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길 잃기 십상”…관료 ‘팔괘진’ 발들인 中 리창 총리

스산(石山)
2023년 03월 22일 오후 10:00 업데이트: 2024년 02월 19일 오후 3:08

외신, 리창 총리 ‘경제사령탑’ 기대감 나타내지만
수십 년 고인 ‘복마전’ 관료체제에 리더십 통할까?
민간이 이끈 남부 경제 발전사…관료들은 발목만

2023년 중국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를 통해 새 정부가 출범하고 리창(李強)이 정해진 각본대로 국무원 총리가 됐다. 리창 총리는 어떤 역할을 할까?

리창 총리는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중국 경제에 대해 언급했다. 향후 국정 운영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내용이 담겼는데, 알맹이를 추리면 7가지다.

첫째, 국무원이 공산당중앙의 사무기관으로 바뀌었음을 확인했다.

리창은 “국무원의 향후 임무는 중앙정부의 경제계획 청사진을 시공 가능한 공정도(工程圖)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시진핑은 부동산업자이고, 중앙경제공작영도소조는 개발업자이고, 국무원은 건설 청부업자이다.

둘째, 리창은 “개혁의 밥을 먹고 개방의 길을 가야 한다”며 ‘개혁·개방’을 거듭 언급했다.

‘개혁’과 ‘개방’을 붙여서 말하면, 즉 한 단어로 쓰면 덩샤오핑 이론의 대명사가 된다. 지금의 ‘신시대’와 ‘시진핑 사상’이란 개념은 이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리창의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셋째, ‘인구 보너스(人口紅利·풍부한 노동력에 의한 경제성장)’ 효과와 관련해 리창은 중국 미래의 ‘인재 보너스(人才紅利)’ 효과를 강조했다.

중국에는 9억 명의 노동 인구 가운데 대학을 졸업한 인구가 2억4천만 명이나 된다. 리창의 발언은 중국에는 우수한 인력이 풍부해 앞으로 시진핑이 요구하는 ‘고품질 경제발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중국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향후의 인구 보너스 효과에 대해 묻자 리창은 ‘인재 보너스’ 효과만 언급하고 ‘인구 보너스’ 효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넷째, 농업과 농촌에 대해 언급하며 ‘지역 특색’을 강조했다.

그는 중국에 식량문제가 없다고 강조하면서도 식량 생산을 장려해야 한다고 했다. 리창은 농촌 건설에 대해 말할 때 ‘천촌일색(千村一色), ‘천촌일면(千村一面)’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지역 특색’을 특별히 강조했다. 이 점은 이전에 중국 공산당 관리들이 언급한 적이 없다.

다섯째, 민영기업을 대대적으로 지원한다고 했다.

리창은 자신이 원저우(溫州)에서 성공했고 민영기업과 친분이 두텁기 때문에 민영 기업가를 특히 중시한다고 했다.

그는 저장성 상인들의 ‘4천정신(四千精神)’을 언급했다. ‘4천정신’은 ‘천지사방(千山萬水)을 다 다니고, 온갖 화술(千言萬語)을 다 부리고, 갖은 수(千方百計)를 다 쓰고, 온갖 고생(千辛萬苦)를 다 겪는’ 상인 정신을 말한다. 그는 민간경제를 지원하는 정책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지방관리들에게 민간경제를 계속 지원할 것을 촉구했다.

여섯째, 리창은 “관료들은 집무실에 앉아서 계획을 세울 것이 아니라 민간에 가서 조언을 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집무실에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어렵지만 기층(基層·말단)을 찾아가면 해결책이 있다”고 했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저장에서의 경험과 관련이 클 것이다.

일곱째, 리창은 법제 건설을 강조하며 관료들이 법에 따라 기업가와 상대할 것을 요구했다. 기업가에게 예측 가능한 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날 리창의 발언은 새 정부의 총리로서 국정 운영 기조를 밝힌 것으로 보기 어렵다. 솔직히 말하면 지방의 성장이나 시장이 한 발언으로 착각할 정도다. 모두가 관심을 갖는 국가 경제의 전반적인 상황, 거시적인 계획, 미래의 어려움에 대한 해결책 등에 대해서는 틀에 박힌 말뿐 실질적인 내용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몇 가지 주목할 대목이 있다.

그가 언급한 ‘4천정신’은 매우 흥미롭다. 이 정신은 기본적으로 지난 수십 년간의 중국 경제 발전에 대한 리창의 생각을 대변한다. 중국의 경제 발전은 중국 남부의 민간기업, 또는 민간 상공업자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외부와 통하는 도로도 없고 인구도 2천~3천 명에 불과한 티베트의 한 작은 현에서 필자는 저장성에서 온 상인들을 만난 적이 있다. 도로가 없으니 그들은 보따리를 메고 걸어서 산 넘고 물 건너 그곳에 도착했을 것이다. 현도(縣都)의 인구는 몇백 명에 불과한데 장사를 하러 찾아간다는 것은 정말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누군가가 중국인들에게 모험심이 부족하다고 말하면 필자는 믿지 않는다.

당시는 개혁개방 초기였는데, 공산당 체제 내의 엘리트들은 늘 중국인들의 사상이 폐쇄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중국 경제가 좋지 않은 것은 모두 ‘소농경제(小農經濟)’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소농경제는 중국의 보물이다. 중국 경제가 고속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소농경제’ 덕분이다.

서양의 일부 학자들은 이 소농경제에 ‘기업가 정신’이라는 개념을 부여했다. 1980년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는 중국의 이런 기업가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물론 그는 홍콩에서 이런 정신을 보았다. 그는 중국 정부가 이런 기업가 정신을 허용한다면 중국 경제가 반드시 급성장할 것이라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일부 학자들은 소농경제를 ‘동아시아 논밭경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벼를 재배하는 것은 특히 고생스럽다. 그들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 남부 농부들이 1년간 일하는 시간은 평균 2300시간에 달하는데, 이는 유럽 농부들의 1300시간의 두 배에 가깝다. 동아시아 경제 시스템이 이러한 특수한 집단을 만들어냈다.

중국의 경우 남방 농민들은 대부분 자기 땅에 자기가 농사짓는 자영농이다. 국가에 내는 세금은 고정돼 있기 때문에 수확을 많이 할수록 수익이 늘어난다. 이러한 제도는 중국 농민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격려한다.

중국의 남부 지역은 농한기 없이 겨울철에도 농경지와 수로를 수리한다. 과거 중국 남부 지역은 종법(宗法)을 근간으로 한 혈연사회여서 지금도 가족 단위로 생산을 하고 기업의 모든 기능을 갖추고 있다.

우선 다음 해 날씨를 예측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 일은 통상 가족 중 나이든 남성이 담당한다. 그는 어떤 작물을 재배할지 결정한 다음 농사 지을 인력과 수확물 판매 인력을 배치한다. 여자들은 수제품을 만들고 음식을 책임져야 하는데 이 분야는 보통 시어머니가 관장한다.

이는 생산·인력·판매·물류 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기업 형태의 시스템이다. 따라서 일단 사회 환경이 조성되면 중국 남부 지역의 향진(鄉鎮)경제가 빠르게 발전할 수 있다.

사실 중국은 원나라 후기부터 남방의 이런 생산·무역 모델이 점차 형태를 갖추었다. 명대(明代)에 이르러서는 중국 장강 유역의 사유경제가 이미 상당히 발달했고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또한 이런 경제는 대외무역에 크게 의존했다.

명나라 때 발생한 ‘왜구의 난(亂)’은 사실 푸젠성·저장성·안후이성 상공인들의 폭동이었다. 초기의 왜구는 주로 일본 낭인(浪人)이었지만,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주력이 저장·푸젠·안후이에서 온 중국인이었다. 진짜 일본인과 류큐인은 10명 중 3명도 안 됐고 리더급도 아니었다.

이들 상공업자가 난을 일으킨 것은 해상 교통·무역을 제한하는 해금(海禁) 정책 때문이었다. 명나라가 시행한 이 정책으로 인해 대외 무역이 중단됐고 이 3개 성의 상공업자들에 대한 단속도 심해졌다. 저장성 저우산(舟山)시 육횡도(六橫島)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무역항이었을 것이다. 서역과 왜국, 동남아에서 온 상인이 10만 명에 달했고, 섬에는 교회와 법정까지 있었다. 훗날 가정 연간(嘉靖年間·1522∼1566)에 명나라가 군대를 보내 이 동방의 상업 중심지를 완전히 파괴했다.

융경 연간(隆慶年間·1567-1572)에 이르러서야 명나라는 해금을 다소 완화해 상인들이 해상 무역에 종사할 수 있게 했다. 명나라에는 일찍이 정화(鄭和)가 서역으로 오가는 거대한 선단을 가지고 있었는데, 해금정책 이후에는 더 이상 바다로 나가지 않았다. 명나라 말기 정성공(鄭成功)의 아버지 정지룡(鄭芝龍)은 해상 밀선의 대두목, 즉 해적이었다. 그의 선단은 스페인·포르투갈·네덜란드 선단과 비등하게 경쟁할 만큼 규모가 컸다.

저장성 상인과 명나라의 역사를 언급하는 것은 장쑤·저장·푸젠·안후이 일대의 민풍(民風)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비즈니스 마인드가 뛰어난 원저우(溫州) 상인이 개혁개방 이후 급부상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리창은 원저우 출신이고 또 원저우에서 사업을 시작했기에 당연히 상업적 기질이 충만할 것이다. 이런 점이 그가 기자회견에서 민영기업에 대해 이야기한 배경일 것이다.

리창은 연설에서 농촌 건설의 ‘특색’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지역 특색은 중앙이 아닌 지역에 중점을 두는 것이고, 하의상달(下意上達)식으로 민간 사회가 발달하는 메커니즘이어야 지역 특색이 있을 수 있다. 중국 남방 지역은 산이 많아서 교통이 불편하고, 일부 지역은 30km 정도만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말을 알아듣기 어렵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지역 특색이 있다.

하지만 이런 특색은 종종 중앙의 대통일 정책과 충돌한다. 한때 베이징 당국은 광둥성의 링난(嶺南)문화를 없애려 한 적이 있다. 링난문화는 당국이 대통일에 불리한 요소로 간주하는 광둥어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는 베이징 관리들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리창이 말한 지역 특색과 시진핑 중앙의 강호(江湖) 대통일은 길이 다르다.

리창은 또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어렵지만 기층으로 찾아가면 해결책이 있다”면서 관리들에게 탁상공론만 하지 말고 ‘민중에게 대책을 물을 것(問計於民)’을 요구했다.

이런 방안은 중국 남부지역에서는 개혁을 성공시키는 길이긴 하지만, 지금의 ‘신시대’ ‘시진핑 사상’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근년에 베이징에서 유행하는 정책 추진 방식은 ‘정층설계(頂層設計·Top-level design)이다. 전체주의 체제하에서의 정책 결정·추진 경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방식이다.

중앙에서는 시진핑이 가장 ‘영명’하기에 최상위에서 정책을 주도하고, 지방에서는 지방 당서기가 가장 ‘영명’하기에 상명을 받들어 아래로 하달하는 방식으로 한층 한층 내려가며 압제한다.

계획경제가 결국 작동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베이징 조정은 ‘원조 공산주의자들’로 채워져 있고, 그들은 스스로 영명하다고 여긴다. 그들은 위로는 천문지리를 꿰뚫고 아래로는 역사의 흥망성쇠를 안다고 여기며 천하를 논하고 ‘정층설계’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민초들에게 계책을 물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리창이 기자회견에서 많은 말을 했지만 향후 국정 운영 방향을 가늠할 만한 내용은 별로 없다. 다만 그의 발언으로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는 있다.

첫째, 그는 전형적인 장쑤·저장 지역의 실용주의 관료로서 대인관계가 두루 원만하고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는 데 능하다.

둘째, 시진핑과의 관계가 보통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솔직한 견해를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리창은 시진핑을 옹호하고 시진핑의 권위를 세우는 한편, 거리낌 없이 자신의 복안을 밝혔다.

셋째, 리창은 국무원을 장악하지 못했고, 최소한 지금까지는 베이징의 관료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한 상태다.

넷째, 국가 차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을 내릴 엄두를 내지 못하거나 자신이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이 때문에 향후 몇 년 동안의 리창의 집권 특성은 분명해졌다. 그는 베이징의 권력 ‘팔괘진(八卦陣)’에 발을 들여 놓았으니 늪이 크고 물이 깊고 악당이 많아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을 것이다.

리창 외에 딩쉐샹(丁薛祥) 상무부총리를 비롯한 허리펑(何立峰), 류궈중(劉國中), 장궈칭(張國淸) 등 네 명의 부총리가 있다.

딩쉐샹은 과거 줄곧 중앙판공실 주임을 맡아 베이징 관료 시스템에 익숙하며, 주로 국무원의 얽히고설킨 여러 파벌을 다루는 일을 담당했다.

허리펑은 국가발전개혁위원회(NDRC) 주임으로 중국 경제 발전을 기획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샤먼대 재경학과를 졸업한 그는 앞으로 경제, 금융, 재정을 총괄할 것으로 보인다.

류궈중은 교육·보건·문체, 장궈칭은 농업·상무 등을 담당한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류궈중과 장궈칭은 모두 방산업계 출신으로 모두 국유경제와 관료 시스템의 베테랑이다. 그들을 부총리로 발탁한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리창이 국무원과 북방의 경제 모델에 익숙지 않고 대형 국유기업을 다루는 데도 익숙지 않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의 도움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시진핑이 ‘전쟁 준비’와 국민 경제의 군사화를 준비하는 문제를 크게 고려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전쟁이 발발하면 경제 전체가 뒷받침돼야 하고 민간 제조업을 전쟁 시스템에 포함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리창이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 베테랑 방산업계 출신 관리에게 의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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