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정치와 혁명의 틈에서 되새기는 ‘중국인 후스즈’

허칭롄(何淸漣)
2015년 08월 20일 오후 1:32 업데이트: 2024년 02월 19일 오후 3:27

전반적인 서양화 주장, 계몽 운동과 어려운 문체 대신
일상 생활 쓰이는 말을 그대로 작품에 쓰자는 ‘백화 운동’ 추진

역사상 인류사회에서 역사적 인물 한 사람을 놓쳐서 끝없는 아쉬움을 남긴 많은 사례가 있다. 일의 공로가 주가 되어 놓친 역사적 인물 장쥐정(張居正)을 예로 들자면 사람들은 만력(萬曆) 중기 이후 명나라 통치 사정이 점점 나빠졌기 때문에 ‘세상에 다신 없을 장쥐정’이라는 감탄을 내뱉었다. 그러나 생각에서부터 역사의 갈림길을 바꾸고 싶어하는 일반 사람들은 그의 가치를 알기 어렵다. 다음은 <중국인 후스즈>를 읽은 감상이다.

후스와 천두슈, 중국 현대화의 양대 표지

후스의 사상에 대해 연구한 학술 논문은 꽤 많다. 하지만 이 시대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열심히 책을 읽는 사람들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류나이슌(劉乃順)과 티엔총슈에(田崇雪)라는 두 명의 작가는 후스의 일생을 장편의 문학 다큐멘터리 극본으로 쓸 예정이다. 다시 말해 TV드라마라는 형식을 통해서 더 많은 중국 사람이 후스를 알게 하고 이해하도록 하고 싶은 것이다.
작가는 역사 재현이라는 취지로 이 책은 결코 해학적으로 서술한 책 따위가 아니라 대략 모든 이야기가 모두 본질을 가지고 있다. 역사에 흥미는 있지만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어하지 않는 현대 중국인에게 이 책은 한 권의 좋은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책 속 후스와 진독수(陳獨秀) 두 사람의 길은 다르지만 우정의 끈은 끊어지지 않은 ‘은원지교’에 매우 흥미가 있다. 진독수는 만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5·4운동은 중국 현대사회 발전에 있어 필연적인 산물이다. 맞든 틀리든 간에 그 몇 사람에게 잘못을 돌리면 안됐다. 그러나 채원배(蔡元培)선생, 스즈(適之)그리고 나는 바로 그때 사상언론에서 주요 책임을 지는 사람이었다.”

이 말도 물론 괜찮다. 하지만 사상에 영향을 준 결과로 말하자면 진씨(陳氏)의 영향이 매우 크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1910~1920년대에 자유주의, 무정부주의, 니힐리즘 그리고 사회주의 등 각종 사조가 한꺼번에 중국에 들어왔고, 당시와 그후 20여년간 중국 청년 지식인 대부분은 전 세계에 성행하는 좌경 사조와 사회주의 사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후스가 살던 시대는 때마침 중국 현대화가 사거리 프로세스를 배회하던 시기였다. 여기서 ‘사거리’라는 것은 중국 지식 엘리트들이 서양의 양대 정치 사조에 취사선택하던 시기를 말한다. 그때, 영미 제도를 숭상하는 자유주의 정치사조, 프랑스대혁명과 러시아10월 혁명을 숭배하는 사회주의 정치 사조가 동시에 중국에 들어왔고, 당시 중국 지식계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그 후 중국 정치노선의 선택, 즉 영국과 미국이 대표하는 건전한 발전과 프랑스와 러시아가 대표하는 격동적인 발전 방식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후스는 미국에서 10년 동안 유학하는 동안 실험주의 철학의 대가인 두웨이(杜威)를 스승으로 모시며 자유주의에 점차 깊이 스며들었고 평생 미국 민주정치에 정례를 표했다. 줄곧 미국을 근대화의 성공 전형으로 여겼으나 낭만주의에 심정을 관철시킨 한결 같은 프랑스대혁명에는 비판적인 태도를 지니며 ‘낭만병’을 ‘게으름병’이라고 꾸짖었고, “정확한 방법은 정확한 건축 재료 위에 짓는 것이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만년 까지 후스는 처음의 소망을 바꾸지 않았다. ‘미국 개국은 단지 3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인데, 300여 년 동안 그렇게 큰 지역을 개척하였고, 문화 수준이 가장 높고 사람들의 생활이 가장 안락하며, 국력이 가장 큰 국가가 된 것은 인류 역사의 기적이다!’ 일생을 후스와 친하게 지냈던 진독수는 오히려 프랑스대혁명의 열정적인 숭배자였습니다.

<프랑스인과 근세문명>이라는 책에서 그는 ‘근대문명의 특징은 가장 고대의 도리(道理)로 변할 수 있어서 민심과 사회가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중요한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인권설이고, 두 번째는 생물진화설이며 세 번째는 사회주의다. 이 세 가지 근대문명은 모두 프랑스 사람이 하사한 것이다. 세계에 프랑스가 없다면 어쩌면 오늘날 어둠에 대해서 여전히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고 썼다.
진독수는 프랑스인의 혁명 정신을 추앙했고, 프랑스 문학 또한 매우 찬양한다.

<유럽문예담>에서 프랑스 문학 예술의 각 유파 예를 들어 고전주의, 현실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를 중국에 소개하였고, 프랑스문학에 대한 중국인들의 흥미를 일으켰다.

러시아 10월 혁명이 발생한 후, 진독수는 열정이 충만하게 <러시아혁명과 우리 국민들의 착오>라는 책을 발표했다. ‘이번 혁명은 민주주의의 승리다’고 찬양했고, ‘18세기 프랑스의 정치혁명, 20세기 러시아의 사회혁명 당시 사람들은 모두 온갖 욕설에 대치하였으나, 그 후의 역사가들은 모두 그들을 인류 사회 변동과 진화의 관건으로 여겼다’고 단언했다.

후스와 진독수 두 사람은 1910~1920년대의 중국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후스는 자유주의를 깊게 믿었고, 미국의 민주를 추앙하며, 5·4시기에 실험주의를 힘껏 홍보했다.

표면적으로는 그의 지도 교수인 두웨이의 실험주의 철학 이론을 널리 퍼뜨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미국 민주제도 이론의 정수를 발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중국인들에게 미국의 민주제도를 소개할 때, 후스는 특히 미국 민주의 정수는 여전히 국민에 의한 정치이며, 이것은 마침 그 당시와 그 후에 미국 민주제도를 연구한 사람들이 비교적 쉽게 지나칠 수 있는 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진독수는 프랑스대혁명에서부터 러시아의 10월 혁명까지, 루소의 급진적 민주주의부터 레닌의 사회주의까지 걸어왔으며,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 및 초대 서기가 되었다. 그는 단지 러시아의 방법을 모방하는 방법과, 혁명이라는 수단을 이용해 낡은 세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제도를 강력하게 추진해야만 중국이 출구를 찾을 수 있다고 깊게 믿었다.

진독수는 만년에 세상만사 모든 변화를 경험할 정도에 이르러서 소련의 경험을 다시 한 번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단지 그가 은퇴한 후의 개인 사상 수련을 완성하는 것이었고, 중국 사회의 사조에 대해서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중국인 후스즈>는 다큐멘터리 문학이기 때문에 후스와 진독수 두 사람의 사상 논쟁 장면을 매우 융통성 있게 처리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잡담을 할 때 친구 모임, 잡지 사무에 대한 토론 등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5·4 이후 진독수는 세 차례 수감되었고, 후스는 그를 구원하기 위해 팔방으로 뛰어다녔다. 진독수가 출옥한 후 두 사람은 만나자 마자 바로 정치 관점에 대해 논쟁했다.

두 사람의 이러한 은혜와 원한, 서로 얽매인 우정에 대해 후스는 진독수에게 보내는 편지에 ‘우리 오랜 친구는 정치적 주장도 다르고 사업도 비록 다르지만, 여전히 친구인 이유는 너와 나의 머리 뒤에 자기와 다른 것을 용납하는 태도가 공통적으로 있기 때문이다’ 고 개괄했다.
이러한 ‘군자지교’는 오늘날 우리 지식인 후배들이 보기에 감동적이며 부럽기도 한 부분이다. 현재 급진파는 나날이 정치의 정확한 표지로 변해가고 있다. 한 마디의 말이 맞지 않으면, 급진자는 정치상 개량을 주장한 사람들은 ‘중국 공산당에 매수됐다’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둘 사이의 교분을 완전히 끊기를 바란다.

후스의 자유주의 정치 이상

후스의 정치이상을 말하자면 주로 ‘개인의 자유’와 국가와의 관계인 ‘호인정부(好人政府)’, ‘국민에 의한 정치’의 세 분야다.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서 후스는 유럽과 미국의 개인주의를 숭상하며 유럽 18~19세기의 개인주의가 빵을 사랑하는 사람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능가하는 자유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을 육성했고, 그렇기 때문에 유럽과 미국의 문명세계가 탄생했다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북양 정부가 청년들에게 ‘한 사람의 자유를 희생하여 국가의 자유로 바꾸어라!’고 호소할 때 후스는 팽팽하게 맞서며 청년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의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 바로 국가의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의 인격을 쟁취하는 것이 국가를 위해 인격을 쟁취하는 것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는 노비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돌이켜보면 수십년 동안 중국 공산당 의식 형태교육을 통해 대부분의 중국 청년 일대에서 국가와 개인, 국가와 사회의 관계는 이미 뒤죽박죽 되었다.

개인주의는 지나치게 이기적이라고 여겨지는 데다 비판까지 받고 개인을 집단에 따르게 하였으며, 집단의지가 개인의지보다 높은 것은 논박의 여지가 없는 ‘진리’로 간주됐다.
후스의 ‘호인정부’ 주장은 후스를 지금까지 공로를 세운 학자들의 비웃음거리가 되도록 만들었다.
2012년 <인민일보> 역사 칼럼의 ‘자유주의 지식분자의 정치참여의 위험’ 시리즈 중 <우담화처럼 잠깐 피었다가 사라지는 ‘호인정부’> 한 편을 썼다.
“‘호인정부’를 일종의 전형적인 실험주의의 방식으로 자신의 파산을 증명했고, 자유파 지식분자의 정치 실천은 비통한 실패를 당했다. 반동 군인을 타도하지 못하고, ‘좋은 정부’만 공론하니 오히려 반동 군인을 감추고 덮어 숨기는 암흑 통치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후스가 정말 유치한가?

역사상 정말 ‘호인정치’의 실천이 있었는가? 1992년 5월 13일, 후스가 편집을 주관한 <노력주간>의 제 2기 <우리의 정치 주장>이 발표됐다. 이 문장은 후스가 초안을 쓰고 채원배와 이대교(李大钊)등 16명이 연합하여 서명한 정치적 제의를 거쳤다. 이 제의의 주요 관점은 중국 정치 개혁의 목표는 ‘좋은 정부’를 개혁 중국 정치 최저한도의 요구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정부라는 것은 소극적인 방면에서는 정당한 기관이 있어야만 사리사욕을 꾀하려고 부정을 저지르는 불법 관료들을 감독하고 방지 할 수 있다.

적극적인 방면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정치 기관을 충분히 활용하여 사회 전체를 위한 충분한 복지를 도모해야 한다. 두 번째, 개인의 자유를 충분히 수용하고, 개별적인 발전을 보호해야 한다” ‘제의’가 앞으로의 정치개혁에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첫 번째, 우리는 일종의 ‘계획이 있는 정치’를 요망한다. 두 번째, 우리는 하나의 ‘공개적인 정부’를 원한다. 현재의 구체적인 주장은 남북 양방이 빠른 시일 내에 정식으로 화의를 맺는 것. 군대를 축소하는 한 가지 방법을 협상하는 것. 그리고 국가 독재의 방법, 현행 재선거 제도를 폐지하고 직접선거제를 채택하는 것”등 입니다.

그 다음에, 후스 등 16명이 초고를 쓴 <정치계획>은 우페이푸(吳佩孚)의 의견을 구하러 보내졌고, 우페이푸는 사회의 유명인사들에게 요청하여 새로운‘호인내각’을 조직하여 국정을 보좌하는 것을 고려해 보는것을 승낙했습니다. 우페이푸의 이 고려는 사실 본말이 전도되는 식의 수용입니다. 그는 권력을 제약하는 것 과 정부의 공공 서비스 기능을 형상화 하는 것이 근본 요소라는 것을 완전히 경시해버렸으며, 현명하고 재간이 있는 사람을 흡수하여 ‘호인내각’을 조직하는 것을 ‘호인정부’의 전부로 여겼다. 설령 오늘날이라 할지라도, 후스의 주장은 3번째 주장이 당시 정치적 상황을 겨냥한 주장이고 그러므로 시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외에, 다른 주장들은 여전히 오늘 중국의 헌정자들이 열심히 강구하지만 목적에 도달할 방법이 없다.
후스가 <우리의 정치적 주장>에서 강조한 것은 사실 권력의 제약이며, 권력을 감독과 제약 아래 두어야만 ‘호인정부’가 나올 수 있고, 현대인의 이해력으로는 아마도 의도적인 곡해가 아니라면 대부분 이 점을 오해하지 않을 것이다.

후스의 부지런한 ‘민치(民治)’ 추구

후스는 국민의 지혜를 일으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고, ‘민중의 자질을 높이는 것은 민주를 실현하는 필수적인 전제’라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그는 교육을 매우 중시했고, 직접 많은 잡지를 창설하고 사상을 전파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후스는 정치에 만약 국민의 참여가 없다면 진정한 공화의 실현은 없을 것이라고 줄곧 강조했다.

인류 자유의 역사는 국민 한 방울 한 방울의 피와 땀으로 바꾸지 않은 나라는 없다. 자유를 위해서 전쟁한 국민도 없었다면 진정한 자유가 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후스의 주장은 먼저 공민 자유의 권리를 쟁취해야 하며 그 다음에 정부의 권력을 제한해야 하며, 둘 중 어느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더욱 귀중한 것은 후스는 민주의 실천을 민주 이상의 전파와 같은 중요한 위치에 두었다. 그는 민치국가에서 정부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민중이 정치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국민에 의한 정치 그 자체를 진심으로 믿은 것은 일종의 교육이며, 정계인들이 민중의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유로 삼아 거절하거나 혹은 민중에 의한 정치의 실행을 미루고 있다는 것을 반박하는 것을 겨냥한 것이다.

그는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그렇게 높은 전문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경험이다. 걱정하고 있는 것은 단지 민중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원하지 않거나 혹은 감히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치국가의 큰 문제는 어떻게 민중을 정치에 참여하도록 격려할 것이냐다. 그들이 정치에 참여하려고 한다면 처음에는 서툴러도 두 번째 할 때는 익숙해지고, 처음에 속으면 두 번째는 요령을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제도 자체는 가장 좋은 자질의 훈련이다”고 썼다.

책 <후스 일기 전집> 어디에서나 비슷한 견해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정부 당국의 연구자와는 많이 다른 <중국인 후스즈>를 쓴 두 작가는 책에서 후스의 민치와 인권에 대한 표현은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다. 또 후스 사상의 내막을 살펴보게 한다.

자유주의 사상은 왜 중국에서 적합하지 않을까?

후스는 한평생 ‘중국 어디를 향해 가는가’라는 방향성의 문제에 대해 생각했으며, 중국은 민치를 특징으로 한 미국식 민주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지지했다. 각종 스트레스와 유행하는 정치 사조들이 서로 배척하는 상황 아래 그는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일찍이 ‘신문화운동’ 기간에 ‘백화문운동’에 반대하는 황칸(黃侃)은 후스를 풍자하며 “당신은 후스라고 불리면 안된다. ‘어디로 가냐’고 불려야 한다” 고 말했다. 중국 고문 중에 ‘후스즈’는 어디로 가다 라는 뜻이다. 황칸의 이 풍자는 우연히 들어맞았고, 후스의 일생을 요약한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후스보다 조금 어린 다른 한 명의 문화 거장 궈모뤄(郭沫若)에 비해 후스의 견지가 더 진귀함이 드러났다. 내 고향에는 우파로 분류되어 베이징 모 대학교에서 출생 소재지의 중등 학교의 현인을 가르치도록 유배된 사람이 한 분 있다. 그는 수업에서 풍자하며 말하기를 “내 평생 가장 탄복하는 사람은 궈모뤄 선생이다. 잘못을 인식하면 신속하고 단호하게 잘못을 고친다. 하루에 하나의 관점을 말한다”고 궈모뤄의 일생 행장을 평가했다.

후스와 궈모뤄 두 사람은 마침 중국 문화인 품격의 양극을 대표한다. 이 교사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각종 ‘반동의견’ 때문에 학교의 홍위병에게 비판 투쟁을 당하였고 절망 속에서 자살을 시도했고 평생 불구로 살다 처량한 만년을 보냈다. 십여 년 전, 국내에 ‘후스를 놓친 100년’이라는 주제로 실현되지 못하여 중국에 역사적 여한을 남긴 후스의 자유주의 정치 주장 평론한 글이 있었다. 하지만 한 민족, 한 국가가 어떤 사상을 받아들이는가에도 사실 ‘경로 의존성’이 존재한다.

현재 중국 집정자는 전제정치의 경향이 날로 강해져 민간에서도 ‘혁명으로 돌아갔다’라는 소리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전제정치와 혁명이라는 유전자가 쌍둥이 형제가 재차 중국에 군림한 것이다. 바로 이때, 후스사상과 그것이 왜 중국의 ‘당시의 요구’에 맞지 않는지를 되새기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1840년 이후부터 오늘까지 역사적 경로를 더욱 확실히 알도록 하고 중국의 미래 추세를 통찰하게 한다. 후스가 주장한 자유주의 정치 주장은 그 당시 시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초기로 말하자면 후스에게는 몇 명의 추종자가 있었다. ‘국가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한 것이 계몽을 압도’한 후에 자유주의 이념은 중국에서 이미 환영 받지 못했다.

1930년대 중기 후스가 주최한 <독립평론>에서 이미 민주와 전제정치의 토론이 전개됐고, 후스의 단짝 친구인 딩원짱(丁文江), 장옌푸(蔣延黻), 치엔두안셩(錢端升)등은 잇달아 ‘강자정치’에 동의했다. 후스가 지키는 미국식 민주정치의 주장은 거의 만나기 힘든 발자국 소리가 됐다. 더 비참한 것은 그의 자유주의 이념은 심지어 말로 전수하고 몸으로 직접 가르쳐 둘째 아들 후스두(胡思杜)의 사상에 영향을 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후스는 평생 미국의 민주정치를 숭상하였고, 제국주의를 타도할 필요성을 단호하게 부인했으며, 그의 정치적 주장과 문학적 주장은 줄곧 루쉰의 각박한 비판을 받았다. 설령 1949년 중공 내전 때 국민당이 패배해 대만으로 물러났다 할지라도 그는 자신의 이념을 고수하였고, 다른 사람처럼 큰 수박 옆에 바싹 달라붙는 행동을 하거나, 남에게 의지하는 승리자가 되지 않았다.

공산당 독재와 국민당의 권위정치 중에서 ‘덜 나쁘다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하여 국민정부를 따라 의연히 대만으로 갔다. 그러나 그의 아들 후스두는 짧은 30여년 인생을 정신적으로 아버지를 시해하는 일생을 살았다. 그는 시대조류가 전반적으로 좌경화 된 데서 영향을 받았고, ‘반제·반봉건’의 구호에 미련이 남았으며, 공산주의를 믿었기 때문이다. 미국 코넬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공부에 흥미가 없었고, 많은 성적이 저조했으며, 미국에서 추방을 당했지만, 루쉰을 매우 존경했다. 1949년 부친과 함께 대만 이민을 거절하고 대륙에 잔류를 선택했으며, 마지막에 결국 그의 인생에 비극을 낳았다. 오늘까지 중국 집정자들은 ‘입헌정치’라는 이 두 글자를 홍수와 맹수로 여긴다.

올해 7월 26일, <인민일보>는 ‘미국식 민주의 허위’를 폭로하는 글을 전면 게재하여 ‘미국 민주의 곤경’을 보여주었다. 붉은색 정치 집단의 사리를 위해서 수많은 학자들은 아직도 끊임없이 각종 민주를 피하고, 권력의 상호제어인 ‘옥상 디자인’을 피하는데 공헌하고 있습니다.

7월 상순 <남풍창>은 칭화대학교 외국 교수 뻬이딴닝(貝淡寧)의 <중국의 현명하고 재간 있는 정치의 미래>에서 현명하고 재간 있는 자의 정치는 중국에서 깊고 두터운 근원이 있다고 말했으며, 조사 결과 대부분 사람은 ‘후견인의 말’을 자유민주의 말보다 더 지지했다고 나타났다.

후견인을 통해 유능한 관원에게 사회이익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책임을 지라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중앙정부의 지도자는 어질고 재능 있는 제도를 통해 선발해야 하며, 하급정부의 지도자는 민주선거를 통해 출현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제시했다. 상층은 이러해야 한다면, 그렇다면 하층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문제에 대해 난는 <혁명의 신발 한 짝은 이미 땅에 떨어졌다>라는 글에서 지적했다.

중국 공산당의 수십 년 간의 의식 형태교육이 가난한 마르크스사상 주의자들을 대거 배양했으며, 그들은 현재의 모든 사회는 자산계급의 착취가 공정하지 않으며, ‘박탈자를 박탈’하는 것을 통해 혁명이 평등을 달성하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전제정치와 혁명의 틈새에서 중국은 후스를 놓쳤으며, 그건 아마 100년이 아니라 더 긴 시간일 것이다. 어쩌면 20년에 더 지난 후 지구상의 ‘실패국가’명단에 몇 개의 나라가 더 추가되었을 때, 비교정치연구에 지금 보기에 옳지 않은 새로운 정치적 과제 즉 ‘어떤 나라는 왜 민주와 연이 없는지’가 하나 더 추가될 것이다.

후스를 되새기는 것은 중국의 밝은 미래를 위한 것

이러한 제도의 선택상의 ‘경로적 의존’은 그 문화 정치의 관성이 큰 것이며, 한 번 또 한 번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작용을 할 것이다. 작가는 모든 책의 결말 부분에 후스를 위해 한 가지 꿈을 모의했다. 장졔스, 마오쩌둥, 스탈린, 루스벨트와 천국에서 만날 때, 후스는 자신이 평생 했던 말을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책을 평생 가르쳤는 데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평생 책을 썼지만 본 사람이 없었다고 원망하며 말했다. 이건 사실 ‘과거’의 중국에서의 자유주의의 운명에 대한 개괄일 뿐만 아니라, 그 미래의 운명까지도 예고하고 있다.

차이신왕(財新網)은 얼마 전에 총바이윈(從白雲)의 글 한 편을 게재했다. 중국인의 개인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진지하게 분석하여 ‘개인주의는 중국 언어 환경에서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남에게 손해를 끼치고 자기 이익만 챙기는 것이 아니다.

서양에서 개인주의는 개인의 사회에서의 지위이고 사회 공동체의 특징이며, 개인과 타인,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의 일종의 존재론적 인식이다’고 밝혔다. 이 글을 본 독자들은 이에 많은 갈채를 보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이것이 후스 선생이 1910년대~1920년대에 열심히 보급시키던 자유주의의 일반 지식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중국인들이 여전히 ‘전제정치와 혁명’이라는 이 악순환 속을 배회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의 두 작가는 수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이 ‘시기에 적합하지 않다’라는 책을 썼고 드라마라는 방식을 통해서 일생을 ‘혁명 사회 변혁 입장에 반대를 고수한’ 후스를 현대 중국인들에게 소개했다.
류나이슌(劉乃順) 선생은 작가로써 상업계에 들어가 성공한 기업가다. 그는 시세를 잘 살핀다. 그러나 그가 분석한 것은 자신의 시세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중국 미래 운명의 추세였고, 그러므로 중국인의 혁명 사조가 다시 일어났고, 중국 출판계, 영화계가 상업화 외에는 고려하지 않을 때, 사태를 거슬러 이 ‘시대 착오적’인 작품을 내놓은 것이다.

<중국인 후스즈>라는 이 책을 정독할 때 나는 류나이슌 선생의 고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사색에 몰두하여 ‘이 나라의 정치생활이 어떠해야 궤도에 오를 수 있는가? 공개적이고, 투명하고, 헌정 정치와 민주법치의 공민사회여야 한다’고 말했고, 마치 그는 이 책의 서문에 쓰인 후스에 대한 이해와 흡사하다.
이것도 사실 내가 역사의 한 점에 비천하게 바라는 바이다. 나는 여전히 사리에 밝은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소망을 품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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