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결산] ‘어둠 속 희망의 불빛’…중국 9대 사건

차이나뉴스팀
2022년 12월 31일 오전 12:48 업데이트: 2022년 12월 31일 오전 12:48

2022년 한 해를 돌아보며 중국의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들을 정리한다. 공산당 독재정권의 흑막과 권력 투쟁의 내막을 드러낸 사건, 전제정권이 빚어낸 사회적 비극과 인위적 재앙을 폭로한 사건, 중국 인민들이 폭력 정권에 맞서 저항한 사건 등 하나같이 큰 사건들이다.

1. ‘쇠사슬녀’ 사건

2022년 1월 말 이른바 ‘쇠사슬녀’ 사건으로 중국 인신매매 실태가 드러나 국제사회의 공분을 샀다. 인신매매로 장쑤성 쉬저우(徐州)시 펑(豐)현에 팔려가 장기간 폭행당하고 강간당하면서 쇠사슬에 묶여 헛간에 감금돼 있던 쇠사슬녀의 사연을 한 네티즌이 폭로했다.

마침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기간이어서 쇠사슬녀의 비참한 사연은 이 초호화 연회와 극적 대비를 이뤘다.

가해자와 중국 공산당 관료들이 한통속이 돼 인신매매 범죄를 저지른 흑막이 폭로되자 당국은 검열과 은폐로 사건을 덮으려 했고, 네티즌들은 이에 맞서 용기와 기지를 발휘했다. 중국 내 다양한 계층의 정의로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사를 하고 서명 운동으로 성원을 하는 등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국내외 여론의 압박이 거세지자 장쑤성과 쉬저우 당국은 해명성 공고를 5차례 내고 일부 말단 관리들을 가볍게 처리했다. 네티즌들은 쇠사슬녀가 12세 때 유괴된 쓰촨(四川)성 소녀 리잉(李瑩)임을 밝혀냈지만 당국은 외모가 판이한 윈난(雲南)성의 샤오화메이(小花梅)라고 주장했다. 누리꾼들은 당국의 조사 결과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당국은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샤오화메이(왼쪽)와 쇠사슬녀(오른쪽)의 사진. 당국은 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생김새가 확연히 다르다. | 이미지 합성
쇠사슬녀와 리잉의 사진 비교. | 영상 캡처

중국 당국은 또 쇠사슬녀에 관심을 갖고 도움에 나선 인사들을 탄압했다. 쇠사슬녀의 집을 직접 탐방한 용감한 소녀 우이(烏衣)는 3월 2일 두 번째로 공안에 연행됐고, 6월에는 ‘공중소란죄(尋釁滋事罪)’로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쇠사슬녀 사건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한 광시성 반체제인사 루후이황(陸輝煌)은 체포된 지 9개월 만인 11월 20일 ‘국가정권 전복 선동죄’로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쇠사슬녀는 샤오화메이가 아니다”라고 증언한 언론인 자오란지엔(趙蘭鍵)은 중국 공산당의 탄압을 못 견뎌 미국으로 망명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쇠사슬녀 사건에 대해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한 적이 없다. 리커창 총리가 지난 3월 열린 양회 개막식에서 “여성의 합법적 권익을 침해한 데 대해 매우 분노한다”고 말한 것이 전부였다.

정하오창(鄭浩昌) 재미 시사평론가는 지난 2월 15일 에포크타임스에 “여성 납치, 인신매매 문제는 중국 공산당 체제의 죄악”이라며 “이 죄악의 책임은 중난하이에 있고 역대 지도부 그 누구도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 쇠사슬녀 사건의 경우, 그 뿌리를 캐려면 적어도 장쩌민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2. 상하이 봉쇄

중국 공산당이 2020년부터 고수해온 제로 코로나 정책은 엄격한 통제와 대규모 핵산 검사로 인민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 민원의 초점이 됐다.

상하이는 상반기에 코로나 확산이 극심한 지역 중 하나로, 3월 말부터 약 2개월 동안 도시 전체가 봉쇄되고 대규모 군대와 무장경찰이 주둔했다. 인구가 2500만 명이 넘는 이 대도시는 전례 없는 통제로 2차 피해가 속출했다. 출입이 금지된 시민들은 식량 부족을 겪었고, 기저질환이 있는 환자들은 치료가 지연돼 사망하는 사례가 속출했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투신 자살하고 집중 격리된 유아들은 엉덩이가 짓무르거나 울다 지쳐 탈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지난 4월 폭로된 상하이 공중보건임상센터의 ‘영유아 격리점’에서 영유아가 울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돼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 영상 캡처

당국의 철통 봉쇄에 맞서 상하이 시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했다. 한 하급 관리가 “지금 우리는 절망감을 느낀다”며 공산당 지도부에 불만을 표출한 녹취록이 공개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

미국 동북아 전문가인 고든 창 변호사는 4월 4일 트위터에 “중국이 상하이에서 시행한 제로 코로나 조치는 본질적으로 전체주의이며 결과는 역효과를 낳을 것이다. 우리는 이 정권이 질병 통제보다 사회 통제에 더 신경을 쓰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6월 1일 상하이 봉쇄가 해제된 후 상하이시 정부는 사과하기는커녕 “도시 봉쇄를 한 적이 없다”며 극단적인 봉쇄의 책임을 주민위원회에 떠넘겼다.

상하이시 당국은 봉쇄를 해제한 후 보복에 나섰다. 푸둥신구에 사는 인권운동가 지샤오룽(季孝龍)은 상하이 당서기에게 도시 봉쇄에 반대한다는 서한을 썼다는 이유로 8월 31일 자택에서 경찰에 연행됐다.

3. 탕산 집단폭행 사건

6월 10일 새벽 허베이성 탕산(唐山)시의 한 불고기 식당에서 식사하던 여성 4명이 여러 명의 남성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날 천지즈(陳繼志)라는 남성은 한 여성에게 다가가 집적거리다가 여성이 저항하자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천지즈 일행이 여성들을 식당 밖으로 끌고 나가 계속 폭행했다. 이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인터넷에 전해져 대중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현지 당국은 2급 경상을 입은 피해자 2명이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네티즌의 폭로에 따르면 여성들은 성폭행을 당했고, 높은 곳에서 던져지고 자동차에 치이기도 했다. 탕산 공안국장이 폭행 사건의 피의자 중 5명과 함께 먹고 마시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다.

중국 공안부와 허베이 당국은 사태 ‘수습’에 나섰다. 온라인상의 의혹 제기를 차단하고, 피해 여성 4명의 행방과 피해 상황을 비밀에 부치고, 홍콩 언론과 중국 관영 매체 기자들의 취재를 저지하고, 온라인에서 이 사건에 관해 언급한 허베이 1인미디어 마오후이빈(毛慧斌)을 체포했다. 또한 사건이 발생한 불고기 식당은 가게 주인이 바뀌었다.

6월 10일 탕산(唐山) ‘여성 집단폭행 사건’ 현장에서 폭도들이 여성들에게 폭행하고 있다. | 영상 캡처

탕산 집단폭행 범행자들은 또 관가의 권력 싸움에도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7월 3일 허베이성 부성장이자 공안청 당서기 겸 청장인 류원시(劉文璽·54세)가 부임한 지 두 달도 채 안 돼 의문사한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9월 23일, 집단폭행 사건의 주범 천지즈는 24년형을 선고받았고, 나머지 피고인 27명은 각각 반년에서 11년형을 선고받았다. 중앙방송(CCTV) 뉴스 보도에서 천지즈 등은 방호복을 입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피해 여성 4명은 모두 법정에 나오지 않았고, 그들의 신원과 행방도 밝혀지지 않았다.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천지즈는 지난 10년 동안 형사 범죄 11건을 저질렀고, 이 과정에서 그를 보호해준 사람 15명 가운데 8명이 공직자이고 이들 중 가장 높은 직급이 구(區) 공안국장이었다. 네티즌들은 당국이 이들 배후의 더 큰 ‘보호우산’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폭로했다.

시사평론가 왕허(王赫)는 탕산 집단폭행 사건을 저지른 폭행범의 배후에는 거대한 ‘보호우산’이 있는데 바로 중국 공산당 그 자체라고 지적했다.

4. 공안·감찰 조직 대숙청

당국은 쑨리쥔(孫力軍) 전 공안부 부부장이 2020년 4월 실각한 이후 그가 장악하고 있던 공안·감찰 조직을 지속적으로 숙청했다.

20차 당대회를 앞두고 ‘쑨리쥔 정치 파벌’로 언급된 6명에 대한 판결이 잇따라 내려졌다. 쑨리쥔 전 공안부 부부장, 푸정화(傅政華·66) 전 사법부장, 왕리커(王立科·58) 전 장쑤성 정법위원회 서기, 궁다오안(龔道安·57) 전 상하이시 공안국장 등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덩후이린(鄧恢林·56) 전 충칭시 공안국장는 15년형을, 류신윈(劉新雲·59) 전 산시(山西)성 공안청장은 14년형을 선고받았다.

당국이 명시한 쑨리쥔의 죄목은 “정치적 야망이 극도로 팽배하다”, “이익집단을 구성해 주요 기관과 부문을 통제했다”, “정치적 안보를 심각하게 해쳤다”, “불법 총기를 소지했다” 등이었다. 푸정화의 죄목도 “정치적 야망이 극도로 팽배하다”, “장기간 불법적으로 총기를 소지하고 있어 심각한 안보 위험을 초래했다” 등이었다.

2020년 4월 7일, 쑨리쥔(孫力軍) 당시 공안부 부부장이 우한시에서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 Feature China/Barcroft Media via Getty Images

쑨리쥔과 가까운 정법계 고위 관리들의 숙청이 12월까지 이어졌다. 12월 5일 류러궈(劉樂國) 랴오닝성 공안청 전 당위원회 위원이 당적에서 제명됐다. 그는 ‘쑨리쥔 정치 파벌’과 밀착해 기밀 자료와 ‘탄약’을 사사로이 보관한 죄로 숙청됐다.

쑨리쥔은 멍젠주(孟建柱) 전 중앙정법위 서기의 최측근이다. 멍젠주가 공안부장으로 있을 때 쑨리쥔은 그의 비서였다. 멍젠주는 장쩌민파의 핵심 인물이다.

5. 독재에 항거하는 현수막 시위

10월 13일, 중국 공산당 20차 당대회를 3일 앞두고 한 중년 남성이 베이징 쓰퉁차오(四通橋)에 항의 현수막을 내걸었다. 한 현수막에는 “핵산 검사 말고 밥을, 봉쇄 말고 자유를, 거짓말 말고 존엄을, 문혁 말고 개혁을, 수령 말고 선거를, 노비 말고 공민의 삶을”이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고, 또 한 현수막에는 “휴교하고 파업하라. 나라의 도적 시진핑을 파면하라”고 적혀 있었다.

시위자는 현장에서 인화 물질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피워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현장을 급습한 공안에 체포돼 어디론가 끌려갔다. 당국은 소식을 차단하려 했지만 관련 사진과 동영상은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국제 언론들은 일제히 보도했다.

20차 당대회를 3일 앞둔 10월 13일, 베이징 쓰퉁차오(四通橋)에 공산당 정부에 항의하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 웹 캡처

스퉁차오 시위자는 중국 시민 펑리파(彭立發)로 알려졌다. 펑리파는 현수막이 거는 날 이른 시간에 해외 인터넷에 ‘전국 동포에게 보내는 편지’를 게재해 중국 인민에게 휴교와 파업 등을 하라고 호소하고, 전국의 군인과 경찰에게 호국장군 차이샤오(蔡鍔), 리례쥔(李烈鈞), 탕지야오(唐繼堯) 등을 본받아 “독재자를 철저히 몰아낼 것”을 호소했다.

펑리파의 항의는 중국 안팎에서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중국에서는 그의 구호를 화장실 문과 벽 등에 옮겨 적기 시작했고, 세계 각국 주요 도시의 대학가에도 펑리파의 구호가 나붙었다.

‘베이징 쓰퉁차오 사건’ 이후 신장 우루무치에서 11월 24일 화재가 발생했다. 방역 통제로 인해 구조 작업이 지연되면서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 사건은 전국으로 파급돼 ‘백지 운동’을 촉발했다. 시위대가 외치는 구호 중 상당수는 쓰퉁차오에 내걸린 현수막 내용이었다.

호주로 망명한 법학자 위안훙빙(袁紅冰)은 10월 18일 에포크타임스에 “펑리파가 쓰퉁차오에 현수막을 걸었을 뿐 아니라 전 국민의 항의를 상징하는 봉화(烽煙)에 불을 붙였다”고 말했다. 이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처럼 가혹한 중국 공산당의 국가 테러리즘 통치하에서도 기본적인 민심과 민의를 표현한 것이다.

‘베이징 쓰퉁차오 사건’은 해외 젊은이들에게도 큰 자극이 됐다. 세계 곳곳에서 중국 공산당에 항의하고 펑리파를 성원하는 중국 유학생들의 행사가 잇따랐다.

12월 10일 국제 인권의 날, 샌프란시스코 국부기념관에서 열린 제36회 ‘중국의 걸출한 민주인사상’ 시상식에서 ‘쓰퉁차오 용사’ 펑리파가 수상자로 선정됐다.

6. 20차 당대회 전횡

10월 16~22일 열린 중국 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시진핑의 3연임이 결정됐고 공산당 지도부는 시자쥔(習家軍) 일색으로 채워졌다. 다른 정치국 위원들도 거의 시진핑의 측근이다. 공청단파 리커창 총리와 왕양(汪洋) 부총리는 상무위원에서 퇴출됐고, 후춘화 부총리도 정치국에 들어가지 못했다.

공청단파의 수장인 후진타오 전 공산당 총서기는 폐막식에서 돌연 퇴장당했다. 이 놀라운 장면은 국제 언론의 카메라에 잡혀 20차 당대회 최대 관전 포인트가 됐다.

10월 22일 후진타오 전 공산당 총서기는 20차 당대회 폐막식 도중 회의장에서 퇴장당했다. | Kevin Frayer/Getty Images

당시 주석단에 앉아있던 고위 관리들은 아무도 반응을 하지 않았지만, 후진타오가 격대지정한 후계자 후춘화(胡春華)는 두 손으로 가슴에 안고 화난 표정을 지었다. 후춘화는 다음 날 열린 제1차 전체회의에서 정치국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것이 후진타오가 20차 당대회 폐막식에서 갑자기 퇴장당한 이유라는 관측이 나왔다.

시진핑은 20차 당대회에서 ‘완승’했다. 이어서 그는 3일 후인 10월 25일 정치국회의를 주재하고 ‘중앙의 집중통일 영도’를 강화하는 문건을 심의하며 정치국이 그의 지위를 수호하는 데 앞장설 것을 요구했다.

일본 산케이신문 야이타 아키오(矢板明夫) 타이베이 지국장은 10월 26일 에포크타임스에 “시진핑이 대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며 “이는 그가 권력에 대한 불안감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7. 장쩌민 사망

11월 30일 장쩌민(江澤民) 전 공산당 총서기가 사망했다고 중국 당국이 전격 발표한 뒤 일주일간 추모행사를 거행했다.

장쩌민이 죽은 후 그의 스캔들이 국내외에서 다시 한번 화제가 됐다. 그가 매국노 가문 출신이고, 1989년 6.4 천안문 학생운동 탄압에 일조해 집권했고, 부패·음탕·방임으로 국가를 다스리고, 자유로운 정보 유통을 봉쇄하는 방화벽을 구축하고, 러시아가 불평등조약으로 점령하고 있던 125만㎢의 중국 영토를 러시아에 공식적으로 넘겼고, 정실자본주의 경제로 국고를 탕진한 것 등이다. 장쩌민의 범행 중 가장 엄중한 범죄는 파룬궁에 가한 전대미문의 박해다.

장쩌민은 민간에서 ‘부패 총감독’으로 불리며, 장쩌민 가문은 ‘천하제일의 탐욕자’ 가문으로 불린다. 12월 1일 장쩌민의 관(棺)이 베이징으로 옮겨졌고, 막대한 부패 자산을 가진 자로 지목된 장쩌민의 손자 장즈청(江志成)을 비롯한 장쩌민의 자손들이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 당국이 장쩌민에게 부여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라는 칭호가 장즈청으로 인해 희대의 웃음거리가 됐다.

11월 30일 베이징 거리의 대형 스크린에 장쩌민 사망 소식이 나오고 있다. | Noel Celis/AFP via Getty Images

12월 6일 베이징대회당에서 열린 장쩌민 추도회에서 시진핑은 장쩌민을 한껏 치켜세웠다. 이어 각 성(省) 정부는 회의를 열어 이 추도사 내용을 ‘전달·학습’했고, 관리들은 이 기회를 빌려 시진핑 핵심에 대한 충성심을 표명했다.

재미 시사평론가 탕징위안(唐靖遠)은 12월 12일 에포크타임스에 “시진핑은 추도사에서 노골적으로 각급 관료들에게 충성을 요구했다”며 “이는 각 계파 관료들에게 줄 설 것을 암시했다”고 했다. 그는 또 “각급 관리들이 장쩌민의 추도사를 ‘학습’하게 하는 것 자체가 장쩌민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캐나다 중국인 작가 성쉐(盛雪)는 12월 5일 “장쩌민은 중국 공산당의 전체주의 폭정의 폭군이며, 장쩌민이 자행한 파룬궁 수련자들에 대한 강제 장기적출 만행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은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8. 백지혁명

중공 바이러스(COVID-19)의 새로운 특성에 근거해 세계 각국은 적시에 ‘위드 코로나’로 전환함으로써 사회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안정적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러한 세계적 흐름과는 반대로 3년 동안 제로(0) 코로나 봉쇄 정책을 고수해왔고,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저항하기 시작했다.

지난 9월 구이저우(貴州)성 구이양(貴陽)에서는 시민들을 격리 시설로 이송하던 버스가 전복돼 27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11월 24일 신장 우루무치의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했지만 방역 봉쇄로 소방차 접근이 지연되면서 심각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이 사건이 제로 코로나 정책에 항거하는 ‘백지운동’을 촉발했다.

11월 25일부터 난징·베이징·충칭·우한·청두 등 곳곳의 시민들이 통제된 주택단지를 뚫고 나왔고, 각지의 대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추모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수많은 사람이 백지를 손에 들고 시위에 참여했다. 상하이 거리에서는 “시진핑 물러가라” “공산당 물러가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11월 27일 상하이 시민들이 백지를 들고 거리로 나와 당국의 봉쇄 조치에 항의하고 있다. | Hector Retamal/AFP via Getty Images

해외 관측통들은 이 운동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시드니 과학기술대학의 핑충이(馮崇義) 중국학 교수는 11월 27일 에포크타임스에 “이번 항의 사건은 민중이 자신의 권익만을 위해서 목소리를 낸 것도 아니고 산발적인 항쟁도 아니다. 이 운동은 중국에 헌정 변혁의 서광을 비추는 것이다”라고 했다.

자오쯔양(趙紫陽) 중국 공산당 전 총서기의 정치 비서를 지낸 우궈광(吳國光) 캐나다 빅토리아대 교수는 12월 15일 미국의소리(VOA)에 기고한 글에서 “이번 항의 운동은 중국 민중의 정신적 해방과 인간성 회귀에 긍정적 작용을 했다”고 평가했다.

‘백지운동’은 빠르게 전 세계적인 호응을 얻었다. 해외 중국인과 중국인 유학생들은 잇달아 집회를 열고 중국 민중의 항쟁을 응원했다.

중국 당국은 시위 활동을 강경 진압했다. 공안이 시민들을 무차별 체포하고 지하철과 길거리에서 행인들의 휴대전화를 뒤졌다. 11월 26일 난징(南京)미디어학원에서 시위가 발생한 뒤 이날 밤 백지운동에 참여한 여학생 리캉멍(李康夢)을 비롯한 학생 60여 명이 체포됐다.

12월 7일 국제앰네스티 등 49개 인권단체는 베이징 당국에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를 존중하고 평화로운 시위를 보장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9. 제로 코로나 시스템 붕괴

중국 당국은 12월 7일부터 전격적으로 봉쇄를 풀었다.

위마오춘(余茂春) 전 미국 국무부 중국정책수석고문은 12월 18일 대만 ‘자유시보’에 발표한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중의 분노와 항쟁, 처참한 혼란 상황에서 시진핑은 ‘완병지계(緩兵之計·적의 공격을 늦추는 계략)를 쓸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 독재정권의 안정을 위해 3년 가까이 집요하고 잔혹하게 집행해온 봉쇄 정책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지난 3년 동안 중국 공산당은 인민에게 속하는 거의 모든 자원을 ‘수용소식’ 폐쇄 운동에 투입했다. 하지만 공중보건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는 자원이 별로 투입되지 않았다. 방역 정책을 대폭 완화한 이후 코로나 감염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당국은 14일부터 무증상 감염자 데이터 공개를 중단했다. 이제 중국의 코로나 확산 상황은 알 길이 없다.

각지의 병원과 약국은 의료진과 의약품이 부족하고, 특히 해열제가 턱없이 부족하다. 민중들은 ‘왜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봉쇄를 풀었느냐’며 분노하고 있다. 차이신왕(財新網)은 20일 “관련 의약품의 상당 부분이 권력자의 특급 경로로 흘러갔다”고 폭로했다.

중국 당국이 대책 없이 봉쇄를 해제하자 베이징의 코로나 감염자가 갑자기 폭증했다. 사진은 지난 14일 발열진료소 밖에서 시민들이 진료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 Yuxuan Zhang/AFPTV/AFP via Getty Images

감염 폭증으로 의료 대란을 겪으면서 암환자 등 중증 환자들은 치료를 받을 수 없어서, 그리고 면역력이 약한 노인과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코로나에 감염돼 세상을 떠났다. 고위 관료와 전문가, 유명인도 많이 죽었으며, 화장장은 과부하가 걸려 24시간 가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2월 19일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익명의 베이징 고위 관리를 인용해 “중국 공산당 20차 당대회 기간에 베이징의 주요 병원의 병원 내 감염이 매우 심각했으며 12월 초에는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당국에 의해 철저히 봉쇄됐다”고 폭로했다.

중국 공산당 내부 회의록에 따르면 중국의 일일 신규 감염자 수는 3700만 명에 달하며 12월 1일부터 20일까지 누적 감염자는 2억4800만 명에 달했다.

시사평론가 리린이(李林一)는 “제로 코로나 정책은 폐기됐지만 중국 공산당의 전제와 폭정은 변하지 않았으며, 2023년 민중 항쟁의 작은 불씨는 들판을 태우는 큰 불로 변해 중국의 어두운 밤을 몰아낼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