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공자 불러내 ‘공산당’ 살리려는 중국(하)

2017년 04월 21일 오후 1:47 업데이트: 2020년 06월 12일 오후 5:26

공자(孔子, BC 551 ~ BC 479)의 이름은 구(丘)로, 자(字)는 중니(仲尼)이다. 노나라 추읍(陬邑, 지금의 산동성 취푸(曲阜)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은 송(宋)의 율읍(栗邑, 지금의 허난성 샤이(夏邑)현)이다.

‘공자학원’은 성인에 대한 수치

‘태극수련복을 입고 사람들이 침착한 자세로 태극권을 연습하고 있다. 뒤에 있는 외국 어린이들도 요리조리 몸짓을 따라하며 흉내 낸다. 오른발을 내미는 아이, 왼다리로 발길질하는 아이, 혀를 내미는 아이….’ 이는 뉴스에 보도된 해외 ‘공자학원’ 교실의 모습이다.

세계 최초의 공자학원은 2004년 6월 15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정식으로 설립됐다. 한반(漢辦·중국어보급위원회) 직원에 의하면 공자학원은 공자 사상에 대한 교육을 다루는 곳이 아니라 공자의 이름을 빌려 세계에 중국어를 널리 퍼뜨리고자 설립된 기관이다. 실제로 많은 공자학원들은 외국인들에게 공산당을 찬양하는 가곡을 가르치는 등 공산당 이념과 문화를 설파하는 데 애쓰고 있었다.

각국에 설치된 공자학원은 사실상 공자의 이념과 사상을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공산당의 왜곡된 이념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가장 전형적인 예가 오스트리아 그라츠 대학의 공자학원이다. 그들이 주최한 한 포럼에서 해당 학교의 교수는 자신이 이전에 마르크스가 다녔던 본 대학에서 공부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발언을 시작했으며 마르크스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 태국 동방대학의 공자학원은 중국과 태국, 양국의 교사와 지원자들을 모아 10월 1일에 정권찬탈 60주년 열병식을 시청하게 했다.

2008년, ‘공자학원’의 예산은 18억 위안에 달했으며 책정 예산 역시 매년 높아졌다. 이와 함께 ‘희망공정(希望工程)’을 20년간 진행하여 50억 위안 가량을 모금하기도 했다.

중국은 이렇게 많은 돈을 국외 교육에 투입하면서 어째서 본국의 아이들에게는 투자하지 않는 것일까? 손해를 감수하며 ‘소프트파워 수출’이라는 명목 하에 벌어지는 이러한 행위는 해외 교포들을 더 실망하게 만든다고 홍콩의 학자 우싼싱(吳三興)은 지적했다. 교포들의 경멸을 살 뿐만 아니라 분열을 더욱 키운다는 것이다.

한 업계 인사가 폭로한 바에 따르면 ‘공자학원’이라고 불리는 기관들은 소위 ‘삼무학원(三無學院)’으로 불리는데, 법적 보증, 학술적 자격, 정규 교사가 없기 때문이다. 공자학원들은 운영 과정에서 거액의 적자를 공통적으로 기록했다. 적자의 원인은 다양한데 가장 큰 문제는 운영형식과 재무상황의 불투명성이었다. 결과적으로 공자학원은 중국 정부의 대표적인 예산 낭비 사업인 동시에 교육부 직원들이 각국 화폐를 임의로 인출하는 현금 인출기와 같은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2011년 12월에 열린 ‘제6차 공자학원대회’에 초청된 각국의 청년 가수들 다수가 공산당을 찬양하는 ‘홍가(红歌)’를 불렀다. 선전부장 리창춘(李長春)은 ‘공자학원’을 ‘대외선전’ 부처의 중요한 구성요소라고 말한 바 있다. 공자학원은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고 공산당 찬탈기념일을 경축하며 공산당의 ‘홍가’를 부르게 한다. 이는 다만 한 가지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바로 공자학원이 유명무실한 교육기구라는 것이다. 즉 공자라는 이름을 내걸었지만 교육기구의 모습을 어설프게 취한 것에 불과했다. 공자학원은 중화문화를 선양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성현을 욕되게 하고 있었다.

2017년 3월 3일, 중국의 해외 ‘공자학원’의 내막과 진상을 폭로한 다큐멘터리 <공자의 이름으로>가 캐나다 온타리오의 벨르빌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최초 상영됐다. 평가위원은 <공자의 이름으로>에 대해 “이 다큐멘터리는 놀라운 디테일을 담고 있으며 악독한 (공산당의) 심보, 그리고 평민영웅을 동시에 보여주며 수십억 달러로 착복하는 학원의 배후를 밝혀냈다”고 평가했다.
◈ 공자를 왜 못살게 하나

중국은 왜 공자를 못살게 구는 걸까? 공자의 사상인 ‘인, 의, 예, 지, 신’은 인간의 정도이며, 이를 통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齐家治国平天下, 심신을 닦고 집안을 정제한 다음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함.)’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의 공산주의와 투쟁철학은 이단사설로 사람을 해치고, 가정을 파괴하며, 나라를 망치고, 중화(中華)를 어지럽게 할 뿐이다. 1949년, 공자가 대표하는 중화전통문화와 공산당이 대표하는 마르크스 레닌 공산주의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그리고 정권을 잡은 공산당은 천하를 통일하고자 했던 공자에 대해 무조건적인 전쟁을 선포했다. 이것이 바로 중국이 공자를 괴롭히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중국전통문화는 사실상 도교, 유교, 불교, 삼대종교를 핵심으로 한다. 이 세 사상은 중국인의 도덕적 기반을 함께 구성해왔다. 이 때문에 소위 말하는 ‘문화대혁명’은 사실상 ‘완전하고 철저하게 중국 5천년 전통문화의 명을 끊는 운동’이나 다름없었다. ‘문화대혁명’의 ‘대(大)’자는 구체적으로 ‘완전하고 철저하게’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현재 문혁시기를 되돌아볼 때, 문화대혁명이 두 가지 절차에 따라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불교와 도교를 멸절시키는 것, 둘째는 유교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통문화가 파괴된 중국에서 문화적 공백은 생기지 않았다. 중국전통문화를 멸절시키는 과정 속에서 공산당 문화를 확고히 해나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공산당은 힘을 모아 중국을 10년간 파괴해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10년간의 문혁 과정에서 중국은 ‘파사구(破四舊, 4대악습철폐-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 운동을 통해 불교와 도교의 승려를 내쫓았으며 사찰, 경전에서 문물을 거의 파괴한 후 말기에 접어들어 ‘비림비공’을 시작했다. 불교 및 도교에 대한 파괴와 공자에 대한 비판으로써 얻는 결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전자를 통해서 정신에서 물질에 이르기까지 신불에 대한 신앙 개념을 철저히 제거했다. 이를 통해 무신론과 유물론이 통치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반면 후자를 통해서 ‘인, 의, 예, 지, 신’ 사상을 사람들 마음속에서 철저히 뿌리 뽑았다. 그리고 투쟁철학을 뿌리내리고 독재 및 폭정을 진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그렇기에 중국은 공자를 제거하는 데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즉, 공자묘를 팠던 사건은 ‘4대악습철폐’ 내지 전체 10년 문혁과정 중 가장 큰 ‘단일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그 아이디어는 최고위부로부터 나왔으며 주도면밀한 계획, 높은 기세, 많은 인원, 긴 시간, 파괴한 문물 수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상당한 기록을 세웠다.

‘신을 멸망케 하고자 하는 이는 필히 미치게 된다.’ 역사상 몽골족의 원나라가 송을 멸망시켰을 때에도,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웠을 당시에도 공자묘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중화의 주인이 누구였든지 간에 성현 공자는 추앙을 받았다. 하지만 공산당이 일으킨 ‘문혁’ 대란만은 피할 수 없었다. 공산당이 파괴한 중국 선현이 어찌 공자뿐이겠는가? 이와 관련한 검색어를 바이두에 검색한다면 기나긴 명단을 볼 수 있다. 누구라도 이에 분노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