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스케치] 베테랑 언론인 石山 “자유를 느낀 곳 홍콩이 내고향”

츄수웨이(秋水·추수)
2022년 08월 31일 오후 2:30 업데이트: 2022년 08월 31일 오후 4:41

필자는 수년 전에 자동차로 다리 위를 달리며 바다를 본 적이 있다. 창밖에 쪽빛 바다가 펼쳐졌는데 수평선 위로 파란 하늘이 이어져 있었고 흰구름이 떠 있었다.

새장을 뛰쳐나온 새처럼 기분이 좋았던 필자는 차를 운전하던 스산에게 나도 모르게 말했다. “홍콩의 자연을 이제야 제대로 보게 됐다. 지금까진 홍콩에 올 때마다 콘크리트로 된 대도시만 봤다.”

이때가 언론인 스산과의 첫 만남이었다. 필자는 문득 그가 본토 중국인이 아닐 수 있다는 느낌이 들어 고향이 어딘지 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답했다.

“내가 어디서 왔냐고? 사실 나도 잘 모른다. 광저우에서 태어났지만 얼마 후 베이징으로 갔고 나중에 쓰촨, 티베트 등 여러 곳에서 살았다. 그러다 중국을 떠나 홍콩으로 갔고 나중에 다시 미국 영국 등에서 여러 해 지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

스산이 하와이에서 찍은 사진. | 본인 제공

‘베테랑 떠돌이’가 자유를 느낀 곳은 홍콩

스산은 경력이 풍부한 베테랑 언론인으로, 자칭 ‘베테랑 떠돌이’다. 그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친구들은 나를 ‘국제 떠돌이’라 한다”고 자조했다.

태어날 때부터 온 세상을 떠돌 운명이었는지 떠도는 가운데 가정도 꾸리고 자녀도 넷이나 얻었다. 그는 중국 북방에서는 남방인이었고, 남방에서는 북방인이었으며, 홍콩에서는 대륙인이었고, 유럽에서는 홍콩인이었다. 그리고 지금 외국에서는 중국인이지만 중국에서는 오히려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

스산은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는 홍콩이 중국 전통문화를 해외에 전파한 덕을 봤다고 했다. 그는 일찍이 영국에서 택시 운전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런던 동부는 가난했고 강도가 아주 많았으며 택시 요금을 내지 않는 사람도 흔했다. 하지만 그는 2년간 일하면서 단 한 번도 강도를 당한 적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리샤오룽(李小龍·이소룡) 등이 출연한 홍콩 무술 영화들이 해외에 널리 퍼져 홍콩 사람은 모두 쿵푸를 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지역 사회에 스산이 쿵푸를 할 줄 안다는 소문이 퍼져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고 또 정중히 대우했다고 했다.

미국 하와이 화산암 앞에서. | 본인 제공

그는 1997년 7월, 개인적으로는 특별한 이유 없이 가족을 이끌고 홍콩을 떠나 국제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그는 막 홍콩 주권 이양에 관한 보도를 마치고 찰스 왕세자가 영국 국기를 꽂은 브리타니아호를 타고 빅토리아항을 떠나는 장면을 목격했다.

1989년 민주화 운동 이후 스산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대륙을 떠났고 막 홍콩에 도착했을 때는 수중에 500홍콩달러밖에 없었다. 가진 것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었지만 분주한 그 도시가 좋았다. 그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일종의 기쁨이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그 기쁨이 ‘자유’임을 깨달았다.

필자는 역사학자 위잉스(余英時)의 체험이 떠올랐다. 위잉스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1950년 신정에 친지를 방문하러 홍콩에 간 적이 있었는데 선전과 홍콩 사이의 뤄후교(羅湖橋)를 건널 때 한 차례 기묘한 체험을 했다고 했다.

“갑자기 머리가 가벼워지면서 온몸이 마치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는 소요자재(逍遥自在)한 상태에 있는 것 같았다. 이 정신적인 변화는 아주 짧아서 아마 1초도 되지 않았겠지만 내게 깊은 느낌을 주었다. 평생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이후 더는 유사한 체험을 해보지 못했다.”

그때 위잉스는 홍콩의 자유를 경험했던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화제는 바다

스산는 시간이 나면 산수를 유람하기 좋아한다. 그는 일찍이 우리 일행을 이끌고 탬문섬(塔門島·Grass Island)에 간 적이 있다. 우리는 드넓은 경사진 풀밭에 앉았다. 눈앞에는 끝없이 넓은 바다가 펼쳐졌고, 뒤에는 소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자 그는 기쁨에 겨워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들었다. 필자가 ‘당신 마음속에서 홍콩의 경치 중 탭문섬이 몇 번째냐’고 묻자 그는 두 번째라고 하면서 첫 번째는 태평산(太平山) 야경이라고 했다.

미국 노퍽 군항. | 본인 제공
홍콩 바다와 항행 중인 배. | 츄수이(秋水)/에포크타임스

우리는 또 라마섬(南丫島)에서 바다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는 바다가 7개 대륙을 연결해주고 있고, 박해와 포용으로 자유를 길러냈고 해양문화를 길러냈다고 했다. 과거 인류는 바다에 가로막혀 내왕하기 불편했고 대항해 시대 이후 비로소 해양의 한계를 극복하고 교류할 수 있었다.

필자는 해외 여행을 많이 다녀보진 못했으나 조용한 대만의 바다를 좋아한다.  국제적인 대도시 홍콩의 해안은 아주 깔끔하게 정비돼 있지만 시끄럽고 상업적 느낌이 강했다. 대만의 해안은 원시적이고 자연적인 상태로 남은 곳이 많다.

특히 필자는 대만 남동부 타이둥(台東) 해안을 산책하면서 받은 생명에 대한 느낌, 천지에 대한 느낌이 인상 깊었다. 스산은 내게 “당신은 생명의 근원이 도가(道家)에 가까워 자연스러운 것을 선호하는 것 같다”고 했다.

어느 바다를 가장 좋아하냐는 필자의 질문에 스산은 잠시 생각하더니 미국의 바다라고 했다. 그는 워싱턴주 해안의 바다도 좋아하지만 캘리포니아의 태평양 해안고속도로에서 바라보는 바다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훨씬 거칠고 더 야성적이기 때문”이라면서.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

최근 몇 년간 스산은 업무 관계로 홍콩과 미국을 여러 차례 오갔다. 2021년 초여름 홍콩으로 돌아와 리다오(離島)에서 일광욕을 즐겼다. 그는 미국보다 홍콩의 기후를 더 좋아한다. 그는 홍콩에서 좀 오래 거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2021년 6월 빈과일보가 홍콩 당국의 압박에 못 견뎌 폐간하게 되면서 홍콩 언론 환경이 급속히 악화됐다. 시대의 격랑 속에서 숨죽여 생존하는 언론인들에게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사치스러운 일이 됐다. 스산은 업무 관계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그런 상황이 달갑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다.

필자는 그가 떠나기 전에 머리카락을 움켜잡으며 “그래, 난 떠돌이야”라고 한 말을 기억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의미가 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유튜브에서 1997년 7월 홍콩의 기차역에서 우연히 중국 공안을 만났던 경험을 얘기했다. 공안들은 싸늘하고 매서운 눈빛으로 기차역 전체를 둘러보고, 바쁘게 오가는 홍콩 시민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스산은 한 가닥 서늘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대륙에서 20여 년간 살았던 그에게 그것은 매우 익숙한 느낌, 바로 ‘공포’였다.

스산은 이후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을 때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헌법을 자세히 읽어보면서 자유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행복을 추구할 자유’와 ‘두려움에서 벗어날 자유’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자유가 있어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두려움이 있다면 자유를 잃은 것이다. 자유가 있으면 그곳이 바로 고향이다.

물론 스산만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난 6월 취재차 영국에 갔다가 홍콩을 떠나온 엘리트들을 만났다. 영국 땅에 발을 디딘 그들은 거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스산은 “그들은 홍콩 전체를 등에 업고 떠도는 홍콩인들”이라며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홍콩의 정신과 가치를 지키고 있다”고 평했다.

홍콩인들이 세계 각국으로 흩어지는 것을 본 필자는 중국 출신 홍콩 언론인 장제핑(張潔平)이 생각났다. 그녀는 2021년 대만으로 이주했고 팟캐스트 프로그램 ‘홍콩에서 불어오는 바람(香港來的風)’을 개설했다.

장제핑의 주된 인터뷰 대상은 대만으로 이주한 홍콩인들이다. 그녀는 일찍이 한 인터뷰에서 “대만, 홍콩, 대륙(중국)을 막론하고 우리는 20세기 전쟁 이후 중국의 그늘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과 대만은 현재 ‘휴전’ 상태이지 ‘평화’ 상태가 아니다.

전쟁과 난세 속의 삶, 이것은 2019년 홍콩인이 겪은 일이자 스산이 살아온 삶을 요약하는 표현이다. 수십년 전 제2차 세계대전이나 지금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군사력의 대결이지만 중국과 대만, 홍콩 사이에서는 정보전과 심리전, 여론전, 그리고 가치관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2019년 홍콩의 송환법 반대 운동이 한창일 때 대만의 한 서점이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글이 감동적이어서 공유하고자 한다.

“홍콩 젊은이들의 분투는 용감하고 파란만장한 것으로 보인다. 홍콩은 근대 중국인들을 이끌고 군주제에서 벗어나게 한 곳이다. 당시 홍콩에 이주한 사람들은 마치 흑수구(黑水溝·대만해협)를 건너온 대만인들처럼 중원의 전제(專制)에서 벗어나 자유와 더 나은 삶을 찾아온 사람들이다. 2000년간 이어온 군주제(君主制)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다. 자유를 향한 여정은 위험이 가득하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돈 때문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안정된 삶을 위해 기본적인 자유를 희생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믿는다.”

NASA의 위성사진에서 흑수구(黑水溝)의 윤곽이 확연히 드러난다. 사진: NASA/EOSDIS에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외딴섬 대만은 1949년 피난 온 국민당 정부와 그들을 따라온 군인들과 백성을 받아들였다.

또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홍콩은 중국 공산당 폭정에서 탈출한 수많은 대륙인을 받아들였다.

지금 이 순간 바다 건너 자유세계 국가들은 중국 공산당의 전제에서 탈출한 홍콩인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나는 1988년 대륙에서 한동안 방송됐던 ‘하상(河殤)’이란 다큐멘터리에서 “황하는 운명적으로 반드시 황토고원을 통과해 결국에는 푸른 바다에 합류해야 한다”고 한 것처럼 중국도 자유세계에 합류해야 한다고 믿는다.

홍콩 라마섬을 찾은 스산. | 본인 제공

“자유를 느낀 홍콩이 바로 나의 고향”

필자는 항시 스산의 정신적인 고향이 어딘지 궁금했는데, 여러 지역에서 다양하게 겪은 경험이 그의 풍부한 인생 배경을 만들었음을 이해하게 됐다.

그래도 역시 그의 인품에서는 중국 문화가 더 많이 배어 있다. 그는 노자를 논하고 티베트 고원에서의 삶을 회억하고 홍콩 역사을 강변했다. 중국과 홍콩문화에 대한 열정을 감추지 못했다.

필자가 처음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그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홍콩이 몰락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이제 그가 답을 찾았음을 알 수 있다.

올해는 홍콩이 중국 공산당에 반환된 지 25주년 되는 해다. 요즘 홍콩은 예전 같지 않다. 중국 공산당 창당 기념일을 하루 앞둔 지난 6월 30일 스산은 자신의 유튜브 방송에서 홍콩에 대한 심경을 밝히며 진솔하게 자신의 인생을 결산했다.

“나는 고향이 없는 사람이었다. 북방 사람이지만 남방에서 태어났고, 성년이 된 후 도처를 떠돌며 정해진 거처가 없었다. 하지만 홍콩이 내게 가져다준 기쁨, 이런 자유에 대한 느낌 때문에 홍콩이 내 고향이라고 고집스레 생각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