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 사임, 최단명 총리 기록… 242조 연기금 손실 오명

최창근
2022년 10월 22일 오후 3:23 업데이트: 2022년 10월 22일 오후 4:14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10월 20일 전격 사임했다. 9월 6일 공식 임명된 후 44일 만이다.

영국 역사상 ‘최단명’ 총리로 기록됨과 동시에 정책 실패로 242조원 연기금 손실을 끼쳤다는 오명을 쓰게 됐다.

10월 20일 리즈 트러스 총리는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영국 총리 공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임을 공식 발표했다. 그는 “나는 경제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기에 총리에 취임했다. 내가 총리로서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임한다는 뜻을 국왕께 전했다. 다음 주 후임자가 결정될 때까지 총리직에 머물겠다.”고 밝혔다.

트러스의 사임 원인은 경제 정책 실패이다. 재원 마련 계획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른바 ‘부자 감세’를 밀어붙이다 역풍을 맞고 철회했으나 막대한 연기금 손실을 초래했다.

9월 23일 보수당 내 사전 교감, 재정 대책 없이 450억 파운드(약 72조 원) 규모 감세안이 포함된 예산안을 발표했다. 소득세 최고세율 인하(45%→40%), 소득세 기본세율 인하(20→19%), 법인세율 인상 계획 철회, 주택 구매 세금 인하 등이 골자였다.

트러스 총리는 세금을 줄여주면 투자로 이어져 경제 전반이 성장한다는 ‘낙수(洛水) 이론’을 신봉했고 이를 정책에 반영했다. 문제는 유동성 과잉 상태에서 재정 긴축을 실시하고 있는 세계적인 흐름에 반한다는 것이었다. 영국 보수당 정부의 정책과도 엇박자를 냈다.

영국 중앙은행(BOE)은 지난해 12월 0.15%포인트 인상(0.1%→0.25%)을 시작으로 올해 9월 22일 2.25%포인트까지 꾸준히 기준금리를 인상해왔다.

이 속에서 ‘역진(逆進)’으로 평가받은 트러스의 경제 정책은 혼란을 불렀다.

감세안 발표 후 영국 파운드화 가치, 영국 국채 가격이 동반 폭락했다. 재원 마련이 불확실하다는 우려 때문에 영국 파운드화는 한때 달러와 1대1에 가까울 정도로 폭락했고 영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가능성까지 제기됐다.

영국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지자 투자자들은 빠르게 영국 국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국채 매도세가 강해지고 가격이 급락하자 투자자들은 더 높은 국채 이자율을 요구했고 영국 대출금리는 치솟기 시작했다.

감세안 발표 전날 9월22일 3.5%였던 영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9월 28일 3거래일 만에 4.6%로 인상됐다. 20년물과 30년물 금리는 각각 모두 3%대 후반에서 같은 날 5%를 돌파했다.

여파는 영국 연기금으로 파급됐다. 국채에 레버리지 투자를 한 영국 연기금 마진콜(추가 증거금 요구), 디폴트(채무 불이행) 위험이 급상승했다.

9월 27일, 국제통화기금(IMF)은 영국 정부에 “고소득자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한 감세가 불평등을 심화할 것이며 영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에서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진 현시점에서 크고 목표 없는 재정 패키지를 권장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9월 28일, 영국 중앙은행은 금융 시장 혼란 대응책으로 국채 무제한 매입이라는 일종의 ‘양적 완화 정책을 사용했다. 이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치솟는 물가는 생활고를 유발했다. 영국 전역 50개 도시에서 생활고에 대한 해결책을 촉구하는 동시다발적 시위가 열렸다.

영국 여론조사업체 ‘유고브’에 따르면 9월 28일~29일 기준 노동당 지지율은 54%로 21%를 기록한 집권 보수당에 33%포인트나 앞섰다. 당장 조기 총선을 치른다면 보수당이 대패한다는 결과였다.

위기 속에서 10월 3일, 리즈 트러스 총리는 쿼지 콰텡 재무부 장관을 앞세워 감세안을 전면 철회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때늦은 대응이었다.

10월 13일, 영국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JP 모건은 보고서를 통해 “트러스 총리의 대규모 감세 정책이 촉발한 국채 금리 급등으로 영국 연기금 손실이 최대 1500억 파운드(약 242조 원)에 달할 것이다.”라고 추산했다.

10월 14일 트러스 총리는 시장 혼란 책임을 물어 콰텡 재무부 장관을 경질했다. 후임 재무부 장관 제러미 헌트는 트러스 총리의 경제 정책을 대부분 폐기했다. 이로서 트러스는 정치 생명에 치명상을 입었다.

10월 19일 측근 수엘라 브레이버먼 내무부 장관이 사퇴하며 총리를 압박했다. 트러스는 이날까지도 “나는 싸우는 사람이다. 사퇴는 없다.” 공언했지만, 결국 10월 20일 사임을 발표했다.

트러스 총리는 ‘역대 최단명 총리’라는 오명을 남기게 됐다. 직전 기록은 19세기 초반 취임 119일 만에 사망한 조지 캐닝(George Canning)이다.

트러스는 영국 사상 3번째 여성 총리로서 ‘제2의 마가렛 대처’를 표방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철의 여인’이라 불린 대처 전 총리는 11년 208일간 재임하며 보수당 장기 집권 시대를 열었다.

트러스 총리 후임으로는 보리스 존슨 전 총리, 제러미 헌트 재무부 장관, 벤 월리스 국방부장관, 페니 모돈트 보수당 원내대표과 더불어 지난 보수당 당수(대표) 경선에서 트러스와 마지막 경합을 벌였던 리시 수낵 전 재무부 장관 등이 거론된다. 차기 총리는 늦어도 10월 28일 결정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