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사냥개’로 신의 은총 노래한 천재 시인, 프랜시스 톰슨

김연진
2023년 04월 15일 오후 5:25 업데이트: 2024년 01월 19일 오후 5:27

나는 그분에게서 도망쳤네, 밤과 낮의 비탈길 아래로
나는 그분에게서 도망쳤네, 세월의 곡선 저 아래로
나는 그분에게서 도망쳤네, 내 마음의 미로 속으로
그리고 눈물의 안갯속에, 흘러가는 웃음 속에 그분을 피해 숨었네

(I fled Him, down the nights and down the days;
I fled Him, down the arches of the years;
I fled Him, down the labyrinthine ways
Of my own mind; and in the mist of tears
I hid from Him, and under running laughter.)

영국의 시인 프랜시스 톰슨(Francis Thompson)의 대표작 ‘천국의 사냥개(The Hound of Heaven)’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시의 화자는 도망자이며, 신으로부터 도피한 인물로 묘사된다. 또한 시에서 ‘천국의 사냥개’는 다름 아닌 신을 뜻한다.

해당 작품을 통해 프랜시스 톰슨은 신의 권능과 은총에 대해 찬양했다.

프랜시스 톰슨은 인생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던 자신에게 신이 찾아와 깨달음을 주고, 죄를 사하며, 삶을 구원해 줬다고 고백했다.

고난과 역경, 그리고 구세주

1859년,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프랜시스 톰슨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최종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는 등 좌절을 경험하고 크게 낙담한 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영국 런던으로 향했다.

낯선 도시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성냥이나 신문을 팔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던 프랜시스 톰슨은 아편에 손을 댔고, 결국 마약중독자로 전락했다.

그렇게 도시의 부랑자가 되어버렸지만, 프랜시스 톰슨은 손에서 펜을 놓지 않으며 작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프란시스 톰슨(Francis Thompson) | Public Domain

그러던 중 1887년, 그는 가톨릭 잡지 ‘메리 잉글랜드(Merry England)’의 편집장인 윌프리드 메이넬(Wilfrid Meynell)에게 편지와 시를 써서 보냈다.

윌프리드 메이넬은 프랜시스 톰슨의 시적(詩的) 재능에 감탄했고, 이후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인연을 맺었다.

윌프리드 메이넬과 그의 아내는 프랜시스 톰슨의 안타까운 사정을 알고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메이넬 부부는 건강이 좋지 않은 프랜시스 톰슨을 정성껏 보살펴줬다. 게다가 음식과 옷, 거처를 마련해 줬다.

프랜시스 톰슨이 ‘천국의 사냥개’를 쓴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천국의 사냥개

프랜시스 톰슨은 ‘천국의 사냥개’에서 신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신은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걸음걸이로, 장엄한 긴박함으로 도망친 영혼을 쫓는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네가 나를 배반하기에, 만물이 너를 배반하느니라.”

프랜시스 톰슨은 이 작품에서 신이 전지전능하며, 만물을 사랑하는 존재라고 노래했다. 또한 신은 지친 인간에게 평화를 가져다주고, 마음의 빈 곳을 채워주려고 찾아온다고 말했다.

심지어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도망쳐도, 신은 마치 사냥개처럼 끈질기게 도망친 영혼을 추적한다고 강조했다.

그 맹렬한 사냥개가 인생의 마지막 종착지로 안내하는 인도자(引導者)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결국 감격할 수밖에 없다고 프랜시스 톰슨은 말했다.

은혜에 대한 찬양

런던 거리를 전전하며 노숙 생활을 하던 프랜시스 톰슨은 이웃들의 도움과 친절, 자비 덕분에 구원되었다.

특히 메이넬 부부의 관심과 애정이 없었다면, 프랜시스 톰슨은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톰슨의 기념패(Memorial plaque to Thompson) | Martinevans123, Wikipedia

또한 메이넬 가족의 관대함과 보살핌은 프랜시스 톰슨의 많은 작품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프랜시스 톰슨은 1895년 작(作) ‘자매(Sister Songs)’를 통해 메이넬 가족의 친절함에 경의를 표했다.

이후 그의 작품은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 은혜에 대한 찬양으로 귀결됐다.

시의 언어로 세운 기념비

프랜시스 톰슨의 시는 어렵고 낯선 표현들로 가득하다.

‘천국의 사냥개’는 더욱 그렇다. 복잡한 구성과 형이상학적 주제, 추상적인 개념과 수사(修辭) 등은 물론이고 182행에 이르는 장대한 분량은 독자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작품 속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나면, 프랜시스 톰슨에게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소설가 J.R.R. 톨킨은 프랜시스 톰슨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극작가 유진 오닐은 어린 시절 ‘천국의 사냥개’를 접하고 감명받아 작품 전체를 통째로 외웠다고 고백했다.

또 소설가 G.K. 체스터튼은 1907년 프랜시스 톰슨이 사망하자 “우리는 가장 위대한 시적 에너지를 잃었다”고 그를 추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