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알아두면 평생 득이 되는 지식…중국 전통문화에 담긴 ‘중정평화’

평생 득이 되는 전통이념②

왕요췬(王友群)
2022년 05월 11일 오후 1:50 업데이트: 2024년 02월 19일 오후 3:10

상고시대 요(堯)임금이 순(舜)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줄 때 ‘윤집궐중(允執厥中·진실로 그 중심을 잡는다는 뜻)’ 네 글자를 주었다. 요임금은 순에게 반드시 ‘중도(中道)’에 따라 나라를 다스릴 것을 요구했다. 즉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치우침이 없이 핵심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중정(中正)·평화(平和) 사상이 여기서 비롯됐다.

나중에 순임금은 또 이 네 글자를 우(禹)에게 전하고 우임금은 또 탕(湯)에게 전했으며, 이어서 문왕 – 무왕 – 주공 – 공자 – 맹자에게로 전해져 내려왔다. 이 네 글자는 중국인들이 5천 년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휘황찬란한 중화문명을 창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탈취한 후 ‘윤집궐중’의 위대한 역사적 전통은 철저히 파괴됐다. 중국 공산당은 인류 사회의 모든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단순화했고, 지난 70년간 줄곧 “하늘과 싸우고 땅과 싸우고 사람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끝이 없다(마오쩌둥의 말)”고 했다. 그 결과 중국 대륙은 호전적인 사상, 언어, 행동으로 끝없이 싸우고 파괴하는 ‘어둠의 땅’으로 변했다.

5천 년 신전문화(神傳文化)의 우수한 전통으로 회귀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역사적 책임이다. 특히 선대가 물려준 위대한 정신적 자산인 중정평화 이념을 계승하고 길이 빛내야 한다.

◇ 사람이 되는 길(道), 중정평화

‘중정·평화’의 이념은 유가학설 중에서 중용(中庸)의 도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중용의 도는 유가가 추구하는 지극히 높은 경지다. ‘논어論語)’ 용야(庸也)편에서는 “중용의 덕(德)이 지극하다”고 했다. 남송 시대의 유학자 주희(朱熹)는 중용에 대해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하고, 변함이 없는 것을 용(庸)이라 한다” “중이란 기울거나 치우침이 없고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음을 말한다. 용이란 평상(平常), 즉 한결같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중용의 도란 무원칙하게 타협하거나 아무런 원칙이 없는 게 아니다.

‘기울거나 치우침이 없다(不偏不倚)’는 것은 중도(中道)·정도(正道)를 취하고, 공정(公正)·공평(公平)하고 사사로움이 없음을 뜻한다. ‘중용’에서는 “희로애락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이미 발했으나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중은 천하의 대본(大本·큰 근본)이고, 화는 천하의 달도(達道·두루 통하는 도리)이다”라고 했다.

즉 희로애락의 감정이 일지 않아 마음이 물처럼 고요하면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있고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데, 이런 상태가 바로 ‘중정(中正)’이다. 또 희로애락의 감정이 일어났을 때 잘 조절해서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다면 마음이 평정(平靜)하고 모든 사람과 화합할 수 있는데, 이런 상태가 ‘평화(平和)’이다. 사람의 마음이 ‘중정’하고 ‘평화’할 때 절도를 지켜 치우치거나 지나치지 않고 적정한 상태가 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사람이 크게 기뻐하거나 슬퍼하거나 노여워하거나 즐거워할 때는 이지적일 수 없다. 사람의 정서가 극단적일수록 사상과 행동도 더욱 극단적이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중절(中節·시의와 상황에 맞게 절제함)하고 극단으로 가지 않을 수 있는가? 일찍이 공자는 “양 극단을 두드려 힘껏 깨우친다(叩其兩端而竭焉)”고 했다. 즉 양 극단의 견해나 믿음을 신랄하게 살펴 그것이 바른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양 극단을 두드리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공자는 또, 순임금을 일러 “그 양 극단을 잡아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쓰셨다(執其兩端, 用其中於民)”고 했는데, ‘집양용중(執兩用中)’이란 말이 여기에서 비롯됐다. ‘중용’에서는 이 ‘중’의 작용에 대해 한 글자로 표현했으니 바로 ‘화(和)’이다. 상화롭고 평화로운 마음이 일단 나오면 좋지 않은 정서는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지며 사상이 바로잡힌다.

중용지도(中庸之道)의 핵심은 자신을 수양하고 감독하고 완전하게 해 중정평화한 사람이 됨으로써 자신과 조화롭고 남들과 조화롭고 사회와 조화롭고 천지와 조화롭게 되고, 마침내 지극히 선하고 지극히 성스러운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할 수 있다.

◇ 의학 속의 중정평화

현대인들은 중국의 전통 의학을 ‘중의(中醫)’라 한다. 사실 중의란 본래 이런 뜻이 아니었다. 중국 최초의 의학경전인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는 “상의(上醫)는 나라를 다스리고, 중의(中醫)는 사람을 다스리고, 하의(下醫)는 병을 다스린다”고 했다. 왜 중의는 사람을 다스린다고 했을까? 왜냐하면 병이 생기는 원인은 사람이 좋지 않게 변한 데 있으므로 성정과 심태를 바로잡으면 병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의는 사람을 중시하고 병 자체를 중시하지 않으며, 오직 하의만이 병을 치료한다. 중의는 중도(中道)의 의학이란 뜻으로, 바로 중국 전통문화 속의 중정평화 이념을 계승한 의학이다.

‘황제내경’에서는 “평인(平人)은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 어떤 사람이 평인인가? 당나라 의사 왕빙(王冰)의 해석에 따르면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 평인이다. 바로 중도와 정도에 머무는 사람을 평인이라 한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중정평화한 사람이 바로 건강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중정평화에 도달할 수 있는가? 당나라 때 의학자 손사막은 ‘천금요방(千金要方)’에서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은 설사 옥액금단을 먹는다 해도 장수할 수 없다고 했다. 도덕성이 충만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아도 수명이 연장되고 복을 구하지 않아도 복이 저절로 오는데, 이것이 바로 양생의 큰 도리(大經)이다. 도와 덕을 숭상하고 선과 덕을 쌓으면 심신이 건강해지고 복과 수명이 늘어난다.

그렇다면 병은 언제 나타나는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있을 때다. 몸의 병이든 마음의 병이든 모두 그러하다.

노자는 “하늘의 도는 남는 것을 덜어 부족한 것을 보충한다”고 했다. 남는다는 것이 지나친 것이고 부족한 것이 모자란 것이다. 하늘의 도에 따르면 지나치면 덜어내고 모자라면 보충해준다. 이 덜고 보충하는 것이 바로 각종 방법을 통해 좋은 상태로 회복되게 하는데, 바로 중정평화한 상태이다. 중의에서는 주로 두 가지 방도를 취한다. 하나는 조신(調身)이고 다른 하나는 조심(調心)이다.

조신은 몸을 조절하는 것이다. ‘황제내경’에서는 “실(實)하면 사(瀉)하고 허(虛)하면 보(補)함으로써 그 병을 묻지 않고도 다스릴 수 있다”고 했다. 조심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역시 ‘황제내경’에서는 “마음이 고요하고 욕심이 없고 깨끗하면(恬淡虛無) 진기가 따라오고, 정기(正氣)가 안에 있으면 사기가 침입할 수 없다. 정신이 안에서 지키면 병이 어찌 올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한 사람이 오장, 칠정, 기혈, 음양이 조화로우면 어떤 병이든 생겨날 수 없다.

◇ 음악 이론 속의 중정평화

고금(古琴·칠현금)은 중국 최초의 현악기다. 전설에 따르면 복희씨가 창조했는데 중국 전통문화인 거문고(琴)·바둑(棋)·글씨(書)·그림(畫) 중에서도 으뜸으로 친다. 자고로 “군자가 앉음에 왼쪽에는 고금을 두고 오른쪽에는 책을 둔다”고 했다. 고금은 풍부하고 심오한 문화를 품고 있어 수천 년간 문인과 선비들이 사랑해온 물건이다. 고금의 정수 역시 중정평화다.

위진(魏晉) 시기 죽림칠현 중 한 사람인 혜강(嵇康)은 “고금은 천지를 감동시켜 화(和)의 상태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했다. 고요히 정좌하고 고금을 타는 자는 잡념이 없고, 몸과 물(物)이 둘이 아니고, 옛날과 지금이 따로 있지도 않다. 이때 거문고는 거문고일 뿐이고, 사람은 사람일 뿐이고, 천지는 천지일 뿐이어도 천·지·인 합일 정신이 그 속에 내재돼 있다. 중국 고대에는 거문고든 차(茶)든 모두 고요함 속에서 내재적인 자아를 통찰하면서 중정평화의 본성을 길렀다.

‘예기‧악기(樂記)’에서는 “음악이란 천지의 조화다”라고 했다. ‘논어’에서는 “즐겁되 음란하지 않고 슬프되 몸과 마음이 상하지 않는다”고 했다. 춘추시대 오나라의 계찰은 음악은 마땅히 “오성(五聲)이 조화롭고 팔풍(八風)이 평온하며 음절에 절도가 있고 선율에 질서가 있다”고 했다.

제나라의 안영은 악곡은 “맑고 탁함, 크고 작음, 짧고 김, 빠르고 느림, 슬픔과 즐거움, 강하고 부드러움, 더디고 빠름, 높고 낮음, 나가고 들어감, 촘촘하고 성김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했다. 혜강은 아악(雅樂)과 음란한 소리를 구별하는 관건은 아악 속에 존재하는 일종의 ‘평화(平和)’ 정신이라고 했다. 널리 전해진 ‘고산유수(高山流水)’, ‘평사낙안(平沙落雁)’, ‘구로망기(鷗鷺忘機)’ 등 중국 고전음악은 모두 평화하고, 고요하고 담백한 특색을 지닌다.

중국의 전통 악곡은 대부분 단성부(單聲部)의 곡으로, 주선율과 부선율, 화성 부분으로 나뉘는 문제가 거의 없고, 단일한 선율이 수평으로 뻗어나가고 반복적으로 되풀이된다. 음조와 선율은 일반적으로 높낮이나 강약, 빠르기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으며 악곡이 시종 평온하고 함축적이고 맑으며 음송(吟誦)의 풍격을 유지한다. 대표적인 것이 ‘평호추월(平湖秋月)’이나 ‘양관삼첩(陽關三疊)’이다. 음률은 반음이 없는 오성(궁, 상, 각, 치, 우) 체계로 구성된 평화로운 곡조다. 중국의 옛 음악을 들으면 평안하고, 상화롭고, 부드럽고, 심신이 이완되고, 시적인 정취와 그림 같은 아름다움이 넘쳐흐른다.

유가 예악문화에서는 중정평화하고 온유·돈후한 악곡은 인격을 도야하고, 성정과 혈기를 안정시키고, 정신을 맑히고 유쾌하게 하므로 가족 관계나 사회 대인관계가 더욱 조화롭고 안정될 수 있다고 여겨왔다. 순자는 “음악이 행해지면 뜻이 맑아지고, 예가 닦이면 행실이 발라지고 눈과 귀가 총명해지고 혈기가 화평해지고 풍속이 바로잡혀 천하가 편안해지고 아름다움과 선(善)을 좋아하게 된다”고 하였으니 궁극적으로는 천인합일의 최고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유가문화에서는 음악을 정신의 안식처로 삼고 악(樂)을 인격 완성의 경지로 보았다. 이것이 소위 “시(詩經)로써 일어나고, 예(禮)로써 서고, 악(樂)으로써 이룬다”는 것이다.

◇ 중정평화 상태로의 회귀가 필요한 현대인

중정평화의 이념은 개인의 수신에서부터 의학, 음악, 건축, 치국평천하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 관통돼 있다. 달이나 지구, 태양 등도 드넓은 우주 중에서 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궤도에 따라 운행한다. 이것이 우주의 질서이자 자연의 법칙이다. 만사만물이 이 질서를 따를 때 비로소 안정을 이루듯 사람 역시 중정평화할 때 광명정대한 정도(正道)를 걷게 된다.

중정평화는 중화문명 역사의 큰 흐름 속에 스며들어 있고, 천리(天理)와 인심에 순응해 사상과 행동을 바르게 하도록 이끄는 탁월한 가치관이다. 도연명은 관직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갔으나 의기소침하지 않고 오히려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꺾어 들고 멀리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고 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이 중정하고 기가 평화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성향이 반대인 북송의 재상 왕안석과 사마광이 ‘화이부동(和而不同)’, 즉 뜻을 같이하지는 않지만 화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중정평화란 전통 가르침에 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범중엄 가문이 800년간 쇠퇴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가 중정평화로 집안을 다스리고 이 도리를 대대로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중정평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사업을 하면 화기가 넘쳐 재산이 불어나고, 한 지역을 다스리면 예(禮)와 악(樂)이 조화를 이뤄 질서가 정연하게 되며, 나라를 다스리면 천시(天時)·지리(地利)·인화(人和)를 얻을 수 있고, 국제적으로 큰 일을 도모하면 사해가 한 가족이 되고 만방이 함께 즐거워하고 천하의 인심을 얻을 수 있다.

중정평화 상태로 돌아가면 자비롭고 상화한 심태를 유지하게 돼 마치 물처럼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게 되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이 기사는 저자의 견해를 나타내며 에포크타임스의 편집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