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3세와 영연방의 운명은?

최창근
2022년 09월 13일 오전 11:30 업데이트: 2022년 09월 14일 오전 12:17

영국 역사상 최장기인 70년간 재위에 있었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서거 후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의 미래에 대한 여러가지 추측들이 나돌고 있다.

9월 12일, 로이터, AFP, ‘뉴욕타임스(NYT)’, ‘가디언’ 등 영미권 매체들은 영연방의 미래에 대해 집중 조망했다. 일부 영연방 회원국들이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으로 전환하려 한다는 것이다.

영국 국왕은 크게 3가지 지위를 가진다. 하나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즈·북아일랜드로 이뤄진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의 국왕이다.

다른 하나는 영연방 왕국(Commonwealth realm)의 ‘군주(君主)’이다. 영국 외 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 영국 국왕을 명목상 군주로 하는 14개 왕국을 통칭한다. 영국 외 국가에서는 국왕(여왕)을 대리하는 ‘총독’이 국가원수의 권한을 행사하며, 이 나라들의 영토는 총 1,880만 제곱킬로미터이며 1억 3500만 명의 인구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 국왕이 군주를 겸하는 영연방 왕국 15개국 현황. | 연합뉴스.

나머지 하나는 56개 영연방 회원국의 수장이다. 영연방은 지난날 영국을 식민 모국(母國)으로 하는 국가 연합체이다. 영연방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과 자치령(Dominion) 정부 간 연합 조직으로 출범했다. 본래 ‘대영제국(British Empire)’은 본토인 영국이 다수의 자치령과 식민지(속령)을 거느리는 형태였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캐나다, 호주 등 자치령들이 보다 많은 자치권을 요구하였고, 1931년 영국 정부가 웨스트민스터 헌장으로 그 요구를 수용했다. 그 결과 자치령들은 외교권·군사권까지 자체적으로 가지게 돼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고 이후 본국 영국과 자치령들의 입장을 조율하기 위한 조직으로서 영연방을 창설하게 됐다. 영연방 창설 당시 소속 국가들은 영국의 군주를 국가 원수로 삼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54개국 중 15개국만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로 인정하는 영연방 왕국이 따로 생겼다.

영연방 휘장. | 영연방 홈페이지.

영연방이 존속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영향력이 있었다. 여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947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평생 영연방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발표했다. 1952년 즉위 후에는 각국을 순방하며 결속력을 높였다. 이러한 엘리자베스 2세는 21세기에도 영국의 왕실을 유지시킨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힌다. 여왕은 강인한 성격과 유머 감각을 갖추고 있어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엘리자베스 2세 개인의 매력으로 왕실로부터 독립하려는 나라는 비교적 적었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여왕 사후 영연방 내 균열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추락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여왕 사후 일부 국가는 찰스 3세를 새로운 국가원수로 선포한 반면 일각에선 공화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특히 영국이 과거 자행했던 노예 무역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은 자메이카 등을 중심으로 군주제 폐지 여론이 불붙고 있다.

9월 11일, 호주와 뉴질랜드는 찰스 3세의 즉위를 즉각 선포했다. 호주에서 영국 국왕의 지위를 대리하는 데이비드 헐리 호주 총독은 캔버라 국회의사당에서 찰스 3세를 국가원수로 선포했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도 “찰스 3세 즉위로 뉴질랜드와 영국의 관계가 더 깊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서거 사흘 뒤인 지난 9월 12일, 영연방 왕국 소속인 카리브해의 도서국 앤티가 바부다가 공화제 전환을 위한 국민투표를 3년 안에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같은 카리브해의 자메이카에서도 공화정 논의가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앤드루 홀니스 자메이카 총리는 지난 3월, 찰스 3세의 장남 윌리엄 왕세자(당시는 왕세손) 부부가 자메이카를 방문했을 때 자메이카가 영국 왕실과 결별하고 공화정으로 독립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2021년 자메이카는 과거 영국인 노예 소유주들이 아프리카인 60만 명을 강제 이송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영국 정부에 보상을 요구한 바 있다.

공화제를 택하려는 움직임은 바하마, 벨리즈 등 카리브해의 다른 영연방 국가에서도 속도를 내고 있다. 영연방 핵심 국가 중 하나인 캐나다와 호주에서도 공화제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호주 연방의회 제3당인 녹색당의 애덤 밴트 대표는 엘리자베스 2세 서거 이튿날 “호주는 앞으로 나아가 공화국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는 “지금은 여왕에게 경의와 존경을 표해야 할 때이다. 공화제 전환 이야기는 바람직하지 않다.”라며 선을 그었지만, 정치권 내에서는 이번 기회에 해묵은 과제인 ‘공화국 전환’을 이뤄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연일 높아지고 있다. 현재 추세를 볼 때 호주의 공화제 지지 여론이 높아 전환은 시간문제로 전망된다. 중도좌파 성향의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는 6월 1일, 공화국 추진을 전담하기 위하여 법무장관 아래에 ‘공화제담당 차관(Assistant Minister for the Republic)’을 신설하기도 했다.

지난 4월 여론조사 기관 앵거스리드연구소가 캐나다 국민을 대상으로 시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영국인 국가원수에 대해 찬성하는 비율은 26%에 불과했다.

엘리자베스 2세의 뒤를 이어 새 국왕이 된 찰스 3세를 국가원수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비율은 67%에 달했다.

메리 사이먼 캐나다 총독. 캐나다 원주민 이누이트족 출신으로 첫 총독이 됐다. 영연방인 캐나다의 총독은 국가 수반인 영국 국왕을 대행하는 직책으로, 의회 개회 및 정회 선언, 각종 법안에 대한 왕실 인가, 캐나다 군 최고사령관 등의 역할을 맡는다. | 연합뉴스.

이 속에서 찰스 3세 국왕도 즉위 직후 영연방 핵심 인사를 만나는 등 ‘영연방 다지기’에 나섰다는 관측이 나온다. 엘리자베스 2세가 2015년 중단한 영연방 국가 국빈방문도 재개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찰스 3세의 측근은 “찰스 3세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국가원수로 모신다는 것이 조금은 우스꽝스럽다는 견해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며 일부 영연방국의 공화국 전환 움직임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 목소리는 내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25세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역사상 최장 기간 재임하며 그야말로 ‘살아있는 역사’였던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찰스 3세가 잘 이어갈 수 있을지 관심이 주목된다고 외신들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