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역사의식 부재로 위기 초래…지식인들이 제구실 해야”

이윤정
2020년 08월 17일 오전 10:00 업데이트: 2020년 08월 17일 오후 3:45

“한국 사회에 닥친 위기는 역사의식의 부재에서 비롯됐으며 우리나라 역사 교육에서 가장 잘못한 점은 공산주의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올해는 6·25전쟁 70주년이 되는 해다. 대한민국은 해방 후 전쟁 위기를 잘 극복하고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지만 최근 정치적 견해를 둘러싼 대립과 계층 간, 성별 간, 세대 간 갈등이 심화하면서 사회가 분열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국제적으로도 미ㆍ중 신(新) 냉전 시대가 도래하면서 외교와 안보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는 가운데 신종코로나(중공 바이러스) 팬데믹까지 겹쳐 국내외적으로 복합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에포크타임스는 지난 10일 한국 근·현대사를 걸어 지나온 지성계 원로인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를 만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위기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대담 = 추봉기 보도국장

-현재 한국 사회를 진단한다면.

“물질적으로 매우 풍요롭고 어느 면에선 부강한 나라가 됐지만 그런 과정에서 정신이 해이해지고 금전 만능주의에 물들어 있다. 나라의 앞날을 한 치도 내다보기 어려운 너무나 큰 위기에 직면해 있어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무겁다.”

-위기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나.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이고 역사가 발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우리 인류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에 이르렀는가 하는 데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기 때문에 욕심부리고 본능적 욕구에 따르며 냉정하게 판단하지 않고 자기감정에 따라 제멋대로 속단하는 현상이 심화하면서 사회갈등이 심해졌다고 본다.”

-세대 갈등도 역사에 대한 인식 부족 때문인가.

“그렇다. 나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IT분야와 인공 지능에 관해서는 반(半)문맹이다. 그런 면에서 세대 간 단절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부모와 자식 간에도 소통이 잘 안 되는 이유는 역사 교육이 실패한 탓이라고 본다.”

-교육 현장에서의 역사교육을 말하는 것인가.

“과거엔 그래도 질서가 있고 남녀역할의 구분이 있고 나라에 대한 충성, 친구들 사이의 신뢰, 형제간 우애, 부모에 대한 효 등 근본적 가치관과 역사에 대한 교육이 가정이나 생활 전체를 통해서 이뤄졌다. 성리학적 가치관이 사회 깊숙이 배 있었고 역사를 직접 경험한 어른들의 얘기를 들으며 배울 수 있었는데 사회가 변하면서 이런 배움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제는 학교에서 역사를 더욱 정확하게 가르쳐야 하는데, 경제발전과 정치 민주화에 치중하다 보니 인간 교육의 본질을 등한시했다. 사물을 따뜻한 눈으로 보고, 서로를 인간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서로 경쟁자로만 대하고 어떻게 하면 시험을 잘 보고, 좋은 직장을 얻으며 돈을 잘 벌 것인가에만 초점이 맞춰져 왔다. 거기서부터 국민들이 역사를 보는 눈이 점점 더 비뚤어졌다.”

-역사를 보는 눈이 어떻게 비뚤어졌다는 것인가.

“현 기득권 세대와 6·25 전쟁 한참 후에 태어난 세대는 선대와 달리 너무 쉽게 자유와 안정, 부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당연한 권리로 여긴다. 자기가 가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못 가진 것에 대한 불만만 커지면서 사회 갈등도 심해졌다. 어찌 보면 사회가 퇴보한 면도 있다.”

“해방 당시만 해도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고 6·25 전쟁 이후에도 그랬다. 그걸 다 극복하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했는지를 가르치는 게 교육이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 교육에서 가장 잘못한 점은 공산주의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실패한 이론…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정확히 인식해야

-현재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자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간 대결이 격화하고 있지만 많은 한국인이 공산주의의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 역사는 상당 부분 반공 투쟁의 역사다. 그러나 공산주의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어찌 보면 운이 좋은 세대에게 공산주의가 왜 나쁜지, 우리가 왜 공산주의와 싸워야 했는지를 전수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공산주의 이념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잘 사는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며 이는 계급 투쟁과 혁명을 통해 달성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하나의 이상으로서는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현실은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평등 사회를 추구하니까 좋은 거 아니냐고 많이들 착각한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 정권이 수립된 후 소련은 봉건주의 계급 사회구조를 지닌 약소민족들에 금전적 지원을 해주는 등 상당히 공을 들였다.”

-해방 후 남한에서도 공산주의 체제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던데.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면 계급해방과 민족해방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는 소련의 메시지는 당시 일제하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도 굉장히 매혹적인 이념으로 다가왔다. 많은 젊은이가 평등의 실현, 계급해방에 심취했고 지식인 중에도 공산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민족주의와 반대되는 국제주의로, 개인보다 계급을 중시하고 민족과 국가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이승만, 김구 같은 분들은 소련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한 우리가 추구하는 자주독립은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반공 노선을 택한 것이다.”

“미소 양국이 히틀러를 무찌르기 위해 힘을 합쳤다가 공동의 적이 없어지자 이해관계가 대립하면서 우리나라가 그 접전의 최전선이 됐다. 6·25는 세계 공산화 전략에 따라 김일성이 스탈린, 마오쩌둥과 모의해서 일으킨 동족상잔의 참담한 전쟁이자 국제전이다.”

“그런데도 전쟁 당시부터 지금까지 마치 우리가 북한을 침략한 것처럼 거짓 선동하고 남한을 혁명으로 공산 통일하려는 꿈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국민들의 의식을 교란했다. 그런데 우리는 경제발전에 너무 심취해서 그런 것들은 외면한 채 모든 게 잘 되고 있다는 식의 자기 최면에 걸려 있었던 거다.”

-오늘날 구소련 붕괴 직전의 상황과 유사한 공산당 탈당 운동이 일어나고 있고 현재 3억 6천만 명이 공산당 3대 조직(공산당, 공산주의 청년단, 소년 선봉대)을 탈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이 취해야 할 현명한 외교적 대응 방안은.

“평등한 사회를 만든다는 이상과 달리 정치 권력의 힘으로 이상을 달성하려던 시도들이 정치, 경제, 도덕 등 모든 면에서 독재와 경제 파탄을 불러왔다는 것은 러시아와 동유럽 등의 역사에서 이미 증명됐다.”

“미국은 기독교에 뿌리를 둔 문화권이라 신의 피조물로서 인간은 평등하다는 이상을 부정하지 않는데 공산당은 계급에 따라 인간의 가치를 매기니까 무서운 거다.”

“중국이 우리의 무역 파트너로서 중요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정치적으로는 미국, 일본과 공조하며 중국을 견제하는 쪽에 서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우리의 자주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위기 극복하려면 언론과 지식인들이 제구실 해 줘야

-과거보다 법은 많아졌는데 오히려 사회는 더 혼란스러워진 느낌이다.

“법은 큰 원칙을 정하고 그 원칙에 맞게 집행하면 되는데 구체적 사례마다 법을 만들면 역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다. 지금 온갖 규제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주눅 들게 하거나 법을 악용하는 것을 조장하는 측면이 많다. 아무리 법을 많이 만들어도 사람들이 제대로 된 인생관 특히 도덕적 감각, 입장바꿔 생각하는 능력 등을 가지고 있어야 법이 제대로 작용을 한다.”

-지난해 발생한 코로나 때문에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번 인류에게 닥친 재앙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인간이 환경을 파괴하면서 생태계를 교란했기 때문에 자연으로부터 심각한 경고를 받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번 전염병은 인간의 힘으로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졌다. 팬데믹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어서 획기적인 공동대책이 필요하다.”

-KBS 이사장으로도 일한 적이 있다. 언론이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가짜 뉴스를 양산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자유롭고 공정해야 할 언론이 파괴됐다는 것은 우리나라 위기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내가 2014년 9월 KBS 이사장으로 선출된 그 당시에도 편파적이고 왜곡된 보도가 많았다.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전부 ‘악’으로 규정했다.”

“흔히들 언론을 입법, 사법, 행정에 더해서 ‘제4부’라고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한 기능이 있다고 본다. 언론이 진실 보도에 앞장서지 않는다면 그런 언론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언론의 역할은 인체로 치면 피의 순환과 같은 것이다. 피가 오염되면 몸 전체가 병들고 오래 가지 못하는데 우리나라 언론이 그렇게 병들어 있다.”

“언론은 지식인들이 하는 활동인데 지식인층이 제구실을 못하는 게 이 나라가 심하게 흔들리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이 제일 중요하다고 본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거울삼아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야 하고 개인 간이든 국가 간이든 서로 돕고 아끼며 적어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인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서울대 사학과 재학 시절 미국으로 유학 가 러시아사 등 서양사를 전공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고려대, 서울대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우리나라 여성 대사 1호로 핀란드와 러시아에서 활동했다.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KBS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