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人] 美 음악계의 자존심을 살린 ‘불멸의 거장’, 레너드 번스타인

김연진
2023년 05월 19일 오후 2:36 업데이트: 2024년 01월 19일 오후 5:27

20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세계 고전음악 무대에서 미국이 설 자리는 없었다.

고전음악 무대는 유럽 음악계가 주름잡았고, 미국 음악계는 비주류 취급을 당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불멸의 거장’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판도가 달라졌고, 전 세계가 미국 음악계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인 최초로 ‘세계 정상급 지휘자’라는 타이틀을 따내며 미국 음악계의 자존심을 살린 천재 음악가다.

레너드 번스타인 | Public Domain

우연히 찾아온 기회

1943년 11월 14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지휘자 브루노 발터(Bruno Walter)가 독감에 걸려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된 것이다.

공연 당일이어서 연주회를 취소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브루노 발터는 부지휘자에게 지휘봉을 맡기겠다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이 파격적인 이유는 당시 부지휘자의 실력이 제대로 검증이 안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부지휘자는 입단한 지 약 2개월 된 새내기 지휘자였다.

갑작스럽게 큰 무대에 오르게 된 부지휘자는 긴장감에 손이 덜덜 떨려 신경안정제까지 챙겨 먹었다고 훗날 고백했다.

그는 무대에서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는데, 우려와 달리 공연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객석에서는 기립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뉴욕타임스 등 각종 매체는 혜성처럼 등장한 새내기 지휘자를 주목하며 그의 천재적인 재능과 감각을 칭송했다.

미국이 낳은 ‘불멸의 거장’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은 이렇게 데뷔했다.

공연 리허설 중인 레너드 번스타인 | Public Domain

준비된 천재 음악가

번스타인이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움켜쥘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타고난 천재이자 철저한 노력파였기 때문이다.

1918년 유대인 부부의 아들로 태어난 번스타인은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여유롭지 못한 가정형편 탓에 부모는 번스타인이 음악가의 길을 걷는 것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타고난 천재성을 숨길 수는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번스타인의 재능을 인정하고 어렵게 모은 돈으로 피아노를 사주며 꿈을 응원했다.

번스타인은 하버드대학교와 커티스음악원에서 실력을 갈고닦으며 음악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그 재능을 인정받아 1943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임명됐다.

지휘자 브루노 발터가 독감에 걸려 대신 지휘봉을 잡았던 11월 14일까지, 번스타인은 무대 뒤에서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바로 그 전날까지도 번스타인은 악보를 붙들고 밤새 연구와 훈련을 거듭했다. 이에 갑작스럽게 무대에 올랐어도 성공적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번스타인은 “행운과 기회가 찾아올 때, 그것을 움켜쥘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오케스트라 지휘. 1985년. | Public Domain

만능 엔터테이너로 거듭나다

우연히 지휘봉을 잡은 것이 계기가 돼 일약 스타덤에 오른 번스타인은 1969년까지 뉴욕 필하모닉을 이끌었다.

음악 평론가들은 번스타인이 지휘봉을 잡았을 때가 뉴욕 필하모닉의 최고 전성기였다고 평가했다.

고전음악의 최정상에 선 번스타인은 대중음악에도 관심을 보였다.

당시 고전음악계는 대중음악을 음악으로 인정하지 않고 폄하했는데, 번스타인은 달랐다. 고전음악은 음악의 한 장르일 뿐이며 대중음악도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비틀즈의 음악이 웬만한 클래식 음악보다 뛰어나다”고 말해 음악계에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번스타인은 작곡, 음악교육, 피아노 연주, 작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눈부시게 활약했다.

특히 ‘온 더 타운(On the Town)’,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 등의 뮤지컬 작품을 작곡하며 브로드웨이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20세기 최고의 만능 엔터테이너’로 불리는 이유다.

번스타인의 마지막 지휘는 1990년 탱글우드 페스티벌의 공연이었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 연주를 끝으로 건강이 악화해 은퇴를 선언했고, 같은 해 10월 14일 뉴욕 자택에서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