쩡칭훙이 왕치산을 공격하는 배후 원인과 비밀

샤샤오창(夏小強)
2017년 12월 16일 오전 11:44 업데이트: 2024년 02월 19일 오후 3:24

19차 당대회 이후 시진핑(習近平)과 장쩌민(江澤民) 집단 간의 치열한 정치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사건이 바로 장양(張陽·66·사진) 전 정치공작부 주임(상장·대장급)의 자살이었다. 왕치산(王岐山)이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고 있으며 국가부주석을 맡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나오면서 상황은 한층 악화되는 조짐이다.

자살한 장양이 정변에 참여했다는 말이 나오는 가운데 한 소식통은 그가 팡펑후이(房峰輝) 전 중앙군사위 정치공작부 주임과 함께 1976년 ‘사인방(四人幫)’을 체포하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시진핑 정권을 통제하려 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결국 이들의 계획은 폭로됐고 시진핑은 단호하게 둘을 체포해 정변을 저지했다.

그러나 팡펑후이와 장양 등 여러 인물은 구체적인 계획을 실천으로 옮긴 사람일 뿐 막후에는 계획을 세운 또 다른 인물이 존재한다. 장양은 쉬차이허우(徐才厚)의 직계였고 팡펑후이은 궈보슝(郭伯雄)의 심복이었다. 쉬차이허우는 죽었고 궈보슝은 낙마했다. 따라서 장양을 배후에서 조종할만한 인물로는 장쩌민파의 2인자 쩡칭훙(曾慶紅)이 유력하다는 관측이다.

왕치산과 쩡칭훙은 각각 시진핑과 장쩌민의 집권기에 2인자를 지냈다. 고위층의 정치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친족 세력과 인맥임을 고려한다면 이 둘의 중요성은 상당하다.

특히 시진핑 집권 5년 동안 장쩌민 세력과의 치열한 정치투쟁은 왕치산과 쩡칭훙 간의 대결 양상으로 직접 나타나기도 했다.

19차 당대회 전까지 쩡칭훙은 장쩌민 세력의 필사적인 반격을 주도해왔다. 그리고 왕치산은 시진핑이 실시한 반부패 호랑이 사냥을 이끈 주요 인물이었다. 반부패 운동은 공산당 내부, 특히 장쩌민 집단의 여러 가족을 포함한 세력을 겨냥하고 있었다. 쩡칭홍은 왕치산을 공격해야만 자신의 청산을 피할 수 있는 처지가 됐다.

장쩌민 세력은 왕치산에 대해 끊임없는 여론 조작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심지어 암살도 여러 차례 시도했다. 이를 위해서 쩡칭훙은 해외 특수요원과 자신의 통제하에 있는 언론을 적극 이용했다. 언론은 연일 왕치산에 대한 부정적인 소식을 보도하고 시진핑과의 불화 소식을 퍼뜨렸다. 이간질의 목적은 둘의 정치적 동맹관계를 단절시키는 데 있었다.

만약 왕치산이 핵심 권력을 장악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쩡칭훙의 공격이 대부분 실패했음을 입증한다.

왕치산은 어떤 인물인가 

왕치산의 장인 야오이린(姚依林)은 중국 공산당의 제1대 지도자이자 공산당 설립 이후 경제를 책임진 고위 간부이다. 또한 정치국 상무위원과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했다. 정치계에 뛰어든 왕치산은 야오이린에게 정치적 능력을 전수받았다.

왕치산은 금융업, 지방 고위관직, 중앙부위(部委, 국무원 산하의 부와 위원회) 및 국무원의 부총리를 역임했다. 외부에서는 그를 ‘소방대장’, ‘해결사(清道夫)’ 라고 불렀으며 주로 경제를 담당해왔다. 하지만 시진핑이 2012년 중국 공산당 18차 당대회에서 집권하면서 왕치산은 중앙기율위원회에 배치됐다. 그는 반부패 호랑이 사냥을 이끌면서 시진핑의 조력자로 거듭났다. 고강도로 진행된 반부패 운동은 중국 공산당, 군대 및 지방 정부 등에 암약한 장쩌민 세력을 와해시키고 새로운 인사체제를 만들어냈다. 5년이 넘는 기간 그는 시진핑을 도와 당·정·군(黨政軍) 고위 관료 수백 명을 실각시켰다. 그중 대부분은 장쩌민 세력이다. 여기에는 정국급(正國級·국가지도자급) 저우융캉(周永康)과 ‘부국급'(副國級·부총리 등과 동급) 관료인 쑤롱(蘇榮), 쉬차이허우, 궈보슝, 쑨정차이(孫政才) 등이 포함돼 있다.

쩡칭훙은 어떤 인물인가 

1989년 6∙4사건(천안문 사태)을 통해 베이징에 진출한 장쩌민은 중앙 총서기를 맡고 있었다. 당시 그는 양상쿤(楊尚昆)과 리펑(李鵬)에게 쩡칭훙을 중앙 판공청 부주임으로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장쩌민이 그들에게 제시한 유일한 요구였다. 그 이유는 쩡칭훙 집안의 정치적 자산과 베이징 지역의 광범위한 인맥 때문인 것으로 알려진다. 즉 장쩌민 집권 이후 벌어진 권력 남용과 재난은 대부분 쩡칭훙으로부터 초래된 것이다.

쩡칭훙의 아버지인 쩡산(曾山)은 당의 원로간부이자 특무 기관의 수장을 지냈다. 또한 그는 내무부 부장(장관)을 역임했다. 쩡칭훙은 아버지 세력을 이용해 정계에 진출했다. 그의 가족들 역시 고위관료로, 둘째 동생 쩡칭화이(曾慶淮)는 문화부 관리였다. 그는 문화 관련 사업을 이끌면서 형인 쩡칭훙을 위해 홍콩 특무와 중국 전역의 예술계를 장악했다. 셋째 동생 쩡칭양(曾慶洋)은 군사과학원 군제연구부(軍制研究部) 부장이자 소장(少將)이며, 넷째 동생 쩡칭위안(曾慶源)은 공군 후근부(後勤部) 부장이자 소장이다. 여동생 쩡하이성(曾海生)은 중국인민해방군총참모부(中國人民解放軍總參謀部) 관리보장부(管理保障部) 정치위원이자 소장이다. 조카딸 왕샤오링(王曉玲)은 광저우(廣州)시 부시장 겸 기율위 서기를 지냈는데 각종 범죄사건에 연루돼 여러 차례 실명 신고를 당한 바 있다.

쩡칭훙의 부친 쩡산은 중국 공산당 동남국(東南局), 화중국(華中局) 조직부장을 지낸 뒤 방직부 부장, 상업부 부장, 교통부 부장, 내무부 부장을 역임했다. 이는 시간이 지나 쩡칭훙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됐다. 쩡칭홍의 어머니 덩류진(鄧六金)은 장정(長征)에 참여한 27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기관보육원의 설립자이자 원장이었다. 이 보육원은 ‘태자당의 요람’으로 불린다.

쩡칭훙은 군대와 석유사업 부문에서 근무한 바 있으며 후기에는 중앙조직부와 국가안보시스템, 중앙판공청, 공산당 간부학교, 통일전선부 등 핵심부처를 장악했다. 당시 그가 심어놓은 간첩들은 당 내부와 각 지방 및 해외에까지 포진돼 있다. 쩡칭훙은 장쩌민 세력의 파룬궁 박해를 주도했으며 시진핑을 겨냥한 정변과 정권찬탈을 배후에서 조종해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자원을 총동원해 시진핑에 대항하고 있다.

쩡칭훙이 왕치산을 공격하는 숨겨진 이유

쩡칭훙이 왕치산을 공격한 주된 이유는 바로 쩡칭훙 집안의 재산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쩡칭훙 집안은 장쩌민 집안 못지않게 탐욕스러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쩡칭훙 일가의 재산은 거의 천 억 위안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공권력을 남용해 강제로 국가자원을 분할하는 바람에 산둥루넝(魯能)의 700억 위안이 유실된 사건은 유명하다. (쩡칭훙의 아들 쩡웨이(曾偉)가 자산가치가 738억 위안에 달하는 산둥(山東)성 최대 국유 전력기업 루넝(魯能)그룹을 37억 3000만위안에 사들였다). 또한 그들은 ‘나라를 팔아 돈세탁’을 해왔다. 후진타오(胡錦濤) 집권 초기 쩡칭홍은 장쩌민 일가와 함께 수중의 권력을 남용해 대만에 대한 ‘타협 정책’을 수 년 동안 비밀리에 진행했다. 이와 함께 군사와 정치력을 악용해 돈세탁에 나섰다.

홍콩 언론이 폭로한 바에 따르면 쩡칭훙 일가의 재산은 베이징, 톈진, 산둥, 상하이, 홍콩, 호주 등 각지에 은닉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형제와 아들, 며느리, 조카들까지 최소 12명의 가족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데, 국내에 있는 재산만 무려 430억~470억 위안으로 추산된다.

부정부패 외에 쩡칭훙이 저지른 죄악은 무수히 많다. 파룬궁 박해, 파룬궁 창시자에 대한 수차례 암살 시도뿐 아니라 ‘초한전'(超限戰) 방식으로 시진핑을 겨냥해 끝없는 정변 모의를 실행해왔다. 이 과정에서 중국 금융과 경제를 파탄으로 이끌었으며 여러 도시에서 살육 사건을 벌여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쩡칭훙이 야심이 넘치는 정치인이라는 점은 공산당 고위층 사이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저우융캉은 체포되고 난 뒤 장쩌민의 투병 기간 비밀리에 쩡칭홍을 만나 인사명부 초안을 작성한 사실을 자백했다. 쩡칭홍의 목적은 바로 보시라이가 베이징에 입성해 시진핑을 견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최고의 위치에 군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쩡칭훙은 장쩌민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대내외적으로 장쩌민파 잔여 세력을 규합해온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이미 장쩌민파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쩡칭훙이 수사 대상으로 오르지 않는 것 또한 장쩌민 세력이 시진핑과 왕치산에 대한 공격과 정변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쩡칭훙은 부패하고 음란하며 장쩌민과 다름없다. 그는 각급 관료들과 복잡다단하게 관련돼 있다. ‘경친왕(慶親王)’ ‘야심가’라는 칭호가 언론에 나타날 때마다 시민들은 악명 높은 쩡칭홍의 별칭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중국 사회와 국민들이 반부패 운동에 거는 기대는 다름 아니라 쩡칭홍과 장쩌민의 법적 처벌에 있다.

향후 쩡칭홍에 대한 수사가 진행된다면 중국사회가 곤경에서 빠져나온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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