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 당(黨)문화] 제3장 주입수단(중)

9평 편집부
2007년 03월 3일 오전 7:23 업데이트: 2021년 10월 26일 오후 5:42

상편:당문화는 어떻게 건립되었는가 

【당문화 해체】3:주입수단(중) 


< 목 차 >

3. 사악한 당 문인을 이용한 악당(惡黨) 찬양 

1) 문학작품을 이용해 중공의 이론과 정책 설명 

2) 중공의 세계관, 역사관과 인생관 주입 

(1) 신에 대한 신앙을 비판하고 무신론 주입
(2) 전통 관념을 타파하고 계급 증오 주입
(3) 역사상의 폭군, 소인배, 도적떼와 폭도들을 미화
(4) 인성(人性) 폄하 당성(黨性) 찬양

3) 당(黨)문학을 이용한 중공 주입의 몇 가지 특징 

(1) 민족문화형식을 전면적으로 도용
(2) 문학적 기교 활용
(3) 금서(禁書)를 이용해 문화에 대한 갈증 강폭
(4) 반복으로 중독 효과 강화

4) “보이는 흑수(黑手)”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흑수”에 이르기까지 

4. 교과서를 이용한 당문화 주입 

1) 정치수업-일방적인 거짓말 

(1) 수업시간이 많고 요구가 엄격
(2) 당문화를 “덕육(德育)”, “상식”, “원리”, “기초”로 분장
(3) 중공의 가장 특징적인 수업내용-시사정치
(4) 증오와 억지 주입해 정치적 무관심 조성
(5) 정치수업은 절대 늦추지 않아

2) 역사수업-자신을 속이고 남을 기만 

(1) 역사는 정치의 분과로 전락
(2) 진실한 역사를 은폐 왜곡

3) 국어수업-즐거움 속의 속임수 

(1) 문장 선택
(2) 교사의 교수법
(3) 입시를 통한 유도
(4) 최근 추세


3. 사악한 당 문인을 이용한 악당(惡黨) 찬양

<9평 공산당> 제1평에서는 “공산당 정권과는 달리 다른 모든 사회에는 그 사회가 비록 아무리 전제적이고 독재정치를 하더라도 모두 일부 자발적인 조직과 자주적인 성분이 존재한다. …중략…. 그러나 공산당 정권은 이러한 자발적인 조직과 자주적인 성분을 철저하게 제거했으며,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중앙집권적인 구조로 대체하였다.”라고 지적하였다.

공산당의 극단적으로 삼엄한 사회 통제가 조성한 좋지 않은 결과 중 하나는 바로 독립적인 지식인 계층의 소실이다. 중공은 일부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육체적으로 소멸시켰고 다른 지식인들은 여러 가지 “조직(單位)”에 소속되게 했다. 이런 조직은 사실상 중공이 도시에서 인민에 대해 전면적인 통제를 실시하는 기본적인 조직형식이다. 이처럼 정권 통제의 제한을 받지 않는 생존 공간과 자유 언론의 공간을 잃어버린 지식인들은 어쩔 수 없이 중공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으며 커다란 압력을 받는 동시에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부분 자신의 전문 지식을 이용해 여러 각도에서 각종 방식으로 사악한 당을 찬양하며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동시에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중국 사회에는 예로부터 “스승을 공경하고 도를 중시(尊師重道)”하는 전통이 있다. 중공 정권은 지식인(文化人)에 대한 민중의 신임과 존중을 이용해 문인들의 저작과 언론을 통해 민중에게 간접적으로 당문화를 주입하고 중국인의 선악 표준을 개변시켰다. 동시에 “사이비 지식인” 계층을 유지하여 한편으로는 중공으로 하여금 “청의(淸議, 역주: 공정한 평론)”와 여론의 제약을 피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 어디서나 겉으로는 공정해 보이는 “과학연구성과”와 “사회여론”을 날조해 낼 수 있게 하여 그 사악한 통치를 위해 변호하게 했다.

중공이 문인들을 재편하는 방식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직접 흡수하여 입당시키는 동시에 정권(정부, 인민대표대회, 정치협상회의)에 참여하게 하는 방법. 예를 들어, 궈모뤄(郭沫若 역주: 중국 문학가, 역사학자)는 중공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했고, 역사학자 우한(吳晗)은 베이징 시 정치협상회의 부주석, 베이징 시 부시장을 역임했다.

▲민주당파에 배치하는 방법

▲과학원(사회과학원), 대학 또는 문학과 역사 관련 부문에 소속시키거나 작가협회, 연극협회, 문학예술계연합회(文聯) 등에 배치하는 방법. 문화혁명 기간에 부인과 함께 자살한 번역가 푸레이(傅雷)는 중공이 정권을 잡은 뒤, 어떠한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직업을 가진 소수 지식인들 중 한 명이었다.

사상 통제의 편리를 위해 중공은 50년대부터 대학에서 “학부 조정”을 진행하여, 많은 학교의 철학계열을 하나로 합병했다. 정치학,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 등은 자산계급 학과로 분류하여, 모두 없애버렸다가 80년대에 이르러서야 점차 회복시켰다. 중앙에서부터 지방의 당교(黨校), 사회과학원, 대학, 전문대학 등 기구는 방대하고 인원도 매우 많았다. 이들은 “과학연구”의 기치를 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중공의 합법성을 논증했다.

조직 재편, 사상개조, 폭력적인 위협, 이익의 유혹, 반대자에 대한 도태(“반우파 투쟁” 기간에 용감하게 진실을 말한 지식인 백만이 유배됨) 등 절차를 거쳐 중공은 모든 지식인들을 수중에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소수의 정직하고 깨어있는 지식인들은 기껏해야 분노를 표시할 수 있었을 뿐 감히 발언은 하지 못했으며 담이 작고 나약한 지식인들은 담장 위의 풀처럼 바람 부는 대로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밖에 간사하고 아첨하기 좋아하는 지식인들은 자발적으로 사악한 당의 앞잡이, 나팔수가 되었다.

중공은 철학계, 역사학계, 문학계, 과학계, 종교계 내부에 모두 일부 주요 대리인과 나팔수들을 배양했다. 이들은 평소에 그럴듯하게 많은 문장과 “저작”들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마르크스주의는 진정한 과학”, “사회발전 5단계는 보편적인 진리”, “자연과학은 계급성을 띠고”, “종교는 진리이며 사회주의도 진리”라는 등을 논증하여 당문화의 기본적인 무기고를 충실히 하는 역할을 했다. 이들은 매번 정치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형세를 바짝 따라 “당”에 충성을 표시했고, 엉터리 문장들로 악당을 찬양하고 단장취의(斷章取義), 의미왜곡, 정치적 해석 등의 방식으로 중공의 “적”을 타격했으며 인격을 팔아 당의 노예가 되는 대가로 약간의 떡고물을 챙겼다. 문화혁명 과정에 명성을 날린 량샤오(梁效, 베이징대와 칭화대 학자들이 조직한 작가팀), 89년 6.4 천안문 민주화운동으로 유명해진 허신(何新 역주: 6.4천안문 사건 전후, 중공을 위해 대변하는 문장들을 발표하면서 각광을 받음. 대졸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으로 초빙됨), 파룬궁 탄압 과정에 유명해진 허쭤슈(何祚庥), 위관위안(於光遠), 판자정(潘家錚) 등 인물들이 모두 이런 유형에 속한다.

사악한 당의 대표문인으로 예전에 궈모뤄(郭沫若)를 꼽았다면 지금은 허쭤슈를 꼽을 수 있다.

중공이 “문화의 기수(旗手)”로 부른 풍파(風派 역주: 문혁 후, 자신의 입장이 없이 세력 따라 움직이고 말을 한 기회주의자를 가리킴) 문인 궈모뤄는 카멜레온보다 더 변화무쌍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중공이 반성하라고 하면 반성했고 우쉰(武訓 역주: 영화 “우쉰전”은 청말 거지 출신 인물인 우쉰이 학교를 창설한 스토리를 다룬 역사 다큐멘터리로 중공 역사상 최초로 상영이 금지된 영화이기도 하다), 후스(胡適), 후펑(胡風)을 비판하라고 하면 누구보다 신나게 비판했으며 어느 한 역사 인물에 대한 반대 학설을 내놓으라고 하면 두말없이 바로 그렇게 했다. 그러나 천하의 궈모뤄도 원칙과 입장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공 앞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혁명 초기, 궈모뤄는 풍향이 바뀐 것을 눈치채고 즉시 “지금의 표준으로 보면 내가 이전에 발표했던 문장들은 엄격히 말해 일고의 가치도 없으며 전부 태워 버려야 한다. 내가 잘못한 주요 원인은, 마오쩌둥 사상을 제대로 학습하지 못했고 마오쩌둥 사상으로 자신을 무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반성했다.

과학원의 “정치원사(政治院士)” 허쭤슈는 문화혁명 기간에 마오쩌둥과 공산당에 아부를 일삼았으며 심지어 모자(毛子 역주 : 물리에서 물질 입자를 무한히 나눌 수 있다는 원리에 근거해 추측으로 어느 한 층 입자를 마오쩌둥의 성씨를 따다 원자나 전자처럼 모자라고 불렀다), 무자(無子 역주: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산계급의 “무”자를 따다가 추측으로 어느 한 층 입자를 무자라고 불렀다)라는 개념까지 내놓았다. 또한 2001년에는 엉뚱하게도 “양자 역학의 법칙은 장쩌민의 3개 대표이론에 부합된다”라는 학설까지 내놓았다. 이러한 과학건달이 바로 중공이 파룬궁을 타격하는데 이용할 주요 “이론근거”를 제공했다.

바른 믿음(正信), 진리와 인류의 전통적인 도덕 체계는 모두 안정적이며 고정불변한 특징을 지닌다. 세속의 권력에 따라 흔들리는 도덕은 도덕이라고 불릴 자격이 아예 없으며, 시대 발전에 따라 변화하는 진리는 진리라고 불릴 자격이 아예 없다.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들에 대한 신념 역시 신념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사악한 당 문인들의 변덕스러움은 사람들에게 그나마 남아 있는 인성과 미덕에 대한 자신감을 파괴했으며 사람들에게 일체 도덕 표준을 포기하도록 부추겼다. 아울러 중공의 좋고 나쁨을 좋고 나쁨의 표준으로 삼아 중공 정권의 존재를 수호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았다.

본서의 1장과 2장에서 우리는 이미 학술계, 종교계, 과학계의 당(黨) 문인들에 대해 상당히 많이 분석하고 폭로했다. 우리는 본 절에서 문학 영역에서 사악한 당 문인들이 어떻게 악당을 찬양하고 중국인들의 선악 표준을 변모시켰는지 중점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광의의 문학에는 각종 문헌, 저술과 협의의 문학 작품을 포함한다. 언어는 인류 문화 체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각종 전통 문화에서는 모두 언어와 언어 예술에 해당하는 문학을 역대로 매우 중시해 왔다.

중국 문화는 일종의 반신(半神)문화이다. 옛사람들은 문장이 지고무상(至高無上)한 천도(天道)에서 내원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문장은 도를 싣는 것(文以載道)”라고 말했다. 또한 문학은 도덕을 제고하고 성정을 함양할 수 있다고 여겨 “수사에는 진심이 담겨야 한다(修辭立其誠)”, “시란 사람의 감정이 담긴 것이다(詩者持也, 持人情性)”라고 했다. 역대의 문인 묵객들은 문학 창작을 “나라를 경영하는 대업이며 불후의 성대한 일(經國之大業, 不朽之盛事)”로 생각하고 장중하고 성실한 태도로 많은 우수한 문학 작품들을 창작해 냈다. 이러한 작품들은 사실 바로 그들의 청정(淸淨)하고 고상한 내심 세계를 반영한다.

중공은 사람들의 사상을 통제하는 일종의 사교(邪敎)로서, 동서고금의 그 어떤 정권보다도 이데올로기를 중시했다. 중공 사령(邪靈)이 침입한 후, 문학은 불행히도 중공이 당문화를 제조하고 당문화를 주입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중공의 노예가 되길 꺼리지 않는 엉터리 문인들은 잇달아 이름을 날릴 수 있었지만, 자신의 인격 존엄을 포기하지 않는 작가와 시인들은 다행히 박해를 피해가더라도 창작과 발표의 기회를 박탈당해 사회 변두리에서 우울하게 생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의 문예(文藝)사상은 마르크스-엥겔스에서 시작되어 레닌을 거쳐 마오쩌둥에 이르러 본격적인 형태를 드러냈다. 마오쩌둥은 《옌안(延安) 문예 좌담회 강화(講話)》에서 공산당은 “문예를 전반 혁명기계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야 하며 인민을 단결시키고 교육하며 적을 타격하고 적을 소멸하는 강력한 무기로 만들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살기등등한 이 강화는 중공이 문인을 이용해 당문화를 건립하고 중국인들의 정신세계를 통제하는 서막을 열어놓았다. 이때부터 “정치 표준이 제1위이고 문학 표준이 제2위”, “계급투쟁을 위해 복무하는 문학”, “전 당이 문예에 참여해야 하며 전 인민이 문예에 참여해야 한다”, “주제가 우선이다” 등이 중공 어용작가들의 창작 지도원칙이 되었다.

1) 문학작품을 이용해 중공의 이론과 정책 설명 

중국 현대사를 살펴보면 중공이 발동한 거의 매 차례 정치운동은 모두 어느 한 문예작품 혹은 문예사상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40년대의 정풍(整風)운동은 왕스웨이(王實味)의 《야생 백합(野百合花)》에 화살을 겨누면서부터 시작되었고, 50년대 일련의 사상개조 운동은 영화 《우쉰전(武訓傳)》, “홍루몽연구”와 “후펑(胡風 역주 : 유명한 시인, 번역가, 논평가)집단”을 비판하면서 시작됐으며, 문화대혁명은 우한(吳晗)이 새로 만든 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이 발단이 되었다. 또한 TV 다큐멘터리 “허상(河殤 역주: 서방민주에 대한 동경을 표현함으로써 청년 학생들의 환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오쯔양 전 총서기의 칭찬을 받은 작품)”에 대한 비판은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 탄압 후, 사상 통제를 강화하는 중요한 일환이 되었다.

다른 한 방면에서 보자면, 중공 휘하의 문인들은 중공의 지휘봉에 따라 움직이면서 문예작품으로 중공의 이론과 정책을 알기 쉽게 설명하여 서로 다른 시기에 중공의 정치 요구를 만족시켰다.

중공의 “토지개혁(지주의 토지 박탈)”과 “합작화 운동(농민들의 모든 토지 박탈)”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문인들은 《폭풍취우(暴風驟雨)》, 《삼리만(三里灣)》, 《창업사(創業史)》 등의 작품을 써냈다. 이들 문학 작품들은 정치운동 과정에 중공이 자행했던 잔혹한 살인과 박해, 공공연한 불법 재산몰수와 약탈 행위를 덮어 감춰주었다. 국민당을 추하게 만들고 중공이 일으킨 내전을 “해방전쟁”으로 꾸미기 위해 문인들은 또한 《임해설원(林海雪原)》, 《보위연안(保衛延安)》, 《홍암(紅岩)》과 같은 작품을 써냈으며, 중공이 “항미원조(抗美援朝 역주: 한국전쟁)”를 미화하려 하자 문인들은 서둘러 《누가 가장 사랑스런 사람인가(誰是最可愛的人)》를 써냈다.

중공이 자본가를 “평화”적으로 개조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자 하자 문인들은 《상하이의 아침(上海的早晨)》을 써냈고, 중공이 중국인민들이 공산당을 선택한 것임을 세뇌하려 하자 문인들은 《홍기보(紅旗譜)》를 창작했으며, 중공이 “소자산계급 지식인”을 인도하여 “견정한 마르크스주의자”로 만들려고 하자 문인들은 《청춘의 노래(靑春之歌)》를 창작했다. 이 밖에 중공이 “대약진(大躍進)”운동을 미화하려 하자 전국적으로 약진하여 백만 개도 넘는 거짓 민요들을 창작했다.

어떤 사람은 중공이 파룬궁을 모함하는 드라마를 시청하고는 오히려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야 중공이 왜 파룬궁을 금지했는지 알겠다.”라고 했다. 말 밖의 뜻이란 이런 드라마를 보지 않고서는 그 역시 왜 파룬궁을 금지해야 하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중공의 문예 날조는 놀랍게도 “파룬궁 탄압 정책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근거로 되었다. 이는 여론 주입이 최근에 발생한 탄압운동에서도 중요한 작용을 일으켰다는 것을 설명한다. 사실 역사적으로 중공이 “착취계급” 소멸을 선동할 때 사용한 것도 마찬가지 수법이었다.

사람들은 실생활 속에서 지주(사실 그들은 평범한 토지 소유자에 불과하다)들이 대부분 근면성실하고 공익활동에 적극적인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중공의 주입을 통해 지주라고 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예술 수단을 통해 왜곡된 저우바피(周扒皮), 류원차이(劉文彩), 황스런(黃世仁), 난바톈(南覇天) 등 악덕 지주들의 이미지였다. 정권을 탈취하기 전에 중공은 점령지에서 가무와 연극으로 병사들을 교육했는데 많은 병사들은 《백모녀(白毛女)》 등의 극을 관람한 후, “계급의 적에 대한 적개심이 일어났고 복수의 불길이 타올랐다.”고 말했으며 중공에 의해 “각성한 무산계급의 전사”가 되었다.

2)중공의 세계관, 역사관과 인생관 주입

(1) 신에 대한 신앙을 비판하고 무신론 주입 

무신론은 중공 사상의 기초이다. 하지만 각각의 커다란 정통문화에는 모두 신의 존재를 믿으며 깊이 있고 걸출한 많은 문학작품들에서도 모두 신을 묘사하고 찬양하였다. 그리스 신화나 단테의 《신곡(神曲)》, 밀턴의 《실낙원》,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 중국의 《서유기》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때문에 중공은 한편으로는 문인들을 통제해 물질을 숭배하고 폭력을 숭배하는 문학작품을 쓰게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용학자들을 동원해 유신론 문학을 뜯어 고치고 의미를 왜곡했다. 그리하여 종교는 “정신적인 아편”으로, 천당과 지옥은 “봉건미신”으로 변질되었으며 신화와 전설은 생산력이 발달하지 않은 원시사회에서 자연에 대해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형상과 반응으로 해석되었고 손오공(孫悟空)과 《실낙원》의 사탄은 무산계급과 피압박자들의 대표로 변형되었다.

(2) 전통 관념을 타파하고 계급 증오 주입 

중국의 전통적인 시(詩) 교육은 “원한이 있되 분노하지 않으며 슬프되 상심하지 않음(怨而不怒,哀而不傷)”을 강조했고, 아무리 억울하고 슬플지라도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여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것을 요구했다. 중국 고전문학 속에는 충효절의(忠孝節義)를 묘사하고 가족 간의 정이나 우정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로 가득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작용이 감정을 발산하고 정화(淨化)하는 데 있다고 했고, 고대 로마의 문학가 호라티우스는 문학의 작용은 교육과 오락이라고 했다. 세계 각국 문학작품은 설사 증오를 쓰더라도 대부분 권선징악(勸善懲惡)의 각도에서 썼다. 때문에 증오를 묘사하고 선동하는 것은 전통문학의 특징과는 서로 화합할 수 없다.

그러나 중공의 이해에 따르면 “일부 계급이 승리하고 일부 계급이 소멸되는 것이 바로 역사이다”, “계급투쟁이 역사 발전의 진정한 원동력이다”, “누가 우리의 적인가? 누가 우리의 벗인가? 이 문제는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라고 주장했다. 때문에 계급적 증오를 주입하고 선동하는 것은 중공 당 문예(黨文藝)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되었다. 이렇게 하여 증오는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좋은 의미를 지닌 단어가 되었다.

“그 18세 여자 노비의 검고 이글거리는 커다란 두 눈에는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는 영화 《홍색낭자군(紅色娘子軍)》 시나리오의 처음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창작된 오페라는 더 극단적으로 증오를 찬송했다. “꿋꿋이 서 있는 그녀의 두 눈에서는 증오의 불꽃이 뿜어 나왔다”, “그녀는 치솟아 오르는 원한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음속에서는 강렬한 계급적 증오가 불타올랐다”, “군사 훈련은 계급적 원한이 넘치는 함성으로 마무리되었다”, “고통이 클수록 원한이 깊다”, “하늘에 사무치는 원한”, “원한을 풀기위해 복수를 결심했다” 등등. 오페라 주인공은 대개 20세가 채 안 된 꽃다운 소녀들이었지만 이처럼 인간성이라곤 전혀 없는 살인 기계로 묘사되었다.

더 두려운 것은, 중국인들은 상당히 오랜동안 정신적으로 극히 궁핍한 시기를 거쳤기에 이런 청춘 남녀들을 쉽게 우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문화혁명 시기, 중학교 여학생들이 교사를 가죽 벨트로 때려 사망케 할 수 있었던 것도, 광시(廣西)에서 사람들이 “계급의 적”으로 분류된 사람들의 심장과 간을 파먹으면서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상당 부분 증오를 선전하는 이런 문학을 숭배한 것과 관련이 있다.

북경 모 중학교 교장의 자아비판 : “나는 잡귀신(牛鬼蛇神)….” | 에포크타임스

(3) 역사상의 폭군, 소인배, 도적떼와 폭도들을 미화

역사를 날조해 진실을 은폐하고 세뇌하는 것은 중공의 일관된 재주! | 에포크타임스

공산당은 자신을 “역사발전의 필연적인 산물”, “중국 인민의 필연적인 선택”이라고 포장하기 위해 역사를 전면적으로 뜯어고칠 수밖에 없었고 역사상의 폭군, 소인배, 도적떼와 폭도들을 “역사전진의 동력”이라고 분칠했다. 그리하여 중공은 중국 역사상 소문난 간신배, 악인들을 공손하게 “신단(神壇)”에 모셨다. 폭군의 대명사 상(商)나라 주왕(紂王), 진시황, 각박하고 인정이 없었던 상앙(商鞅, 역주: 전국시대 정치가로 법을 엄격히 적용해 진나라를 강국으로 만드는 데는 공헌했으나 결국 자신이 만든 법에 의해 희생됨)은 모두 중공이 공덕을 찬양하는 인물이 되었다. 중공은 농민전쟁 두령을 선구자로 떠받들어, 잔인한 살인광 황소(黃巢), 장헌충(張獻忠), 홍수전(洪秀全)도 중공 문학의 전당에서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작은 예를 하나 들어본다.

명나라 말기, 도적떼들의 우두머리 중 한 사람이었던 장헌충은 살인을 밥 먹듯 했는데, 그는 당시 쓰촨(四川)성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도륙하다시피 했고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 부를 정도로 풍요로웠던 쓰촨성은 인간지옥으로 변했다.

1982년 마오둔(茅盾) 문학상을 수상한 장편 역사소설 《이자성(李自成)》은 제1권 하편 서두에서 전원시와도 같은 우아한 필치로 다음과 같이 썼다. “전란이 끊임없었던 곡성(谷城) 일대는 장헌충의 농민군이 주둔하면서부터 비로소 태평을 되찾기 시작했다.”

물론 중공의 목적은 이들 역사 인물들을 분칠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공의 진정한 목적은 그들을 미화함으로써 그럴듯하게 자신을 미화하려는 것이었다.

(4) 인성(人性) 폄하 당성(黨性) 찬양 

중공의 문예 이론 저작들을 읽어보면 한 가지 괴상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인성(人性)”이란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로 쓰인다는 점이다. 한 부의 문학 작품이 만약 “인성”을 표현한다면 그것은 실패한 작품, 심지어 반동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그렇지 않고 한 문학 작품이 만약 계급성(계급의 적에 대한 증오, 계급의 형제에 대한 우애)을 표현하면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부자(父子) 혹은 모자(母子) 사이의 정, 남녀 간의 사랑, 우정, 동정심 등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한 문예 작품들은 모두 비판 받았으며, 당성이 인성을 이기는 등 “무산계급 각성”을 표현한 작품들은 찬사를 받았다.

이런 논리에 근거해 탄생한 영웅인물들은 보편적으로 “높고(高)”, “크고(大)”, “완전(全)”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주인공의 이름을 “가오다취안(高大泉)”이라고 지은 문학 작품도 있음. 역주:全과 泉은 중국어 발음이 같다] 그 뜻인즉, 훌륭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고 있으며 세속적이지 않고 당에 충성하며 적에 대해서는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되는 인물은 비겁하고 흉악하며 교활한 이미지로 부각되었다.

긍정적인 인물은 성(姓)이 “가오(高)”나 “량(梁 역주: 선량하고 좋다는 의미)”이고 반면적인 인물은 성도 “댜오(   역주: 교활하다는 의미가 있음)”이다.

단편소설을 하나 예로 들겠다. 모 지역에 소금 부족이 매우 심각했는데, 한 젊은 엄마는 지하당에 “당비(黨費)”를 바치기 위해 어린 딸이 손에 쥐고 있던 한 가닥 콩꼬투리(소금에 절인 반찬)마저 빼앗는다. 식량부족으로 비쩍 마른 여자 아이는 반찬을 빼앗기자 서럽게 울음을 터뜨린다. 이 작품은 젊은 엄마를 가정과 자식에 대한 정보다 당을 우선 생각하는 인물로 만들었기에 당 문학에서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았다.

중공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의 모습은 종종 여성적인 특징이 전혀 없으며 큰 고생을 겪어 마음에는 증오가 넘치고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 애정에는 자산계급이라는 딱지가 붙어 중공 문학작품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거나 “혁명사업”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보조적으로 나타나곤 한다. 남(여)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흔히 적들에게 희생되고 이 때문에 주인공은 슬픔을 이기고 혁명에 뛰어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주인공이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은 혁명문학 작품에서 커다란 금기였다. 왜냐하면 일단 가정을 이루게 되면 자질구레한 일상생활이 “혁명가의 투지를 부식”시키고 중공 역시 “계속혁명”과 “끊임없는 혁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공의 어용문인들은 “주제 우선”의 창작 원칙을 신봉하기에 중공이 새로 필요로 하는 것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만족시켜주는 문학작품들이 대량으로 쏟아냈다. 이상은 단지 몇 가지 사소한 예에 불과하다.

3)당(黨)문학을 이용한 중공 주입의 몇 가지 특징 

당문화는 중국 문화 위에 달라붙은 일종의 부체(附體) 문화이다. 전통문화, 민간문화의 형식과 요소를 이용하는데 능숙한 중공은 이를 통해 선전 효과를 극대화하는 목적에 도달했다.

(1) 민족문화형식을 전면적으로 도용 

인류문화에 대한 중공의 태도는 지금까지 자신의 통치에 유리한 부분이 있다면 모두 가져다가 주저 없이 쓰는 것이다. 문학 방면에서, 고체시(舊體詩詞), 현대시, 각종 민요, 중단편소설, 장편소설, 장회(章回)소설, 산문, 화극(話劇 역주: 대화와 동작으로 이루어진 연극), 전통 희극 등은 모두 당문화의 내용을 싣는 매개체로 되었다. 중공은 그것을 “낡은 병에 새 술 담기”, “민족 형식에 사회주의 내용을 가미한 것”으로 미화했다.

이렇게 하는 데는 당연히 이유가 있다. 미(美)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 판단은 어느 정도 안정성이 있는 것으로, 장기간 형성된 습관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새롭게 시작하여 “새 병에 새 술을 담는 것”보다 사람들이 가진 미에 대한 고유의 가치 판단 습관을 이용해 당문화를 슬쩍 끼워 넣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민족적인 형식에 당문화의 내용을 담은 결과, 사람들에게 신선하고 신기한 느낌을 주면서도 중공을 선전하는 최대의 효과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시, 민요, 소설, 화극(話劇) 등을 감상하는 과정에 자신도 모르게 당문화의 포로가 되고 만다.

(2) 문학적 기교 활용 

비록 “당”은 문화(文化)의 반대어에 가깝고 “무력화”, “저속과 야만화”, “반(反) 문화”와 동의어나 마찬가지지만 “당”은 또 문화를 활용하는데 아주 능숙해 문화를 이용해 문화에 반대했다.

중공의 어용 문인들은 당문학의 선전효과를 높이기 위해 그야말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백묘(白描 역주: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수사를 가하지 않은 묘사), 대조(襯托 역주: 어떤 것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다른 것과 비교하는 것), 반전, 긴장감 조성, 공감대 형성, 기복, 심리묘사, 전형적인 성격, 개성적인 언어 등 동서양 고전문학 중의 성공적인 테크닉을 거의 전부 가져다 이용했다.

중공은 문예에서 “보급”을 중시했다. 그들의 손에서 나온 문학작품은 수준이 높지는 않았지만 주로 문화수준이 높지 않은 노동자, 농민 대중들을 상대했기 때문에 당문화를 주입하는 목적에 성공적으로 도달할 수 있었다.

(3) 금서(禁書)를 이용해 문화에 대한 갈증 강폭 

배고픈 사람은 무엇을 줘도 모두 맛있다고 느낀다. 중공은 어용 문인들의 손에서 나온 이른바 문학작품이라는 것들이 수준 높은 세계 문학작품들과는 전혀 비교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질투심이 강한 여자가 백설공주를 죽이려 했던 것처럼 중공도 정권을 탈취한 뒤, 계획적으로 좋은 서적들을 불태워 없애거나 읽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문화혁명 시기에는, 무릇 미(美)와 관련된 것이기만 하면 모두 “자산계급”의 딱지가 붙었기 때문에 문화에 대한 중국인들의 갈증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독주(毒酒)라도 마시려 했으며 당문화는 바로 이 틈을 타고 들어갔다.

(4) 반복을 통한 중독 

술은 사람의 생명을 유지함에 필수품이 아니다.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은 술맛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왜 어떤 사람은 술을 그토록 좋아해 술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가? 그것은 바로 중독 때문이다. 장기간 한 가지 문화 속에 잠겨있다 보면 사람들은 일종 기대심리를 갖게 되고 어느 한 문예작품이 이런 기대를 만족시켜 주면 마치 가려운 곳을 긁어준 것처럼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도 대부분의 경우 중독에 대한 만족감이다. 이 점을 안다면 미적 감각(美感)이란 것이 어떤 때는 비이성적이고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사람들의 미에 관한 가치판단 역시 조종될 수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중공 역시 이 점을 이용했다. “당”의 교조(敎條)는 자신들이 만든 구호나 노래, 그림, 비유, 이미지를 잘 포장한 후 각종 방식을 이용해 끊임없이 반복하고 강화하여 중국인들에게 일종 변이된 “미적 감각”을 억지로 만들어 주었다. “산적 두목의 시”라고 불리는 “마오쩌둥의 시”, 거칠고 천박한 “마오쩌둥 문체”, 제멋대로 갈겨 쓴 “마오쩌둥 서법(書法)”은 반복적으로 모방되고 숭배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들이 20세기 중국 예술의 최고봉이라고 했다. 오늘날 소위 “홍색 경전(紅色經典)”은 아직도 중국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으며 이는 중공이 장기간 고심하여 육성한 사악한 당 문예에 대한 민중들의 심리적 의존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4) “보이는 흑수(黑手)”에서 “보이지 않는 흑수”에 이르기까지 

중공 당문학(黨文學)을 투시해 보면 또 한 가지 해결할 문제가 있다. 중공이 정권을 잡은 후의 당문학은 문화혁명을 경계로 해서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는 1949년부터 문화혁명까지이며 2단계는 문화혁명이 끝난 후부터 현재까지다. 1단계는 “당”이 태엽을 조이고 죽자사자 문화의 명줄을 끊어놓았고 문예를 전횡하는 정치를 했으며 올가미를 단단히 조여 갈수록 범위가 좁아지는 일종 “수렴”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문화혁명이 끝난 후에는 “문학은 계급투쟁에 복무해야 한다”는 구호가 방치되었고 “금지구역을 돌파”하고 “사상을 해방”시켰으며 작가들의 창작조건에 대한 속박도 갈수록 느슨해져 마치 풀어주는 과정처럼 보인다. 현재 중국 문단은 미녀작가, “깡패문학(痞子文學)”, “하반신 작가” 등 정말이지 “해방”된 것처럼 보인다. 그럼 이런 상황 하에서 중공이 문학을 조종하고 이용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인구학에서는 일반적으로 25년을 한 세대로 본다. 1949년부터 1978년(중공 제11차 3중 전회)까지 29년이다. 1920년대 이전에 출생한 사람은 1949년 중공이 정권을 잡기 전에 이미 30이 넘어 세계관이 이미 형성된 상태였고 1978년에는 이미 60이 넘어 퇴직 연령이 지났다. 그때 각 분야에서 활약했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중공의 독즙(毒汁)을 먹고 자랐다. 바꿔 말하자면 1970년대 말에 이르러 당문화는 이미 기본적으로 확립되었다. 이에 중공은 책략을 바꿔 일부 영역에서 제한적이나마 뒤로 물러났다. 종전의 “보이는 흑수”에서 배후에서 “보이지 않는 흑수”로 변해 전체적으로 민중들에 대한 당문화를 “거시적으로 조정”하고 있다(물론 필요할 경우에는 “흑수”가 언제든 손을 뻗친다).

당문화가 확립된 증거는 “당”의 직접적인 지도를 기다리지 않고도 “사상 해방”을 겪고 “풀려난” 문학이 여전히 중공의 정치적인 필요와 완전 부합한다는 점이다. 문화혁명 이후의 유명한 상처문학과 반성문학도 문화혁명에 대한 해석은 중공의 정책과 궤를 같이 한다. 잘못을 범한 것은 린뱌오(林彪)와 사인방, “극좌사조”이고 “당”은 여전히 위대하고 광명하며 정확하며 용감하게 잘못을 시인했을 뿐만 아니라 잘못을 개선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뿌리를 캐보면 “당”이 진화론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당의 잘못”은 “봉건 유독(流毒)의 찌꺼기가 일어난 것”이라고 유도한 것이다. “의식의 흐름”에서 유동적으로 흘러가는 것을 흩뜨린 후 재편하여 “당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과거의 고통을 회상하며 오늘의 행복을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소시민들의 고달픈 생활이지만 이는 “당”을 대신해 사람들에게 “인생이란 원래 번뇌이며 운명이란 알 수 없는 것”임을 알려 더는 “당”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허물을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모두 사는 것이 쉽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확실히 쉽지 않으며”, “살아있기만 해도 좋고”, “쉽게 오지 않을 이런 좋은 시절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소와 풍자를 위주로 하는 문학작품은 사실상 다른 일종의 쓰레기 언어로 당의 쓰레기 언어에 반대하는 것으로 만약 “당”과 함께하지 않으면 세상에 불만을 품은 채 냉소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각종 음란물로 중국의 성윤리를 통제할 수 없게 만든 색정(色情)문학은 “당천하(黨天下)”에 사는 사람들에게 언론이 자유롭다는 가상을 준다.

오늘날 중국의 문화 환경은 극단적으로 복잡한 면모를 보인다. 때문에 오직 중공의 진면목을 진정 똑똑히 구별할 수 있어야만 복잡다단한 각종 가상에 미혹되지 않을 수 있다. 중공은 자신의 생존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으며 여기에는 최저한계선이 없다. 중공은 “무릇 적이 옹호하는 것은 우리가 반대하고 적이 반대하는 것이면 우리가 옹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공은 적이 반대하는 것도 반대할 수 있고 적이 옹호하는 것도 옹호할 수 있다. 적이 중공의 생존을 반대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중공은 호언장담, 거칠고 악랄한 말을 할 수 있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이나 달콤한 말도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주선율을 연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화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4개를 견지[역주: 4개를 견지한다는 것은 중공의 4가지 기본원칙으로 1)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견지, 2) 사회주의의 길 견지, 3) 무산계급독재(나중에 인민민주주의 독재로 변경) 견지, 4) 중국공산당의 지도 견지를 말한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주장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시간, 장소, 조건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레닌) 권력의 정상에 오른 후 그것은 “승자는 비난받지 않는다.”(스탈린)라고 말했다. 불안에 떨며 구차한 목숨을 부지할 때도 “강대한 적을 마주하고 적수가 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의연히 검을 뽑아들며 설사 쓰러지더라도 산이 되고 고개가 되겠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마치 숭고한 동기를 지닌 비극의 영웅인 양 가장했다.

“나는 반드시 역사에 대해 책임질 것이다.…. 나는 상대가 나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적이 이미 보검을 뽑았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시험 삼아 운기(運氣)하고자 하며 곧 나의 그 시대는 끝날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마침표를 찍어야 하지 않을까?”(《양검(亮劍)》)

“생존이란 무엇인가? 생존이란 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비루하거나 뻔뻔하거나, 비열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좋다.…. 풀을 먹는다고 인자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고기를 먹는다고 꼭 잔인한 것은 아니다. 나는 한 마리 늑대이며 반드시 늑대가 될 것이다. 나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늑대이며 선혈과 죽음은 내 생명의 원천이다.”(《늑대(狼)》)

“우리 당은 일관되게 시대와 함께 변해왔다.”: 법률의 외투를 걸친 늑대. | 에포크타임스

어느 시대의 문학이든 직접적이든 아니면 간접적인 방식으로든 그 시대를 반영한다. 위에 인용한 중국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통해 우리는 당문화가 단지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다양한 종류의 작품 속에 확산되어 이전보다 더욱 구별하기 어렵고 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중공 악당이 통제하는 문인들의 주입을 거친 후 중국인들은 중공의 가치관들을 받아들였고 증오를 숭고하게 여겼으며 살인방화가 정의로 변했고 폭군, 소인배, 도적떼와 폭도가 숭배 대상이 되었다. 잔인한 당성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관심을 갖고 사랑하는 선량한 본성을 대체했고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믿는 것이 우매한 미신으로 변했다. 선악의 표준이 거꾸로 뒤집혔고 문학은 정서를 도야하는 기능을 상실하고 중공이 제멋대로 자신의 죄를 미화하고 죄악을 덮어 감추는 보호막으로 변질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말한다면 사악한 당의 문인들은 분명 중공 살인의 공범이자 방조범이다.

4. 교과서를 이용한 당문화 주입

한 사람이 사물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주로 두 가지 요소로 결정한다. 하나는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이고 다른 하나는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 즉 사유방식이다. 현대인에 대해 말하자면 언론매체가 가장 중요한 정보출처이며 학교교육이 사유방식을 만들어내는 가장 주요한 힘이다. 때문에 중공은 당문화를 주입하면서 필연적으로 언론매체와 학생들의 교과서를 극히 중시하였다. 전자에 대해서는 이미 앞 절에서 언급했기에 여기서는 중공 교과서의 주입작용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949년 이전 중국의 교육은 국립, 사립과 교회에서 설립한 세 가지 방식이 있었다. 1949년 이후 모든 학교는 국유로 귀속되었고 중공 당국은 ‘당위원회 책임제’를 통과시키고 법규와 행정명령을 제정하는 등의 방식으로 학교권력을 장악했다. 조직을 청리하고 사상을 개조하는 방식으로 교직원들을 길들였고 교과서를 이용해 막 성장하는 청소년들을 체계적으로 세뇌했다. 마오쩌둥은 “(청소년은) 한 장의 백지와 같으니 아무런 부담이 없고 가장 새롭고 가장 아름다운 문자를 쓰고 가장 새롭고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라.”라고 말했다. 중공은 청소년들의 마음에 제멋대로 칠을 했고 교육은 중공이 당문화를 주입하는 중요한 진지가 되었다.

소위 ‘해방구(解放區)’ 교육을 시작하면서부터 중공은 체계적인 정치교과 과정을 수립했다. 정권을 획득한 이후 중공 교육부문은 점차 정치교육을 법제화하여 각급 학교에 강제로 실행하게 했다. 50년대 고교에 설립된 정치교과 과정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기초’, ‘사회발전사’, ‘중국혁명사’, ‘정치경제학기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운동을 하지 않을 시기에는 이런 교과과정이 대학 전체 수업시간의 10에서 20% 정도를 차지했다. 정치운동이 시작되면 이 정도 수업으로는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현저히 부족했다. 반우파 투쟁, 4청(四清)운동 등 운동, 정치학습, 보고회, 군사훈련, 공활(역주: 학생들을 공장에 보내 노동시키는 것), 농활 등 형형색색의 정치교육에 앞에 말한 강의를 더하면 전체 교과과정의 절반이상을 차지했다.

 

‘10년 대겁난(문화대혁명)’ 시기의 홍위병(紅衛兵) 증서. | 에포크타임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여전히 1966년 이전에 “자산계급과 지식인들이 우리 학교를 통치하고 있다”고 보았다. 1967년 중공 중앙은 《초등학교 무산계급문화대혁명에 관한 통지(초안)》을 제출하여 “초등학교 1학년부터 4학년 학생들은 마오 주석의 어록만을 학습해야 하고 글을 배우며 혁명가를 배우고 약간의 산수와 과학 상식을 배운다. 5, 6학년은 마오 주석의 어록, ‘마오쩌둥 3부작’과 ‘3대 기율과 8항의 주의’를 배우며, ‘16조’를 학습하고 혁명가를 배워야 한다.”라고 했다. 사실 이 역시 ‘교육 혁명’이란 시끄러운 연극의 작디작은 한 부분에 불과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10년 이상 진행된 전 인민에 대한 강제 세뇌는 사회도덕과 민족심리에 거대한 상처를 남겼다. 지금부터는 ‘개혁개방’이후 ‘정상시기’에 중공이 어떻게 학생들에게 당문화를 주입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1) 정치수업-일방적인 거짓말

(1) 수업시간이 많고 요구가 엄격

예전에 어린 학생들은 처음 배움을 시작할 때 청소하고 인사하는 예절부터 시작해 예악과 활쏘기, 말 몰기, 서예와 산수 등의 상식을 배웠다. 당시 사용하던 교재에는 그 자체로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서양 근대이후 아이들은 문화 과목 외에도 공민(公民) 과목이 있었으며 학습내용은 민주사회에서 공민의 권리와 의무였다. 그러나 중공은 교육을 계급투쟁의 도구로 만들어 교육의 목적을 인격이 건전한 개인이나 이성적으로 책임지는 공민을 육성하는 것이 아니라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르는’ 계승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가르치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교학(敎學)수단과 내용도 전혀 다르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이것은 개괄적인 말이고 사실 주입은 유치원부터 시작해 대학원까지 진행된다) 중국의 학생들은 줄곧 정치수업을 들어야 하며 수업시간도 많고 교과과정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요구가 엄격하다. 이는 동서고금에 전례가 없는 일이다.

각 단계마다 교과과정의 이름도 다르고 중점도 다르다. 초등학교 때는 ‘사상품덕(思想品德)’, 중학교에서는 ‘사상정치’, ‘사회발전사’, ‘국정교육(國情教育)’이라고 하고 고등학교에서는 ‘청소년 수양’, ‘철학상식’, ‘경제상식’, ‘형세임무’라고 하고 대학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철학’, ‘혁명사’, ‘사회주의 건설’, ‘법률상식’ 등이다. 이들 교과과정은 비록 명칭은 서로 달라도 종지(宗旨)는 하나인데 바로 “공산당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고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들 과정은 대략 전체 수업시수의 약 20%를 차지한다.

“공부를 잘해야 출세할 수 있단다!” | 에포크타임스

여기서 특별히 지적할 것은 이들 교과과정이 선택이 불가능한 필수과목, 핵심과목, 각종 시험의 필수 고시과목이라는 점이다. 어떤 진급 시험에서는 정치과목에서 불합격한 사람에게는 일률적으로 입학을 허락하지 않는다.

(2) 당문화를 ‘덕육(德育)’, ‘상식’, ‘원리’, ‘기초’로 분장

당문화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사람을 속이는 물건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이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자연스런 것이자 원래부터 있어왔으며 세상이 다 그렇게 여긴다고 가장할 필요가 생겼다. 이에 반인성적인 계급증오 교육을 ‘덕육(德育 역주: 한국의 도덕에 해당)’이라 부르고 상식에 반하는 것을 ‘상식’이라고 하며 왜곡된 이치를 ‘원리’라고 하고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을 ‘기초’라고 하여 마치 전 세계인들이 모두 이런 것들을 학습하는 것처럼 했다. 아무런 저항 능력이 없는 청소년들은 이런 허위적이고 왜곡된 세계관, 인생관을 완전히 받아들여 이때부터 협애하고 고집스럽게 변하며 모든 정상인들이 이렇게 문제를 사고한다고 여긴다. 공산중국이야말로 세계의 모범이며 걸핏하면 다른 관점을 ‘반동’, ‘찌꺼기가 떠오른 것’, ‘자기편을 해치려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고 헐뜯고 배척한다. 모 중학생이 사회발전사를 배운 후에 교사에게 물었다. “사회주의가 반드시 자본주의를 대체한다면 왜 자본가들은 역사의 조류에 순응하지 않나요, 그들은 정말로 그렇게 어리석은가요? 아니면 어리석은 척 가장하는 건가요?”

대학의 철학사는 마르크스를 경계로 마르크스 이전의 서양철학을 고전철학이라고 부르며 기계적 유물론 아니면 유심주의라고 하는데 전체적으로 아직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마르크스 이후를 현대철학이라고 하는데 전부 자본주의의 부패와 몰락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전통사상은 만약 합리적인 성분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 역시 변증법이거나 혹은 유물주의의 ‘맹아’ 혹은 옛사람들의 ‘천재적인 추측’이다. 각종 《철학사 참고자료》와 같은 종류의 책은 이런 결론에 따라 사료에서 알맹이를 제거하고 풍부한 역사를 ‘두 가지 노선’의 투쟁사로 재단해 버린다. 이런 철학을 배운 사람들은 거의 “마르크스와 레닌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세상은 계속 어둠속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하지만 기왕에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이 영원한 진리를 발견했다면 왜 다른 책들은 모두 태워버리지 않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3) 중공의 가장 특징적인 수업내용-시사정치

중공은 원칙이라곤 전혀 없는 깡패당으로 그 입장과 원칙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설사 형세를 바짝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꼭 새로 발생한 어느 사건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사정치’ 교육은 이런 곤란한 문제를 해결해준다. 대학입시와 다른 대형 고시 중에는 늘 일정한 비율(보통 10%)로 시사정치와 관련된 내용이 출제되어 학생들에게 중공 당국의 해석에 따라 답안을 작성하도록 강요한다. 2000년 대학입시 정치문항 중에는 파룬궁을 비방하는 답안을 고르는 문제도 있었다.

(4) 증오와 억지 주입해 정치적 무관심 조성

인권(人權)이란 한마디로 백성들의 기본적인 권리이다. 그러나 오랜 주입을 통해 절대다수 중국인들의 눈에는 ‘인권’이란 단어는 폄하하는 뜻이 있는 단어이거나 최소한 의심스런 단어로 여겨진다. 이 말을 들을 때 사람들의 첫 반응은 바로 “말하는 사람이 정치적 목적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닌지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공은 청소년들에게 판별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갓난아이부터’ 증오교육으로 일관한다. 1999년 이후에는 파룬궁을 증오하는 내용을 각급 학교교재에 대량으로 집어넣었다. 인민교육출판사에서 2003년에 출간한 고등학교 3학년 ‘사상정치’ 제4과에는 적나라하게 파룬궁을 비방하는 ‘교학내용’을 담았다. 인민교육출판사에서 2003년 11월 제3판 《사상품덕(思想品德)》(제10권) 12과는 전문적으로 류쓰잉(劉思影)의 입을 통해 대륙 초등학생들에게 ‘천안문 분신자살’ 사기극을 선전해 증오를 선동할 뿐만 아니라 모든 초등학생들에게 파룬궁을 비방하고 증오하는 것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했다. 매우 많은 학부모들은 스스로 중공의 박해정책이 옳다고 여기진 않지만 순진한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아이와 이 사건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좋은 마음이 뜻밖에도 아이들로 하여금 아무런 보호도 없이 중공 일언당(一言堂)의 선전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만든다.

CCTV ‘초점방담’에 방송된 천안문 분신자살 사기극 | 에포크타임스

앞에서 인용한 직접적으로 어떤 결론을 주입하는 제목 외에도 정치 시험 속에는 반드시 자신의 사유를 왜곡하지 않으면 정확한 답안을 제출할 수 없는 일부 문제들이 있다. 오랜 동안 이런 식으로 훈련을 받은 후에 학생들은 자신의 정상적인 논리사유에서 ‘벗어나’ 출제자의 변이된 논리방식으로 들어가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렇게 육성된 학생들은 완전히 이런 사악한 논리 방식을 습득하여 ‘좌파 몽둥이(左棍)’나 ‘분노청년(憤青)’이 되거나 혹은 이런 추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아예 포기하고 일종 ‘인격 분열’ 상태에 만족한다. 이들 학생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안을 적지만 이때부터 ‘철학’, ‘인생관’, ‘정치’ 등에 대해 극심한 혐오와 냉담을 보이게 되고 결국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에만 관심을 갖고 공중 의식이라곤 전혀 없는 사람이 된다.

(5) 정치수업은 절대 늦추지 않아

최근 중공 교육부는 일부 과목 교재 편찬에 대한 통제를 서서히 완화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치과에 대해서는 절대로 늦출 수 없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6.4 천안문 민주화운동’ 이후 열린 매 차례 대학 공공정치과목의 중대한 내용 수정은 중공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의 토론과 비준을 거쳐야만 한다. 2004년 봄에 나온 ‘고등학교 사상정치교과표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고등학교 사상정치 과목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과 ‘3개 대표’ 중요사상의 기본 관점을 교육하고 학생들을 인도하며 변증유물주의와 역사유물주의의 기본관점과 방법을 깨닫게 하여 현대사회생활에 참가할 능력을 착실히 향상시키고 점차적으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공동이상을 수립하며 정확한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초보적으로 형성하여 평생토록 사상정치소질을 발전시키고 다지는 기초가 되게 한다.”

2) 역사수업-자신을 속이고 남을 기만

(1)역사는 정치의 분과로 전락

역사의 거울에 비춰보면 흥망을 알 수 있다. 세계의 각 문명국가들은 모두 대량의 사료(史料)를 보존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풍부한 교훈을 얻을 수 있고 개인의 입신, 처세 및 민족의 발전에 소중한 교훈을 제공한다. 자신의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마치 기억이 상실된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주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중공의 역사는 그리 영광스럽지 못하며 진실한 역사는 공산당의 큰 적이다. 중공은 통치 합법성을 논증하기 위해 반드시 역사 해석권을 독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용학자들은 혼신의 노력을 다해 중국 역사를 ‘발전 5단계’라는 허황한 틀 속에 끼워 넣고 ‘역사는 공산당을 선택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중공이 만든 중국사 교재를 통독할 때 받는 인상은 바로 농민 전쟁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진승(陳勝), 오광(吳廣)에서부터 중국인민들은 2천년이 넘는 동안 역사의 진리를 장악한 혁명정당이 출현해 도탄에 빠진 인민들을 구원하길 눈이 빠지게 기다려왔다는 것이다. 결국은 ‘10월 혁명의 대포소리’와 함께 공산당이 등장한다.

사실은 인류 역사의 5단계 발전이란 것은 순전히 허구이며 중국 역사에서는 더더욱 타당하지 못하다. 만약 중국이 전국시기부터 봉건제로 진입했다고 한다면 그럼 진시황이 봉건을 폐지하고 군현을 설치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공자는 “나는 주(周)를 따른다”고 하면서 6개 나라를 유세하며 삼대(三代)의 예악제도를 회복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중공의 눈에 이는 ‘노예소유주 계급’의 대변인으로 보인다. 그러면 왜 공자의 유가사상이 ‘봉건시대’의 정통사상이 되었는가? 황당하기 그지없고 제멋대로 지어낸 말이다. 이런 체계는 비판하자고 하면 온통 허점투성이이며 중공은 일찍이 25사를 태워버리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2) 진실한 역사를 은폐 왜곡

중공 교육부에서 역사교재를 편찬하는 지도원칙은 다음과 같다.

‘유물사관’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전부 가르치지 않고 공산당의 추한 악행도 전부 가르치지 않으며 역사 속의 성현군자나 명군 재상은 선별적으로 강의하되 강의할 때는 반드시 그 ‘역사적인 제한성’을 지적해야 한다. ‘반동계급의 죄악’은 크게 중시해야 하고 ‘농민 기의(起義)’를 중시해야 한다. 공산당의 ‘찬란한 역사’는 크게 중시해야 한다.

 

중공의 역사서에서도 맹자를 언급하지만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자는 남을 다스리고 힘을 수고롭게 하는 자는 남에게 다스림을 당한다(勞心者治人,勞力者治於人 역주: 맹자 등문공 상에 나오는 문장)”는 말을 인용하여 이것이 ‘착취계급’의 본성임을 강조한다. 국민당을 언급하면 그들이 “항일에는 소극적이고 반공에만 적극적”이었다고 비난하지만 사실 진정하게 항일투쟁을 한 것은 바로 국민당 정부였다. 중공은 스스로 “1할은 항일, 2할은 국민당을 상대하고, 나머지 7할은 자신을 발전시켰다.”라고 한다. 기독교를 말할 때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가르침을 언급하지 않고 ‘종교전쟁’과 ‘종교는 식민주의의 도구’라는 것을 강조한다. 자본주의 국가를 언급할 때는 ‘자산계급 민주주의의 허위성’과 ‘자본주의 경제위기의 내재적 모순은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최근에 들어와 갈수록 많은 청년 학생들이 중공의 역사왜곡과 날조를 인식한 후 자신의 독서와 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상을 알고자 한다. 그러나 이전에 중공의 사악한 사관으로 주입당한 것들을 근본적으로 돌파하기가 아주 어렵다. 근현대사 방면에서 중공은 사료를 독점하고 언로를 봉쇄했다. 현재 중국대륙에서는 중공이 나타난 이후의 진정한 역사를 전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 중공이 역사를 체계적으로 뜯어 고쳤기 때문에 중국 역사의 진상을 알려면 단순히 중공이 구체적인 사건에서 날조한 거짓말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중공의 이론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인류문명사의 관점에서 공산 사령이 인간 세상에 화란을 끼친 근 1세기의 역사를 보아야 한다. 바로 이 방면에서 《9평 공산당(九評共產黨)》이란 책은 우리에게 아주 좋은 범례를 제공한다.

3) 어문(語文)수업-즐거움 속의 속임수

(1) 문장 선택

학생들에게 당문화를 주입하는 방면에서 만약 정치교과가 경극에서 흰 얼굴로 분장한 악역이라면 어문과목은 붉은 얼굴로 분장한 충신역이다. 정치교과가 질풍과도 같이 강제로 집어넣는 주입이라면 어문과목은 봄바람에 가랑비 내리듯 부드러운 주입이다. 서로 방식은 다르지만 목적은 동일하다.

초등학교 중국어 교과에서 선택하는 문장은 중공 당 두목의 문장과 그들에 관한 문장이 일정한 비율을 차지한다. 왕얼샤오(王二小), 류후란(劉胡蘭), 장제(江姐), 추사오윈(邱少雲), 둥춘루이(董存瑞), 황지광(黃繼光), 랑야산(狼牙山)의 5장사 등 중공의 소위 ‘영웅인물들’도 빠지지 않는다. 중공의 계급투쟁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어문과목에서는 동서고금의 피압박계급을 긍정적으로 표현해야 하고 거의 정형화된 지주, 자본가 등이 그 사이에 들어간다. 서양국가에 관한 문장에서는 ‘자본주의 찌꺼기’의 특징을 부각시켜야 한다. 물론 세계 명작은 선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중공의 교조와 어울리는 문장을 선별해야 한다. 마오쩌둥이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홍루몽(紅樓夢)》을 인용했기 때문에 중학교 교재에 ‘호로승(葫蘆僧)이 호로 안건(葫蘆案)을 판단하다’는 문장이 인용되어 봉건 통치계급의 이기적이고 잔혹하며 인명을 경시하는 것을 드러냈다.

중학 어문교과에 가장 많이 수록된 것은 마오쩌둥과 루쉰(魯迅)의 문장이다. 마오는 ‘자유주의에 반대한다(反對自由主義)’고 말했고 루쉰은 5천년 역사책에는 온통 ‘사람을 잡아먹는다(吃人)’는 두 글자뿐이며, ‘물에 빠진 개를 심하게 때려야 하고(痛打落水狗)’, ‘페어플레이는 마땅히 시행을 늦춰야 한다(費厄潑賴應當緩行)’고 말했다. 이들 문장은 대부분 외워야 한다.

(2) 교사의 교수법

이들 문장의 의미가 아무리 간단하고 명확할지라도 어떤 책이든 모두 다양한 방식의 해독이 가능하다. 이런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중공 교육부서에서는 어문 교사가 문장에 나오는 글자를 풀이한 후에 다시 문장의 ‘중심사상’을 짚어주어 학생들에게 당문화의 언어를 반복하도록 강요했다. 예를 들어 《꼬마 음악가 양커(小音樂家揚科)》는 초등학교 5학년에 나오는 문장으로 ‘중심사상’은 ‘낡은 사회착취제도의 죄악’이며 교사는 학생들에게 “가난한 사람의 이상은 실현할 수 없고 설사 재능이 있더라도 매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시키고”, “학생들에게 착취제도에 대한 증오와 노동인민을 동정하는 사상정감을 유발해야 한다.”

(3) 입시를 통한 유도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시험은 각급 교육의 지휘봉이다. 입시 출제 경향은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아주 큰 유도 작용을 미친다. 다시 말해 교학의 중점이 시험문제 출제에 맞춰진다는 것으로 시험문제는 직접적으로 중공 정책의 통제를 받는다. 대학입시 문제를 예로 들어보면 1958년 전국 시험 제목은 “대약진 운동이 인심을 격동한 한 막”이었고 1977년 베이징 시험 제목은 “이 전투에서 나의 1년”, 상하이의 제목은 “강령을 잡고 나라를 다스리는 날들”이었다. 최근 작문 제목 중에는 이렇게 적나라한 당문화 제목은 줄었지만 대신 비교적 은폐된 당문화로 대체되었다.

입시의 각급교육에 대한 유도 작용은 절대적이다. 중공은 입시 출제권을 통제하여 학생들의 학습시간 안배와 학습방향을 지배한다. 중공이 강제로 주입하려는 것을 고시의 중점으로 만들어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내용을 공부하는 것보다 십 몇 배 심지어 몇십 배의 노력을 들여 당문화의 내용을 학습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당문화는 마치 칼로 새긴 것처럼 학생들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4) 최근 추세

얼마 전까지 초등학교 학생들의 인생 첫 수업은 바로 ‘마오 주석 만세’, ‘나는 북경 천안문을 사랑하며 천안문 위에 태양이 오른다.’였다. 지금의 교과서는 많이 ‘진보’해 초등학교 1학년 하권에 가서야 비로소 쑥스러운 듯 ‘덩샤오핑 할아버지가 나무를 심다’가 나온다. 두보의 “멀리 떨어진 불쌍한 어린아이들은 장안에 있는 애비를 기억 못하리(遙憐小兒女 未解憶長安 역주: 두보의 시 달밤[月夜]의 일부)”라는 구절은 시인이 직접적으로 아이들에 대한 상념을 쓰는 대신 반대로 아이들은 애비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표현을 통해 참신하고 더 깊은 맛이 난다.

현재 어문 교과서는 많은 문장이 모두 이런 기교를 이용해 만든 것이다. 초등학생들이 ‘4개 위대’를 외칠 필요는 없지만 ‘고향친인들(鄉親們)’에 나오는 “물을 마실 때 우물을 판 사람을 잊지 않듯 늘 마오쩌둥 주석님을 생각한다(吃水不忘挖井人,時刻想念毛主席).”는 오랫동안 기억한다. 중공은 전에 스스로 ‘세계 혁명의 중심’이라고 고취했으나 지금은 다음 일화를 이야기한다. “유학생이 해외에서 방황하다 곤경에 처했다. 외투를 벗어 국수와 바꾸고 싶었지만 서양인 사장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학생의 목 위에 있던 오성홍기를 보더니 ‘사장의 눈빛이 밝게 빛나며’ 기어이 국수와 홍기를 교환하고자 했다. 그러나 유학생은 정의롭고 늠름하게 손을 뿌리치며 떠났다. 사장은 이에 큰 감동을 받았다.” 정치과목에서는 ‘하나의 중국’, ‘무력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설명하지만 어문과목에서는 대만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고 말을 꺼내면서 마지막에는 교사가 “거기(북경) 어린이들도 너희들이 그들과 함께 놀기를 바라고 있을 거야.”라고 말하면서 요점을 정리한다.

최근 새로 출판된 초등학교 어문 교재는 2권부터 시작해서 체계적으로 ‘붉은 스카프’, ‘10월 1일―조국의 생일’, 이야기를 통한 중공의 대만정책, 민족정책, 외교정책, 경제정책 등을 설명하여 사상이 단순한 아이들에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량의 당문화 내용을 흡수하도록 한다.

현재의 어문교과서에는 시대적 정취가 묻어나는 작품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살펴볼 것은 어문교과는 여전히 당문화를 주입하는 데에서 상당히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첫째 당 두목의 문장이 아직도 일정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둘째, 매우 많은 문학작품들과 함께 당문화의 문장 역시 자연스럽게 명문장의 지위를 획득하여 ‘경전화’되었다. 학생들이 이런 당문화 문장으로 문법과 수사를 배울 때면 그 내용이 이미 자연스럽고 당연하며 심지어 필연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어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셋째, 현행 입시교육에서 기술을 가장 중시하는 경향은 학생들의 주의력을 그 부분에 집중하게 만들어 문장 내용에 대해서는 흥취가 없거나 혹은 탐구할 능력이 없게 되었다.

물론 어문과목은 다른 교과과정과 협력하여 작용을 발휘하기에 어문과목 자체는 어느 정도 ‘탈정치화’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당문화의 강대한 흡인력과 고도의 기만성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가령 ‘헌법에 인권이 삽입되고(人權入憲)’, 장쩌민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림(以德治國)’을 제출하며 후진타오가 ‘조화사회’를 말하는 것처럼 어쩌면 언젠가 ‘유불도의 정화를 견지하고 발양하자’가 당장(黨章)과 헌법에 들어가 계속해서 중공의 ‘위대하고 광명하며 정확함’과 ‘시대와 함께 변화’하는 데에 이용될지도 모른다.

중공 교육체제하에서 지리, 음악, 자연과학 등 다른 교과과정은 모두 마찬가지로 당문화를 주입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여기에서는 상세한 내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은 당문화 교육이 가장 해로운 것은 주입하는 구체적인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주입이 학생들이 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인지(認知) 틀이 된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이런 인지 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후부터는 이 틀로 처리할 수 없는 정보는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태도를 보이거나 또는 이 틀로 해석할 수 없는 현상은 보아도 못 본 척하거나 또는 중공이 주입한 왜곡된 사유방식을 이용해 이들 정보를 가공하고 최후에는 중공통치에 유리한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왜 오늘날의 중국인들이 한편으로는 매우 사상이 있고 언변에 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극단적으로 협애하고 고집스러우며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은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 일종 ‘선택적인 무지(無知)상태’에서 만족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

중국에는 자고로 ‘모든 것이 다 하품이며 오직 책을 읽어 과거에 응시하는 것만이 귀하다(萬般皆下品,唯有讀書高).’는 말이 있다. 이는 사회적으로 교육을 몹시 중시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당수의 농촌 아이들은 대학 입시를 치르는 것이, 군대에 가는 것을 제외하고, 농민의 신분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중공은 일체 국가 자원을 장악하면서 아이들에게 교육을 받지 않으려면 그럼 당문화의 교육만 받으라고 한다. 수십 년 동안 중공은 원래 천하의 공기(公器)였던 교육을 자신의 사사로운 재화를 파는 작업장으로 변질시켜 버렸고, 중국인들은 대대로 당문화 교육의 쓴 열매를 억지로 삼켜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