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전4기 탈북 작가 지현아 “사람들, 공산주의라는 무서운 몽둥이 모른다”

2021년 04월 26일 오후 8:15 업데이트: 2021년 04월 27일 오후 11:07

3번의 강제 북송과 4번의 탈북. 한국 땅을 밟기까지 지현아 작가는 강제 낙태와 교화소 수감이라는 생지옥을 겪어야 했습니다. 작가로 활동하며 국제 사회에서 북한의 인권 유린 실태를 알리는 그녀를 만났습니다.

 

자기 소개를 부탁합니다. 

저는 북한에서 탈북자 지현아입니다. 2007 대한민국에 왔는데요. 98년도에 탈북 시도를 하고 2007년도 대한민국에 입국하기까지 3번의 강제북송과 4 탈북. 그리고 감옥을 오가면서 어렵사리 10년 만에 한국에 올 수 있었습니다. 

1998년 한국 라디오 방송을 들은 지씨의 가족은 첫번째 탈북 시도를 합니다. 하지만 지씨는 공안에 체포돼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교화소로 끌려가 참혹한 상황을 견뎌야 했습니다. 네 차례 탈북 시도 끝에 어머니와 한국 땅을 밟은 지 씨. 이후 남동생과 여동생을 한국에서 만났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행방불명 상태입니다.(나레이션) 

살아 있는 메뚜기를 두 마대 먹은 것 같습니다. 너무 배고팠으니까요. 다리랑 날개만 뜯어서요. 그때가 99년도니까 만 20살이었습니다. 

강목으로 머리와 어깨를 두드려 맞았어요. 생벼를 먹었다는 이유였어요. 쓰러지니까 제 입을 찢었어요. 선생이라는 사람인데, 한국의 경찰 같은 사람이예요. 감옥의 교도관인 셈이죠.

그러면서 더이상 조선의 국민이 아니라고, 공민증을 박탈했다고 했어요. 공민증은 한국의 신분증입니다. 더 이상 조선 인민이 아니라는 소리죠.

그런데 선생이 죽여도.. 거기 선생한테 너 왜 얘를 죽였냐.. 이렇게 따지지 못합니다. 왜냐면 인원에 포함이 안됐기 때문에..

네 차례나 탈북한 이유는?

중국 근방을 건너갔는데, 바깥에 밥그릇에 쌀밥이 얼어 있더라고요. 겨울이니까. 쌀밥을 탈북자들이 건너가면 먹으라고 내놓은 줄 알고 그거 먹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게 개밥이래요. 그래서 제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신선한 충격도 아니고 죽을만큼 고통스러웠어요.

저뿐 아니라 많은 탈북자들이 3번, 4 심지어 8번까지 탈북하는 이유는 죽어도 땅에 묻히고 싶지 않지 않기 때문이예요. 그래도 중국에서 죽으면 시신을 짐승들이 먹게 그냥 내놓지 않고.. 땅을 파서 묻어라도 주거든요.  

자유와 인권을 안 사람은 그 땅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요. 

고향이 그리울 때가 있나요?

나쁜 것은 북한 정권이죠. 어릴 때 같이 놀았던 친구들의 모습들… 잊히지 않는 간직하고 싶은 동심의 세계죠. 

내 고향이지만 어쩔 없이 부정적인 면 얘기해야 하는 상황이라 북한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죠.

탈북자로서 한국 내 북한 인권을 바라보는 시각을 어떻게 보시나요.

국내 인권문제는 여당과 야당이 같다고 하면서  북한 인권만 다르게 취급하나요?

여당과 야당, 이념을 떠나서 국내 인권 문제를 처리하듯, 북한 인권 문제에도 그런  시각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북한을 경험해본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잖아요.

그런데 공산주의를 선택하겠다. 이것은 배부른 것 밖에 안됩니다. 영혼과 육신이 비만에 걸려서 공산주의가 무서운 몽둥이임을 모르는 거죠.

북한처럼 공산주의 사회주의로 가고 싶으면 (본인이) 북한에 가고, 대한민국의 다음 세대는 살려야 하니 빨리 자리를 내려놓고 북한에 가길 바랍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통일할 있도록 바람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김일성 회고록이 출간된 것에 대한 생각은?

대북전단금지법을 만든 후 북한의 엄청난 것이 들어온 거잖아요. 페이스북에2천 5백만의 눈물은 쌓이고 쌓이는데 악마에 대한 칭찬은 세상이 떠나갈 요란하다”라고 한 마디로 표현했거든요. 홍콩 사태가 대한민국의 사태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