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미국 대공황과 뉴딜, 자의적 해석이 빚은 한국판 뉴딜 패착 ①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2021년 08월 13일 오후 2:10 업데이트: 2021년 09월 4일 오전 6:58

오피니언

1930년대 미국 대공황만큼 진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도 드물다. 왜 대공황이 발발했고 그 과정은 어땠으며 통상 1~2년이면 침체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만 10년에 걸친 장기불황의 수렁에 갇혔는지에 대해 객관적인 이해가 태부족하다.

문재인 정부는 미국의 대공황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결여된 채, “루즈벨트(F. Roosevelt) 대통령의 뉴딜 정책이 미국을 구한 것으로 오해하고”, 이를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삼아 한국판 뉴딜 정책을 졸속으로 만들어 집행했다.

이 글에서는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의 원인과 경과 그리고 정책적 시사점을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다음 글에서 문재인 정부의 ‘K-뉴딜’을 비판하고자 한다.

1930년대 미국 경제 대공황에 대한 이해와 오해

미국의 경제 대공황은 아래 2개의 그림으로 압축 설명된다. <그림-1>은 미국 대공황 기간인 1929년부터 40년까지의 다우 존스 지수 추이를 표시한 것이다.

그림1 : 미국 대공황 기간(1929~1940) Dow Jones 지수 추이

<그림-1>에서 보듯이 대공황을 알리는 전조인 증시 폭락은 ‘검은 목요일’로 알려진 1929년 10월 24일에 일어났다. 1929년 9월 3일 381.17이었던 다우지수는 그해 10월 24일 230.07로 폭락했다. 그 후 1933년 7월 8일 ‘41.22’를 기록하면서 전 최고점(391.17) 대비 10분의 1 토막 났다.

1929년 최고점에서 1933년 최저점까지 주가 하락 패턴을 보면, 층계에서 공을 떨어뜨린 것 같은 궤적을 보이고 있다. 최저점에 이르기까지 ‘무려 6번의 작은 반등’이 있었다. 반등을 기대하며 주식을 매집했지만 주가는 끝을 모른 채 하락에 하락을 6차례나 거듭했다. 하락장이 그 바닥을 드러냈을 때 이미 주가는 10분의 1 토막 나 있었다.

최저점을 찍은 후 주가는 반등했다, 1933년 3월 대통령에 당선된 루즈벨트가 미국을 이끌었다. <그림-1>에서 보듯이 1937년에는 32년 최저점 대비 370% 주가가 상승했다.

문재인 진영은 이를 루즈벨트 뉴딜정책의 성과로 해석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뉴딜이 제대로 성과를 냈다면 전 최고점을 회복했어야 맞다. 최고점 대비 10분 1토막 나고 370% 반등 한들, 직전 최고점에는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1937년까지 회복되던 주식시장은 2차 대전이 발발한 1939년까지 다시 침체에 빠졌다. W자 ‘더블 딥’(double dip)에 빠진 것이다. 이는 뉴딜의 약발이 먹히지 않았다는 반증(反證)인 셈이다.

그림-2 : 미국 대공황 전후 실업률 추이

대공황이 발발하기 전, 미국 경제는 호황을 누렸다. <그림-2>에서처럼 실업률은 5% 수준이었다. 대공황이 엄습하자 실업률은 1933년 25%로 증가했다. 4명 중 1명이 실업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1933년 루즈벨트 대통령 집권 이후 실업률은 감소했지만 곧 다시 증가했다. 앞서 언급한 ‘더블 딥’ 현상이 고용시장에도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실업률이 낮아진 것은 1939년에 2차 대전이 발발한 후였다.

<그림-1>와 <그림-2>에서 보듯이, 미국의 대공황을 종식시킨 것은 루즈벨트의 뉴딜이 아닌 2차 대전의 발발(1939. 10)이었다.

◇ 대공황에 대한 2가지 오해

첫 번째 오해는 대공황이 자본주의 체제의 ‘시장실패’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시장의 작동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유효수요를 늘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케인즈언’적 사고의 대두이다.

두 번째 오해는 루즈벨트의 뉴딜(New Deal)정책으로 대공황을 치유했다는 것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 정책을 통한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이 죽어가는 미국 경제를 살렸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시장이 실패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누군가의 사업이 실패할 수는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실패할 수는 없다. ‘시장이 실패하는 주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개인만이 행동한다’라는 공리(公理)를 부정하는 것이다.

개인은 의사결정의 최소 단위이다. 그래서 인격이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인격을 가진 개인이 모인 군중은 역설적으로 군중의 격, 즉 군격(群格)을 갖지 못한다. 따라서 개인은 인격이고 군중은 심리인 것이다. 따라서 시장은 ‘실패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실패가 목도되는 장(場)인 것이다. 모든 실패는 ‘정책의 실패’인 것이다.

대공황 발발의 첫 번째 원인은 잘못된 통화관리 정책 때문이었다. 미국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s)은 1921년 중반에서 1929년 중반까지 통화 공급을 60% 이상 늘렸다. 통화 팽창은 인위적 호황을 가져오게 돼 있다. 대공황이 오기 직전까지, 미국은 일명 재즈 시대(Jazz Age)라 불리는 ‘역대급 호황’을 누렸다. 대공황은 ‘역대급 호황장에 따른 역대급 하락장’이 그 본질이다. 큰 그림을 그리면, 시장의 자연스러운 호황(Boom)과 불황(Bust)의 사이클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 중앙은행, 즉 연방준비제도가 대공황 이후에 생겼다고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연방준비제도는 1913년 우드로 윌슨(W. Wilson) 정권 때 만들어졌다. 같은 해에 소득세가 도입되었고 국세청(IRS)도 설립됐다. 연방준비제도가 설립된 후, 통화량을 꾸준히 늘렸다. 1920년대 지속적인 통화팽창으로 ‘대공황의 씨앗’은 이미 싹트고 있었다.

통화량이 증가하면 이자율이 하락한다. 그러면 기업은 새로 유입된 통화량을 이용해 새로운 투자 프로젝트를 실행하면서 자본재 시장에 호황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플레이션이 진행된다. 1929년 후반에 들어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해 통화량을 줄이기 시작했다.

통화 공급을 관찰하고 있던 일부 투자자들이 통화량 감소로 주가가 하락할 것을 예상하고 주식을 대거 내다 팔았다. 주식 투자자의 주식 투매로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 1929, 10. 24)이 터진 것이다. 주가 폭락은 대공황의 ‘원인’이 아니라 호황의 거품이 터진, 즉 ‘현상’이었다.

1931년 대공황 당시 미국 시카고의 무료 급식소에 길게 줄지어 서 있는 남성 실업자들의 모습. | 위키피디아

◇ 후버(H. Hoover) 정부의 반시장적 정책

당시 대통령이었던 공화당 허버트 후버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한다. 스뭇-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 통과가 그것이다. 관세법안이 의회에 상정되자 이 법의 통과가 가져올 수 있는 심각한 경기 침체를 우려한 1천여명의 미국 경제학자들의 반대 서명에도 불구하고 후버 정부는 1930년 6월 의회에서 이 법을 통과시켰다.

관세법은 외국제품에 대한 수입을 사실상 금지시키는 것으로서 관세부과 대상 품목이 무려 3218개에 이르렀다. 관세부과는 보복 관세를 부를 뿐이다. 외국 정부들의 미국 제품에 대한 보복관세 조치가 취해졌다. 이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품목이 미국 농산물이었다. 미국 농부들은 시장의 약 3분의 1을 잃게 됐다.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수만 명의 농부들이 파산하였고, 농업의 붕괴로 인해 지방은행들이 도산했다. 이는 은행공황으로 이어졌다.

후버는 철저한 시장주의자로 묘사되지만 실제는 ‘시장주의자도 작은 정부주의자’도 아니었다. 후버가 취임하기 전까지 미국은 재정적으로 흑자를 기록했는데, 후버가 취임하고 몇 년 새에 재정지출은 약 40%나 급증하게 된다. 그는 경기부양을 통해 각종 공공사업을 대대적으로 시행하는 확대 재정정책을 펼쳤다.

1930년 7월 미 의회는 약 9억1500만 달러의 공공사업비를 의결했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후버댐 등의 대형 토목사업이 후버의 작품이다. 후버 재임 4년간 공공사업을 위한 지출은 루스벨트에 비해 작았지만 후버 이전 30년간의 공공지출보다 많았다. 그는 재건금융공사(Reconstruction Finance Corporation)를 만들어 10억 달러를 부실기업들과 은행들에게 빌려주었다. 이는 루즈벨트의 뉴딜(New Deal)의 모태가 되었다.

후버는 1932년 ‘세입법’(Revenue Act)을 통해 세금을 더 거둬들였다. 세입법으로 최고한계세율이 24%에서 64%로 증가하였고, 조세감면이 줄었다, 불황기에 세금을 더 올린 것이다. 이와 같은 잘못된 정책으로 예전 같으면 1~2년 만에 끝날 수 있는 불황을 심화시켜 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가운데) | AP/연합

루즈벨트(F. Roosevelt) 의 등장과 뉴딜 정책 시행

‘뉴딜’이란 용어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미국인을 위한 새로운 처방(a new deal for the American people)”을 약속한 1932년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만이 이 참사를 해결할 유일한 탈출구라고 확신했다. 그는 취임연설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적은 두려움 그 자체라고 역설”(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t) 했다.

뉴딜 첫해에 루즈벨트는 30억 달러의 조세 수입을 훨씬 초과한 100억 달러의 정부지출을 계획했다. 전년대비 정부지출이 83% 이상 증가했다. 재원은 국가부채 증가였다.

◇ 뉴딜 정책의 역습

집권하자마자 ‘농업조정법’(Agricultural Adjustment ACT: AAA)을 제정했다. 경작면적을 줄이고 생산된 곡물의 일부를 심지어 내다 버리기까지 하면서 공급을 감소시켜 농산물 가격을 인상시켰다. 농가의 수입 증대가 목적이었다. 경작하지 않은 농부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해 농가소득을 지지해줬다. 농산물 가공물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는 ‘가공세’(processing tax)를 신설해 재원을 마련했다.

AAA 법은 예기치 않은 부작용을 초래했다. 공급 감소로 가격이 올라 많은 사람들이 농산물에 대해 높은 가격을 지불해야 했으며, 공급 감소로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배를 주렸다. 또한 생산이 줄자 일자리가 줄게 되어 가난한 흑인 소작농이 일자리를 잃었다.

1933년 6월에는 ‘국가산업부흥법’(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 NIRA)을 제정했다. 미국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향상시키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최저임금제를 도입하였고, 청소년 고용을 금지시켰다. 이로 인해 기업의 비용이 급격히 증가되어 경제가 회복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했다.

루즈벨트 행정부는 공공지출 증가 재원마련을 위해 세금을 크게 인상했다. 후버 행정부에 의해 오른 소득세율을 더욱 높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마지막 해에 최고 소득세율은 94%까지 올라 최고조에 달했다. 그리고 기업의 배당에 대한 5% 원천과세를 도입했다.

루즈벨트 행정부는 인위적으로 일자리를 만들었다. 비효율적인 정부지출이 크게 늘어났다. 워싱턴의 공공건물들로부터 새를 쫓기 위해 사람을 고용했으며 바람에 풀 더미가 날라 굴러다니는 것을 막기 위해 사람들을 고용하는 데 국민 세금을 지출했다.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본빌 댐(Bonneville Dam) 건설공사 | 위키피디아

1933년 11월에 시민일자리부(Civil Works Administration)를 설립했다가 1934년 3월에 폐지하고, 나머지 실행에 옮기지 못한 계획들은 연방비상고통경감부(Federal Emergency Relief Administration)에 이관시켰다.

1935년에는 루즈벨트 행정부의 패착으로 평가되는 ‘국가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을 제정했다. 이는 후일 와그너 법(Wagner Act)으로 불린다. 이 법은 노조에 면책과 특권을 부여했고, 노사분규 문제를 법정이 아닌 새로 설립된 ‘국가노동관계국(National Labor Relations Board)’에서 다루게 했다. 이 정부 기구는 노동문제에 관해, ‘검사, 판사, 배심원’ 등 모든 기능을 다 수행하도록 했다. 노조에 온정적이었던 사람들은 이 법을 더욱 왜곡시켜 ‘노동에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었다.

이 같은 효율을 도외시한 정부지출의 증가 그리고 노동 편향적인 제도 및 기구로 실업률은 1938년에 다시 20% 가까이 증가했고 1937년 8월에서 1938년 2월까지 주가는 약 50% 하락했다.

더블 딥에 빠졌던 경기가 다소나마 활력을 찾은 것은 연방 대법원이 1935년에 NIRA를, 1936년에 AAA를 위헌으로 판결하면서부터다. 이처럼 규제가 풀리면서 경제의 숨통이 틔어졌다. 그 결과 실업이 1935년에 18%, 1936년에 16%, 1937년에 13%로 하락했다.

 

2차 대전 발발이 종식 시킨 대공황

대공황의 원인은 1920년대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통화팽창 정책에 있었다. 통화정책을 통해 대공황 문제를 해결했어야 하지만 자본시장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해 시장과 정책 당국 간 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1929년 10월의 검은 목요일을 막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후속 정책이 잘못 실행되어 침체가 장기화되고 증폭되었다.

후버 정부의 가장 큰 패착은 관세법의 제정이다. 무역을 파괴하는 관세법을 제정함으로써 상대국의 보복관세를 유발했고 세계 무역 규모를 3분의 1토막 냈다. 그리고 세입법을 제정해 불황기에 증세를 한 것도 큰 패착이다.

1933년에 집권한 루즈벨트 대통령도 경제 불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정부지출을 늘려 불황을 타개하려 했지만 지출의 효율성이 담보되지 않아 실효적이지 않았다. 농가소득 증대를 위해 무리하게 집행한 정책의 역작용, 생산과 경쟁에 대한 통제, 노동에 편향된 강제적 노동법 등이 경기회복을 막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1~2년 정도면 회복될 수 있었던 불황을 10년 동안 지속되도록 만든 장본인은 역설적으로 루즈벨트였다.

루스벨트 정부가 심혈을 기울인 NIRA와 AAA 법이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경제의 숨통이 틔인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장기간의 불황을 종식시킨 것은 2차 대전의 발발이었다. 장기불황을 야기한 것은 자유시장의 자유방임주의가 아닌 정부의 무분별한 개입이 빚은 정책실패 때문이었다.

미국경제가 ‘온전히’ 자리를 잡은 것은 루즈벨트가 대통령에서 물러나고 2차 대전이 끝난 뒤 민간 투자자들이 투자하기 시작하면서이다. 동맹국과의 무역이 재개됨으로써 시장이 넓어졌으며 투자자들이 되돌아온 것이 전후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은 문제의 해결사가 아닌 문제의 진원지였다.

다음 글에서 뉴딜을 오독(誤讀)하고 정책 명칭부터 뉴딜을 베낀 ‘한국형 뉴딜’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한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조동근·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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