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중공의 ‘항미원조’ 한국전쟁, 승자는 누구인가

스산(石山)
2020년 10월 23일 오후 4:21 업데이트: 2024년 02월 19일 오후 3:18

중국은 최근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한미 양국이 함께 겪은 고난의 역사”를 언급한 BTS 리더 RM(본명 김남준)의 발언을 문제 삼아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중국 누리꾼들의 빗나간 민족주의”라는 분석이 나오지만, 이들의 도 넘은 발언을 포탈과 SNS에 퍼뜨리며 공론화해 비난여론을 부추긴 중국 공산당 관영매체들의 작용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왜 BTS 발언을 문제 삼았는지,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하는 중화권 유명 평론가의 칼럼을 에포크타임스 한국 독자들에게도 소개합니다. -편집부


중국 공산당(중공) 총서기 시진핑이 ‘항미원조’ 기념일을 맞아 미국에 대항하자는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지난 19일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 항미원조 70주년 특별전시회에는 시진핑을 비롯해 중공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전원이 참관했다.

중국에서는 한국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맞서 조선[북한]을 도움)라고 부른다.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이 공식적으로 한반도에 진입해 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운 지 70년이 지났다. 시진핑은 한국전쟁이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저항하기 위한 전쟁”이라며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은 휴전협정으로 끝났다. 시진핑은 “승리”라고 했지만, 전쟁은 3.8선에서 시작해 3.8선 부근에서 끝났다. 양측에서 군인 100만명, 민간인 300만명이 사망했다. 양측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피해상황만 보면 무승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시진핑이 말하는 “위대한 승리”는 다분히 정치적인 발언이다. 진정으로 평화를 지켜낸, 인도주의적인 의미가 아니라 항미 정신을 부추기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담겨있다. 하지만, 전쟁에는 늘 승자와 패자가 나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승자는 누구인가.

“그 전쟁은 무승부가 아니었다”

2013년 7월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의 한국전쟁기념비 앞에서 행한 한국전 휴전 60주년 기념연설에서 말했다.

“우리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 전쟁은 무승부가 아니며 승리한 것이다.”

“5천만명의 한국 국민들은 자유와 활기가 넘치는 민주제도 아래에서 생활하고 있고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활력이 넘치는 경제체가 됐다. 압박과 빈곤에 시달리는 북한과 비교하면 그 자체로 이미 승리이다.”

기념식에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참석해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은 승자는 한국이며 미군 참전용사들은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선, 성공한 국가를 통해 감동과 감격을 선물 받았다는 것이다.

필자는 한국 방문 당시 서울 용산구의 전쟁기념관에서 한국전에 참전한 유엔군 사망자 전원의 명단이 새겨진 비석을 봤다. 또 서울의 거리에는 큰 현수막이 걸려있었는데 현수막에는 모든 참전국의 국기가 그려져 있었다.

한국인들은 전쟁으로부터 삶의 터전을 지켜냈다. 가장 직접적인 승리자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현재 한국에는 5천여만명의 국민들이 중진국을 넘어선 수준의 생활을 누리고 있다. 1인당 국민총소득은 3만 달러를 넘어섰다.

한국전쟁의 또 다른 승리자들

한국전쟁에는 승리자들이 더 있다. 하나는 중화민국(대만)이다. 대만은 파병하지 않았지만, 유엔군에 붙잡힌 중공군 포로 1만명은 대만행을 선택했다. 대만은 참전 없이 병력이 늘어났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전쟁이 대만에 전해준 평화다. 당시 대만의 국민당 정부는 50만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했으나 중공과 전쟁(국공내전) 패전부대였기에 사기가 약했다.

반면 중공은 대만섬 공격을 위해 푸젠성과 광둥성에 최소 4~5개의 병단이 도하작전 준비 중이었는데 이들은 주력부대였으며 사기가 매우 높았다. 중공이 소련과 담판해 공군, 해군 지원만 이끌어내면, 중공군은 바로 대만해협을 건널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미군 제7함대가 대만 해협에 진입했다. 소련은 물러섰고 중공의 ‘대만 해방’ 꿈은 물거품이 됐다. 인구 2천여만명의 대만은 중공의 위협에서 벗어나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대만은 현재 1인당 국민총소득이 2만 7천달러다. 전쟁을 피하고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점에서 대만은 작은 승리자다.

세 번째 승리자는 구소련이다. 소련은 1946년부터 북한을 도와 인민군부대의 3개 사단과 1개 연대를 편성했으며, 무기를 제공하고 각 사단에 소련 고문위원 15명을 파견했다.

사실 소련은 한국전쟁의 최대 승리자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으로 미국의 시선을 유럽에서 동북아시아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그 사이 소련은 유럽에서 여러 압박을 완화할 수 있었다.

이후 냉전 구도를 형성하며 중국-북한으로 이어지는 우방지역을 형성한 소련은 미국과 함께 양극을 이루며 국제사회에서 미국과 비슷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소련은 많은 무기를 판매했는데 주된 구매자는 중국이었다. 중국은 전쟁을 해야 했고 현대화된 무기가 필요했는데 소련으로부터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중공은 소련으로부터 60개 사단 규모의 무기와 군사장비를 구입하고 자동차, 탱크, 항공기도 구입했다. 비용은 소련으로부터 10억 루블(당시 기준 약 3~4억 달러)을 빌려 지불했다. 당시 중국의 국내총생산 10억 달러의 30~40%에 육박하는 금액이다.

하지만 소련이 중공에 판매한 군사장비는 대부분 2차대전 장비로 시대에 뒤처진 것들이었다. 소련은 막대한 차익을 남겼다.

네 번째 승자는 김일성이다. 앞서 승자들은 모두 국가였지만 김일성은 개인 혹은 한 가문이라 할 수 있다.

김씨 일가는 지금까지 3대째 집권하고 있다. 평범한 집권이 아니라 봉건왕조식 집권으로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김씨는 북한에서 백두산 혈통으로 불린다.

김일성은 일본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과 함께 백두산 일대를 비롯한 만주 지역에서 항일 빨치산 운동을 벌였지만,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소련으로 물러나야 했다.

이후 소련은 1940년에 일본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모든 항일 무장세력들의 일본과 전쟁을 차단했다. 1945년 8월 조선이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되자 소련은 항일 무장세력 출신들인 빨치산파를 도와 북한에서 공산정권을 수립했다.

여기서 해방 후 북한에 있던 정치 파벌들인 빨치산파, 소련파, 연안파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다.

바로 앞에서 먼저 언급한 빨치산파는 1930년대 북만주 지역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소련영토로 들어가 소련군을 지원했다. 대표적 인물이 김일성이다.

소련파는 대부분 소련에 귀화한 사람들로 소련말에 능통했으며 소련군의 북한 진입 시 함께 들어가 활동했다.

연안파는 중공 지도부가 있던 옌안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세력이다. 이들은 중공이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때, 중공 팔로군에서 간부 역할을 했다.

김일성은 1950년대 당내 숙청을 통해 소련파와 연안파들을 처형, 투옥하며 축출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소련이나 중국으로 도망쳤다. 이후 북한에는 김일성 일가만 남게 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당내 숙청은 공산정권 국가에서는 늘 일어나는 일이다. 다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마지막까지 남았을 뿐이다. 그는 한국전쟁의 또 다른 승자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마오쩌둥의 위험한 도박

마지막 승자는 중공이다. 당시 중공 지도자 마오쩌둥은 위험한 도박을 했다. 막 세계대전을 마친 미국이 중국을 침공하거나 소련과 대결하지는 않으리라 보고 한국전쟁에 뛰어들었다.

여기서 마오쩌둥이 파병한 부대의 성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차대전 말, 일본의 주력부대는 만주를 이탈해 태평양 전선이나 일본 본토로 돌아가 미국과 전쟁을 준비했다. 만주에 주둔하던 관동군은 일본군에서 가장 강한 부대였지만, 이 시기에는 주력부대가 빠져나간 2군에 가까웠다. 하급 사관과 병사 대부분은 조선인이거나 대만 출신이었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9일 만주에 진입했고, 일주일 뒤인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만주에 남아있던 50만명의 관동군은 무장해제하고 투항했다. 그중에는 조선인 병사들이 많았다.

이들 중 일부는 북한이나 국민당 군대로 들어갔지만, 대다수는 중공군으로 편입됐다.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이 관동군 소위였는데 그는 국민당 부대에 편입됐다가 국공내전의 만주 최후결전인 ‘요심전역’에서 포로로 잡혀 풀려난 뒤 한국으로 돌아가 한국군에 합류했다.

투항한 조선인들은 중공군으로 여러 곳으로 흩어졌지만, 상당수가 중공군 제4 야전군에 배치됐다.

필자는 어린 시절 조선족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1980년대에 한국(남한)에 가겠다며 “할머니가 살아계신다”고 했다. 한국인 할머니가 한국에 생존하고 있음은 그 친구도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의 부친은 중공 제4 야전군에 편입된 조선인 병사였다. 조선에서 일본의 관동군으로, 다시 중공군으로 끌려간 그의 부친은 중국에 눌러앉았고, 친구는 반평생 조선족으로 살다가 할머니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이었다.

그 친구는 중공군 제4 야전군에 한국 국적자 혹은 조선족이라 불리는 군인이 10~20만명은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4 야전군에 조선인이 그만큼 많았다는 이야기다.

중공은 김일성에게 제4 야전군의 3개 사단, 약 4만 병력을 지원했다. 국공내전을 경험한 팔로군과 관동군 출신으로 구성된 이들은 한반도 남쪽으로 진격(남침)하며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는 부대가 됐다.

수십만 명의 조선인(한국인)들끼리 총칼을 겨누게 한 장본인이 마오쩌둥이다.

기밀이 해제된 구소련 비밀문서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서유럽을 공격하라고 부추기며 군사지원을 약속했다. 마오쩌둥은 미국이 세계대전을 피하려 한다고 예측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미국과 세계대전을 벌이고 싶어 했다.

그는 미군을 중국 본토로 끌어들여 미국 제국주의를 ‘인민전쟁’의 바닷속에 빠뜨리려 했다. 인민전쟁은 마오쩌둥의 전쟁이론 중 하나다. 인민의 도움으로 적군을 상대한다는 것으로 모든 인민을 전쟁에 동원하겠다는 의미다.

마오쩌둥은 핵전쟁도 불사했다. “중국은 4~5억 인구가 있는데 절반이 죽어도 두렵지 않다”고 했다. 스탈린마저도 마오쩌둥이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마오쩌둥은 집단학살을 즐기는 살인광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무적의 영웅으로 여기며 자신의 전술이 최강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미국은 마오쩌둥의 예측대로 또 한 번의 세계대전을 원하지 않았다. 미국은 전쟁의 확대를 피하려 했고 전장을 한반도 내에 제한하려 했다. 국제경찰 역할만 해서 국경을 회복하고 원래의 질서로 되돌아가려 했다.

이러한 중공의 호전성과 미국의 소극적 자세는 당시 해외 중국인들, 화교들에게 엉뚱한 메시지로 해석됐다.

화교들은 미국이 너무 강력해 건드리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오쩌둥이 중공군을 투입해 미국과 맞서 싸웠다는 사실에 자못 감명을 받았고 자부심을 느낀 것이다.

지금껏 중공이 주장하는 “위대한 승리”가 바로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패배하지 않았고 조선인들끼리 서로 살인하게 한다는 목표를 이뤘으니 중공도 나름 승리했다고 볼만하다.

한국전쟁의 패배자들

이상으로 한국전쟁의 승리자를 한국, 대만, 일본, 소련, 김일성, 마오쩌둥의 중공으로 나열했다. 전쟁에는 늘 승자와 패자가 있다고 했다. 그럼 패자는 누구인가?

미국은 지지 않았다. 국제연합(UN)이 미국에 맡긴 임무는 국제경찰로서 원래의 국경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북한의 공산세력을 소멸하지는 못했지만, 3.8선과 비슷한 휴전선을 설정함으로써 기본적으로 UN이 맡긴 임무를 완수했다.

가장 처참한 패자는 바로 북한 주민들이다.

김일성 일가는 승자이지만 북한 주민들은 패자이다. 북한은 지금까지도 기근과 식량부족으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핵무기와 미사일을 제외하면 가진 것이 거의 없는 나라다.

북한은 핵무장을 위업으로 내세우지만 사실 한국, 일본, 대만 등 동북아시아 국가들은 모두 핵무장을 달성할 기술과 핵발전소, 핵원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단지 미국이 핵개발을 막고 있을 뿐이다.

중공은 인민을 굶겨가며 핵개발을 했다. 북한의 핵개발도 양상이 비슷하다. 김일성과 김씨 일가는 한국전쟁의 승리자이기는 하나, 국가 차원에서 볼 경우 주민들을 굶겨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다면 패배자나 다름없다.

두 번째 패자는 중국과 중국 인민들이다.

UN은 한국전쟁을 이유로 중국을 봉쇄하는 제재 조치를 가했다. 이후 20여년 간 중국은 외국 물자를 수입하거나 기술을 도입할 수 없었다. 외교적으로도 고립됐다.

이후 소련과도 사이가 틀어지면서 소련을 주축으로 하는 동구권 국제시장 등에서도 배제됐다.

자력갱생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바람에 중국 인민들은 80년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30년 가까이 고통스러운 경제 상황 속에서 버텨야 했다. 다시 말해 2세대에 가까운 사람들이 40~50년대의 경제수준에 머물러야 했다.

엄청난 정책 실수에 따른 재난도 겪었다. 대약진 운동으로 농업생산 기반과 산업시설이 궤멸적 타격을 입었고 문화대혁명으로 사회·경제·문화가 피폐해졌다. 세계 최빈국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1978년 개혁개방 이후에야 서서히 경제를 회복할 수 있었다.

오바마가 2013년 휴전협정 기념일에서 말한 “위대한 승리”는 한국에 대한 찬사이자, 자유민주 국가를 지켜낸 자국 참전용사에 대한 위로였다. 하지만 시진핑이 말하는 “위대한 승리”의 주인공은 중국인이 아니라 중공이다. 둘의 발언은 표현은 같지만 출발점이 다르다.

항미원조 정신 절실한 중국 공산당

23일 시진핑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항미원조 참전 7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1950년 6월 25일 북한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며 “미국 정부는 국제 전략과 냉전 사고에 기반해 한국 내전에 무력 간섭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전쟁 책임을 미국에 돌렸다.

그러면서 “항미원조 전쟁의 고난을 뚫고 거둔 위대한 승리를 기억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지난 19일 연설에 이어 또 한 번 “위대한 승리”를 강조했다.

중국인의 패배, 중공의 승리를 압축한 “위대한 승리” 발언에는 한국전 참전이라는 오판으로 국가경제를 30년간 후퇴시킨 당의 실패를 감추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또한 파병 군대에 조선인을 앞세움으로써 살인욕구를 채우려던 마오쩌둥의 잘못을 덮으려면, 한국전쟁은 한국과 미국이 아닌 중국인이 고난을 당한 전쟁이어야 하고 미국이 일으킨 전쟁이어야 한다.

아울러 미국과의 갈등 장기화로 더욱 심화될 중국경제 침체를 자국민에게 받아들이게 하려면 항미원조 정신이 필요하다. 이번 항미원조 70주년을 맞아 시진핑과 중공이 분위기를 띄우려는 이유다.

특히 아파트가격 폭등, 취업난, 구매력 감소에 직격탄을 맞을 젊은층에 대한 인식 주입이 절박하다. 중국에서 애국주의를 고취시키는 영화가 줄줄이 개봉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고 중공이 실제로 미국과 싸운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다. 미국에 싸움을 걸었던 마오쩌둥의 도박은 미국이 중공을 큰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던 시절에나 가능했다. 이제 미국은 중공을 최대 위협으로 보고 있다. 더는 중공의 도박이 통하기 어렵다.

*이 기사는 저자의 견해를 나타내며 에포크타임스의 편집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