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人] 최초의 여성 작가, 칼에 맞서 평등을 외치다

김연진
2023년 05월 10일 오후 5:26 업데이트: 2024년 01월 19일 오후 5:27

중세 유럽은 칼의 시대였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는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한 크고 작은 전쟁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럴수록 지배와 권위가 정당화됐고 남성중심적 사회 구조가 형성됐다. 그 속에서 여성은 혐오와 조롱, 폭력의 대상에 불과했다.

여성을 향한 혐오와 폭력이 극단으로 치달아 벌어진 비극이 바로 중세의 ‘마녀 사냥’이다.

이런 시대에 차별과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이 등장했다. 그녀는 “모든 여성을 보호해 주는 ‘요새’를 만들기 위해 펜을 들었다”고 당당히 외쳤다.

‘최초의 여성 작가’로 이름을 떨친 크리스틴 드 피잔(Christine de Pizan)의 목소리였다.

문필(文筆)로 생계를 유지한 첫 여성

1364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피잔은 4살 무렵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했다.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궁정 의사였던 아버지는 교육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딸 피잔에게 문학과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가르쳤다.

당시 여성교육은 왕실 및 귀족계급의 특권이나 마찬가지였다.

집필 중인 크리스틴 드 피잔 | Public domain

이런 상황에서 시민계급 출신인 피잔이 교육과 학습에 매진할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의 도움이 컸다.

피잔은 16살 무렵 궁정 서기 청년과 결혼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 피잔은 세 명의 어린 자녀, 어머니 등 대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이때 피잔이 선택한 직업은 ‘작가’였다. 여성이 작가로 활동하며 돈을 버는 일은 전례가 없었다.

몇 년간 피잔은 원고 필사(筆寫)로 생계를 이어갔고, 그녀의 필력을 알아본 귀족들의 후원이 이어지면서 비로소 집필까지 하게 됐다.

그렇게 피잔은 최초의 여성 전업 작가로 데뷔했다.

숙녀들의 도시(The Book of the City of Ladies)

피잔은 저서 ‘숙녀들의 도시’를 통해 가부장제에 맞서고 남존여비(男尊女卑)에 도전했다.

시민계급 출신의 여성으로서 당했던 부당함, 남편과 사별했다는 이유로 받았던 차별의 시선 등을 작품 속에 녹여내며 중세 유럽 전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여기에 더해 그녀는 여성의 진정한 가치와 재능을 증명하고자 했다.

해당 작품에서 피잔은 자기 자신을 화자(話者)로 등장시킨다.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하고자 하는 그녀의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크리스틴 드 피잔(왼쪽)이 강의를 진행하는 모습 | Public domain

또 ‘숙녀들의 도시’에는 세 여신이 등장한다. 거울을 든 이성(理性)의 여신, 자를 든 공정의 여신, 저울을 든 정의의 여신이 주인공이다.

세 여신은 작품 속 피잔과 대화를 주고받는데, 대화의 주된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여성 혐오는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이 남성보다 더 우월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남녀평등의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여성 작가의 꿈

중세 유럽은 이런 사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남녀평등을 외치는 피잔의 목소리는 또 다른 조롱과 혐오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그럼에도 피잔은 포기하지 않고 현실에서 ‘숙녀들의 도시’가 실현되길 바랐다.

1430년경, 잔 다르크의 활약에 누구보다 기뻐했던 사람이 바로 피잔이었다. 당시 피잔은 잔 다르크를 통해 ‘숙녀들의 도시’의 실현 가능성을 보았다.

이에 잔 다르크에 관한 최초의 문학작품인 ‘잔 다르크 전’을 펴내며 잔 다르크의 활약과 성취에 찬사를 보냈다.

이 작품을 남기고 얼마 뒤 피잔은 생을 마감했다. 언젠가는 완벽히 실현될 ‘숙녀들의 도시’를 후대 사람들이 굳건하게 지켜주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