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최대 3만명 주둔 했던 주(駐)대만 미군 역사는?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미군의 대만 주둔

2021년 05월 25일 오후 3:18 업데이트: 2021년 05월 25일 오후 4:58

미군과 대만군의 연합 훈련 외신이 타전되면서 미군 대만 주둔 문제가 다시 한번 부각됐다.

지난날 대만은 아시아 국가 중 한국·일본·필리핀과 더불어 대규모 미군이 주둔하던 곳이었다. 그러다 1979년 1월 1일 미-중 수교와 동시에 이뤄진 대만-미국 단교로 인하여 미군은 공식적으로 대만섬을 떠났다. 주(駐)대만 미군 역사는 어떠할까.

1949년 12월,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 정부는 국공내전에서 패배, 대만으로 천도했다. ‘국부천대(國府遷臺)’로 기록된 사건이다. 1948년 들어 국공내전 전세는 중국 공산당으로 기울었고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 천안문 누각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립을 선언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색이 짙어지자 미국 트루먼 행정부는 국민당 정부를 불신했다. 1949년 8월 5일, 미국 국무부가 발표한 ‘미중관계백서(The China White Paper)’는 “국민당 정부의 패배는 국민당 정부의 부패 때문이지 미국의 정책이 적당하지 않았거나 원조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기술하여 국공내전 패전 책임을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에 돌렸다.

국부천대 직후인 1950년 1월 12일, 미국 국무부 장관 딘 애치슨은 전국기자클럽(NPC)에서 발표한 ‘아시아의 위기’ 연설에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 연결선이라 천명했다. 이른바 ‘애치슨 라인’이다.

애치슨의 연설이 문제가 된 것은 한국, 인도차이나반도와 더불어 대만이 제외됐다는 점이다. 애치슨은 이들 지역을 두고 ‘방어적 주위(defensive perimeter)’라는 모호한 표현을 썼다. ‘포기’보다는 상황 변화에 맞춰 지원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뜻이었다. 5개월 후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였고, 애치슨의 연설은 북한의 남침 전쟁 발발 명분을 주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6·25전쟁 발발 후 ‘대만의 중화민국(中華民國在臺灣)’을 방기(放棄)하는 태도를 취했던 미국의 정책에 근본 변화가 생겼다. 6월 27일, 서태평양 지역을 관할하는 미 해군 제7함대를 대만 해협으로 급파, 해협 봉쇄작전을 수행했다. 7월, 제7함대 사령관 아서 스트러블(Arthur D. Struble) 제독이 타이베이를 방문, 장제스 총통을 접견하여 대-미 연합방위작전을 논의했다. 8월, 미 태평양사령부 예하 공군 제13항공대가 대만에 진주하여 미군 대만 주둔 시대를 열었다. 동시에 미국 정부는 ‘대만해협 중립화’를 선언하고 국민당 정부에 재정·물자 지원을 재개했다.

1951년 존 덜레스(John Dulles) 미국 국무부 고문은 허스리(何世禮) 주일본 대만대표를 만나 ‘대-미상호방위협정’을 처음으로 논의했다. 결과는 6·25전쟁 정전 이듬해인 1954년 12월 3일, 워싱턴에서 ‘중(대만)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중미공동방위조약 체결 직후인 1955년 1월 1일, 타이베이에 미 태평양사령부 예하 대만 주둔 협방사령부(協防司令部)가 창설됐고, 미군 5000여명이 배속됐다. 4월 오키나와에 주둔하던 미 공군 제16 전투비행단이 대만으로 기지를 이전했다. 이후 미 공군 제25 전투비행단도 대만에 기지를 마련했다. 4월 26일, 중미상호방위조약 부속 상호협정서를 조인했고, 미 해군 7함대가 타이베이에 대만연락센터를 개소했다.

1960년대 대만 타이베이에 세워졌던 미 공군 기지 현판 | Rick Ferch TAS

대만 주둔 미군 숫자가 5000명대에서 2만명대로 4배 증원된 것은 1958년이다. 1958년 중공군이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에서 약 2km 떨어진 진먼(金門)섬에 포격전을 전개했다. 8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44일간 포격전에서 중공군은 48만 발을 포격했다. 8·23포격전 발발 직후, 미국은 제7함대, 제6함대 소속 항공모함 7척, 중순양함 3척, 구축함 40척을 파견했다. 이후 대만 주둔 미군은 해병대 3800명을 포함하여 2만명대로 늘어났다.

8·23 포격전 중지로 대만해협 긴장 수위도 낮아졌고, 미군 감축도 지속 되어 1963년 8000명대를 유지했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기화로 1965년 미국은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전쟁 기간 1968~70년 사이 대만 주둔 미군도 증원돼 3만명으로 늘어났다.

1972년 2월,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중국을 방문한 닉슨은 ‘상하이공동성명(코뮈니케)’을 발표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 존중, 향후 미-중 관계 정상화, 단계적 대만 주둔 미군 철수를 시사한 코뮈니케 발표 후, 미국은 지속적인 대만 주둔 미군 감축을 진행했다.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북베트남, 남베트남, 미국 3국은 베트남 평화협정(Paris Peace Accords)을 체결했다.

미국은 아시아 지역 미군 철수를 진행했다. 1973년 7월, 미 태평양 공군은 대만 주둔 미 공군 제374전술공수연대 소속 수송기 65대, 조종사 3000명 철수를 발표했다. 이듬해인 1974년 6월 기점으로 아시아 주둔 미군 수는 16만 4000명 선으로 줄어들었다. 그중 일본에 5만 8000명, 한국에 4만명, 태국에 3만 1천명, 필리핀 1만 7000명, 대만 6000명을 포함 기타 태평양사령부 예하 해상전력 2만명 선이었다.

1974년 연말 미군은 5800명으로 줄어들었고, 이듬해에도 철군은 이어져 1975년 12월 31일 기점으로 3198명으로 줄어들었다. 이후 1976~78년 미군 감축은 지속되어 1978년 9월에는 육군 176명, 해군 209명, 공군 357명, 해병대 11명 등 총 753명으로 줄어들었다.

1978년 12월 16일, 미·중 양국은 이듬해 1월 1일부로 미중 수교를 발표했다. 1979년 미중수교공동성명이 공식 발표됨으로써, 미-중 양국 간 국교는 정상화됐다. 동시에 대만 주둔 잔여 미군도 공식 철수해야 했다. 미군지원사령부(Headquarters Support Activity·HSA)·육군통신사령부·제6217공군기지중대 등이 공식 해산했다. 이후 1979년 4월 28일, 타이베이의 협방사령부에서 마지막 성조기 하강식이 거행됐고, 5월 3일 ‘마지막 미군’이 대만을 떠남으로써 주(駐)대만 미군 시대는 종식됐다. 이듬해 1월 1일, 1954년 체결된 중미상호방위조약은 폐기되어 대만과 미국의 공식 동맹 관계도 종지부를 찍었다.

지난 2018년 6월에 열린 미국재대만협회(AIT) 신청사 준공식 | 타이베이=AP 연합뉴스

1979년 대만-미국 단교 후, 미군의 대만 주둔 문제가 부각된 것은 2018년이다. 대만-미국 단교 후 제정된 ‘대만관계법’에 의거해 타이베이에 비공식 대사관 역할을 수행하는 미국재대만협회(美國在臺協會·AIT) 타이베이 사무처가 설치됐다. 2005년부터 타이베이시 신이(信義)로 소재 AIT 사무처 청사에는 미군이 사복 차림으로 근무했다. 2006년~2009년까지 제10대 타이베이 사무처장(주대만 미국대표)을 역임한 스티븐 영(Stephen M. Young)은 타이베이시 네이후구로 AIT 사무처 청사 신축 이전을 추진했고, 신축 청사에 미 해병대가 주둔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미국 국무부는 국방부에 해병대 병력 신청사 주둔을 요청하였으나, 국방부는 요청을 거절했다.

미국 정부는 상하이공동성명(1972년)·제2차 상하이공동성명(1978년)·미중수교공동성명(1979년) 등 3대 공동성명과 대만관계법(1979년)에 의거하여 중국은 하나이며,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 이라는 ‘하나의 중국 정책’을 준수할 것이라 발표했다. 그후 2018년 12월 AIT 타이베이 사무처 신청사 입주 후에도 ‘공식적인’ 미군 경비병력 주둔은 이뤄지고 있지 않다.

이후 2021년 미 육군 안보지원여단(SFAB)은 예하 육군부대훈련북구통합평가센터에서 미군이 대만군을 대상으로 연합 훈련·평가를 실시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에 대만 정부는 NCND(Neither Confirm Nor Deny·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음)를 유지하고 있다.

/최창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