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젠더리즘, 젠더교육을 비판한다

오세라비 /작가·미래대안행동 공동대표
2021년 11월 1일 오전 11:20 업데이트: 2021년 11월 1일 오전 11:58

EBS가 앞장선 젠더리즘과 퀴어 이론

EBS(한국교육방송공사)는 지난 8월 30일부터 교육부, 국가평생교육진흥원과 공동 기획하여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각 분야의 학자 40명을 선정하여 온라인 공개강좌를 진행 중에 있다. EBS는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강좌에 ‘위대한 수업, 위대한 생각’이라는 타이틀로 자체 유튜브를 통해 방영을 하고 있다. 프로그램 중 《젠더 트러블》의 저자 주디스 버틀러 편을 지난 9월 21~27일 동안 총 5강을 방영하였다. 버틀러는 젠더이데올로기를 보편화시킨 인물로 1990년 발표한 《젠더 트러블》은 젠더 개념과 퀴어(동성애)이론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필자는 EBS 프로그램 <주디스 버틀러-‘젠더’> 강연에 대한 비판을 하고자 한다. 이에 앞서 페미니즘운동이 젠더리즘으로 변이된 흐름을 살펴보자. 서구의 여성운동 역사는 길게 잡아 약 200여 년간 걸쳐 진행되어, 1960년대 말부터 페미니즘운동이란 명칭으로 일반화, 대중화되었다. 초기 여성해방운동이란 슬로건으로 이어지던 급진 페미니즘운동은 1970년대 중반 무렵 레즈비언, 게이 권리운동과 결합하며 정체성정치임을 확고히 했다.

페미니즘운동은 70년대 중반 대학의 ‘여성학’으로 자리를 잡았고, 1980년대 말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맞았다. 페미니즘운동은 포스트모던, 즉 해체주의와 결합하며 이른바 제3물결 시대를 열었다. 제3물결은 남성 페미니즘, 다문화주의 페미니즘, 사회구성 페미니즘,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상호교차성 페미니즘 등 여러 유형을 만들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법, 종교, 정치, 문화를 해체하였고, 이에 영향을 받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동성애, 이성애, 성전환 경계를 해체하였다.

1990년대 초가 되자 트랜스젠더에 대한 담론이 시작되었고 이때 등장한 인물이 미국의 여성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페미니즘과 성별(남녀) 정체성을 해체하자는 주장으로 학계는 물론 페미니즘계에 일대 논쟁을 일으켰다. 이것이 포스트모던과 결합한 젠더이데올로기의 등장이다. 버틀러의 젠더리즘은 퀴어 이론으로 발전하여 여장남자(drag), 게이 행진, 의상 파티를 연출하였다. 이와 때를 맞춘 듯, 1995년 베이징 제4차 유엔여성대회에서 ‘젠더 이퀄리티(Gender Equality)’ 어젠다를 내걸어 이것을 여성계의 중심 관점이자 전략으로 채택하였다. 이러한 젠더 개념의 맨 앞자리에 버틀러가 있다.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버틀러의 이 책은 난해하고 장황하다. 페미니즘 이론에 대해 어느 정도 깊이가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핵심은 버틀러가 이번 EBS 강연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와 동일하다. EBS 강연 전체가 《젠더 트러블》에서 말한바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이성애를 부수자, 남녀 이분법에서 벗어나자, 남성과 여성이라 부르지 마라. 동성애 이성애 경계를 해체하라. 남근 로고스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자. 버자이너 보다 우월한 페니스라고? 남성, 여성 이분법이야말로 남성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전통적인 여성성과 남성성을 떠나보내고 전래의 성 규범을 즐겁게 뛰어넘는 퀴어적 신체 연출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 버틀러 주장의 핵심이며 퀴어 이론이다. 심지어 버틀러는 “여성 없는 페미니즘, 여성이라는 범주가 없는 페미니즘”을 주창함으로서 생물학적 여성을 완전히 해체하는 우를 범했다.

1990년대 《젠더 트러블》은 당시 페미니즘운동이 침체기를 겪고 있는 시기 나타나 페미니스트들은 버틀러에게 심취했다. 독일의 유명 페미니스트인 스베냐 플라스푈러는 이렇게 고백한다. “주디스 버틀러에게 심취할수록 나는 점점 더 진정한 해방은 동성애의 형태로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결론으로 향했다.” 스베냐 플라스푈러는 자신의 이성애 성향 자체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하고 여자를 찾아야 한다고 아무리 노력했지만 결국 둘 다 실패하고 말았다고 덧붙였다.

여성의 실존을 위협하는 주디스 버틀러의 해체주의 페미니즘

버틀러는 생물학적 여성을 부정함으로써 여성의 존재, 여성이 지닌 힘까지도 해체하였다. 버틀러는 젠더이데올로기의 이론적 영감과 뿌리를 시몬느 보부아르의 《제2의 성》(1949)에서 가져온다. 버틀러는 EBS 강연 1~5강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보부아르를 호출한다. 마치 자신이 보부아르에 필적할 만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보부아르의 《제2의 성》 명제인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에서 젠더 개념의 영감을 찾아 생물학적 구분을 해체한다는 구실을 만들었다. 성적 차이를 무시하고, 성적 차이의 폐지 근거를 보부아르의 주장에 의존한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생물학적 여성을 거부했다. “여성성은 변한다, 여성의 본질은 고정된 어떤 관념이 없다. 모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낙태는 후회할 일이 아니다, 더 큰 성적 자유와 성적 해방”을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사실혼 관계인 사르트르와 함께 애인을 공유하고, 다수의 애인을 거느렸으며, 동성애를 즐겼다. 보부아르의 성적 해방은 페미니스트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며, 성적 해방이 여성의 독립성에 중요한 측면임을 강조했다. 보부아르의 급진성은 페미니스트들의 직계 조상격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캐디 스탠턴이 여성의 본성을 존중하고 타협하면서 독립성을 얻고자 하는 것과는 크게 차이가 있었다.

보부아르와 버틀러의 차이점은 보부아르는 생물학적 여성을 거부할지언정 남과 여의 생물학적 성의 존재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러나 버틀러는 인류를 생식기관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것에 반대한다. 버틀러는 EBS 강연 1강에서 이렇게 말했다.

“태어날 때 주어진 생물학적 성별이 여성이라고 여성처럼 행동해야 할까? 사회제도는 성의 개념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결혼은 사회가 생물학적 방식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1970~8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생물학적 성별, 사회적 의미의 젠더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여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결정도 여성이라는 성별과는 무관하다.

어떤 직업을 가질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누구와 함께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자녀를 낳을지 말지, 한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다 해서 꼭 아이를 낳아야 할 이유는 없다. 생물학은 여성의 인생을 결정할 수 없다. 무엇을 결정할지는 그 자신이다.“

버틀러는 생물학적 성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 것을 주장한다. 버틀러는 결국 여성으로 태어나 온전히 여성으로 살아가며 결혼, 출산, 육아를 통해, 어머니로 살아가는 여성은 결함이 있고 부족한 여성으로 만들어 버린다. 또 결혼을 하지 않더라고 타고난 여성성을 지닌 채 자신의 일로 성공한 여성까지 생물학적으로 순응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버틀러는 생물학적 구분이 이성애적인 성 정체성을 고착화한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여성의 지위, 여성의 자기 부정, 여성의 욕망, 여성의 자주성,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무력화시킨다. 이는 이성애자가 아닌 레즈비언인 버틀러의 개인적인 성정체성의 합리화가 아닌가? 버틀러는 여성을 무력하게 만들고 존재를 지워버리고 나아가 실존까지 위협한다.

버틀러 퀴어 이론 창시, 성별은 상황에 따라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한다?

버틀러는 레즈비언임을 스스로 밝혔다. 따라서 퀴어 이론의 창시자라 불리는 버틀러의 페미니즘 철학은 자신의 개인적인 성 정체성에 기반하고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버틀러는 페미니즘을 퀴어 이론으로 확장시켰다. “성별은 사회가 만든 것이다” 버틀러의 강연의 핵심 주제다. 버틀러는 EBS 강연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남녀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면서 성별을 해체하는 동시에 퀴어 이론을 끼워 넣어 변주한다.

“태어날 때 생물학적 여성으로 판별된 사람이 사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남성으로 태어난 사람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 부여받은 성별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들의 젠더란 선택이 아니다. 성별 정정은 선택받아야 한다.”

“성별을 이해하는 방법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한다. 성별은 상황이다. 남성 그리고 여성 그리고 새로운 젠더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변한다. 그건 바로 성별의 범주는 정해진 사실보다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버틀러의 EBS 2강은 전체적으로 자신의 퀴어 이론에 대해 설명한다. 버틀러의 주장에 따르면 상황에 따라, 시간과 공간에 따라 성별이 변한다며 병렬적인 일련의 성 범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수천 가지의 조합이 연속적으로 가능하다고까지 말한다. 이러한 젠더리즘의 확산에 따라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는 두 개의 성별에서 벗어나 수십 가지의 성별 표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페이스북은 2015년부터 성별을 본인 스스로 정하는 칸을 만들어 현재 71개까지 늘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33개의 성별이 있다.

두 갈래 트랜스젠더 논쟁: 주디스 버틀러 VS 쉴라 제프리스

레즈비언을 대표하는 두 여성학자, 주디스 버틀러와 쉴라 제프리스의 대척점을 보자. 버틀러는 트랜스젠더를 옹호한다. 버틀러는 EBS 9월 27일 마지막 5강에서 “페미니즘은 트랜스젠더를 배제할 수 없다”고 강변했다. 이는 생물학적 여성만을 범주에 넣는 페미니즘 터프(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 성향이 대다수를 이루는 한국 페미니스트들과 정면충돌하는 지점이다. 지난해 2월 한 여자대학교에 입학하려는 트랜스젠더가 여학생들의 반발로 포기한 사건이 그 사례다.

2019년 10월 한국의 페미니스트 단체가 초청하여 3차례 순회강연을 한 바 있는 쉴라 제프리스도 TERF 성향의 대표적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이다. 트랜스젠더리즘을 페미니즘의 침입자로 규정하는 쉴라 제프리스는 《젠더는 해롭다》(2014)를 출간하였으며 한국 강연에서 “트랜스젠더 여성은 여장에 성적 패티시를 느끼는 남성이며, 트랜스젠더 여성은 사회적 여성성을 수행해 가부장제를 공고히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2월 한 여자대학교 입학이 불허된 트랜스젠더에 대해 같은 레즈비언이면서도 주디스 버틀러와 쉴라 제프리스의 입장은 명확히 반대인 것이다. 버틀러는 레즈비언이라도 스스로 여성 혹은 남성이라 여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레즈비언 쉴라 제프리스는 오직 생물학적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다. 버틀러는 EBS 강연 4~5강을 통해 트랜스젠더 영역에 대한 논쟁에 대해 중점적으로 말했다.

젠더리즘은 아동·청소년에게 성정체성 혼란을 일으킨다

젠더리즘은 사회 모든 분야를 전복시키고 있다. 트랜스젠더(MTF)가 여자 격투기 대회에서 승리하고, 역도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하는 등 여성 스포츠 분야를 뒤흔들고 있다. 남자가 스스로 여자라 주장하며 여자 목욕탕에 들어가는 일도 벌어진다. 그런가하면 미국 맨해튼 사립학교에서는 “엄마·아빠라 부르지 마라”, 프랑스는 학교 서류에 부모1, 부모2로 표기하도록 하원에서 가결되었다. 영국 런던의 한 클리닉센터는 “엄마 나는 성별이 잘못된 몸으로 태어났어요”라고 생각하는 아동이 2017년 한 해 동안 2000여명이 나왔다고 한다. 학교 현장의 젠더리즘에 물든 교육의 폐해다.

이처럼 버틀러의 젠더리즘의 가장 큰 해악은 아동, 청소년의 고유한 개체를 건드리고 성정체성 혼란을 야기한다. 신체와 정신이 발달과정에 있는 아동, 청소년은 자연스러운 남녀라는 양성이 마치 잘못된 것처럼, 고정관념인양, 또 남녀이분법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람직한 현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현재 학교 교육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성교육은 젠더리즘(한국 번역: 성인지)이 침투하여 이를 기반으로 한 성교육, 성평등 교육이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남성성 제거다. 버틀러가 1강에서 한 말을 상기하자. “성별 기준이 오직 남성이었다, 성별은 오직 남성들이었고, 남성들의 성기는 유일한 성별 기준이었다. 여성들은 음경이 없으므로 결핍된 존재였다.” 이는 철저히 남성을 적대적 위치에 놓는다. 남자와 여자는 각각 성과 성적 특질이 존재한다. 남자의 성적 특질이 잠재적 위협이라고 가르친다면 여자아이들이 어떻게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까. 건강한 남녀 관계, 건강한 배우자가 될 수 있을까.

페미니스트들은 이렇게 말한다. “결혼제도를 끝내는 것이 여성해방의 필수 조건이다.”

오늘날 가족해체 원인 중 한 가지는 페미니즘에서 변이된 젠더리즘과 동성애가 아닐까. 가족제도와 결혼제도 붕괴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우리나라 상황에서 공영 교육 방송사 EBS가 주디스 버틀러라니. 이것이 위대한 수업인가?

*이 기사는 저자의 견해를 나타내며 에포크타임스의 편집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