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시위대는 높고 단단한 담벼락에 맞서는 계란들”…무라카미 하루키식 비유 담긴 조형물

Larry Ong
2019년 09월 26일 오전 9:06 업데이트: 2020년 01월 2일 오전 11:58

홍콩에는 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는 여러 상징물이 있다. 우산혁명의 상징인 ‘엄브렐러 맨’ 조각상, 홍콩인들의 민주화 염원을 담은 메모로 도배된 ‘레논 월’ 등이다.

이런 유명 상징물보다 눈에는 덜 띄지만, 홍콩 민주화 시위대의 곤경을 가장 잘 포착한 설치 예술작품이 있어 소개한다. 5년전인 2014년 홍콩 센트럴 점령 시위 당시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송환법 반대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지금 상황과도 잘 들어맞는다.

각각의 ‘얼굴’을 가진 55개의 계란이 직사각형 스티로폼 보드의 왼쪽 상단 모서리에 깔끔한 파스칼의 삼각형 모양으로 쌓여 있다. 붉은 갈색의 벽돌로 된 두 개의 ‘벽’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계란들이 앞으로 가는 길을 막은 채 서 있다. 얼굴을 가진 계란 하나하나는 소시민을 살아가는 홍콩인들을 상징한다.

‘계란과 높은 벽(Eggs and High Wall)’이라는 제목의 이 설치물은 홍콩 정부와 중국 공산당에 진정한 보편적 참정권을 요구하는 홍콩인의 결의를 나타낸다.

설치물을 만든 작가 리틀썸씽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55개 계란은 홍콩의 민주화 운동가들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계란들은 연약하고 깨지기 쉽지만, 하나로 뭉치면 중국 공산당의 ‘높은 벽’을 극복할 힘을 갖게 될 것이라며 작품에 의의를 더했다.

리틀썸씽 작가는 “우리 홍콩을 사랑하는 ‘계란들’은 후추 스프레이, 최루가스, 경찰 몽둥이, 폭력과 직면했고 우리의 평판이 더럽혀지는 것을 목격했으며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두렵지 않으며 우리는 꾸준히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높은 벽’을 무너뜨리는 날까지”라고 썼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

리틀의 이 설치물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벽을 마주하는 달걀’이라는 시적이고 기발한 이미지를 차용한 예술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일본의 소설가이자 번역가이기도 한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에서뿐 아니라 국제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많은 상을 수상했는데 2009년 2월 이스라엘의 최고 문학상인 예루살렘상을 받기도 했다.

예루살렘상 수락 연설에서, 무라카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단단하고 높은 담벼락과 그것에 맞서 깨지는 계란이 있다면, 벽이 옳고, 계란이 틀리더라도, 나는 계란 쪽에 설 것이다. 왜인가? 왜냐하면 우리는 각각 모두 계란이기 때문이다. 깨지기 쉬운 계란에 둘러싸인 독특한 영혼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각자는 높은 담벼락을 마주하고 있다. 높은 벽은 보통 우리가 개인의 힘으로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들을 하도록 강요하는 시스템이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고 개인이고 깨지기 쉬운 계란이다. 벽에 맞서는 우리는 희망이 없다. 그것은 너무 높고, 너무 어둡고, 너무 춥다. 벽에 맞서 싸우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함께 모아 온기와 힘을 키워야 한다. 시스템이 우리를 통제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 시스템을 만든 것은 우리다.”

당시 무라카미의 이스라엘 시상식 참석과 그의 연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계속되는 갈등 때문에 특히 논란이 됐었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을 옹호하며 “대부분의 소설가들처럼, 나는 사람들이 내게 충고하는 말과 정반대의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와서 보기로 했다. 침묵하느니 여기 와서 말하는 쪽을 택했다”고 말했다.

무라카미의 ‘벽과 계란’ 비유는 홍콩 가수 사안기(謝安琪)의 2014년 노래 ‘계란과 양(Egg and Lamb)’ 가사에도 등장한다.

그녀의 노래 가사에서, 사람들은 ‘벽에 부딪히고,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계란’이 되거나 또는 ‘목장에 갖힌 순종적인 양’이 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고 묘사된다.

‘계란과 양’은 홍콩에서 우연히도 2014년 7월 1일 연례 민주화 행진을 하루 앞두고 나왔고 권위에 대한 반항의 메시지로 인해 민주주의 노래로 칭송받았다.

이 곡은 순식간에 유튜브 히트곡이 되어 발매 2주 만에 100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돌파했다.

하지만, 이 곡의 프로듀서는 ‘계란과 양’이 2014년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영화 ‘노예 12년’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홍콩 정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어쩌면 리틀썸씽 작가 역시 그 노래의 진의를 잘못 해석하고 자신의 작품에 채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작품 ‘계란과 높은 벽’은 홍콩 민주화 시위대가 직면하고 있는 현재의 곤경을 매우 적절하게 비유하고 논평했다. 연약한 ‘계란’들은 하나로 뭉쳐 홍콩 정부와 중국 공산당의 ‘높은 벽’에 대항해 확고히 버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