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폐해와 상실의 회복…‘포로가 된 안드로마케’

마리 오스투(Mari Ostu)
2024년 05월 3일 오전 9:58 업데이트: 2024년 05월 13일 오후 5:29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프레더릭 레이턴(1830~1896)은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와 관련한 주제를 주로 다뤘다. 그는 특유의 섬세한 화풍으로 당시 예술계의 사랑을 독차지해 영국 최초로 세습 남작 작위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레이턴의 자화상’(1880),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 퍼블릭 도메인

‘포로가 된 안드로마케’

레이턴이 1888년경 완성한 작품 ‘포로가 된 안드로마케’는 가족 간의 사랑과 관계를 조명한 작품이다. 작품 제목의 안드로마케는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의 아내다. 레이턴은 트로이 전쟁 이후 안드로마케가 느꼈을 가족과 국가의 분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레이턴은 예술에 학문을 투영해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를 효율적으로 전달한다. 그는 호머의 ‘일리아드’에서 미망인이 된 안드로마케가 여인들의 행렬 속에서 남편 헥토르의 죽음을 슬퍼하고 아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장면을 효과적으로 묘사했다.

‘일리아드’를 현실로 옮기다

‘안드로마케와 아스티아낙스에게 보내는 헥토르의 작별’(1918), 칼 프리드리히 데클러 | 퍼블릭 도메인

이 작품이 처음 전시됐을 때, 당시 일리아드 속 한 문구가 적힌 도록(圖錄)과 함께 전시됐다.

“너의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어떤 이가 말하기를, ‘트로이를 위해 싸울 때 모든 트로이 전사들 중에서 최고의 영웅인 헥토르의 아내가 바로 이 여인이야’라고 말하리라.”

‘호머의 독서’(1885), 로렌스 알마 타데마 | 퍼블릭 도메인

이 작품은 일리아드 속 사건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레이턴은 일리아드 6권에서 헥토르가 자신이 죽은 후 아내가 그리스인에 의해 노예가 되는 것을 상상한 것을 그림으로 옮겼다.

안드로마케는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아들이 아버지 없이 자라게 된 것을 슬퍼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아들이 느끼게 될 정서적 불안에 대해서도 걱정한다. 일리아드에서 헥토르는 부성애의 이상을 상징하는 인물로, 질서와 평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남편을 잃은 과부의 슬픔을 담고 있는 한편, 패전국이 된 트로이의 몰락과 슬픔을 담고 있다. 레이턴은 개인과 국가 차원의 슬픔을 화폭에 아름답게 묘사했다.

‘포로가 된 안드로마케’

‘포로가 된 안드로마케’(1888), 프레더릭 레이턴 | 퍼블릭 도메인

그림 속 장면은 이른 아침이다. 마을 사람들은 공동 분수대에 모여 물동이에 물을 받으며 즐겁게 담소를 나눈다. 그들이 입고 있는 형형색색의 옷은 아침 햇살에 아름답게 반짝인다. 흐르는 물과 경쾌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밝은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림 가운데 자리한 주인공 안드로마케는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감싼 채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고 서 있다. 관객들은 그녀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레이턴이 말하고자 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그녀 주위에는 평범한 일상이 분주히 펼쳐진다. 그 한복판에 서있는 그녀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비극에 사로잡혀 절망에 빠져있다. 땅으로 향한 그녀의 얼굴엔 햇빛과 대조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레이턴은 빛과 어둠의 대조로 그녀의 슬픔을 더욱 세밀하게 묘사했다.

안드로마케와 주황색 옷을 입을 여인(왼쪽), 길쌈하는 노인(오른쪽)

레이턴은 주변 인물을 활용해 그림 속에 이야기를 더했다. 안드로마케의 바로 오른쪽에 서 있는 주황빛 옷을 입은 여인은 그녀와 자세와 얼굴이 놀랍도록 닮았다. 주황 옷 여인은 안드로마케보다 훨씬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또한 장밋빛 뺨의 따스함과 봄날의 꽃잎 같은 선명한 색채의 옷은 안드로마케가 애도를 나타내기 위해 입은 검은 옷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 여인은 안드로마케가 남편을 잃지 않았다면 보였을 아름답고 활기찬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림 속에는 검은색이 포함된 옷을 입은 여인이 세 명 있다. 바로 안드로마케와, 작품 왼쪽의 늙은 여인과 오른쪽 하단의 파란 두건을 쓴 여인이다. 이들은 모두 안드로마케에 대한 설명을 더하기 위해 그려진 인물이다. 왼쪽의 길쌈하는 노인은 안드로마케의 가까운 미래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녀 앞에 놓인 외로움과 고통을 상징한다.

세 명의 가족

‘포로가 된 안드로마케’(1888)의 세부, 프레더릭 레이턴 | 퍼블릭 도메인

슬픔에 잠긴 안드로마케의 시선 끝에는 행복한 가족이 있다. 삼각형 구도로 앉아 있는 가족의 가장 위에는 아이의 어머니가 있다. 검은 옷을 입고 파란 두건을 쓴 여인은 헥토르가 죽지 않았다면 안드로마케가 가족과 함께 누렸을 미래를 의미한다. 여인의 무릎 위에는 갓난아기가 편안하고 안정적인 자세로 앉아 있고, 아기는 아버지의 코를 잡으며 즐거워한다. 그녀는 온 신경을 아기에게 쏟으며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다.

신고전주의 예술

레이턴은 1878년 런던 최고의 예술 기관인 왕립예술아카데미의 회장직을 맡았다. 당시 그는 신고전주의 예술의 부흥을 위해 힘썼다. 도덕과 우화, 헬레니즘 미학을 담은 작품을 주로 그리며 ‘예술을 위한 예술’을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포로가 된 안드로마케’는 그 노력의 연장선이자 대표작으로 꼽힌다.

레이턴은 플라톤이 추구한 선(善)과 미(美), 그리고 용기를 예술에 표현하면서도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했다. 또한 안드로마케가 겪은 고통을 통해 관객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전쟁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전달한다. 안드로마케의 시선 끝에 자리한 행복한 가족을 통해 우리는 진정 무엇이 중요한지, 어떤 가치를 따르고 지켜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

마리 오스투는 미술사와 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그랜드 센트럴 아틀리에의 핵심 프로그램에서 고전 드로잉과 유화를 배웠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기사화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