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 정전협정, 6·25전쟁 발발과 휴전까지

이승만 대통령 안전보장 없는 정전협정에 반대... 반공포로 석방 강수
최창근
2022년 07월 26일 오후 3:24 업데이트: 2022년 07월 26일 오후 3:27

7월 27일은 6·25전쟁 정전 협정일이다. 1953년 7월 27일 경기도 파주 판문점에서 체결된 협정으로 동족상잔의 전쟁이 중단됐고 2022년 현재까지 ‘정전(停戰)’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6.25전쟁 정전협정서 서명란. | 국가기록원.

1950년 북한군의 전면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간 이념 차이로 벌어진 내전(內戰)임과 동시에 국제전이었다. 1948년 건국된 신생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유엔(UN)군 기치 아래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파병했고 북한을 도와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 명분으로 중국 공산군이 참전했다. 소련은 공군 조종사를 지원했고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자 패전국 일본은 소해정(掃海艇·기뢰 제거 선박)을 파견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배하여 대만으로 천도한 중화민국(中華民國) 정부도 지원군을 파병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선제타격작전 계획에 따라 38도선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했다. 북한군은 서해상 옹진반도로부터 동쪽으로 개성,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동부전선에서는 강릉 남쪽 정동진, 임원진에 해병대와 유격대를 상륙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활약했던 소련제 탱크 T-34를 앞세운 북한군은 전쟁 발발 당일 개성(파주-문산 축선)과 동두천, 포천(동두천-의정부 축선)을 점령했다. 서부전선에서는 파주와 문산을 거쳐 서울로, 중부전선에서는 동두천과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진격했다. 결국 6월 28일 새벽, 한국군은 미아리 방어선까지 격파당했고 서울도 함락당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천도했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전시. | 연합뉴스.

유엔은 6월 25일,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의 남침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38도선 이북으로 북한군의 퇴각을 요구했다. 북한이 이를 무시하자 이틀 후인 6월 27일 유엔군 파병을 결의했다. 7월 초 유엔군을 지휘할 통합군사령부가 설치되고 더글라스 맥아더가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됐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북한군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에는 마침내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았다. 대구에서 마산까지 서남부 방어는 유엔군이, 대구에서 포항까지는 한국군이 방어를 맡았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에서 9월 중순까지 낙동강전선에서 북한군과 혈전을 계속하였다.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은 북한군에 맹폭을 퍼부었으며, 지상에서는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을 저지했다.

전세가 역전된 것은 9월이다.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다. 상륙작전 후 전세가 완전히 역전됐다.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다.

6.25전쟁 전세를 역전시킨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 연합뉴스.

이승만 대통령은 9월 말 대구의 육군본부에서 한국군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여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로서 북진 명령을 내렸다. 10월 1일 강릉 방면의 국군 3사단이 최초로 38선을 돌파했다. 10월 7일에는 유엔군이 38선을 넘었고, 그 뒤 유엔 총회가 이를 추인하였다. 이후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10월 19일 백선엽 사단장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이 평양에 입성했다. 이후 국군 중 선두 부대는 압록강에 도달했고 유엔군도 한반도에서 공산군을 몰아내기 위한 마지막 공세에 몰입했다.

10월 1일, 북한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소련과 중국은 참전을 결정했다. 마오쩌둥은 ‘순망치한(脣亡齒寒)’, 즉 북한이 망하면 중국이 위태로워진다는 논리를 내세워 당초의 약속대로 군대를 보냈다. 1950년 10월 19일, 펑더화이의 지휘 아래 1차로30만여 명의 병력이 압록강 3개 지점을 거쳐 입북했다.

소련군도 1950년 11월부터 공군을 파병했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확전 가능성을 우려하여 소련군 비행기를 중공 항공기인 것처럼 꾸몄고, 조종사들은 중공군 복장에 중국어를 쓰도록 교육받았다.

중공군은 유엔군과 한국군이 북한 깊숙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11월1일 평안북도 운산 일대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국군은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받았고 운산 북방 구봉산에서도 중공군에 포위됐다. 이후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던 유엔군 역시 중공군의 공세에 악전고투해야 했다.

일명 ‘크리스마스공세’였던 11월 24일 최종 공세에서도 큰 손실을 입은 유엔군은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당시 맥아더는 참전한 중국 인민지원군의 숫자가 약 8만에서 12만 사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60만 명이 넘었다. 결과적으로 크리스마스 대공세, 즉 1950년 12월 25일까지 중국 국경선까지 진출하여 전쟁을 종결하려 했던 맥아더의 구상은 대규모의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좌절됐다.

동북 방면의 유엔군도 중공군의 공세에 시달렸다. 북한의 임시수도 평안북도 강계를 점령하기 위해 함경남도 장진호로 진출했던 미 해병 1사단은 10배나 많은 중공군 7개 사단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15일간 영하 20~30도의 혹한 속에서 치른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은 3천여 명의 전사자 등 사상 최악의 피해를 입었으나,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성공적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유엔군은 12월 23일까지 흥남에서 철수했다.북한 주민 10만여 명도 유엔군과 함께 탈출했다.

결과적으로 1951년 1.4 후퇴로 서울을 다시 중공군에 내주었다. 중공군은 경기도 평택까지 남하했으나 유엔군의 반격을 받고 격퇴당했다. 유엔군은 1951년 3월 15일 서울을 재수복했고 여세를 몰아 3월 말 38선을 회복하였다. 이후 전선은 교착되었으며, 휴전이 모색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막후 접촉에서 휴전에 동의했다.

정전협상의 가장 큰 쟁점은 남북간 경계선과 포로 교환 문제였다. 경계선은 전쟁 전의 38선이 아니라 정전 시의 군사 접촉선으로 합의되었다. 그러나 포로 교환 문제는 쉽게 합의되지 않았다. 유엔군은 공산권 포로의 자유의사 귀환을 원칙으로 했다. 이에 대해 공산측이 반발하여 휴전회담이 결렬됐다.

6.25전쟁 정전 협상. | 연합뉴스.

그러다 1953년 3월 휴전회담이 다시 열렸다. 이시기,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 반대가 본격화됐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의 기회가 무산된다고 하여 휴전에 반대했다. 그는 정전회담에서 한국군 대표를 철수시켰다. 정전협정이 체결되면 국군의 작전권을 회수해서 단독으로 국군을 북진(北進)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이승만은 안전보장 없는 휴전협정에 반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반공 포로를 석방했다.

1953년 7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특사를 파견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약속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전제하에서 휴전협상을 받아들였다.

우여곡절 끝에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이로써 3년 1개월 2일, 1,129일 동안 계속됐던 6·25전쟁은 휴전상태로 들어가게 됐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공식명칭이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은 한반도에서 전쟁 행위를 멈추게 한 휴전협정(armistice)이다. 협정 의무 조항에 따르면 3개월 안에 휴전협정 당사국 간에 한반도 평화협정 논의를 해야 하고, 이후 1954년 스위스 제네바회담에서 구체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 하지만 미국 측이 협상을 회피함으로써 실질적이고 깊이 있는 논의는 이뤄지지 못했다.

휴전협정서에는 중국군, 북한군, 유엔군 사령관만 서명했다. 구체적으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을 대표하여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 유엔을 대표하여 유엔군 총사령관 육군 대장 마크 웨인 클라크가 서명했다. 이 외에도 조선인민군 대장 남일, 유엔군 대표단 수석대표였던 육군 중장 윌리엄 해리슨이 협정서에 서명했다. 협정서에는 ‘1953년 7월 27일 10:00시에 한국 판문점에서 영문, 한국문 및 중국문으로써 작성한다. 이 세 가지 글의 각 협정 본문은 동등한 효력을 가진다.’고 명기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