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특집 ③] 대만을 택한 중국인민지원군 포로의 엇갈린 운명

최창근
2021년 06월 23일 오후 4:31 업데이트: 2021년 06월 24일 오후 1:44

반공의사와 반동분자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은 북한군과 더불어 6·25전쟁의 주적(主敵)이었다. 전쟁 발발 한 해 전인 1949년 10월 1일 공식 건국되어, 그해 12월에야 국민당과 국공내전을 마무리한 처지에 미군이 중심이 된 유엔(UN)군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이 ‘지원병’ 명분으로 파병한 군대였다. 이름만 지원군이었을 뿐, 실제는 동북(東北) 지방에 주둔하던 중국인민해방군 제4 야전군이었다. 전쟁 기간 중 총 37개 군단, 113개 사단이 참전했다. 이들 중 약 2만 2000명이 포로가 됐다.

‘출신 성분’ 면에서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는 중국 공산당이 선전하던 ‘견고한 사상으로 무장된 지원군 전사’와는 거리가 먼 병사가 다수였다. 그들은 국•공 내전에 국민당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후 중국인민해방군으로 편입된 경우가 많았다.

전쟁 발발 1년 차인 1951년 7월 10일 제1차 휴전 회담이 시작됐다. 휴전 회담 의제 중 격론이 벌어진 것은 제4항 포로 송환 문제였다. 중국인민지원군 포로 중 3분의 2 정도가 본국 송환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수 차례 재분류 작업 끝에 1952년 4월 유엔군이 집계한 중국인민지원군 포로 2만 700명 가운데 25%인 5,100명이 본국(중국) 귀환을 선택했다. 최종적으로 ‘자유중국(自由中國)’ 대만행을 택한 포로는 1만4715명이었다.

지원군 이름으로 참전한 중국 인민해방군… 포로 중 1만 4715명 대만 송환 원해

중국인민지원군 포로 중 ‘국민당군’ 출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한 주(駐)한국 중화민국 대사관은 포로 송환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1951년 9월 25일 전시 수도 부산에서 중화민국 대사관은 대만 본국 외교부에 중공군 포로 중 다수가 이전 국민당군 포로였음을 알리는 전문을 발송했다.

휴전 회담 과정에서도 중화민국(대만) 정부는 인민지원군 포로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포로 송환 방안도 본격 논의했다. 휴전 회담이 마무리될 무렵이던 1953년 7월 15일 위훙쥔(俞鴻鈞) 대만성 주석은 헌병부·내정부 조사국(현 법무부 조사국)·보밀국·보안국 등 관계자들과 반공(反共)포로 대만 송환 문제 처리를 위한 간담회를 개최했다. 그 결과 ▲포로 교섭·연락사업은 행정원 국방・외교부 2개 부서가 주관한다. ▲포로들이 대만에 오기 전 주관 부서가 유엔군사령부 및 대한민국 정부와 교섭하여 한국에서 심사받을 때 중화민국 정부가 관련 자료를 비밀리에 획득한다. ▲포로들이 대만으로 올 때, 대만 성(省)정부가 수용소를 마련하고 숙소, 양식, 피복 등을 배치하여 대만성 보안부가 관리한다 ▲공산포로충절문제조사위원회(匪俘忠貞問題淸査委員會)를 조직하여 국방부 총정치부(總政治部) 등 관련 기관에서 조사원을 파견하여 포로의 사상, 경력, 배경 및 투항 경과 등을 확인한다. ▲포로 중 불구자·환자·노약자 등은 대만성 사회처에서 처리한다. ▲포로 송환 시작 시 대외선전공작은 국민당 중앙당부가 책임지고 환영・위로・접대 등의 사업을 담당한다 ▲포로 처리방법상 상세 규칙은 기본 원칙을 확정한 후 각 단위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연구한다 ▲전문적으로 조직된 군사기관에서 포로를 관리하며 관련 예산은 대만성 예산에서 충당한다. 상기 논의를 바탕으로 정전 협정 체결 이틀 후인 1953년 7월 29일 중화민국(대만) 정부는 반공포로 송환 후 처리 방안을 결정했다.

정전 협정 체결 후인 1953년 12월 23일, 중립국 송환위원회의 포로 설득 작업이 완료되자 중화민국 정부는 포로 영접을 위한 본격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그 결과 이듬해인 1954년 1월 5일, ‘접운유한중국반공의사귀국연락소조(接運留韓中國反共義士歸國聯絡小組)’를 조직했다.

소조는 일본 도쿄의 유엔군사령부와 협의해 포로들의 이동 시 운수·보급·안전 등을 담당했다. 연락 소조 단장은 레이밍탕(賴名湯)을 비롯한 장교 9명으로 구성됐다.

1954년 1월 20일 오전 9시, 공식적인 포로 교환을 통해 포로 귀환이 시작됐다. 비무장지대(DMZ)에서 나온 포로들은 트럭 16대에 3000명씩 나눠 탔다. 이후 인천항으로 이동했다.

1954년 1월 23일 대만 북부 지룽항에 도착한 반공 포로 | 자료사진

포로 인계 작업은 인천 부두 근처 16개 장막에서 진행됐다. 16대 차량으로 이동한 포로들은 16개 장막으로 들어갔다. 유엔군 및 중화민국 군 장교들이 한 명씩 호명하며 인수인계했고 쌍방이 인수서에 서명했다. 인수 실무 책임자는 왕승(王昇)이었다.

포로들은 15대의 전차 수송선(Landing Ship Tank·LST)에 분승했고, 부상 포로 14명은 6기의 군 항공기에 탑승했다. 1월 21일, 대만행을 희망한 중국인민지원군 포로가 인천항을 출발했다. 해로를 택한 포로들은 3일 만에 대만 지룽(基隆)항에 도착했다. 부두에는 시민 2000여 명이 환영했다. 대만 정부는 1월 23일을 ‘세계 자유의 날’로 지정해 이날을 기념했다.

이에 앞서 1954년 1월 5일, 대만 정부는 반공의사취업보도처(反共義士就業輔導處)를 설립했다. 처장은 장제스의 장남 장징궈가 맡았다. 보도처 조사 결과, 교육 수준은 문맹자가 43%, 초등 교육자 50%, 중등 교육자 6%, 대학·전문대학 졸업자는 12명이었다.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하기 전 직업은 56%가 군인이었고, 그중 중화민국군(국민당군) 근무 경력자는 64%였다.

포로들은 다후(大湖), 샤후(下湖), 양메이(楊梅), 린커우(林口) 등 4개 지역에 나뉘어 수용됐고 2월 8일 보도처 개학식이 거행됐다. 교육 기간은 3개월이었다. 교육 목적은 ▲자유중국의 진보적인 상황 인지 ▲당면한 국제 정세 이해 ▲국군 실황 파악 ▲기본 학술 능력 증가 ▲반공항소(反共抗俄) 이론과 실제 인식 등이었다.

교육 과정 수료 후 반공 포로 다수는 군에 재입대했다. 4월 11일부터 육・해・공군, 병참 각 부문별로 나뉘어 선발됐는데, 최종적으로 육군 11,111명, 해군 994명, 공군 496명, 병참 796명 등 총 13,397명이 입대했다. 이로써 대만을 선택한 중국인민지원군 포로 대부분은 중화민국 국군으로 편성됐다.

중국행 택한 포로, 귀래자는 변절자 딱지

타이베이 중산당에서 개최된 1·23 ‘세계 자유의 날(自由日)’ 기념 행사. | 제공=대만 중국시보.

한편 6000여 명의 인민지원군 포로는 중국행을 택했다. 1954년 1월 3일, 평양역을 출발한 포로들은 열차편으로 신의주, 단둥(丹東)을 거쳐 선양(瀋陽)에 도착했다. 선양 주재 동북군구는 귀환 포로를 귀래자(歸來者·돌아온 사람)이라 명명했다. 이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귀관처(歸管處)를 설립했다.

귀래자들은 정치심사와 기절(氣節)교육을 받았다. 포로수용소에서 겪은 일을 상세히 기술해야 했다. 자아비판도 따랐다. 귀래자 중 중국 공산당 당원은 2900명 정도였다. 그중 92%가 당적을 박탈당했다. 당은 귀래자들은 변절자라 칭했다.

교육 후 귀래자들은 특수 혐의자 혹은 특수 당원이란 오명을 쓰고 고향으로 돌려보내졌다. 집안사람들은 이들을 냉대했고, 약혼자도 다수는 파혼을 요구했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이들은 자아비판을 하고, 인민재판을 받아야 했다. 1982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이들의 명예를 회복해줄 때까지 반동분자 딱지를 떼지 못했다

/최창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