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6·25 전쟁과 전쟁영웅들 그리고 한미동맹

김태우/ 한국군사문제연구원 핵안보연구실장, 전 통일연구원장
2021년 06월 21일 오전 11:44 업데이트: 2021년 06월 29일 오후 7:37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 공격을 맞았던 한국군은 전열을 가다듬을 여가도 없이 남쪽으로 남쪽으로 패주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다급하게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트루만 대통령은 즉각 파병을 결정했다. 6월 27일 유엔안보리가 안보리결의 제83호를 통해 파병을 결의하자 16개 나라가 군대를 파견했고, 5개 나라가 의료지원단을 보냈다. 이후 3년 동안 치러진 전쟁을 통해 미군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은 가본 적도 없는 나라의 만난 적도 없는 국민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주기 위해 수많은 전투를 치렀고 무수한 희생자를 기록했다. 피로 맺어진 이 인연들이 한미동맹의 출발점이었다.

북한군은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쾌속 남진을 계속했다. 1950년 7월 초 일본에서 갑작스럽게 날아온 미 제24사단의 스미스 부대는 오산 죽미령에서 남진하는 북한군과 최초로 조우하여 전멸당하시피 했고, 7월 중순 대전 전투에서는 미 제24사단장 딘(William F. Dean) 소장이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었다. 8월 하순 북한군은 대한민국 영토의 90%를 점령하고 낙동강까지 진출하여 공산화 통일을 눈앞에 두었지만, 대구 북방의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 장군의 한국군 제1사단과 워커(Walton H. Walker) 장군 휘하의 미 제8군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했다.

1950년 9월 15일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 이후 전세는 역전되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9월 18일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을 개시하여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한 후 압록강에 이르렀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한번 역전되었다. 유엔군은 눈물을 머금고 후퇴해야 했고 1950년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맞이할 것으로 기대했던 병사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1951년 1월 4일 이번에는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이후 유엔군은 후퇴 및 반격 과정에서 중공군과 혈전을 반복했다. 인해전술을 앞세우고 밀려오는 중공군과의 첫 격돌이었던 1950년 11월 청천강 전투, 혹한의 추위 속에서 미 제1해병사단이 수적으로 우세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까지 철수한 장진호 전투 등은 전쟁사에 영원히 남을 격전 중의 격전이었다. 12월 중순 미 제10군단 및 국군 제1군단과 함께 자유를 찾아 나선 10만여 명의 피난민을 남쪽으로 철수시킨 역사적인 흥남 철수 작전도 전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1951년 3월 한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서울을 수복하고 전쟁이 한반도 중부에서 교착되면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이어졌다. 펀치볼 전투, 저격능선 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전투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까지 이어졌고, 3년 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한반도는 피로 물들었다.

한국 국민은 그토록 처절하게 치러진 전쟁 동안 대한민국을 지켜주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전쟁 영웅들을 결코 잊지 않는다. 6·25 전쟁에서의 한국군의 전쟁영웅으로는 백선엽 장군, 김종오 장군, 이성가 장군 등을 들 수 있다. 전쟁 초기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을 맞이한 한국군은 혼비백산 후퇴를 거듭했지만, 백선엽 사단장이 지휘하는 경인지구의 제1사단, 김종오 사단장 휘하의 춘천 지구의 제6사단, 이성가 사단장 휘하의 강릉 지구의 제8사단 등은 와해되지 않고 체제를 유지하면서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켰고, 이들은 나중에 반격작전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백선엽 장군의 제1사단은 1950년 8월 마지막 방어선이었던 낙동강 전선을 지켜냄으로써 풍전등화에 처했던 조국을 지켜냈고, 이후 평양 점령과 서울 재수복 과정에서도 선봉에 섰다.

미군에도 수많은 전쟁 영웅들이 있었다. 유엔군사령관으로서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반전시킨 맥아더(Douglus MacArthur) 장군이 한국인이 영원히 잊지 못하는 영웅이었고, 1950년 낙동강의 서쪽 방어선을 지켜낸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장군도 영웅이었다. 대전 전투에서 자신의 위치를 밀고하여 북한군의 포로가 되게 했다가 나중에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한국인 농부의 감형을 간청하여 출옥시킨 딘 장군도 영웅이었다. 밴플리트(James Van Fleet) 미 8군 사령관의 아들로서 폭격기 조종사로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실종된 밴플리트 2세(Van Fleet Jr.)도 영웅이었으며, 자신의 아들을 찾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아들들을 위태롭게 할 수는 없다며 수색작전을 중단시킨 아버지 밴플리트 장군도 영웅이었다.

지난 5월 22일 문재인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바이든 대통령이 문 대통령의 면전에서 명예훈장을 수여한 94세의 노병 퍼켓(Ralph Puchett Jr.) 예비역 대령도 영웅이었습니다. 퍼켓 당시 중위는 미 육군 레인저 부대의 중대장으로 청천강 전투에서 오른쪽 허벅지와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으면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섰다. ‘한반도판 스탈린그라드 전투’라고 불릴 만큼 처절했던 장진호 전투를 치르면서 항공기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사양하고 육로로 철수하면서 중공군 9병단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 흥남철수 작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미 해병 제1사단장 스미스(Oliver P. Smith) 장군도 잊어서는 안 되는 영웅이었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은 전사자 730명을 포함하여 4,400명의 전상자를 기록했다. 미군들은 장진호 전투를 ‘후퇴했지만 승리한 위대한 전투’라고 부른다.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의 주역인 프랑스 대대 대대장 몽클라르(Ralph Monclar) 중령도 진정한 전쟁 영웅이었다. 그는 1, 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로 육군 중장으로 전역한 후 6·25 참전을 자원하기 위해 스스로 네 계급이나 자진 강등하여 중령으로 프랑스군 대대장이 되었다. 지평리 전투는 유엔군의 반격을 무산시키기 위한 시작된 중공군의 1951년 2월 공세를 중단시킨 역사적인 전투였다. 중공군의 1951년 4월 대공세 때 장승천 고지에서 산화한 터키군의 고넨츠(Mehmet Gunenc) 중위도 길이 기억해야 할 영웅이었다. 4월 22일 중공군은 터키군 제1여단 제9중대가 배치된 장승천에 포격을 가한 후에 총공격해 가해 왔고, 터키군 중대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사실상 궤멸되었다. 포병관측 장교였던 고넨츠 중위는 아군 포병본부에 자신이 주둔한 장소를 포격 좌표로 송신하고 포격을 요청했다. 그리고는 “적군이 이미 우리 지역을 점령했다. 우리는 적군의 포로가 되기보다는 아군의 포격을 맞아 죽겠다”고 송전했다. 포병본부는 결국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고, 고넨츠 중위는 적군과 함께 산화했다.

이렇듯 1,129일 동안 지속된 6·25 전쟁은 한반도를 폐허로 만들고 숱한 인명 피해를 발생시켰다. 한국군은 14만여 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총 62만 명의 전상자 및 실종자를 기록했다. 유엔군은 15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유엔군의 주력인 미군은 연인원 백8십여만 명이 참전하여 전사자 3만7천여 명, 부상자 9만2천여 명, 실종자 3천7백여 명 등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으며, 6·25 참전으로 인한 미군의 총 사망자는 5만4천여 명에 달했다. 그들 모두가 6·25 전쟁의 영웅들이었다. 이후 70여년 동안 한미동맹은 한국의 경제기적을 가능하게 해준 안보방패가 되어 주었다. 영웅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동맹도 오늘의 번영된 대한민국도 존재할 수 없었다. 지난 4년 동안 문재인 정부의 좌성향 정책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신고립주의와 결합되면서 한미동맹이 부실화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시련의 기간 중에 양국 정부 간의 이념적 간극을 메우면서 동맹의 생존을 담보해준 것도 6·25 전쟁 동안 피로 맺어진 인연과 이후 70여년 간 축적된 동맹 결속력이었다.

/김태우·건양대 교수, 전 통일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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