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특집] ‘형제의 나라’ 터키…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파병

1만 5000명 파병... 미국, 영국 다음으로 많은 희생

최창근
2022년 06월 23일 오후 4:00 업데이트: 2022년 06월 24일 오후 1:57

“다시 돌아오면 그땐 헤어지지 않을 거야.”

2017년 개봉한 한국-터키 합작 영화 ‘아일라’ 대사 중 하나이다. 영화는 1950년 발발한 6·25전쟁에 참전한 한 터키 군인과 한국인 전쟁 고아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극적인 재회를 다루었다. 터키에서는 500만 명 이상의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했다.

2017년 개봉한 한국-터키 합작영화 ‘아일라’ 한 장면. 한국 전쟁고아 아일라역으로 응답하라 1988에서 ‘진주’역을 맡았던 김설이 출연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는 터키에서 500만 명 이상이 관람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6·25전쟁에 참전한 터키 군인 쉴레이만 딜빌리이(Süleyman Dilbirliği) 예비역 육군 대령과 ‘아일라’라는 터키식 이름으로 불린 한국인 김은자 씨이다. 6.25전쟁 기간 동안 양부녀의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2010년 한 한국 방송사의 도움으로 59년 만에 재회에 성공했다. 그 과정은 2010년 춘천MBC 다큐멘터리 ‘코레 아일라(Kore Ayla·한국인 아일라)’에 담겼고 다큐멘터리를 바탕으로 영화 ‘아일라: 전쟁의 딸’이 제작 됐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6·25전쟁(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 헌장에 의거하여 북한의 침략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권유하는 유엔 결의 제82호를 채택했다. 6월 27일, 유엔 결의 제83호에서는 무력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기 위해 한국에 필요한 원조를 할 것을 회원국에 권고했다. 해당 결의문들은 유엔 헌장에 따른 집단안보를 발동한 것으로서 유엔의 집단안보체제가 본격적으로, 그리고 전형적으로 적용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되기도 했다.

유엔 결의에 따라 6월 27일 미군을 시작으로 연합군의 참전이 시작됐다. 전쟁 발발 나흘 후인 6월 29일, 터키 정부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응답하여 파병을 결정했다.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터키 정부는 “책임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당시 터키민주당(DP) 소속 아드난 멘데레스 총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로부터 한국전쟁 지원 요청을 받자 국회 동의 없이 즉각 파병을 결정했다. 이는 파격적인 정치적 결정이었다.

7월 25일, 터키 정부는 3개 보병대대, 1개 포병대대, 1개 수송대로 구성된 5000명 규모의 여단(旅團)급 병력 파병을 공식 결정했다. 미국에 이은 세계 두 번째 공식 파병이었다.

터키 육군 제28사단 241보병연대를 모체로 편성된 통칭 ‘터키여단’ 여단장에는 육군 제2기갑여단장 타흐신 야즈즈(Tahsin Yazıcı) 준장이 임명됐다. 타흐신 준장은 터키공화국 국부(國父)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와 더불어 제1차 세계대전 시 갈리폴리 전투와 이후 터키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장(名將)이었다.

부상병을 격려하는 타흐신 야즈즈 터키여단 여단장(준장).

1950년 10월 12일, 터키여단의 첫 번째 병력이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후 터키 동부 지중해에 면한 항구 이스켄데룬을 출발한 두 번째 병력이 10월 17일 도착했다. 터키여단은 미군의 군수 지원을 받아 훈련에 돌입했고 이후 미국 육군 제25보병사단 예하로 편성됐다.

한국 도착 한 달 후 터키여단은 첫 번째 전투를 치르게 된다. 11월 27~29일 평안남도 개천(价川)군 군우(軍隅)리 일대에서 벌어진 군우리 전투였다.

‘항미원조(抗美援朝·조선을 도와 미국에 대항한다)’를 명분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중국 인민지원군 제38군이 요충지인 군우리로 진격했다. 미국 육군 제8군은 군우리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의 공세를 지연시키며 퇴각로를 확보하려 했다. 그중 터키여단이 인민지원군 공세를 저지하는 일선에 섰다. 수적 열세 속에서 포위된 터키여단은 완강하게 저항하며 인민지원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터키여단의 활약으로 다른 유엔군 부대는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채 철수할 수 있었고, 터키여단도 미국 육군 제2보병사단과 합류할 수 있었다. 이 속에서 터키여단은 전체 병력의 1/6에 해당하는 767명의 인명 손실(사망 218명, 부상 455명, 실종 94명)을 입었다. 터키군의 희생을 기려 미국 제8군 사령부는1950년 12월 13일, 총 15개의 은성훈장과 동성훈장을 수여했다.

6.25전쟁에 파병된 터키여단.

영화 ‘아일라’의 주인공 쉴레이만 예비역 대령과 아일라(김은자)씨의 극적 만남이 이뤄진 것도 군우리전투였다. 전투 중 상급 부대와 통신이 두절되어 명령을 받기 위해 차량을 타고 가던 쉴레이만은 매복 중이던 북한군의 기습을 받았다. 자동차를 버리고 숲길을 걷던 중 죽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울고 있던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쉴레이만은 아이의 얼굴이 달처럼 둥글고 달빛 아래에서 발견했다는 이유로 ‘월광(月光)’을 뜻하는 터키어 ‘아일라(Ayla)’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

이후 쉴레이만과 아일라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게 된다.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아일라는 쉴레이만은 친딸처럼 여기게 된다. 그러던 중 쉴레이만은 파병 기간이 종료되어 터키로 귀환해야 했다. 아일라를 홀로 두고 갈 수 없어 한국에 남을 것을 자청했지만 상관은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강제로 전역시키겠다.”며 노발대발했다.

별다른 방도가 없었던 쉴레이만은 아일라를 ‘앙카라학원’에 맡긴다. 앙카라학원은 경기도 수원에 주둔하던 터키여단 의무대에서 설립한 고아원 학교였다. 결사코 자신과 헤어지지 않으려는 아일라를 쉴레이만은 가방에 넣어 터키로 데려가려 했지만 아일라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 앙카라학원 관계자가 이를 알려 들통나고 말았다. 결국 쉴레이만은 “다시 돌아오면 그땐 헤어지지 않을 거야.”라는 말을 하고서는 귀국선에 올라야만 했다. 이후 59년의 세월이 흘러 ‘김은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살고 있는 아일라와 극적 재회를 했다.

아일라(김은자)씨와 쉴레이만 씨 부부.

결과적으로 ‘후퇴’와 다량 사상·실종자 발생으로 마무리된 군우리전투 이후 터키여단의 용맹성을 입증한 전투는 1951년 1월 25~27일 벌어진 경기도 용인군 금양장리전투이다. ‘151고지공방전’으로 불리는 전투에서 터키여단 예하 241보병연대 제3대대는 선두 공격을 자청했다. 지난 군우리전투 명예 회복 차원이었다.

전투가 개시되자 터키여단 제3대대는 “알라후 아크바르(Allahû ekber·알라는 위대하시다)”를 외치며 151고지 참호진지를 향해 돌격했다. 지난날 유럽을 공포에 떨게했던 오스만제국 정예부대 예니체리(yeniçeri)를 연상케 하는 공격 결과 고지를 방어하던 중국 인민지원군은 총 474구의 시신을 남기고 퇴각해야 했다. 사체 대다수는 개머리판에 맞아 부서지거너 총검에 찔린 채 발견됐다. 반면 터키군 사상자는 전사 12명, 부상 70명으로 터키여단의 완승이었다. 당시 한 종군기자는 ‘백병전의 왕자’ ‘신(神)의 손(God hand)’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어진 금양장리 일원의 전투에서 터키군은 연전연승했다. 중국 인민지원군은 총 1900명의 사상자를 냈고 터키군은 151고지 사상자를 합쳐 도합 1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데 그쳤다. 이후 터키군은 중국 인민지원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됐다. 김량장 전투 이후 중공군 지휘부는 일선부대에 “가능하면 터키군과의 정면 승부는 자제하라”는 특별 지침을 하달했다. 1300년 전 북방 초원지대를 휩쓸며 중국을 위협하던 ‘돌궐의 전사(戰士)’들에 대한 공포감이 엄습했던 것이다. 이후 터키군은 장승천 전투, 고량포, 서부전선 임진강 북단의 네바다 전투 등에서 돌권 전사의 후예답게 용맹을 떨쳤다.

6.25전쟁 정전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터키는 1만 4,936명을 파병했다. 미국(178만 9000명), 영국(5만 6000명), 캐나다(2만 5687명), 호주(1만 7164명)에 이어 단일 국가로는 5번째로 많았다. 그중 724명이 전사하고 2068명이 부상당했으며 163명이 실종되고 244명이 포로로 잡혔다. 인명 희생 규모 면에서도 미국, 영국 다음이었다. 그중 부산 남구 유엔묘지에는 462위의 터키군 참전용사가 영면해 있다.

1953년 7월 27일, 6·25전쟁 휴전협정이 조인됐다. 정전 후 1960년대 말까지 미국과 터키, 태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는 모두 철군했다. 터키와 태국만이 1개 중대 병력을 한국에 주둔시켰다. 터키와 태국 병력은 유엔사령부의 한 상징으로 남았다. 1966년 7월, 터키는 의장대 11명만 남기고 전투병력1개 중대 전원을 철수시켰다. 남은 의장대 병력 철수가 결정된 것은 1971년 12월이다.

터키 수도 앙카라 시내 한국 공원 내 ‘한국참전토이기(터키)기념탑’

터키군의 용맹을 알린 금량장리 전투 후 매년 1월 25일이면 터키 수도 앙카라 한국공원에 있는 한국전참전추모탑 앞에서 한국전 참전용사, 터키군 대표단과 한국전 참전 각국 외교단들이 참석한 가운데 터키군의 김량장리 전투 승전 기념식이 개최되고 있다.

6.25전쟁 참전을 계기로 스스로 돌궐(突厥)의 후예를 자부하는 터키와 한국은 명실상부하게 ‘형제의 나라’로 거듭났다. 바탕에는 유라시아대륙 극서(極西)에서 달려와 극동(極東)의 전장에서 산화한 터키군 참전 용사들의 희생이 자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