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26주년 전날 밤, 독재자 폭정 클럽 재건

허칭롄(何淸漣)
2015년 06월 17일 오후 5:05 업데이트: 2024년 02월 19일 오후 3:27

26년 전 베이징 6·4 사건은 소련-동유럽 격변(서양사회에서 1989년에 일어난 일련의 혁명을 이렇게 부른다.)의 신호탄이 되었고, 이를 통해 중국 지식분자와 대학생 집단은 세계 민주화 운동에 큰 공헌을 했다.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에서 예언한 듯이 “인류의 이데올로기 논쟁은 이미 종점에 달했고, 자유·민주가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후 20여 년의 정치 변화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강권, 독재에서 민주로 향하는 것은 일방통행이 아니며, 민주화나 계몽 전제주의로 향하던 일부 국가들이 독재로 회귀하는 재난에 직면했다는 걸 발견했다.

러시아 독재 회귀와 민심

현 단계에서 서로 손잡고 모방하는 비민주국가 중, 이란은 정교 합일 국가이며, 중국은 민주화를 겪어보지 못했다. 중국은 그저 개방적 자세 속에서 1980년대 반(半)계몽 전제주의를 겪다가, 현재 어두운 독재로 회귀하는 길을 미친 듯이 달리고 있다. 반면, 러시아는 역사상 서구화를 겪은 경험이 있고, 90년대 이후 민주화 길에서 일정 시간을 겪었다. 러시아를 분석해 보면, 사회 전환 과정 중 민주화가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현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푸틴이 독재로 회귀한 것은 물론 그의 KGB 경력과 큰 관계가 있다. 이런 인간은 독재와 강권을 선호하고, 게다가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부터 스탈린까지 수백 년간 양성된 독재문화의 뿌리가 매우 깊어, 중국에 버금갈 정도이다. 나는 ‘푸틴주의는 어떻게 만들어졌나(2014년)’라는 글에서, 푸틴주의는 대국의 쇼비니즘과 독재정치가 만든 검이지만, 오히려 민심을 거쳐 단련됐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중국과 달리 민주제도라는 외형이 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말하는 ‘국민의 선택’이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정치적 정확성의 상징이다. 하지만 독재국가에서 민심은 강권에 의해 쉽게 휘말리곤 한다. 내가 앞의 글에서 중점적으로 서술한 내용은 이렇다. “러시아 정치의 뚜렷한 방향 전환은 푸틴이 집권한 후에 시작됐다. 푸틴이 집권하기 전, 러시아는 한동안 독재와 작별하고 민주로 향했다. 1999년부터 푸틴은 능숙한 정치 통제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점차 독재와 패권 정치로 회귀시켰고, 자신을 선거에서 뽑힌 대통령에서 독재자로 변신시켰다. 주목할 만한 것은, 푸틴이 정치에서 중대한 변화가 있을 때마다 러시아 주류 민심의 지지를 얻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푸틴은 러시아 민족의 대국 쇼비니즘 전통을 교묘히 영합하고, 러시아인이 수백 년간 권위에 의존한 것을 이용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정치 이상을 실현해, 오늘날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되었다.” 다시 말해, 푸틴의 지지자는 농민계층과 청년 세대였고, 반대자는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의 중산계층에 집중됐다. 이중 전자의 수가 후자를 훨씬 초과했다.

중국에는 이런 견해가 유행한다. “중공의 독재 기반은 주로 1950, 1960년대 생이며, 주력은 광장에서 춤추는 아주머니들이다. 이 세대가 사망하면, 젊은이는 자연히 민주의식을 지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말에는 사실적 기반이 결여됐다. 중국 마오 좌파 중 적지 않은 수가 80, 90년대 생이기 때문이다.

푸틴의 사회 기반 중, 골수 지지자는 ‘청년 근위대’라고 부른다. 이는 과거 소련 대조국전쟁 시기 청년조직의 명칭으로, 전투에서 용감히 싸운 청년의 상징이었다. 2005년 러시아 집권당인 ‘통일 러시아’는 청년 조직을 이 이름으로 개명해, 오늘날 러시아 최대 청년 정치조직이 되었다. ‘청년 근위대’의 ‘업적’은 적지 않은데, ‘반(反)색깔혁명’에서 비상 선봉의 역할을 맡았고, 반(反)푸틴 시위를 거행한 청년들과 격렬한 충동을 일으켰다. 또한 에스토니아가 소련 홍군 해방 기념비를 이전하는 데 항의하고, 미국 정보부의 은닉처라며 모르몬교 교회를 공격했으며, 푸틴의 우크라이나 출병을 지지했다. 청년 근위대는 항상 푸틴이 가리키는 데로 움직였다.

청년 근위대 구성원은 소련 해체 후 태어난 사람들이 많은데, 이 청년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교육받았는지는 아직 체계적으로 연구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중국 민주인사에게 ‘이데올로기 세뇌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지’ 명확히 경고하고 있다.

포퓰리즘과 반미 양대 기둥에 의존한 ‘차베스 사회주의’

베네수엘라는 민주제의 외형 아래 포퓰리즘이 사회를 휩쓰는 전형을 보여준다. ‘중국 인민의 좋은 친구’ 차베스는 포퓰리즘과 반미에 의존해, 베네수엘라에 ‘사회주의’를 건설했다. 남미를 연구하는 정치학자들은 이를 ‘차베스 혁명’이라고 부른다. 이 ‘혁명’은 사회주의 협동조합을 만들고, 의료와 교육 시스템을 개선하며, 권력을 인민에게 돌리기로 약속했다.

차베스가 중국 정부처럼 통계 데이터를 조작하지 않았다면, 그는 약속을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 각종 사회 계획을 통해 10년 내 3백만 명에 가까운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빈곤층이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5%에서 26%로 떨어졌다. 또한 기본적으로 문맹을 퇴치해, 식자율이 96%에 달했다. 외교 정책을 보면, 차베스는 ‘미 제국주의’ 세력과 양립할 수 없는 자세를 취하면서 스스로 ‘반미영웅’의 이미지를 만들어, 적지 않은 지지를 받았다.

현재 베네수엘라는 남미 최대 부패국가 중 하나이자 전 세계 순위 138위이며, 이 나라에 ‘볼리바르 자산계급’이 나타났다고 하지만, 그 구성원에는 ‘특별비용’을 징수하는 정부 관료와 석유를 매매하는 중개인, 암시장과 회색 시장에서 활약하는 사람, 돈세탁 및 마약을 밀수하는 조직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차베스는 앞서 말한 두 가지 성과를 앞세워 자신이 ‘사회주의’를 건설했으며, 그의 사회주의만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난 과연 그가 마오쩌둥의 수제자인지 여러 번 생각해 봤지만, 결국 그의 이데올로기 출처가 매우 다원화됐다는 걸 발견했다. 볼리바르, 예수, 마르크스, 인디언 등이 모두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베네수엘라 빈곤층에게는 빵과 복지가 가장 중요할 뿐, ‘차베스식’ 사회주의가 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차베스에게는 무슨 주의를 택하든 중요하지 않고, 각종 속임수를 통해 권력을 보유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사실 이는 베이징 정권과 다를 게 없다. 그들에게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의 본의가 뭔지 중요하지 않고, 이를 이데올로기 도구로 삼아 반대파를 제거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차베스는 이미 고인이 됐지만, 그가 남긴 문제는 현재 베네수엘라를 괴롭히고 있다. 차베스는 석유자원의 풍부한 이윤에 의지해 빈곤층의 분배액과 복지를 높이고, 그들의 경제생활 수준을 올렸다. 하지만 빈곤층에게 젖병만 제공할 뿐 그들이 발전할 기회를 주지 않은 정책은 석유 가격이 하락하면서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베네수엘라의 중상류층은 차베스가 사회의 혁신과 발전 동력을 말살했다고 그에게 굉장히 반감을 가졌다. 이후 차베스가 임기 중 광범위하게 정치를 억압하고 인권을 침해한 행적이 대량으로 폭로됐다.

미국 애머스트대학의 베네수엘라 문제 전문가 하비에 코랄레스는 “차베스는 법률을 사용, 남용, 무시하는 세 가지 방법으로 대통령의 권력을 확대하고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을 억압했다. 그는 반대파뿐 아니라 정부 내부의 반대 목소리까지 탄압했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원유 가격을 올린 다음 주변국에 소규모 보조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주변국의 민주화 발전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이는 ‘뉴욕타임스’ 기사 제목 ‘차베스는 해탈했지만, 베네수엘라는 여전히 발버둥 치고 있다’와 다름없다.

중국 정부, 폭정자 클럽의 주요 접착제

독재로 회귀하는 추세를 보면, 독재 국가들은 서로 밀접하게 협력하고, 민주를 말살하는 전략과 구체적 수법을 상호 모방해, 본국과 지역 내 민주화 발전을 억제한다. 이 폭정 국가들 사이에서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중국 정부이다.

베네수엘라는 중국과 밀접한 경제협력 관계를 맺고, 중국으로부터 대규모 무상 원조를 자주 받는다. 중국과 이란의 관계는 더 복잡한데, 중국의 선전에 따르면 “40년간 얽힌 중-이란 관계에서, 이란은 중국을 욕하던 데에서 중국 쪽으로 돌아섰으며”, 중국의 국제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이란의 역대 지도자들은 중국을 더욱 중시했고, 심지에 중국을 ‘구명줄’로 여긴다”라고 주장한다. 2014년 중-이란 관계는 ‘전면적인 전략적 파트너’로 격상됐지만, 아직 ‘지속적인 발전’이 필요하다. 현재 가장 중요한 정치 협력은 “미국 등 외부 세력이 색깔 혁명을 발동하는 걸 공동으로 억제하는 것이다.”

상술한 나라들은 중국 정부처럼 충분한 재력으로 인터넷 통제 기술을 개발할 수 없어서, 중국 정부는 매우 ‘사심 없이’ ‘국제 공산주의’ 정신에 입각해, 거대 자본으로 개발한 인터넷 통제 기술을 그들에게 무료로 제공했다. 또한 5마오당을 조직해 민심을 조작하는 경험을 모두 전수해, 그들 간에 5마오당을 통한 ‘민간 교류’의 기반을 다져주었다. 옥에 티라면 최근 베네수엘라 정부가 경제 사정으로 5마오당을 취소했다는 점이다. 물론 중국은 타국이 국민을 통제하는 선진 경험을 배우는 데 능숙하다.

예컨대, 푸틴이 청년 근위대를 조직하자, 시 총서기도 마음속으로 깨달아, 중국 공청단원을 대량으로 5마오당으로 변신시켰다.
독재국가는 같은 국가끼리 서로 뭉쳐야만 자신이 ‘국제 고아’가 되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다. 곧 6·4운동 26주년을 맞는 지금, 당대 세계가 독재로 회귀하는 현상을 분석하는 이유는 중국인을 깨우치기 위해서이다. 독재국가가 폭정자 클럽을 재건하면서 중국 민주화에 가하는 압력이 확실히 거세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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