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용사 구장회 “늘 불안해, 우리 국민들이 전부 망각들 하고 있어”

2021년 6월 22일
업데이트: 2021년 6월 22일

1950년 6월 25일은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날입니다. 6·25 전쟁 당시, 치열했던 장단.사천강 지구 전투에 참전한 애국 용사를 만나봤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폭풍’이라는 작전명과 함께 T34 탱크를 비롯한 소련제 무기들을 동원해, 38도 선을 넘어 기습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소련과 중국의 도움을 받은 북한의 군사력은 막강했습니다. 북한군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6·25 전쟁 당시, 피난길에 올랐다가 가족을 잃은 구장회 할아버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눈물겨운 그 날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구장회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기획총무국장] :

“내가 당시 서울 가회동에 살았었는데, 그때 휘문 중학교 막 1학년 입학을 하고 한참 학교 다닐 시기인데, 전쟁이 났다고 아침에 동네 통장이 연락이 왔어요. 빨리 피난 가라고. 그래서 전쟁이 난 것을 알았고, 그 얘기를 듣고 나니까 저 의정부 쪽에서 포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어”

“27일 보따리를 싸서 한강에 갔더니 한강 다리가 무너졌어.”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피난민 속에 인민군이 끼었다.  그래서 피난민이고 뭐고 상관없이 무차별로 폭격하는 거야. 그래서 내 어머니 잃고 동생도 잃고.. “

“이런 얘기를 하려고 하면 눈물이 나려고 하고 말이 막혀, 목이 메어 가지고..”

가족을 잃은 구 할아버지는 슬퍼할 틈도 없이 피난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굶주린 배를 안고 수개월을 걸어 부산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먹고 살기 위해 구두를 닦으며 생활해야 했습니다.

 

[구장회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기획총무국장] :

“그때 거지예요. 누가 옷을 줘? 피난 갈 때 입은 옷 그대로. 그걸 석 달, 넉 달을 입고 갔으니, 오죽하겠어. 거지지. 가면서 여기저기서 밥도 얻어먹고 원두막 근처에 가서 벗겨 먹은 껍질 주어서 논물에 씻어 가지고, 먹어가면서 석 달 고생해서 부산까지 갔어요. 부산 가서 먹고 살려니 거지 생활을 하지만, 그래도 나 혼자라도 뭐를 해야 할 것 아냐. 그래서 구두를 닦았어요.”

갑자기 시작된 전쟁은 삶을 송두리째 바꿔놨습니다. 유엔군은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고 평양 너머까지 북진했지만,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습니다. 2년이 지나도 전쟁은 계속됐고, 끝날 기미가 안 보였습니다. 

52년 어느 날. 17살 어린 소년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겠다는 결심을 하고 해병대에 지원하게 됩니다.

 

[구장회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기획총무국장] :

“내가 거지로 밥 얻어먹고 이러느니 차라리 군대 가서 떳떳하게 군복이라도 얻어 입고. 전쟁이라도 하다가 적이라도 한 놈 쏴 죽이고 죽자.. 그 생각밖에 없더라고..

 그리고 구 할아버지는 1953년, 열여덟의 나이로 장단 사천강 지구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판문점에서 사천강을 따라 임진강 하구로 이어지는 장단·사천강 지구는 한국전쟁에서 치열했던 격전지 중 하나입니다.

 1951년 7월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됐지만, 전투는 여전히 치열했습니다. 휴전선이 그어지기 전 조금이라도 땅을 더 차지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장회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기획총무국장] : 

“휴전회담이 시작됐는데,  그때가 막 휴전이 무르익을 때야.  그래서 전쟁에 전전선 155 마일 전쟁이 아주 치열했어요. 왜? 이제는 땅뺏기야. 휴전은 곧 될 것 같으니까. 과거에 유엔군이 만들어 놓은 38선이냐, 아니면 현 전선에서 그대로 휴전하느냐. 이것은 결정이 안 된 상태야.”

 “인민군들 작전이 상당히 비열했다는 생각이 들어. 왜냐, 판문점이 여기 있으면, 그 주위에다가 포진지를 구축해놓고  아군쪽으로 계속 쏘는데, 포가 멎지를 않아, 거의 일주일을 계속 쏴요.”

 “이만한 소나무도 나무도 안 보여. 다 잘라져서. 파편에 155m 고지. 그리고 홀딱 뒤집어졌어, 산이. 그리고 군홧발로 이렇게 걸어가면 먼지가 퍼석퍼석 나요. 그러니까 여기서 몇 발짝만 가도 그냥 흙먼지가 막 일어날 정도로..”

 최전방 격전지에서 치열한 전투를 경험했던 구 할아버지는 수많은 동료의 희생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한군에게 총을 맞아 쓰러진 동료의 시신 옆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구장회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기획총무국장] :

“내 옆에 동기생은 ‘천 수복’이라고 바로 옆에 있었는데, ‘억’하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보니까..

여기가 날아갔어. 입에서부터 반이.. 보니까 파편도 이만해.. ‘촥~’하고 날아와서 여기를 친 거야.. 그 자리에서 즉사지 뭐. ”

 “‘분대장님! 분대장님!’ 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분대장이 어디 있는지와?  붙들고 엉엉 우는 거야.. 동기생이 죽었는데, 눈물 안나..”

 “자꾸 그 생각하면 눈물이 나”

 서울에서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인 장단지구 확보를 위해 중공군과 치열한 격전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구 할아버지는 오로지 나라를 위해 중공군과 싸워야 했습니다.

 

[구장회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기획총무국장] :

“중공군이 나타나.  ‘쏼라쏼라’하면서 꽹과리 치고.. 우리는 전쟁 끝난 다음에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이런 거다 하고 들었지 그전에는 생각지도 못하고 들어보지도 못한 얘기야.”

 “떼로 몰려서, 보여요. 오는 게, 중공군이 ‘와~’ 하고 피리 불고 장구치고, 요란해.. 

그런데 거기다 대고 쏴도,  그냥 와~ 몇 사람이나 죽냐 이거야. 그러니까 마음이 위축되지. 

전 전선이 전부 중공군이야.  새까맣게 몰려오는 거야.”

 당시 약 3천만 명의 남·북한 전체 인구 가운데 10%에 해당하는 300만 명 이상의 인명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전쟁 3년 1개월 만인,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됐습니다. 판문점에서는 포로 교환이 이뤄지고, 그렇게 한국전쟁은 서서히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구 할아버지는 휴전되던 날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구장회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기획총무국장] :

“중대장이 ‘만약에 판문점 저쪽에서 청색 신호탄이 올라가면 휴전이 되는 거니까 일체 사격 중지하라’. 이렇게 명이 내린 거야. 밤 10시가 되니까 진짜 청색 신고탄이  ‘빵’ 하고 올라가는 거야. 하늘로.. 야 이제 휴전이구나.. 그때 기분은 거기 있던 사람이나 느끼지 말 듣고는 실감이 안 날 거야.”

 “비무장지대 그쪽에서 철조망 끊어진 데서 우리가 이렇게 가니까 인민군이 하나 와요. 서로가 손 흔들고.. 우리가 말은 통하니까..”

 “‘동무래! 고생했수다래’ 서로 전쟁할 때 적이었지만 그때는 동포야. 우리 말로 대화 되고 참 지금 생각하면 묘해.. 우리가 전쟁해야 되겠어. 이러고 얘기를 하고..”

 목숨을 걸고  포탄을 온몸으로 막던 10대 어린 소년은 이제 여든여섯이 됐습니다. 6·25전쟁은 7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북 분단이라는 현실로 여전히 우리 삶 옆에 있습니다.

 현재 생존한 6·25 참전 용사는 전국적으로 7만여명,  동족상잔의 비극을 극복하고 전쟁의 한 가운데서 살아남은 구 할아버지의 소원을 여쭤봤습니다.

 

[구장회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기획총무국장] :

“휴전 상태를 아직도 전쟁상태라고 하는 것으로 바꿔서 인식하고 전쟁이 안 끝났는데, 어떻게 마음이 놓이겠어요. 난 늘 사실 그 생각만 하면 늘 불안해. 우리 국민들이 전부 망각들을 하고 있어. 그래서 휴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대목을 경각심 속에 넣고 행동했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고, 또 (김)정은이한테 부탁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우리 이러지 말자”

 “정은이하고 문재인(대통령)하고 어느 때고 좋아, 빨리 손잡았으면.. 그게 제일 (소원이야). 더 무엇을 바라나..”

 10대의 나이에 전쟁터에 뛰어든 구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나라 사랑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NTD뉴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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