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외교부는 왜 시진핑과 엇박자일까?

샤샤오창(夏小強)
2017년 07월 21일 오후 6:37 업데이트: 2024년 02월 19일 오후 3:25

중공군과 인도군이 접경 지역에서 대치하는 가운데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인도 모디(Narendra Modi) 총리가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브릭스(BRIC,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공) 비공식 회의를 가졌다고 인도 최대 민영방송사 뉴델리 TV(NDTV)가 7월 7일 보도했다.

이날 시 주석은 모디 총리와의 만남에서 ‘테러리즘 척결에 대한 인도의 굳건한 결심’에 감사를 표했다. 또한 인도가 경제·사회 분야에서 거둔 성과를 높이 평가했으며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불과 하루 전인 7월 6일 중국 루캉(陸慷) 외교부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시 주석이 모디 총리와 만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했다. 특히 이 대변인은 최근 홍콩 관련 브리핑에서 ‘중(中)-영(英) 공동성명(홍콩반환협정)’은 역사적 문서라고 말하며 “그것은 중앙정부의 홍콩 관리에 어떠한 구속력도 발휘하지 않는다”고 밝혀 여론에 파란을 일으킨 바 있었다. 이 또한 시 주석이 민주파 홍콩 인사와의 회동에서 했던 말과 불일치한다.

중국 외교부는 인도군의 국경 침범에 대해 ‘매우 심각한 사건’이라고 언급하며, 안보주권을 위협하며 국제법 규범을 짓밟았으므로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고 밝혔다. 관영언론 인민일보(人民日報)는 ‘인도군의 불법 국경 침범, 국제법 준칙을 짓밟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외교부의 입장을 지지했다.

시진핑과 인도의 외교 정세

최근 국경지대를 둘러싸고 중국군과 인도군이 드물게 근거리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이는 1962년 중국-인도 전쟁 이후 발생한 최장기간 군사 대치로, 현재까지도 갈등은 완화되지 않았다. 중국 공식매체는 비교적 엄중한 성명을 발표하여 인도를 질책했다.

시진핑 주석은 집권 이후 인도를 포함한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 완화를 목적으로 유연한 외교 정책을 펼쳐왔다. 따라서 이번 중국과 인도 간의 긴장된 대치 국면은 시진핑 당국의 외교적 목표와 명백히 모순되는 것이다. 특히 이 같은 비정상적인 정황과 유사한 일이 과거 시진핑에게 두 차례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4년 9월 17~19일 시 주석의 인도 방문은 양국 관계의 돌파구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모디 총리가 시 주석을 초대해 환영만찬을 베풀기 1시간 전, 중국군 800 명이 돌연 인도와의 접경선을 3km 넘어선 지점에 주둔했다. 인도 언론은 이를 ‘침입’으로 받아들였다. 중국 외교부 역시 이 사실을 확인했다.

이와 관련 포브스(Forbes)지는 사설을 통해 제3자의 입장에서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예기치 않은 실수인가, 고의적 행동인가, 목적이 대체 무엇인가? 중국 공산당 최고 사령부 또는 정권 내 일부 고위급 간부들이 시 주석을 깎아내리려는 시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시진핑이 인도를 방문하기 전인 9월 16일, 인도 주재 중국 대사 웨이웨이(魏葦)가 돌연 면직됐다. 이는 중국 외교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시 주석은 인도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9월 21일, 바로 중국 공산당 전군 참모장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시진핑은 ‘호령의식(號令意識) 강화’, ‘정치 명령과 군령의 원활한 소통 확보’ 등을 강조했고, 군대를 엄격히 통제하기 시작했다. 또, 같은 해 10월 30일 그는 푸젠(福建)성 구톈(古田)에서 15년 동안 중단되었던 전군정치공작회의(全軍政治工作會議)를 개최했다. 시진핑 주석은 조사 중인 쉬차이허우(徐才厚) 전(前) 군사위 부주석을 공개 비판하며 쉬차이허우 사건의 해악을 철저히 제거하라고 전군에 요구했다. 그 후, ‘군 호랑이’들이 대거 낙마하기 시작했다.

시진핑 주석이 중앙아시아 방문 및 모디 총리와의 회견을 앞둔 2017년 6월, 중국군 헬리콥터 한 대가 중국과 인도 ‘국경선’ 우타란찰(Uttaranchal)의 중국과 인도 분쟁 지역 중 인도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측으로 날아 넘어갔다. 스와라지(Sushma Swaraj) 인도 외교부 장관은 대표적인 영공 침해 사건이며 이 문제를 제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 정부는 또한, 모디 총리가 향후 중국-인도 정상 회담에서 시 주석에게 이 사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같이 난감한 국면과 시 주석-모디 총리 간 밀접한 관계는 선명하게 대비된다. 예를 들어 모디 총리는 몇 년 간 시진핑의 생일을 축하해 왔다. 2016년 6월 15일 오전 모디 총리는 웨이보에 시진핑 생일 축하 메시지를 시 주석과 악수하는 사진과 함께 올렸다.

장쩌민파 외교부

중국 외교부는 오랫동안 장쩌민파의 수중에 있었다. 1993년부터 2013년까지의 첸치천(錢其琛), 탕자쉬안(唐家璿), 리자오싱(李肇星), 양제츠(楊潔篪) 등 4명의 외교부 장관 모두가 장쩌민파였다. 특히 1998년에서 2001년 주미 대사직에 있었던 리자오싱은 장쩌민(江澤民)이 해외로 폭력을 확대하는 데 있어서 유능한 수하 노릇을 해왔다. 외교적으로는 장쩌민의 파룬궁(法輪功) 박해를 대변하고 후진타오(胡錦濤)를 감독, 통제했다.

따라서 시진핑이 취임하자마자 맞이한 가장 큰 압박과 위기는 외교적, 외부적 상황에서 기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내부로부터 시작됐으며 주로 장쩌민파가 주도했다. 그들은 시 주석을 겨냥한 지속적인 정변 모의와 권력 찬탈 시도를 되풀이했다. 시 주석은 취임 5년 이래로 계속해서 반부패 호랑이 사냥을 해왔는데, 이는 장쩌민 일파의 정변 시도에 대한 대응이었다. 외교는 내정의 연속이다. 시진핑 주석은 집권 후 잦은 외교적 방문을 통해 미국 등 강대국 및 주변국가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일본과의 관계 완화도 이러한 일환이었다.

장쩌민파는 외교 시스템 장악을 통해 국제 이슈를 조성하여 정부에 압박을 가하거나 중국 내 정치 게임에 활용했다. 시 주석 취임 이후에도 장쩌민 일파는 줄곧 이러한 조작을 계속해왔다.

후진타오의 교훈

후진타오 주석 재임 당시의 상황을 돌이켜 보면 중국 외교 시스템이 장쩌민의 손아귀에 있다는 사실은 더욱 명백해진다.

2002년 초 후진타오 전(前) 주석은 장쩌민의 후임으로, 중국 공산당 총서기 및 국가주석에 오르기 전 미국을 방문한 바 있었다. 당시 미국은 국가주석에 준하는 대우로 그를 맞이했다.

미국 전 부통령 딕 체니는 자신의 책, <나의 시대: 사적이고 정치적인 회고록(In My Time: A Personal and Political Memoir)>에서 후진타오 전(前) 주석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서재로 초대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의례적인 인사말도 채 마치기 전에 중국 외교부 리자오싱 부부장이 들이닥쳤다.

체니의 참모는 리자오싱 부부장을 정중하게 제지하며 체니 부통령과 후진타오 주석이 일대일 회담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리자오싱은 이를 무시하고 들어가, 체니와 후진타오 사이에 앉기까지 했다. 이 사건으로 후진타오가 크게 분노했다고 알려졌다.

또 다른 일화로, 2004년 초 장쩌민이 군사위 주석 자리에 있을 당시 체니 부통령이 베이징(北京)을 방문했다. 워싱턴에서 출발하기 전, 부시 전(前) 미 대통령은 부통령에게 민감한 정보 하나를 후진타오 주석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부시 대통령은 체니에게 반드시 독대하는 자리에서 전달할 것을 강조했다.

정부 공식 회담 뒤, 후진타오와 체니는 자리를 옮겨 일대일 회담을 진행했다. 이때에는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았다. 체니는 자신이 대통령의 지시를 잘 전달했다고 여겼다.

체니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회의실을 나섰을 때 참모가 조용히 그에게 다가왔다. 옆방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스피커 앞에 모여 그와 후진타오의 회담 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전했다. ‘사적 회담’이 ‘현장 중계’로 변모한 셈이었다. “저는 일이 잘 진행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체니는 자신의 책에서 씁쓸하게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2007년 4월 27일 리자오싱이 외교부 장관직에서 해임되고, 양제츠가 그 뒤를 이었다.

당연히 시진핑 주석은 위와 같은 일이 자신에게 발생하도록 좌시하지 않았다.

외교부와 시진핑, 엇박자의 이유

2013년 3월, 왕이(王毅)가 시진핑의 신임을 얻어 양제츠 대신 중국 외교부장직에 올랐다.

시진핑 정부 출범 후 외교부 고위층은 최소 두 차례 이상 대규모 조정됐다. 왕차오(王超) 상무부 부부장이 외교부 부부장으로 전임했는데, 외부에서는 시진핑 당국이 외교부에 ‘모래 섞기(摻沙子)’를 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더 이상 외교부 고위급 관료들의 ‘근친 번식’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라는 것이다.

2015년 1월 초, 외교부 장쿤성(張昆生) 부장조리(차관급) 겸 예빈사(의전국) 사장(국장)이 부패 혐의로 낙마했다. 장쿤성은 제18차 당대회 이후 처음으로 낙마한 고위급 외교관으로, 리자오싱 전(前) 외교부장의 비서이기도 했다.

시진핑이 집권한 지 5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외교부가 중대한 국제 사건과 장소에서 계속해서 시 주석과 엇갈린 발언을 내보내는 데는, 다음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첫째, 외교부 관료들이 고의가 아닌, 단지 중국 외교 시스템 운영상 관례에 따른 언행일 수 있다. 이는 중국 공산당 체계가 관성적으로 운영되며 벌어진,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관료들은 중국 공산당 체제하에서 언어와 사유에 제한돼 있으며 공산당의 경직된 투쟁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시진핑이 관례적 투쟁 외교 방식과 다른 방식을 취할 경우 공산당 체제는 본능적인 저항 또는 제약에 부딪히게 된다. 외교부와 시진핑의 외교상 나타나는 엇박자가 바로 이러한 상태를 반영한다. 시 주석이 공산당의 기존 정책과 방식을 벗어 던지니, 기존 체제 내 관료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둘째, 시진핑과 장쩌민 집단 간 치열한 경쟁이 외교상으로 확대됐다. 특히 중국 공산당 제19차 당대회 개최를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장쩌민 일파는 19차 당대회 이후로 정치적으로 전멸할 위기에 직면했다. 이 때문에 마지막 구명의 기회를 붙잡아 난국을 조성, 판세를 역전시키려 하고 있다. 또 그들은 중국 공산당의 기득권, 이익집단을 규합하고 당 내부 및 각 영역별 부처에서 잔여 세력을 모아, 다방면에서 시진핑 주석을 상대로 초한전을 벌여 정변·탈권 시도를 계속하는 중이다.

중국이 공산당 체제로 운영되는 현 상황에서 외교부와 시진핑 주석 간의 엇박자 행보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공산당 체제 자체로 인해 시진핑 정부에 초래하는 장애와 방해, 그리고 체제 유지가 불러오는 파멸적 결과는 갈수록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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