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70주년] ‘총알이 피해가는 사나이’…백마고지에서 인민군과 웃음꽃 피우기도

이가섭
2020년 6월 23일
업데이트: 2020년 6월 24일

70년 전 전장을 누빈 소년은 백발노인이 됐다. 경북 경주시 안강 기계 전투, 인천상륙작전, 금학산, 백마고지… 6.25 전쟁 굵직한 전투에 모두 참전했던 그는 억세게 운이 좋았다. 목숨을 내놓고 적군과 맞섰지만 총알이 모두 그를 피해갔기 때문이다.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있다”는 참전 용사 김종환(88) 할아버지와의 인터뷰를 1인칭 시점으로 구성했다.

#군번도 없던 18살 소년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이 새벽에 38선을 넘어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점점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은 계속됐다. 학교(대구농림중학교) 전체가 술렁였다. 자원입대를 원하며 손을 든 학생은 8명이었다. 18살, 혈기왕성한 우리가 나라를 지켜야 한다. 그 생각뿐이었다.

7월 13일 아침, 운동화 끈을 매던 나는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 저 오늘 군대 갑니다.” 놀란 어머니가 힘껏 붙잡으셨다. 방에 계시던 아버지도 호통치셨다. “어린놈이 무슨 군대냐?” 하지만 소용없었다. 무작정 약속 장소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만나기로 했던 8명 중 4명은 보이지 않았다.

교복을 입은 우리는 군번도, 소속도 없었다. 총 한번 잡아보지도 못했던 손으로 야간에는 북쪽을 향해 사격을 했다. 아침이면 부대를 돌아다니며 주먹밥을 얻어먹었다. 왕소금만 잔뜩 들어있던 주먹밥은 3일 먹고 나니 진절머리가 났다. 하지만 이마저도 감지덕지였다.

끔찍했던 기억이 있다. 비가 쏟아지는 장마철, 하천에는 교복 입은 시신이 둥둥 떠내려왔다. 나처럼 군번도 없는 학도병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아마 그는 전사자로 처리되지 않았을 거다.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6.25 참전용사 김종환 할아버지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영상 캡처=에포크타임스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다

8월 말, 부산 제4부두에서 17연대에 배치됐다. 고참은 우리에게 일본으로 신무기 교육을 받으러 간다며 들뜬 목소리로 전했다. 전쟁도 피하면서 일본에 갈 생각에 신났다. 하지만 작전과에서 나눠준 문서에 도착지는 ‘월미도’라 적혀있었다. 처음 들어본 곳이라 어딘지 물었더니, 고참은 인천 옆이라며 “우리 다 죽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달리기를 잘했던 나는 수색대 정보과에 배치되어 수색 임무를 맡았다. 기습상륙작전을 하기 전, 수륙양용차를 타고 3~4일간 인근에 적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임무였다. 폭격을 쏟아부은 지 3~4일이 지났을까. 다행히 서울을 수복할 수 있었다. 이후 나는 강릉, 속초, 양양을 거쳐 이북 평강으로 종횡무진 옮겨 다니며 또 다른 임무를 수행했다.

하루는 낙오병 병력을 조사하기 위해 강릉 오대산에 투입됐다. 하천을 사이에 두고 적들은 산 위에 있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기관총 소리가 따닥따닥 나더니, 앞에 가던 대원이 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임무 수행이 다급한 데, 총알이 쏟아져 쓰러진 대원을 부축할 수도 없는 긴급한 상황이었다.

자갈밭에 쓰러진 전우를 뒤로 한 채 달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는 함께 입대하고 동고동락을 함께했던 같은 반 친구 보검이었다. 달리는 내내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친구를 챙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7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백마고지의 ‘총알이 피해 가는 사나이’

하룻밤에 몇천 명씩 전사하는 백마고지 전투에도 투입됐다. 적인지 아군인지 숱하게 많은 시체가 발에 뭉클뭉클하게 밟힐 정도였다. 수색대는 총알이 오가지 않을 때 적진의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수색대장은 허위보고가 아님을 증명하라며 적진의 문패를 가져오라고 시키기도 했다. 내내 살얼음판 같은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양측 수색대 모두 집중 사격으로 몰살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서로 정보 수집을 위해 무언의 약속이나 한듯 쏘지 않았다. 인민군과 웃으며 “야 임마, 넘어와”라며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포로로 잡힐 뻔한 순간도 있었다. 정보 수집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인민군 두 명이 “북쪽으로 가면 살만하다”며 양쪽 어깨를 움켜잡았다. 죽겠구나 싶어 기지를 발휘해 용변이 급하다고 말했다. 그들은 거짓말하지 말라며 다리를 세게 걷어찼는데 마침 방귀가 뿍 나오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게 화장실 가는 척하며,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틈에 도망쳐왔다. 그 난리에도 무사했던 나에게 ‘총알이 피해 가는 사나이’ 별명이 붙었다.

#다시 만난 인민군에게 말을 건네다

1129일을 군인으로 지내고 중사로 제대했다. 17연대 수색대 중 살아남은 이는 나 혼자였다.

전쟁을 겪었어도 삶은 계속돼야 하지 않겠나. 전역 후 한달 만에 취직해 서울 국제전신전화건설국 부산중계소로 발령받았다. 73년 7월, 부산에서 평양까지 통신 케이블을 복원할 때 JSA 공동경비구역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국군과 인민군을 한 걸음 거리 사이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38선 경계선에서 국군과 인민군 사이에서 사진을 찍다 | 김종환 할아버지 제공

바로 옆에 서 있던 인민군에게 “우리는 같은 민족인데, 빨리 통일이 돼야 하지 않겠냐” 넌지시 물어보니, 인민군은 빙긋이 웃기만 했다.

#에필로그

여기까지 인터뷰를 마친 김종환 할아버지는 상기된 얼굴이었다. 70년 세월이 할아버지에게는 한순간인 듯했다.

“북한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지 않았나. 뒤숭숭한 날들이다. 구십이 다 된 백발노인이 됐지만, 싸울 용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라를 지키러 뛰쳐나갔던 1950년의 그 18살 소년은 여전히 할아버지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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