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바로크 문화를 꽃피운 ‘예술 후원자’, 마리 드 메디치

김연진
2023년 05월 4일 오후 2:12 업데이트: 2024년 01월 19일 오후 5:27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가 그린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해당 작품은 바로크 시대를 빛낸 화가 루벤스의 대표작이라는 점, 프랑스 왕비 마리 드 메디치(Marie de Medici)의 일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사적 의미가 깊다.

마리는 평생에 걸쳐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루벤스도 마리에게 도움을 받은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마리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루벤스는 마음껏 예술 감각을 발휘하며 바로크 시대를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그녀가 문화예술 후원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가문(家門)의 영향이 컸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마리는 메디치 가문 출신이다.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 예술의 대표적인 후원자로 불릴 만큼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기의 거장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등이 모두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았다.

메디치 가문의 ‘예술 후원’은 인문주의, 유럽의 문화예술 양성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자화상 | Public Domain

루벤스와 메디치 가문

마리는 1575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부터 피렌체 곳곳에 남아 있는 문화유산, 예술 작품들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예술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일찍이 악기 연주에 재능을 보였으며, 화가 조르조 바사리의 후계자 밑에서 미술 조기교육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리와 루벤스가 처음 만난 건 1600년이었다.

당시 루벤스는 빈첸초 1세 곤차가 공작의 궁정 화가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진 예술가였다.

곤차가 공작이 마리와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루벤스도 동행했는데, 이때 우연히 메디치 가문을 소개받으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

마리 드 메디치의 초상화 | Public Domain

비극 속에 피어난 예술

앙리 4세와 결혼하면서 프랑스 왕비가 된 마리에게 끊임없이 비극이 찾아왔다.

마리는 1610년 앙리 4세가 암살당한 후, 아들 루이 13세의 섭정(攝政)을 맡아 7년간 프랑스를 통치했다. 이 기간에 프랑스 내부에서는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녀는 항상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끝내 쿠데타가 발생해 권좌에서 물러나며 전쟁포로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1621년, 반란군 지도자가 사망하고 반란군이 제압되면서 마리는 극적으로 프랑스 왕실에 복귀할 수 있었다.

다시 권력을 잡은 마리는 뤽상부르 궁전을 완성하는 데 집중했다.

피렌체의 피티 궁전에서 영감을 받은 뤽상부르 궁전은 마리의 고향인 피렌체의 건축 예술을 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건립됐다.

물론 마리의 상징인 ‘피렌체 양식’을 건축물에 담음으로써 왕권 강화를 꾀하려는 정치적인 의미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문화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뤽상부르 궁전의 건축 양식은 이후 프랑스 문화예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줬다.

마리가 루벤스에게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를 그려달라고 의뢰한 것도 이때였다.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 마리 드 메디치와 앙리 4세의 대리 결혼식. 페테르 파울 루벤스 작품 | Public Domain

루벤스의 걸작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

당대 유럽 최고의 화가였던 루벤스는 거액을 후원받으며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 연작 24점을 그렸다.

해당 작품은 마리의 탄생부터 시작해 마리와 앙리 4세의 만남, 앙리 4세의 죽음과 섭정 선포 등 주요 사건들을 주제로 담고 있다.

또한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문화 양성에 기여했던 메디치 가문도 그림으로 표현됐다.

루벤스는 이 작품을 통해 바로크 스타일의 정점을 보여주며 유럽의 다른 나라 예술가들에게도 영감을 불어넣었다.

이처럼 당시 유럽의 문화예술이 부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든든한 후원자인 메디치 가문, 그리고 마리 드 메디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