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명 숨진 산악 마라톤 생존자 “조직위, 준비·대처 소홀…날씨 탓만”

2021년 05월 26일 오전 9:34 업데이트: 2021년 05월 26일 오후 12:30

중국에서 열린 산악 마라톤 대회에서 강풍과 폭우, 우박 등 악천후로 참가선수 21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21일 관영 CCTV는 전날 북서부 간쑤성 바이인시 인근 황허스린(黃河石林·황하석림)지질공원에서 열린 100km 산악 마라톤 대회에서 강한 비바람과 기온 강하로 이 같은 사고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이날 경기는 1만명이 참가한 건강 달리기와 172명이 참가한 산악 마라톤으로 나뉘어 치러졌다.

산악 마라톤 부문에는 100km 마라톤 우승자 량징(梁晶), 유명 육상선수인 차오펑페이(曹朋飛)와 황인빈(黃印斌) 등이 참가해 관심을 모았으나 모두 숨져 더욱 큰 충격을 안겼다.

대회 조직위와 언론은 이번 사고가 ‘극한의 날씨’로 인해 빚어졌다고 전하고 있다.

조직위에 따르면 이날 오후 1시께 고지대 20∼31㎞ 구간에서 날씨가 돌변하며 강한 바람과 함께 우박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고 기온이 급강하했다. 사망자 대부분의 사인도 저체온증으로 알려졌다.

조직위가 공식 웨이보에 올린 대회일 전후 일기예보에 따르면, 이날 날씨는 흐리긴 하지만 최저기온 9도, 최고기온 19도에 비가 오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중국 간쑤성 100km 산악 마라톤에 참가한 선수들이 갑작스러운 강풍에 써멀 블링켓(보온담요)을 꺼내 체온 유지를 하고 있다. | 웨이보

중국의 마라톤 경기에 여러 차례 참가했던 한 경력자는 중국매체 제일재경과 인터뷰에서 “100km 마라톤 경기는 선수들이 2000~3000kcal 이상의 음식과 보온장비를 갖춰 참가해야 한다”며 당일 날씨에 따라 조직위가 장비 검사를 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이어 “이번 대회 매뉴얼에서 바람막이는 필수장비가 아닌 권고장비로 적혀 있었다”며 공개된 동영상에서 심각한 저체온증을 나타낸 선수들이 매우 얇은 소재의 반팔, 반바지 차림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코스의 어려움에 비해 보급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체크포인트(CP)2~CP3 구간은 구간거리가 약 8km이지만, 평균고도 2000m의 고지대인 데다 선수들은 손발을 사용해 약 1km 정도를 기다시피 올라가야 했다는 것이다. 내리막 구간 역시 쉽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기상이변은 선수들이 바로 이 지점을 지나던 때에 겹쳤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수준인 7~8급(초속 13.9~20.7m) 강풍과 폭우가 쏟아졌고, 빗방울과 역풍에 시야가 줄어든 선수들은 온몸이 흠뻑 젖은 상태로 가파른 구간을 통과해야 했다.

선수들은 “써멀 블랑켓(은박 보온담요)을 꺼내자마자 강풍에 바로 찢겨져 날아갔다”고 말했다. 한 참가자는 “CP3 구간에서 음식과 식수, 쉼터 등 어떠한 보급물품도 제공되지 않았고 CP4 지점까지 버텨야만 했다”고 증언했다.

또다른 참가자는 관영매체 펑파이와의 인터뷰에서 “참가자 전원이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출발했다. 날씨 변동 가능성에 대해 전혀 몰랐다”며 “경기 전 통보받은 필요 장비 리스트에는 ‘충분한 보온장비’도 없었다. 참가자 대부분이 체온을 보호하지 못한 이유”라고 지적했다.

중국의 크로스컨트리 전문가들도 “고지대에서 개최되는 경기는 전반적으로 위험성이 크다. 선수들은 성적을 위해 가벼운 장비만 챙기려는 경향이 있다”며 “조직위가 바람막이를 강제하지 않은 것이 이번 비극의 한 원인일 수 있다”고 말했다.

험악한 지형은 구조가 늦어진 이유가 됐다. 차량은 CP2 구간에만 접근할 수 있었고, 참사가 빚어진 CP3~CP4 지점까지는 구조대 역시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간쑤성에서 열린 100km 산악 마라톤 선수들을 구조하기 위해 구조대가 고지대를 걸어서 이동하고 있다. | 신화통신/연합뉴스

“조직위, 참사 가능성 경고받았지만 대회 강행”

한 생존자는 가명으로 중국매체 펑몐(封面)신문의 인터뷰에 응해 “대회 조직위가 경기 전 저체온증 사고가 날 수 있다는 경고를 무시하고 경기를 강행했다”고 주장했다.

이 생존자는 “이달 구이저우 우멍산에서 열린 산악 마라톤 경기에서도 저체온증으로 사망자가 나왔다”며 “구조헬기를 요청하려 했지만, 구조대는 밤이 돼서야 도착했고 그때는 이미 구조가 아니라 시신 수습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악천후를 만난 선수들은 자신과 동료들을 구하려 안간힘을 썼다”며 “강풍에 서로를 껴안고 체온을 유지하려 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가지고 갔던 휴대전화로 구조 신청을 시도했지만, 신호가 잡혔다 끊기기를 반복했다. 신호가 잡혔을 때 구조 요청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40통 가까이 전화를 걸어 가까스로 연결됐지만, 구조대가 어떻게 올지 다 듣기도 전에 배터리 2%만 남은 휴대전화가 비행모드로 자동 전환되면서 전화가 끊겨 “헬기 출동을 요청했지만, 전화기 너머로 아무런 응답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이 생존자는 오후 5시께 걸어서 하산했고 하반신 대부분이 거의 감각이 없는 상태였다고 전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하진 않았지만, 같은 대회 제1회 때 참가했던 한 마라톤 선수는 “이 대회의 산악 코스는 황량하고 지리적 환경이 열악하다”며 “주최 측이 제대로 된 응급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모든 선수가 잘 보이는 시그널을 달아 날이 어두워지더라도 구조를 쉽게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안전대책이 필요하다. 물품 보급지점에도 소금 등을 구비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오히려 조직위와 다른 선수들로부터 비웃음만 당했다”고 말했다.

이 대회는 지역 경제 및 관광 활성화를 위해 2018년 첫 회를 시작으로 올해 4회째를 맞이했다.

조직위 공개 자료에 따르면, 코스 대부분은 바위산으로 이뤄진 지형으로 흙길이나 돌길이 많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다. 100km 산악 마라톤 구간은 평균 고도 1716m, 최고 고도 2300m이며, 3.5km 정도의 구간은 등반에 가까운 오르막 코스다.

대회 주관은 중국 공산당 바이인시 위원회와 바이인시 정부이며, 그 외 지역 체육담당부서, 공원관리사업소 측이 참가하고 있다. 대회 시행과 홍보, 기획은 간수 지역의 민간기업 2곳이 맡았다.

한편, ‘날씨 때문’이라는 조직위 공식 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중국 온라인에서는 “당 위원회나 지방정부가 시행사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흐지부지 사태를 마무리 지을 것”이라는 반응이 이어지기도 했다.

/강우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