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적인 아름다움에 압도당하다 ‘헬리오가발루스의 장미’

[시리즈 칼럼] 고전회화는 사람의 내면에 무엇을 남기는가

에릭 베스(Eric Bess)
2020년 09월 15일 오후 9:58 업데이트: 2024년 01월 19일 오후 6:15

우리는 누구나 아름다움에 마음을 쉽게 빼앗긴다. 아름다운 순간, 아름다운 사람과 사물은 우리의 특정한 감정을 자극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로렌스 앨마 태디마가 그린 ‘헬리오가발루스의 장미’는 언뜻 보았을 때, 내면 깊은 곳을 휘젓는 그런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 그림을 몇몇 가까운 지인들과 공유했는데, 한결같이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와, 정말 아름다워요!” 그런 다음 나는 그들과 이 작품에 담긴 잔혹한 스토리를 공유했고 우리는 모두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감각적 인식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됐다.

헬리오가발루스 황제의 잔혹성

이 아름다운 그림 뒤에 숨겨진 잔혹한 이야기는 무엇인가? 헬리오가발루스는 서기 218년, 15세의 어린 나이로 로마의 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황제가 아니라 황후라고 생각한 기인이었으며, “나는 숙녀니, 군주라 부르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다. 십 대에 불과했지만, 그는 잔인한 통치와 극단적인 형태의 쾌락과 오락에 탐닉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로마 제국 쇠망사’의 저자 에드워드 기번은 헬리오가발루스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그의 젊음과 조국, 그리고 넘치는 부에 의해 타락했다. 그는 자신을 무분별한 분노와 광적인 쾌락에 내팽개쳤다 … 계절과 기후의 질서를 혼동시키고, 신하들의 열정과 편견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자연과 품위에 관한 모든 법칙을 무너뜨리는 것은 그의 가장 즐거운 오락거리였다.”

그의 오락거리에는 극에 달한 정욕, 로마 역사에 대한 신성 모독, 살인, 그리고 어린이들의 희생이 포함돼 있었다.

앨마 태디마의 구성

앨마 태디마는 그리스 로마의 고대 풍경을 즐겨 그린 네덜란드 화가였다. 그는 후에 영국으로 건너가 귀화했으며, 1879년 왕립사관학교의 회원으로 선출됐고, 1899년엔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헬리오가발루스의 가장 잔인한 역사 중 하나는 앨마 태디마에 의해 ‘헬리오가발루스의 장미’에서 재조명됐다. 로마 황제들의 전기를 담은 역사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의하면, “헬리오가발루스는 한때 회전식 천장이 설치된 연회장에서 제비꽃을 비롯한 여러 꽃을 그의 신하들에게 거침없이 퍼부어 댔다. 이때 실제로 몇몇 신하들은 쏟아지는 꽃사태 위로 기어 올라오지 못해 질식해 죽기도 했다”고 한다.

앨마 태디마는 헬리오가발루스의 기이한 잔혹성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림의 위쪽 중앙에 자리를 차지한 헬리오가발루스는 배를 대고 누워 차분하게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행사를 지켜보고 있다. 그의 손님들은 오른쪽에 앉아 있고, 디오니시안 메이나드(디오니소스를 추앙하는 여인들) 복장을 한 여성이 왼쪽 상단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와인과 엑스터시의 신 디오니소스의 동상도 멀리 보인다.

로렌스 앨마 태디마(Lawrence Alma-Tadema)의 ‘헬리오가발루스의 장미’ 부분. |Public Domain

작품에는 천장이 그려지지 않았지만, 수백 송이의 장미가 위로부터 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천장의 회전식 문은 헬리오가발루스의 명령에 따라 계속 열린 상태로 꽃을 쏟아붓고 있었을 것이다.

앨마 태디마는 프랑스로부터 장미를 대량으로 조달해가며 꽃잎 한 장 한 장에 정성을 들였다. 장미들은 작품 하단에 흩어져 있는 인물들 위에 떨어지고 있지만, 놀라거나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다. 마치 장미가 갑자기 떨어져 그 상황에 반응할 여유조차 그리고 스스로를 구할 시간조차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아름다움의 층

‘헬리오가발루스의 장미’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장면이다. 몇 년 전 처음 보았을 때, 나 역시,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속에서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즐겁고 편안했다. 작품의 진 모습을 보게 된 건 제목을 읽고 몇 가지 조사를 한 후였다.

우리는 종종 현시적 아름다움에 즉각 매료된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 우리 옆을 지나간다고 상상해 보자. 시간조차 멈추는 듯 느껴질 것이다. 또 아름다운 옷, 보석, 자동차 등은 우리의 소유욕을 자극한다. 심지어 표면적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조차도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상관없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성취하려는 우리의 욕망을 자극한다.

‘헬리오가발루스의 장미’는 아름다움이 층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했다. 표면적인 아름다움이 제공하는 즉각적인 쾌락은 아름다움의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 외적인 아름다움을 무시하거나 비난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외적인 아름다움은 우리를 끌어당기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하지 않는다면, 겉으로 아름다워 보이지만 속으로는 깊이 추한 사람, 사물, 심지어 이데올로기에 쉽게 압도당하고, 감금되고, 질식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모든 일에는 결과가 따른다. 겉보기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내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외적인 아름다움을 고려해야 하는 이유다. 감각적인 인식은 이성적인 사고 그리고 선한 마음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외적인 아름다움은 우리의 감각에 의한 인식이다. 이에 반해 내적인 아름다움은 명확한 답이 없을 수 있는 성찰의 질문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외적인 아름다움과 나 자신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이것이 나 자신의 아름다움을 성장시키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라고 자신을 향해 질문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은 나와 이것을 보는 모든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과거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으며 미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인간의 경험에 대해 무엇을 제안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에릭 베스(Eric Bess)는 현재 비주얼 아트 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젊은 화가 겸 예술전문 기고가다. 고전회화를 중심으로 예술 작품 큐레이션에도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