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 고찰 영은사에 외빈 맞이한 시진핑…복심은?

왕요췬(王友群)
2023년 09월 30일 오후 5:16 업데이트: 2024년 02월 19일 오후 3:05

지난 22일 오전 2023 항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초대된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부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항저우 유명 불교 사원인 영은사(靈隱寺·링은쓰)를 둘러봤다.

영은사는 오랫동안 폐쇄했던 정문을 열고 정문 앞에 긴 레드카펫을 까는 등 오랜 관례를 깨고 이 외빈을 맞이했다.

앞서 마지막으로 영은사 정문으로 들어간 사람은 청나라 강희제(1654~1722년)였다. 나중에 건륭제가 미복 차림으로 영은사를 방문했을 때 날이 저물어 주지스님이 건륭제를 알아보지 못하고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건륭제는 따지지 않고 편문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편문으로 들어간 후 ‘지금부터 아무도 정문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세웠다.

이번에 영은사에서 수백 년간 이어져 오던 이 관례가 깨진 것이다.

운림선사(雲林禪寺)라고도 불리는 영은사는 항저우 서호(西湖) 서북쪽의 비래봉(飛來峰)과 북고봉(北高峰) 사이의 영은산 기슭에 위치한 중국 최초의 불교 사찰이자 중국 10대 고찰 중 하나다.

동진 함화 원년(326년)에 창건된 영은사는 167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인도 승려 혜리가 선교를 하러 항저를 찾았을 때 이곳의 경치가 기묘하고 그윽하여 ‘신선의 영(靈)이 깃든 곳(仙靈所隱)’이라고 여기고 이곳에 사원을 세워 ‘영은’이라고 이름 붙였다. 오대(五代) 때 불교를 독신했던 오월왕 전숙(錢俶)은 영은사 건설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영은사는 9루(樓), 18각(閣), 77전당(殿堂), 승려 3000명 규모로 양쯔강 이남의 불교 명찰이 됐다. 전설상의 제공(濟公) 스님이 이곳에서 출가했다고 한다.

영은사에 들어서면 불교문화나 중화신전문화의 흔적이 눈에 들어오고, 곧바로 강희제, 건륭제, 불교, 선종, 신통력을 가진 제공 등을 떠올리게 된다.

같은 날 오후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영은사에서 6㎞ 떨어진 항저우 시후(西湖)국빈관에서 아사드 대통령을 만났다.

아사드 대통령은 분명 사전에 시진핑의 동의를 얻어 영은사를 방문했을 것이다.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지난 22일 항저우 영은사를 방문하고 있다. | 영상캡처

중국에는 예부터 “하늘에 천당이 있다면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는 말이 있다. 그만큼 항저우에는 경치가 빼어난 곳이 많다.

그런데 시진핑은 왜 하필 아사드에게 영은사를 관람하게 했을까? 이 일은 예사롭지 않을 수 있다.

시진핑은 겉으로는 무신론을 신봉하는 중국 공산당 당수다. 하지만 사람의 사상은 흔히 복잡하기 마련이어서 ‘흑 아니면 백’식의 이분법적 논리로만 나누기 어렵다. 그렇다면 시진핑은 완전한 무신론자는 아니고 내면적으로 신앙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인가? 이 점은 논의해 볼 가치가 있다.

神佛에 대한 믿음

신앙과 관련된, 시진핑의 정신세계를 논하려면 그의 부친 시중쉰(習仲勳)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의 시진핑이 있기까지는 시중쉰의 영향이 컸다. 시중쉰은 마오쩌둥 시대에는 국무원 부총리 겸 비서장에, 덩샤오핑 시대에는 공산당 정치국 위원과 전인대 부위원장에 오른 중국 공산당 원로로, 시진핑의 진학 및 환로(宦路)를 설계하고 지도했다.

또한 시중쉰은 자녀들에게 세 가지 정신적 유산을 남겼다. 시중쉰은 자녀들에게 ‘부처를 공경하고’, ‘기공(氣功)을 지지하고’, ‘설중송탄(雪中送炭·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때맞춰 도와줌)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중쉰은 일생 동안 3차례 박해를 받았다. 1935년 중국 공산당이 벌인 ‘반혁명 분자 숙청 운동(肅反運動)’에서 생매장될 뻔했고, 1962년 ‘류즈단(劉志丹)’ 사건으로 반당(反黨)그룹 두목으로 몰려 16년 동안 박해를 받았고, 1990년 덩샤오핑의 절대적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선전으로 ‘유배’된 것 등이다.

시중쉰은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이 파괴한 선종 육조 혜능의 등신불을 다수의 반대를 물리치고 복원했다. 광둥성에 있는 불교 성지 남화사(南華寺)에는 선종 육조 혜능의 진신(真身) 등신불이 모셔져 있었는데,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들이 등신불을 끌고 다니며 훼손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1979년 당시 광둥성 서기로 있던 시중쉰이 등신불을 복원할 것을 지시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시진핑은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내면 깊은 곳에 신불을 믿는 마음이 싹텄을 것이다.

위키리크스는 2011년 8월 30일 베이징 주재 미국대사관이 2009년 11월 16일 워싱턴으로 보낸 기밀 전보(電報)를 공개했다. 전신 코드는 09BEIJING3128, 기밀 등급은 ‘기밀(Confidential)’이다.

전보에 따르면 시진핑은 불가의 무술, 기공, 건강에 이로운 신비한 힘, 그리고 불교의 성지 오대산(五台山)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 정보를 처음 제공한 사람은 미국 대사관과 오랫동안 연락해온 대학 교수로, 과거 시진핑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는 시진핑의 가정 배경, 성장, 청소년기, 정치 인생, 그리고 시진핑에 대한 인상과 성격 등과 관련된 정보를 공유했다.

익명을 요구한 이 교수는 시진핑이 관료 생활을 시작할 시점에는 불교의 초자연적인 힘을 믿었다고 했다. 그는 시진핑이 실제로 종교를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단지 심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진핑이 이 주제에 익숙하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고 했다.

2014년 1월 7일 시진핑은 중앙정법공작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다.

“실제로 잘못된 집행자들도 그들의 행위를 기록한 장부가 있다. 이 빚은 거기에 기록돼 있다. 일단 그에게 일이 생기면, 이 기록을 모두 찾아낼 것이다. 당신들은 오늘 멋대로 날뛰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기록될 것이니 조심하라. 모두 보응(報應)이 따를 것이다. 머리 석 자 위에 신명이 있으니 반드시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

시진핑의 이 말은 그의 영혼 깊은 곳에는 신에 대한 믿음이 있음을 의미한다.

운명에 대한 믿음

에포크타임스 중문판 편집장 궈쥔(郭君)에 따르면, 시진핑이 푸젠성에서 일할 때 한 도인이 그에게 “장차 대위(大位·제왕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했다. 미래에 공산당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를 운명임을 알려준 것이다.

그때부터 시진핑은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고, 작은 실수로 큰 일을 그르칠까 봐 말과 행동을 삼갔다고 한다.

마오쩌둥의 전 비서이자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 상무부부장을 지낸 리루이(李銳)와 시진핑 간에 있었던 일화가 이를 뒷받침한다. 리루이는 시진핑을 발탁한 사람 중 한 명이다.

2004년 여름, 리루이가 부인과 함께 항저우를 여행할 당시 저장성 당서기였던 시진핑이 리루이 부부에게 식사 대접을 했다. 이 자리에서 리루이가 시진핑에게 “당신은 지금 지위가 달라졌으니 의견을 좀 올려도 된다”고 하자 시진핑은 “당신은 에지볼을 칠 수 있지만 내가 어찌 감히 그럴수 있겠는가”라고 답했다고 한다. ‘에지볼을 친다’는 것은 탁구를 칠 때 공을 탁구대 모서리를 맞추는 것을 말하는데,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함을 일컫기도 한다.

일화는 또 있다. 미국에서 출판된 ‘레드 룰렛(Red Roulette·紅色賭盤)’의 저자 선둥(沈棟)의 아내는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의 부인 장페이리(張培莉)의 측근이었다. 선둥의 아내가 장페이리와 시진핑·펑리위안 부부의 식사 자리에 동행한 적이 있는데, 이때 시진핑은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국가부주석이었다. 선둥의 아내가 전한 바에 따르면 당시 시진핑은 자신의 생각을 밝힐 수 있는 자리였는데도 식사하는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의 자제들로 구성된 ‘태자당(太子黨)’에서 두 명이 후계자 후보에 올랐다. 시진핑과 보시라이(薄熙來) 당시 충칭시 서기였다. 결국 보시라이가 패했는데, 너무 자신을 드러내고 오만한 게 패인이었다.

2012년 11월 18차 당대회에서 시진핑은 공산당 총서기, 중앙군사위 주석을 이어받았고, 이듬해 3월에는 제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국가주석을 이어받았다.

시진핑은 일찌기 한 도인이 알려준 말에 따라 중난하이에 입성하기 위해 신중히 준비를 했고, 결국 성공했다. 이는 시진핑이 내면적으로는 유불도 사상과 문화를 수용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용맥에 대한 믿음

예로부터 중국 군왕들은 용맥(龍脈) 보호에 각별히 신경 썼다. 용맥이 군주의 운명, 국가의 운명과 직결돼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용맥이 존속돼야 군주의 명이 오래 지속되고 국운이 창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산시(陝西)성에 위치한 친링(秦嶺)은 역사적으로 종남산(終南山)이라고도 불렸다. 먼 옛날부터 중국인들은 종남산을 천신지기(天神地祇·하늘과 땅의 신령)이 거하는 곳으로 여겼다. 고대의 풍수사들은 또 종남산을 용맥으로 여기고 종남산 아래가 제왕이 거주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친링 용맥의 복음(福蔭·복과 음덕)이 없었다면 13개 왕조의 도성인 서안성(西安城)은 없었을 것이다.

2014년, 친링에 많은 불법 별장이 건설돼 친링 생태환경이 크게 파괴됐다는 보고가 나왔다. 시진핑은 즉시 이 불법 별장들을 철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당시 산시성 당서기였던 자오정융(趙正永)은 시진핑의 지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아랫사람들에게 아무 숫자나 적어 중앙에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왜 그랬을까? 자오정융은 장쩌민 계파의 사람으로, 장쩌민·쩡칭훙의 후광으로 산시성 성장, 성 당서기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2014년은 시진핑이 반부패 운동을 통해 장쩌민·쩡칭훙이 장악하고 있던 최고 권력을 탈환하는 결정적 시기였고, 투쟁은 매우 치열했다.

시진핑은 반부패 운동에 집중하면서 친링의 불법 별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2014년부터 2018년 사이 그는 친링의 불법 별장을 반드시 철거하라는 지시를 6차례나 내렸다.

2018년 7월, 시진핑은 6번째 지시를 내린 후 중앙기율위원회 부서기 쉬링(徐令)을 팀장으로 하는 중앙특별시정팀을 산시성에 파견해 상황을 파악하게 했다.

당시 산시성 당서기였던 후허핑(胡和平)은 그때서야 움직이기 시작했고, 불법 별장 1185채를 철거했다.

시진핑은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산시성과 시안시 당 위원회와 정부 관리들을 대거 해임하고 조사했다.

자오정융은 뇌물수수 혐의로 사형 집행유예(2년)를 선고받았고,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나 추가 감형은 허용되지 않았다.

시진핑의 강도 높은 문책은 누군가가 친링에 별장을 건설해 용맥을 파괴하고 자신의 큰일을 망치려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후허핑 당서기는 시진핑의 최측근으로 알려졌지만, 용맥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죄로 산시성에서 전출돼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2020년 4월 24일, 시진핑은 직접 산시성을 방문해 친링을 시찰했다. 그는 수행원들에게 “친령은 남북을 화합하고, 천하에 은택을 주는 우리 나라의 ‘중앙 수탑(水塔·수자원의 중심지)’이고 중화민족의 ‘조맥(祖脈·민족의 시원지)’과 중화문화의 중요한 상징이다”라고 했다.

시진핑이 이처럼 용맥을 중시하는 점을 감안해 현임 산시성 당서기 자오이더(趙一德)는 직접 용맥을 호위하는 책임을 맡아 충성을 다하고 있다.

예언에 대한 믿음

지난 3월 이후 국내외 언론들은 시진핑이 로켓군 수뇌부를 부패 혐의로 물갈이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숙청된 장성은 로켓군 사령관 리위차오(李玉超) 상장, 로켓군 정치위원 쉬중보(徐忠波) 상장, 로켓군 부사령관 류광빈(劉光斌) 중장, 로켓군 전 부사령관 창진중(張振中) 중장 등이다.

퇴임한 우궈화(吳國華) 전 로켓군 부사령관(중장)은 자택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그는 로켓군 사건에 연루됐을 가능성이 높다.

로켓군 사령관을 거쳐 국방부 장관을 지낸 웨이펑허(魏鳳和) 상장도 조사를 받고 있다.

국방부장관인 리상푸(李尚福) 상장도 낙마했다. 그는 중앙군사위 장비발전부장을 지낼 당시의 부패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략지원부대 사령관인 쥐첸성(巨乾生) 상장, 전략지원부대 부사령관 상훙(尚宏) 중장도 로켓군 사건에 연루돼 조사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왜 로켓군 수뇌부가 갑자기 이렇게 큰 화를 입었을까? 에포크타임스를 비롯해 여러 매체에서 다양한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필자는 에포크타임스의 분석 중 “시진핑이 예언을 믿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진단에 무게를 두고 있다.

에포크타임스는 “시진핑은 정말 예언을 믿고 있고 죽음을 두려워한다”며 “예언에 활을 들고 쏘는 그림이 있는데, 그는 활이 로켓에 대응한다고 생각해서 로켓군을 숙청한 것이다”라고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전했다.

당나라의 예언서 ‘추배도’ 제46상의 ‘송(頌)’에 “한 군인이 활을 지니고서 ‘내가 백두옹이다’라고 한다(有一軍人身帶弓, 只言我是白頭翁). 동쪽 문에 금검을 숨기고, 용사가 후문으로 황궁에 들어간다(東邊門裡伏金劍, 勇士後門入帝宮)”는 내용이 있다.

백두옹(白頭翁)은 시진핑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 있다. 시진핑의 성 ‘시(習)’ 자는 흰 ‘백(白)’ 자와 깃털 ‘우(羽)’ 자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군인이 활을 지니고서”란 대목은 군인의 신분을 밝힌 것이다. 또 활과 화살은 중국 고대의 장거리 타격 무기로, 현대의 미사일에 해당하는 무기다.

“동쪽 문에 금검을 숨기고, 용사가 후문으로 황궁에 들어간다”는 대목은 누군가가 황궁에서 군사 행동을 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종합하면 로켓군 내부에 시진핑에 반기를 드는 무리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시진핑이 우려하는 일이 벌어진 사례가 있다. 1971년 9월 13일 공산당 서열 2위인 린뱌오(林彪) 원수와 그의 가족 3명이 몽골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는데, 당시 마오쩌둥이 미사일로 격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설이 유력하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믿음

중국 공산당의 지도사상은 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다.

중국 공산당 19차 당대회에서 시진핑은 장쩌민·쩡칭훙이 시진핑 주변에 심어놓은 ‘수석 브레인’ 왕후닝(王滬寧)을 이데올로기를 관장하는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했다.

왕후닝은 이 자리에 오른 후 시진핑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 미혼탕(迷魂湯)을 끊임없이 주입했다.

2017년 10월 31일, 시진핑은 19차 당대회가 끝난 직후 신임 정치국 상무위원 6명을 이끌고 상하이에 있는 1차 당대회 개최지를 찾아 마르크스가 고취한 공산주의를 위해 평생 분투할 것을 주먹을 쥐고 맹세했다. 이 아이디어는 왕후닝이 냈을 가능성이 높다.

2018년 4월 23일, 정치국은 마르크스가 1848년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을 집단 학습했다. 무신론, 반자본주의, 폭력 숭상, 투쟁 철학 등 마르크스가 천명한 ‘원조 공산주의 교리’가 이 소책자에 담겨 있다. 이 아이디어도 왕후닝이 냈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기념행사. | 연합뉴스

2018년 5월 4일, 중국 공산당은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베이징에서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열었다. 시진핑은 기념식 연설에서 마르크스를 기념하는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 연설문은 왕후닝이 조직한 필진이 쓰고 왕후닝이 승인한 것임이 틀림없다.

2022년 20차 당대회 보고서와 보고서에 대한 결의안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시진핑이 아닌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는 41번, 시진핑은 17번 언급됐다. 이 보고서와 결의안도 왕후닝이 조직한 필진이 작성하고 왕후닝이 승인했다.

2021년 12월 16일, 보수 성향의 인터넷라디오 진행자인 휴 휴이트(Hugh Hewitt)는 워싱턴포스트(WP)에 기고한 칼럼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7명 중 왕후닝이 시진핑에게 이념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며 “왕후닝은 틀림없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는 정확한 평가다. 2019년 19차 당대회 이후 불과 5년 만에 시진핑이 쥐고 있던 좋은 패는 나쁜 패로 바뀌었다. 왕후닝이 마르크스-레닌주의 미혼탕으로 시진핑을 현혹해 시진핑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원조 공산주의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맺음말

위의 상황을 종합하면 시진핑의 사상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두 가치가 혼재하는 혼합체이다. 그의 사상 깊은 곳에는 신불·운명·용맥·예언을 믿는 면도 있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믿는 면도 있다.

전자는 모두 중국 전통문화에서 유래한 것이고, 후자는 외부에서 유래한, 전통과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것이다.

지난 6월 2일, 시진핑은 ‘문화 전승 발전’ 세미나에서 “마르크스주의 기본 원리와 중국의 우수한 전통 문화를 결합해야 한다”고 했다.

무신론과 유신론은 근본적으로 대립하는데 결합할 수 있는가?

신불은 절대로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을 보우하지 않을 것이다.

시진핑은 신불도 믿고 무신론도 믿는데, 이는 결코 정도(正道)를 걷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길이 갈수록 좁아지면서 위기에 처하게 된 가장 큰 이유다.

지난 22일, 시진핑은 외빈을 영은사로 초청했다. 이는 그가 신불에 대한 믿음이 아직 조금이나마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이라도 마르크스-레닌주의 무신론을 버리고 “머리 석 자 위에 신명이 있다”는 믿음으로 정도를 걸어야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기사는 저자의 견해를 나타내며 에포크타임스의 편집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