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A주 긴급 구제, 권력과 시장의 대결

허칭롄(何淸漣)
2015년 08월 3일 오후 2:32 업데이트: 2024년 02월 19일 오후 3:27

중국 정부의 강력한 증시 구제를 살펴보면 그 방법은 정말 다른 나라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이다. 마침내 7월 9일 증시 방향이 급변해 주가지수가 빠르게 상승했고, 7월 13일까지 상승세를 유지했다. 중국의 주식 사태가 그리스 채무 위기보다 심각하다고 우려하던 언론은 순식간에 국제 언론에서 사라졌다.

여론이 이런 증시 구제가 중국 정부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닌지, 중국의 미래 경제 발전에 정말 이로운 것인지 토론하기 시작할 때 나는 오히려 다른 문제를 생각했다. 응급조치의 시작에서 볼 때 베이징은 사실상 금융위기에 대응하는 예행연습을 한 차례 겪은 것과 같다.

증시 구제 조치로 드러난 정부의 독재 본색

이번 증시 구제는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단계는 증감위, 중앙은행에서 할당했기에 조치도 비교적 적었다. 6월 28일 중앙은행이 공포한 기준금리 및 지준율 인하는 상당한 조치로 여겨졌지만, 증시는 오르지 않고 오히려 하락했다. 7월 6일 이후 3일간 증시가 폭락하자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들었다. 증시 상황이 국가 안보 분야로까지 격상된 것이다. 증감위, 은감위, 중앙은행, 재정부, 국자위 등이 증시 구제에 나섰을 뿐 아니라 공안부도 ‘악의적인 공매도 세력을 철저히 조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렇게 강력하게 증시를 구제하는 데는 물론 시진핑 주석의 명령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국가적 시스템’을 발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7월 8일 정오, 증감위는 긴급히 ‘증감발 (2015) 51호’를 공포해 두 가지 조치를 내놓았다. 첫째, 6개월 이내에, 상장기업의 지배주주와 주식을 5% 이상 보유한 주주 및 이사, 감사, 고위층은 2차 시장을 통해 해당 기업의 주식 수를 줄일 수 없다고 규정했다. 위의 관련 인원이 규정을 위반하고 해당 기업의 주식 수를 줄이면, 엄격한 처벌을 받는다. 둘째, 각 증감국은 최근 6개월 내 해당 기업의 주식 수를 줄인 대주주 및 이사, 감사, 고위층을 면담하고, 그중 5억 이하로 줄인 주주는 누적 감소 금액의 10% 이상으로 주식 보유를 높이고, 5억 이상으로 줄인 주주는 누적 감소 금액의 20% 이상으로 주식 보유를 높일 것을 명확히 요구했다.

‘국가적 시스템’의 위력은 역시 대단했다. 곧바로 상장기업 655곳이 주식 수를 높이거나 재구매할 계획을 발표했고, 기타 금융기관도 소문을 듣고 즉시 움직였다. 중커증권과 자오상증권은 1억 6300만 위안을 들여 상장기업 3곳의 주식을 사들였다. 중국증권금융주식유한공사가 증자, 채권발행, 동종업 대출 등 다양한 방식으로 획득한 유동성 지원은 7월 9일까지 수천억 위안에 달했다.

국영기업의 반부패를 두려워한 국영기업 관리층은 지난해부터 증시를 통해 주식을 매매했고, 당해 경영자매수라는 국영기업 개혁을 통해 가로챈 주식을 ‘판매해’ 올 상반기 총 5천억을 현금화했다. 이 주식은 원래 고위층이 국영기업 개혁을 이용해 아무런 투자 없이 이익을 챙긴 것이다. 지금 당 중앙이 이런 주식 일부를 토해내 국난을 넘기고, 대부분 주식을 남긴 것은 그들의 사정을 봐준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 고위층의 지도 아래, ‘국가팀’은 일치단결해 주식을 사들였고, ‘공매도’하는 시장세력(즉 외부세력)과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대결을 벌였다. 마침내 2015년 7월 A주 증시 사태에서 승리해 주가지수를 떠받쳤고,(매도를 제한했기 때문에 ‘증시를 떠받쳤다’라고 할 수 없다) 중소 투자자를 포함한 국내 투자자의 믿음을 안정시켰다.

2008년 금융위기가 미국에 도래했을 때 ‘월스트리트저널’은 ‘당 지부가 월스트리트에 공수한다’는 사설을 통해 오직 중공만이 미국 증시를 구할 수 있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7년이 지난 후 당 중앙이 중국 증시에 내려와 주가지수를 성공적으로 떠받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붕괴되던 증시 회복, 시 주석 전능 이미지 공고

7월 5일, 베이징의 다양한 증시 조치가 실패하자, ‘만일 2015년 증시가 붕괴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라는 문장이 인터넷에 떠돌았다. 문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예측했다.

“만약 주식시장, 부동산시장, 실물경제 및 은행 시스템에 위기가 나타나면, 다음에 충격을 받을 곳은 분명히 환율이다. 중앙은행은 예외 없이 주식시장과 환율시장 양측에 조치를 취할 것이고, 그 결과 위안화의 국제화는 여기서 끝날 것이다. 홍콩은 다시 한 번 막대한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중국은 열 차례 넘게 불마켓이 전복됐지만, 시의 결단력과 그가 이끄는 증시 조치의 용맹함은 결코 양 전임 총서기가 따라올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번의 최대 특징은 경찰과 국안이 증시 구제에 개입한 것이다. 7월 9일, 신화사는 “당일 오전 멍칭펑 공안부 부부장이 부대를 이끌고 증감위에 도착해, 증감위와 함께 최근 악의적으로 주식과 주가지수를 공매한 단서를 조사하고, 위법 행위는 강력히 제재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공안과 국안이 증시 구제에 개입해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을 했는지, 외부에서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7월 12일 보쉰이 전한 소식에 따르면, 7월 9일 오후 6시까지 국안국은 대형 지하 금융기관 286곳을 조사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약 3조 위안의 현금을 압류해, ‘국내 금융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죄명으로 국고에 환수했다는 것이다. 다만, 다른 소식통이 없는 탓에 한동안 근거 없는 소문으로 여겨졌는데, 어쨌든 참고해 볼 만 사항이다.

최근 주가 하락은 매우 위급해 뉴욕 증시까지 하락했다. 일부 국제 옵서버들은 중국 증시로 인해 세계 금융위기가 다시 폭발할 것으로 여겼고, 그 결과 ‘전능’하다고 여겨진 시진핑의 통제 능력에 강한 의심을 품었다. 하지만 7월 A주 증시 구제로 사람들은 시의 강세와 결단력을 다시는 의심하지 않았고, 시의 강세가 중국의 운명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증시 구제에 긍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대부분 중국인)은 증시 구제로 한 차례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한다. 일부 평론가들은 완곡하게 이번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이런 위기를 맞아서는 안 된다고 제안했다. 증시 구제를 찬양하는 목소리가 높지 않은 이유는 이번 증시 사태는 ‘정책성 불마켓’이 자초한 화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기에, 관영 언론은 무안하게 이 사실을 회피하면서, 오직 “중요한 순간에 당이 당과 전 국민을 인도해 재난을 성공적으로 종식시켰다”라고만 말할 뿐이다.

7월 A주 증시 구제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위기가 정권 교체를 일으키는 촉매제가 되는 동시에, 중국이 시장화 개혁을 통해 시장경제 체제 국가의 해외 투자자가 되길 희망한다. 그들은 중국이 시장화 수준을 높여 국제 사회에 융합되고, 세계 각국과의 무역 거래를 막는 장애물을 감소시키길 바란다. 이런 견해는 7월 13일 ‘파이낸셜 타임스’의 ‘중국의 증시 구제 조치가 위안화 개혁을 위협한다’는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기사에는 일부 사람들의 실망을 언급했다. “정권을 잡은 중공은 결국 중국 경제와 금융 시스템 주요 부분의 통제권을 포기할 수 없었다… 중국에 있는 외국 투자자도 종종 원망을 한다. 그들은 자신이 좋지 않은 감독 분위기에 처했다고 느끼며, 관료주의의 높은 시장 진입 장벽은 여전히 그들을 슬프게 만든다.”

위에서 말한 평가는 주로 평가자가 중공 체제와 이해관계가 있느냐에 따라 갈리며, 이는 상대주의의 정수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이 어느 시간, 어느 위치에 있으며, 이 사건 혹은 사람과 어떤 관계인지 모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는 1949년 상하이 이야기를 되새겨야

2015년 7월 A주 증시 구제는 1949년 5월 이후 천이, 천운이 상하이에서 ‘불법 악덕 상인(실제로는 ‘시장 세력’)과 대결한 것과 유사하다. 1949년 5월 25일 상하이가 해방되자, 천이, 천운은 명을 받들어 상하이를 주관하면서, 반년 동안 화폐와 상품을 둘러싸고 상하이 투기 상인과 세 차례 격렬한 공방전을 벌였고, 결국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그들은 무슨 방법을 사용했을까? 다름 아닌 군사 행동을 동원했다.

첫 번째 ‘은원대전’을 예로 들어보자. 금원권을 발행하는 화폐 제도 개혁은 악질적인 인플레이션을 낳아, 사람들은 지폐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 상하이가 해방되고 10일 후, 황금, 은원, 달러의 대대적인 투기로 인해, 은원 가격이 거의 2배로 급등했다.

각종 물가 지수도 이에 따라 상승해 쌀과 면사의 가격이 2배 이상 뛰어올랐다. 난징루에 있는 4대 백화점은 은원으로 가격을 표시하고 위안화를 거절해, “해방군이 상하이에 들어갔지만, 위안화는 난징루에 들어가지 못했다”라며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됐다. 군사관제위원회는 은원을 투매해 시장을 안정시키려는 조치가 효과가 없자, 마오쩌둥의 전화 승인을 받아 결연한 군사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6월 8일, 군관위는 신문, 라디오를 통해 상인들에게 위안화를 받으라고 요구했다. 10일 오전, 쑹스룬 상하이시 경비사령부 사령원은 중무장한 군경들을 이끌고 한커우루 422호의 상하이 증권 건물을 포위해, 건물에 갇힌 모든 사람의 명단과 재물을 조사, 등록했다. 이후 집중 훈화를 실시하고, 현장에서 234명을 체포해 인민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했다.

당시 국내외 여론은 “공산당 군사 100점, 정치 80점, 경제 0점”이라고 생각했다. 은원대전 후, 천이, 천윈은 면직물대전, 양식대전에서 또다시 승리했다. 방식은 여전히 국가 기구를 동원해 시장 세력과 대결을 벌였고, 상하이탄의 각종 ‘투기상인’은 감옥에 갇히거나 재산을 몰수당하고, 심하면 목숨을 잃었다. 홍색 자본가 룽이런의 기억에 따르면, 3대 경제대전을 거치면서, 중공의 경제능력에 대한 국내외의 시각이 변했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상하이 경제전투에 높은 평가를 내렸고, 그 의미가 “회해전투보다 적지 않다”고 여겼다. 그는 ‘능(能)’ 자를 직접 적어 천윈에게 상으로 건네주었다. 이후 천윈은 죽을 때까지 공산당 내 최고 경제 전문가의 자리를 차지했다.

1949년부터 2015년까지 시간은 66년이나 흘렀지만, 중공은 여전히 혁명당의 본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국의 마오 추종자들은 시 주석이 시장 구제에서 보여준 강력한 이미지에서 마오쩌둥과 같은 희망과 광명을 보았을 것이다.
중국 A주 시장은 이번 사태를 통해 정책적 불마켓에서 국안이 개입해 증시를 구하는 풍파를 겪었다. 서양의 자유경제 관점에서 보면, 중국은 시장경제 체제의 표준에서 더욱 멀었다.

중국 정부의 관점에서 보면, 60여 년 전으로 돌아가, 1949년 마오쩌둥이 천이, 천윈을 지휘해 상하이에서 시장과 대결한 역사를 재현했다. 이러한 권력과 시장 대결의 재현은 금융위기에 대응하는 예행연습을 한 것과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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