서 중산층으로 전환할 수 없는 계층구조이다. 소위 ‘위에는 서태후가 있다’는 건, 정치 변혁의 핵심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정치 체제가 지금까지 질적으로 변화하지 않아, 집권자는 여전히 정치 폭력을 맹신하고, 서태후 시기에는 없었던 사상통제 시스템까지 추가됐다. ‘아래에는 의화단이 있다’는 건, 겉으로 보기에는 마오 좌파와 사회 하층민이 나날이 폭력화되는 경향을 말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런 폭력 성향은 사회 구성원의 패배감에서 온 것으로, 적어도 인구의 60%에 해당하는 중국인이 번영의 열차에 타지 못한 채, 사회 등급 피라미드에 가장 밑 부분을 이룬 데 기인한 것이다. 개혁개방 초기, 덩샤오핑은 전 국민의 샤오캉(의식주 걱정 없는 중산층 사회)을 약속했다. 그때부터 10년 전까지, 중국 정부가 사회 계층구조 전환을 위해 설정한 목표는 중산층 위주의 계란형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국가급 프로젝트가 적지 않게 투자됐는데, 그중 중국적 특색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은 2001년 중국 사회과학원이 ‘당대 중국 사회 계층 연구’ 프로젝트에서 구분한 ‘10대 계층설’이었다. 이 보고서에서 계층을 구분한 기준은 직업이다. 예를 들면, 국가나 사회 관리 계층, 경영 계층, 민간기업 주요 계층, 전문 기술자 계층, 산업 노동자 계층, 농업 노동자 계층 등이다. 이는 서양 사회학처럼 사회적 지위, 경제 수입, 직업 명성 등을 기준으로 나눈 것도 아니며, 정부 이데올로기인 마르크스주의처럼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을 기준으로 나눈 것도 아니다. 그저 이도 저도 아닌 내용으로 독보적이라는 정부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채 10년이 되지 않아 사라졌다. 2010년 2년, 중국 사회과학원은 ‘당대 중국의 사회구조 변화 연구’ 프로젝트에서 한 가지 결론을 발표했다. 당시 중국 중산 계층의 규모는 총인구 중 약 23%로, 매년 1%의 속도로 규모가 확대된다는 것이었다.당시 상황으로 볼 때, 중국 사회과학원의 2010년 보고서는 믿을 만하다. 하지만 일부 외국 연구기관의 연구는 매우 터무니없어, 중국 현실과는 상당히 동떨어졌다. 가장 황당한 것은 아시아개발은행이 발표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2010년 주요 지표’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서는 매일 2~20달러를 소비하는 사람을 중산 계층이라고 정의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중국의 중산 계층 수는 8억 1700만 명이며, 그중 3억 300만 명은 하층 중산 계급(일일 평균 2달러 소비)이다. 이 보고서가 언론에 보도되자, 수많은 중국인이 자신이 ‘중산층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중산층의 기준으로 삼는 매일 최저 2달러를 당시 환율로 환산하면, 매일 14위안이 채 안 되며, 매달 약 420~430위안에 해당한다. 이는 중국 발달지역의 최저 생활기준과 비슷하고, 중국 대부분 도시의 최저 임금 표준보다 훨씬 적다. 세계은행은 1인당 매일 1.25달러를 소비하면 빈곤하다고 정의했지만, 아시아개발은행은 매일 2달러를 소비하면 중국의 중산층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아시아개발은행의 발표를 믿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현재 상황을 살펴보자. 세계은행이 몇 년 전에 발표한 데이터에 따르면, 중국인 중 매일 1달러 이하로 소비하는 인구는 총 3억 명이며, 아시아개발은행이 계산한 최저 중산층은 3억3백만 명이다. 이는 중국 빈곤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중 원자바오 전 총리가 2010년 3월 중국 발전 고위층 포럼에서 언급한 실업자 2억 명도 포함된다.) 최근 몇 년 동안 이 상황은 계속 악화됐고, 외자 철수와 실물경제의 불황으로 1억 24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다시 말해, 중국의 사회 하층민(즉, 빈곤인구와 반(半) 빈곤인구)은 60%를 넘는다. 중국은 소수의 억만장자를 배출한 동시에, 방대한 수량의 빈곤 계층을 생산했다. 이는 사회의 계층구조 전환에 실패했다는 걸 뜻한다. 사회 계층구조의 전환 실패는 불공정한 분배 제도 탓 사회 계층구조를 개선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회분배 제도이다. 한 사회의 소득분배 제도는 소득분배 거래규칙의 총합을 가리키는데, 이는 법률과 규칙으로 설립된 각 분배 주체 간의 권리와 이익 관계를 뜻한다. 현대 시장경제 조건 아래, 소득분배의 주체는 일반적으로 3대 이익집단으로 구성된다. 즉, 인적자본 소유자(노동력 소유권), 고용주(생산재 소유권) 및 정부(공공 정치권력)가 공동으로 국민소득을 분할한다. 중국의 주요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부의 분배에서 인적자본이 공헌하는 요인이 약화됨에 따라, 사회분배 중 노동자 보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작고 점차 줄어드는 추세이다 이와 관련된 정부 데이터에는 논란이 존재한다. 장젠궈 중화전국총공회 관계자는 몇 년 전 중공망과의 인터뷰에서, 중국 노동 보수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83년 56.5%의 최고치를 기록한 후 계속 떨어져, 2005년에는 36.7%까지 하락했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22년 동안 약 20%가 떨어진 것이다. 이에 재정부는 수치가 심각하게 저평가됐다며, 관련 내용을 부인했다. 이후 사회과학원이 ‘사회청서: 2013년 중국 사회 형세 분석 및 예측’에서 발표한 데이터를 근거로, 중국 노동자 보수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4년 50.7%에서 2011년 44.9%로 떨어졌다고 밝혔다.(미국은 약 10년 동안 58~60%이다.) 2. 자본 보수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장젠궈는 같은 인터뷰에서, 1978년부터 2005년까지 노동 보수의 비중이 계속 하락한 것과는 반대로, 자본 보수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 상승했다고 지적했다. 단, 자본 보수가 GDP에서 얼마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이징대 CCER 중국 경제 관찰 프로젝트팀은 ‘경제 전환 성장과 자본 수익률의 변화 - 중국 개혁개방 시기 자본 수익률 예측(1978~2005)’ 보고서에서, 자기자본을 자본금으로 삼아 계산할 경우,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총 자본수익률은 6.8%에서 17.8%로 상승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 연구자들은 보통 다음 몇 가지를 지적한다. 1. 정부의 자본수지가 자본소득을 명확히 강화해주는 작용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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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난관: 채무 수렁에 빠진 지방 정부 중앙 정부는 지방 채무 위기가 지방 재정 위기로 이어질 수 있어 속을 태우고 있다.외국 투자은행에 따르면 중국의 총 채무 규모는 재작년 중국 GDP 총량의 168%(내가 이 연설문을 쓸 당시 맥킨지 글로벌 연구소 5월 8일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총 부채는 이미 국내 총생산(GDP)의 282%에 달했다)에 달한다. 이 중 소량만 개인 채무이고 대부분은 정부 부채와 기업 부채이며 그 중 지방 정부 부채는 20조 위안으로 가장 높았다. 여기에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이전에 보고한 18조 위안은 관리들이 자신의정치적 실적을 고려해 축소 보고한 것이다. 10여개 도시를 돌며 조사를 진행한 국가발전개혁위원회 관계자 리타이(李鐵)는 “상부에 보고한 지방 채무 액수(18조 위안)는 실제 채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며, “어떤 지방은 10%, 20%, 30% 보고했다. 상부에 보고한 액수가 실제 채무의 50%를 초과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고 밝혔다. 따라서 18조 위안은 실제 채무의 30~50%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중앙 정부는 2014년 9월 ‘제43호문’을 발표, 2015년 1월 5일 전까지 지방 정부 채무를 사실대로 보고하라고 요구하며, 중앙에서 지방 채무 일부를 상환할 것을 암시했다. 이후 거짓 보고를 하거나 축소 보고한 지방 정부는 희망을 감지하고 성실히 보고했고, 하이난 성에서는 채무를 공시하기에 이른다. 결과 지방 채무가 순식간에 폭증했다. 갑자기 불어난 지방 채무에 놀란 중앙 정부는 전체 지방 채무를 20조 위안으로 한정하며 다시 보고하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지방 정부가 신고한 20조 위안의 채무를 중앙 정부가 일부 부담하고 시장에서 일부 책임을 지고, 나머지는 지방 정부와 성 정부가 부담한다. 쉽게 말해 지방 정부에 빚을 떼인 사람들의 집단 시위가 일어나면 성에서 상징적으로 일부를 부담해 사건을 무마하는 식이다.지방 정부가 토지 이외에 새로운 수익 모델을 찾지 못하자 이 거대한 재정 위기는 중앙 정부의 골치거리로 남았다. 다섯 번째 난관: 금융위기 금융 위기의 주요 원인은 재정 위기에 더해 증가하고 있는 대손비율, 과다 발행한 화폐로 인한 유동성 증가다.은행 대손부터 말해보자. 현 상황은 개혁 이후, 부동산 나쁜 부채로 인한 세 번째 대손(貸損) 피크다. 첫 번째는, 주룽지 시대에 있었다. 중국 정부는 1998년부터 1700억 달러를 처리하는 데 6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대손을 일부 처리하면 더 많은 새로운 대손이 형성돼 중국 은행의 해외 상장을 가로막았다. 이후 중국 정부는 네 개의 국유 자산 관리 회사를 설립했고 이 부실 자산 즉 대손을 분리한 후, 이들 회사로 넘겨 영향을 주지 않게 처리했다. 이중 일부 부실 자산은 외국계 투자 회사에 매각했다. 이들 외국계 투자사들은 미스터리 한 중국의 금융 시스템을 파악하기 위해 부실 자산을 매입했다. 두 번째 위기는 원자바오 시대에 발생했다. 은행 대손이 8000억 달러 이상 쌓이자 미국 증권 시장의 ‘사베인-옥슬리 법안(Sarbanes-Oxley Act, SOX, 연방 증권법)을 통과하기 위해 중국은 명성이 좋은 안에이나 프라이스 워터하우스 쿠퍼스 등 여러 미국 평가기관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 미국 증권감독관리위원회 수장은 정치인 콕스였다. 그는 중국에 대한 호감이 없어 엄하게 점검했다. 이 미국 평가 기관들은 감사 과정에서 형편없는 중국의 은행 시스템을 접하고, 월스트리트 대신 홍콩 상장을 권유했다. 중국은 스위스은행, 시티뱅크, 뱅크 오브 아메리카가, 싱가포르 테마섹 홀딩스 등 10여 개의 외국 은행과 전략적 투자 관계를 맺었다. 중국 4대 은행은 이 협력 동반자 포장을 거쳐 홍콩과 중국 A주식 시장에 상장했고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주도적인 상장은 한동안 A주식 시가 총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많은 자금을 흡수한 외국 은행은 주머니를 가득 채우고 2007년 이후 점차 탈퇴했다. 중국 정부의 은행 대손 처리 능력에, 외국 동업자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2008년 미국 금융 위기 이후 유럽과 미국은 어렵게 대처했다. 미국 조차도 마지막에는 몇 백 년 된 은행 리먼 브라더스를 파산 하게했다. ‘월 스트리트 저널’의 한 칼럼리스트는 중국 정부가 은행 대손을 처리한 방법에 관한 조롱 섞인 글을 기고했다. 그는 기사에서 ‘중국 공산당을 초대해 월가의 금융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고 썼다. 자산 회사를 설립하고 은행 대손을 분리해 대손을 회사와 은행 장부에서 몇 차례 돌린 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한다. 그리고 중국의 화폐 초과 발행에 대해 말해보자. 중국은 30년 가까운 경제 성장의 중요한 수단 중 하나는 통화의 과다 발행이다. 최근 중국은 ‘세계 최대 화폐 발행기’가 됐다. 2003~2013년 동안 본원통화는 인민폐 88조 위안 증가하고 외화 자산은 3조 4000억 달러 증가했다. 투자 전성기에, 슈퍼 통화의 부정적인 영향은 명확하지 않았다. 최근 몇 년 동안 투자가 둔화되자 국내 저축이 증가하고 유휴 자금이 증가해 유동성의 어려움을 가중했다. 탕감 수단이 매우 적기 때문에 중국의 금융 정세에 정통한 저우샤오촨(周小川) 중국중앙은행 총재는 마침내 상쇄 방법을 생각해냈다. 이것이 바로 그가 2010년 11월 새로운 금융 정상 회담에서 제출한 ‘웅덩이 이론’이다. 대의는 단기 투기성 자본 즉 핫 머니 유입을 대응하기 위해 홍수 제방을 보강해야 하고, 이미 국내로 들어온 핫 머니에 대해서는 좋은 저수지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우샤오촨이 정의한 ‘웅덩이’는 도대체 무엇인가? 통속적으로 말하면, 하나는 부동산인데 부동산으로 웅덩이를 만들어 유동성을 가두어 두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치솟던 중국의 주택 가격이 세계 가장 높은 랭킹에 오른 원인이다. 한 전문가는 베이징 한 지역의 부동산을 환금하면 미국 전체를 살 수 있다고 농담했다.중국은 이제 부동산이 안 되니 주식으로 웅덩이를 만들어 유동성을 가둔다. 일단 증시가 하락하고 시가가 증발하면 유동성이 크게 줄어든다. 중국이 많은 지폐를 발행했지만 기본적인 생활 용품은 인플레이션 율이 높지 않은 것 같다. 주요 원인은 소비자물가지수(CPI)에 부동산이 계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부동산 가격이 소비자물가지수에 포함된다. 부동산 가격을 소비자물가지수에 포함할 경우 중국의 인플레이션율은 매우 높아질 것이다. 이제 부동산 시장의 침체되니 주식 시장을 웅덩이로 사용해 증시의 폭등과 폭락이 당분간 금융 위기를 해소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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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운 좋게도 아름다운 밴쿠버에 왔다. 나 같은 ‘반혁명’ 분자가 이곳에서 공개 연설할 수 있게 허락한 주최 측과 밴쿠버 중국 영사관에 감사드린다. 뉴욕에서 공개 연설을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내 강연 소식이 들리면 뉴욕 중국 영사관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방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펜실베이니아대학 강연은 2차례 취소됐고, 학생 회장까지 쫓겨났다. 내가 오늘 강연할 제목은 ‘중국 경제발전이 직면한 6대 난관’으로 여러분에게 중국의 경제 기반에 대해 알려줄 예정이다. 중국의 미래는 ‘이 6대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느냐’와 연관된다. 먼저 좋은 소식을 말해 보자. 2014년 중국은 GDP 총량 1조 달러 클럽에 들어섰다. 이 클럽의 멤버는 미국과 중국 둘뿐이다. 이에 중국 정부는 크게 내색하지 않으면서도, GDP 총량은 일본을 추월한 이후부터 줄곧 2위라며, 중국 GDP가 과장됐다는 일부 국제세력의 주장은 음모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의 통계는 중국 국가통계국이 제공한 데이터를 기초로, 구매력 평가법에 따라 산출한 것이다. 즉, 자신이 제공한 데이터로 이런 결과가 나왔으니, 다른 사람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첫 번째 난관: 세계 공장 지위의 몰락과 산업구조 조정의 어려움 중국은 2001~2010년의 10년 동안 ‘세계 공장’으로서 번영을 누렸지만, 결국 헤어날 수 없는 침체에 빠져들었다. 최근 보도를 보면, 세계 공장의 대표 지역인 둥관에서 두 번째 기업 파산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지난 1년 동안 기업 4천여 곳이 문을 닫았다. 사실 세계 공장의 몰락은 2008년부터 시작됐다. 2008~2013년의 공개 데이터를 보면, 둥관에서 문을 닫은 기업은 7만 2000곳에 달했다. 노동집약형 산업이 대부분인 둥관에서 기업이 대량으로 도산한 것은 생태환경과 노동자의 생명 비용을 과도하게 소비하는 중국의 경제성장 모델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중국 경제성장을 이끈 삼두마차는 투자, 무역, 내수였지만, 현재 이 삼두마차는 일찍부터 모두 멈춰버렸다. 올 일사분기 무역 성장속도는 지난해 동기 대비 15% 하락했는데, 이는 무역이라는 마차가 더 이상 중국 경제성장을 이끌지 못하며, 다른 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걸 뜻한다. 과거 20여 년 동안, 부동산은 줄곧 중국 경제성장을 선도한 대표 산업이었다. 하지만 거품화된 부동산 산업은 지지난해부터 정체 상태에 이르렀고, 부동산 시장의 하락을 막으려는 정부와 기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산업을 이끌던 제조 및 관련 서비스 산업은 전면적인 생산 과잉 단계에 빠졌다. 부동산 산업과 가장 밀접한 철강업, 시멘트업의 경우 과잉 생산량이 30%에 달하고, 거리가 비교적 먼 마루, 가구, 방직업 등 산업도 심각한 과잉 상태에 놓였다. 이러한 과잉 생산 위기는 핵폭탄처럼 언제든지 경제를 폭발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중국 경제의 핵위협’으로 비유된다. 이 때문에 중국은 ‘일대일로’ 계획 추진,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설립 등을 통해 생산 과잉분을 대외에 내보내려고 한다. 하지만 이 계획에 포함된 수십 개 나라가 대부분 국가 신용이 좋지 않은 나라이며, 중국이 다른 나라에 진행한 투자도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높아, 계획의 성공률은 매우 낮아 보인다. 앞서 말한 문제는 중국의 경제구조 조정이 희망이 없음을 보여준다. 소위 경제구조 조정은 정부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난 2005년 광둥성은 ‘등롱환조’ 정책을 실시해, 노동집약형 산업을 도태시키고, 기술집약형 하이테크 산업을 끌어오려 했다. 그 결과 낡은 새는 새장을 떠났지만, 새로운 새는 들어오지 않아 새장만 텅 비게 됐다. 그 결과 주장 삼각주 산업이 공동화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두 번째 난관: 방대한 실업 대군 세계 최대 인구 대국인 중국에서 실업문제는 줄곧 중국인의 머리에 놓인 검과 같았다. 내가 10대였던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에는 심각한 실업문제가 있었다. 당시 도시 청년들은 강제로 하방 당했고, 이를 피하려면 일자리를 찾거나 입대해야 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이 세계 공장의 번영기에 들어섰어도 실업인구는 여전히 대량으로 존재했다. 예를 들어 당시 농촌의 잉여 노동력은 1억 명을 초과했다. 오늘날 세계 공장이 쇠락하면서, 실업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중국 정부가 발표한 도시 등록 실업률은 오랫동안 4.5%를 넘지 않았지만, 이 데이터로는 중국의 실제 실업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첫째, 이 데이터는 정부 부서에 등록된 도시 인구만 계산했을 뿐 미등록 인원은 포함하지 않았다. 둘째, 도시 등록 실업률에는 농촌 실업인구가 배제됐지만, 농촌의 과잉 노동력 수도 매우 방대하다. 따라서 이 두 가지 통계 데이터가 배제된 것은 그 자체로 심각한 누락이라 하겠다. 현재 중국의 실업 대군은 총 네 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농촌의 과잉 노동력이다. 세계 공장의 도산으로 대규모 농민공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실업 현상은 더욱 심각해졌다. 둘째는 외자기업 종사자이다. 외국 자본이 대규모로 중국을 빠져나가면서, 소득이 높던 외자기업 종사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셋째는 실업 대학생이다. 대학생은 학교에 취업증명서를 제출해야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 이에 학생들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부모나 친척 회사에서 가짜 취업증명서를 발급받는다. 결국 학교에서 제공하는 취업률은 완전히 의미를 잃었다. 넷째는 도시에서 초중고를 졸업한 후 오랫동안 집에서 일자리를 기다리는 청년들이다. 중국 언론은 이들을 컨러오주(캥거루족)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중국에는 얼마나 많은 실업자가 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데이터를 참고할 수 있다. 원자바오 전 총리는 2010년 3월 중국발전 고위층 포럼에서 “중국의 실업인구는 2억 명”이라고 공개 선언했다. 또한 린이푸 전 세계은행 부총재는 올 1월에 열린 2015 동계 다보스 포럼에서 “임금 상승으로 인해 제조업 일자리 1억 2400만 개가 다른 개도국으로 이전했다”라고 밝혔다. 현재 중국의 노동인구가 9억 4000만 명이니, 실업인구를 3억 명으로 추산하면 실제 실업률은 32%에 달한다. 이렇게 높은 실업률은 통치 집단과 민중 사이의 ‘빵 계약’이 이미 효력을 잃었다는 걸 뜻한다. ‘빵 계약’이란 독재 통치자가 국민을 압박해 선거권, 신문 및 언론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등 정치적 권리를 ‘양도’받는 대신, 국민이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오늘날 높은 실업률은 중국 국민이 권리도 찾지 못하고 빵도 얻지 못했음을 뜻한다. 어떤 나라라도 이렇게 높은 실업률에 직면하면 매우 골치 아픈 문제가 될 것이다. 세 번째 난관: 심각한 자원 위기, 심화되는 대외 의존 중국의 환경오염은 매우 입체적이다. 육(토지), 해(강, 하천, 호수, 바다), 공(공기)이 모두 심각하게 오염됐고, 이와 관련된 자료도 많다. 그중 자원 위기를 예로 들면, 중국의 경제발전은 심각한 자원 속박에 직면했다. 원재료를 생산하는 각종 광물이나 생필품을 구성하는 식량 모두 대외 의존도가 심각하다. 중국은 ‘경제의 혈액’이라고 불리는 석유를 현재 60% 이상 수입하고 있다. 철, 동, 아연 등 각종 금속 광물의 대외 의존도도 비교적 높다. 즉, 중국 경제의 안전은 외부 요소에 심각하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백성은 음식을 하늘로 여긴다고 하니, 식량을 예로 들어 보자. 중국의 농업인구는 전체 인구 중 60%이지만, 식량 자급률은 2014년에 이미 87%로 떨어졌다. 콩, 옥수수, 보리 등 주요 곡식은 모두 수입에 의존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