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유신 50주년’ 3차 토론회 개최…경제적 업적 재조명

이윤정
2022년 11월 6일 오후 6:15 업데이트: 2022년 11월 7일 오전 11:22

좌승희 “유신으로 ‘정치의 경제화’ 실현”
주익종 “朴, 야당 부정적으로 인식해 비상조치”
한승희 “두 회의체, 경제 정책 효율적 집행에 큰 역할”

11월 5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관 박정희홀에서 유신 50주년 제3차 세미나 ‘오늘의 대한민국과 유신의 정치경제학’이 개최됐다.

올해는 1972년 이른바 ‘10월 유신’ 선언을 바탕으로 한 ‘유신 체제’가 선포된 지 50년이 되는 해다. 1972~1979년 유신 체제는 민주주의 발전 면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멈춘 시절로 평가받지만, 경제 발전 면에서는 오늘날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대한민국 발전의 결정적 순간으로 평가받는다.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박정희학술원은 10월 유신 50주년을 맞아 총 3회에 걸쳐 토론회를 열고 10월 유신을 실증적·거시적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유신, 50주년-그때 그리고 오늘’ 논문집을 발간했다. 이날 마지막으로 열린 3차 세미나는 ‘오늘의 대한민국과 유신의 정치경제학’ 주제로 10월 유신이 이뤄낸 경제적 업적들을 다뤘다.

이번 세미나에서 좌승희 박정희학술원 원장과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 한승희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가 주제 발표를 했다. 앞서 1차 세미나는 지난 10월 17일 ‘국제정치적 격변과 국가건설과업의 수행’ 주제로 진행됐고, 10월 29일 2차 세미나에선 ‘유신의 정치학, 민주-독재 프레임을 넘어’ 주제로 토론했다.

좌승희 박정희학술원 원장 | 이유정/에포크타임스

좌승희 박정희학술원 원장은 ‘정치와 경제발전: 박정희 정치경제체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 주제 발표에서 “유신으로 ‘정치의 경제화’를 실현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좌 원장은 “정치학계나 정치계가 민주주의라는 잣대로 박정희의 쿠데타나 유신을 부정적 시각에서 볼 수는 있지만, 이를 통해 정치를 경제화함으로써 지속가능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 가능성도 같이 보는 균형 잡힌 시각도 필요하다”면서 “민주주의는 국민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그는 “오늘날 민주정치는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는 포퓰리즘 정치로 변질되고 있다”며 “선·후진국을 불문하고 사회민주주의가 보편화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지난 30여 년간은 역으로 경제가 정치화됨으로써 경제정책은 실종되고 모든 정부의 지원 정책이 지원금을 1/n로 나누는 평등주의 사회정책으로 변질했다는 것이다.

좌 원장은 이에 대해 “민주주의 성격상 불가피한 측면”이라며 “투표수에 의해 경제정책을 결정하는 입법부가 집행부인 행정부보다 정책과 제도 결정 체계상 우위를 점하는 국가정책 결정 체제는 불가피하게 평등주의 경제정책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이어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이 경제발전을 촉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포퓰리즘적 평등주의를 추구하는 민주정치를 사전에 차단했기 때문”이라며 “유신체제는 자유민주주의가 사회주의적 평등주의로 변질돼 나타나는 폐단인 ‘경제의 정치화’를 막기 위한 제도적 혁신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국가는 법 앞에 평등한 기회를 보장해야 하지만, 경제적 기회나 결과의 평등을 보장할 경우 경제발전의 정체를 면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며 “결과든 기회든 평등을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결국 다수가 경제적으로 흥하는 소수를 착취하는 결과를 피할 수 없다는 점도 인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좌 원장은 실증적 자료와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을 통해 “박정희 정치경제체제는 친자본주의적 시장권위주의체제로서 반(反)시장적·반기업적·반산업적·반자본주의적인 정치세력을 억제하고, 기업 육성을 통해 세계 최고의 기업주도 포용적 동반성장을 실현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 | 이유정/에포크타임스

이승만 학당 이사를 맡고 있는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는 유신체제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보장하기 위해 국민의 정부 선택권과 대표 선출권을 박탈 혹은 제한한 비민주적 체제였다”며 그 대표적 사례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한 것 ▲국회의원의 1/3을 사실상 대통령이 뽑은 것 ▲긴급조치를 발동해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과 유신헌법의 개정 요구를 금지한 것 등을 언급했다.

다만 그는 “유신체제 수립을 단지 박 대통령의 끝없는 권력욕, 장기집권욕 때문이라 보기는 어렵다”며 유신체제 성립의 주요 배경으로 박 대통령의 ‘부정적 야당관’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박 대통령은 1963년과 1967년, 1971년 도합 세 번 국민의 선택을 받았으며, 예정대로라면 1975년 치러질 선거에는 출마할 수 없었다. 1971년 대선과 총선에서 약진한 야당 신민당은 1975년 선거 혹은 늦어도 그 다음번 선거에서 집권할 가능성이 컸다. 그간 사사건건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워온 야당의 집권은 박 대통령이 추진해 온 ‘조국 근대화’ 사업의 중단을 의미했다.

주 이사에 따르면 1963년 민정 전환 이래 주요 국정 현안을 두고 야당과 맞서는 과정에서 박 대통령은 야당을 ‘나라를 맡겨서는 안 될, 집권해서는 안 될 세력’으로 인식하게 됐다.

주 이사는 “박정희 정부와 야당은 한일국교정상화, 베트남파병, 경제개발 추진, 안보 위기에의 대응 등에서 격하게 대립했다”며 “어느 때인가부터 박 대통령에게는 야당이 국정의 비판적 동반자가 아니라 사사건건 반대만 일삼는 훼방꾼이었고 이런 인식은 갈수록 확고해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박 대통령은 야당의 집권 가능성이 시야에 들어오자 마침내 헌정을 중단시키는 비상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승희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 이유정/에포크타임스

한승희 KDI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는 ‘유신시대 정책집행 거버넌스’ 주제로 당시 경제정책을 관리한 핵심적 기구인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와 ‘수출진흥확대회의’에 대해 발표했다.

한 교수는 “지난 1960~1970년대 한국이 주요 경제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한 이면에는 1960년대 중반부터 정례적으로 개최한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와 ‘수출진흥확대회의’가 큰 몫을 했다는 평가가 있다”고 밝혔다.

한 교수에 따르면 경제기획원 주관으로 개최된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와 상공부 주관의 수출진흥확대회의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여러 방면에서 구축한 관-관, 관-민, 민-민의 원활한 협조와 조정 체계의 상징이었다. 두 회의체는 1965년 비슷한 시기에 출범해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기까지 매월 거의 빠짐없이 개최됐고, 대통령은 빠짐없이 회의 현장에 참석해 회의를 주재했다. 이들 회의체는 1970년대 초 이래 더욱 실효성 있게 운영됐다.

그는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는 경제계획의 효과적 집행에 기여하고 여러 가지 경제적·사회적 여건 변화에 부응한 단기 경제정책의 결정과 추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며 구체적 사례로 ▲새마을운동 ▲식량증산시책 ▲산림녹화시책 등을 꼽았다.

하지만 회의체 운영과정에서 일부 미흡한 점도 있었다며 “1970년대 당시 한국이 특히 이 회의체를 통해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전략을 실천해 나가는 과정에서 경제주체들이 정부 의존적 태도를 형성하게 하고, 시장경제 활성화를 더디게 한 점은 문제점 중의 하나”라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정부 정책의 성과 창출 여부는 정부에서 수립된 올바른 정책이 얼마나 잘 집행되는지와 직결된다”며 “이 두 회의체의 역사적 공헌은 관계·학계·업계가 축적한 고급 정보를 광범위하게 수집·분류해 개발정책의 모색·결정·집행·조정 과정에서 매우 효율적인 체계를 구축했다는 점”이라고 평가했다.

이날 3차 세미나에서는 ‘오늘의 대한민국과 유신의 정치경제학’ 주제로 10월 유신이 이뤄낸 경제적 업적들을 다뤘다. | 이유정/에포크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