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에게서 배우는 리더십과 인품

제프 미니크 (Jeff Minick)
2020년 06월 20일 오전 11:25 업데이트: 2024년 01월 19일 오후 6:15

1940년 5월, 독일군은 프랑스와 영국군을 차례로 격파하며 프랑스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달 말, 독일군은 40만 명이 넘는 영국-프랑스 연합군을 던커크(Dunkirk·덩케르크) 항에 가뒀다.

꼼짝없이 포위돼 죽음을 기다리던 수많은 젊은 병사들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영국군과 민간인들이 선박 수백 척을 이끌고 이들을 구출하러 도버해협을 건너온 것이다.

목숨을 건 이 구출작전은 9일간 계속됐고 약 33만 명의 병력이 죽음의 덫을 빠져나왔다. ‘던커크의 기적'(Miracle of Dunkirk)으로 알려진 제2차 세계대전 최대의 철수작전이었다.

비참했던 5월, 또 하나의 기적을 찾는다면 윈스턴 처칠이 영국 내각의 수장이 된 일일 것이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1941년 8월 19일 다우닝가(Downing Street)에서 | Keystone / Getty Images

 ‘영광과 오욕’

필자는 몇 년간 처칠의 자서전 ‘나의 반생’(My Early Life)을 비롯해 그의 삶을 다룬 전기 여러 편을 읽었다. 그 중 윌리엄 맨체스터(William Manchester)의 3부작 ‘마지막 사자’(The Last Lion)는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이 글에서는 에릭 라슨이 쓴 책 ‘영광과 오욕’(The Splendid and the Vile)을 다룬다. 책에 대한 필자의 친구 앤의 열정 덕분이다.

이 책은 ‘처칠 가족 그리고 런던 공습 당시의 저항에 관한 스토리’(A Saga of Churchill, Family, and Defiance During the Blitz)라는 부제가 달렸다.

필자는 앤과 자주 전화 통화를 하곤 한다. 그녀가 라슨이 쓴 처칠의 전기에 대한 얘기를 세 번째로 꺼낸 날, 필자는 그 책을 읽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에릭 라슨의 책 ‘영광과 오욕’은 2020년 5월 미국 출판계를 뜨겁게 한 베스트셀러였다 – 역주)

윈스턴 처칠의 초상화, 더글러스 그랜빌 챈더(Douglas Granville Chandor) 작품, 1946년, 스미스소니언 협회의 내셔널 초상화 갤러리 컬렉션. | Smithsonian Institution

라슨은 ‘영광과 오욕’의 첫 줄에서부터 처칠이 나치와 맞서 직면했던 비참한 상황 속으로 필자를 몰입하게 만들었다.

휘파람 소리를 싫어했던 개인적 성향에서부터 국정을 처리했던 집무실에 대한 묘사까지, 라슨의 디테일한 표현법은 당시 절박했던 순간과 사건들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윈스턴 처칠의 전기 ‘영광과 오욕’ | 책 표지

‘영광과 오욕’을 읽으면서, 그리고 또 다른 책에서 만났던 처칠을 회상하면서, 필자는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이 처칠과 같은 역사적 인물에게서 미덕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를 충동적이고 낭비벽이 심한 술주정뱅이, 주전(主戰)론자, 제국주의자로 지금까지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처칠은 영국을 규합하고 나치즘 종식의 길을 닦은, 서구문명과 자유민주주의를 구원한 세계사적 영웅이다.

처칠의 리더십과 인품에 대한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몇 가지 교훈을 얘기해 보려 한다.

1940년 섣달그믐날, 런던 대공습 잔해 속에 서 있는 처칠. | J. A. Hampton/Topical Press Agency/Getty Images

일상을 기뻐하고 사실을 직시할 용기

사실을 직시하라. 1938년 독일 뮌헨에서 독일 지도부와 협정을 맺고 귀국한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가 “이제 평화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고 발표하자, 처칠은 의회에서 “우리는 비극적인 완전한 패배를 당했다”고 말했다.

처칠은 다른 어떤 정치인들보다도 더 깊이 나치를 연구했고, 그들의 이중적인 본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실을 마주하기엔 너무 무지하거나, 두려움 때문에 침묵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삶에서 기쁨을 유지하라. 처칠은 기사를 쓰고 책을 집필해 많은 돈을 벌었다. 1953년에는 ‘역사적이고 전기적인 글에서 보여주는 탁월한 묘사와 고귀한 인간의 가치를 옹호하는 뛰어난 웅변술’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런 반면, 여느 보통 사람들처럼 집수리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폴로(Polo)를 즐기고, 농장에서 동물들을 키우며 일상생활 속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무슨 일에든 몰두하라. 처칠은 평생 어린아이와 같은 경이로움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았다.

한번은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노는 소년들을 발견하고는 그 틈에 끼어들었다. 그는 좋아서 손뼉까지 치며 외치듯 말했다. “오 좋아! 자, 한번 부딪쳐 보자!”

제네바호숫가에서 그림 그리는 처칠. | Fox Photos/Getty Images

사랑과 눈물, 자비 그리고 주먹

배우자를 사랑하라. 처칠에게 클레멘타인은 아내이자 최고의 조언자이고 안식처였다.

그들이 생전에 나눴던 서신에는 클레멘타인을 향한 처칠의 깊은 사랑과 그녀의 의사결정에 대한 지속적인 신뢰가 잘 나타나 있다.

1949년 6월 4일 영국의 엡섬 더비 경마장에서의 윈스턴 처칠과 아내 클레멘타인. | Central Press/Hulton Archive/Getty Images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남자가 돼라. 처칠은 자칭 ‘울보’였다. 깃발의 나부낌, 시, 대공습, 영국인들의 용맹함, 죽어가는 당나귀, 친구 또는 아이의 죽음에 관한 영화까지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 울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 없이 정직한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울보 처칠이었지만, 그는 20세기 가장 강인한 정치가로 기억되고 있다.

주먹을 날려라.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실책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2만5000명의 병력이 전사하며 대참사로 끝난 갈리폴리 전투다.

이 작전의 패배로 그는 여러 정치가와 기자들에게 비난을 받았고 1930년대를 정치적으로 고립된 채 보냈다. 거기에 더해 나치 위협에 대한 끊임없는 그의 경고는 그를 더욱 전쟁광으로 보이게 했다.

처칠은 평생 우울증을 앓고 살았다. 자신의 우울을 “검은 개(black dog)”라고 부르며 “내 평생을 따라다녔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그 어둠을 털어내고 안타를 쳐냈고, ‘영국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 믿는 것을 위해 계속 싸웠다.

적에게 자비를 베풀어라. 체임벌린 총리가 사임하고 후임 총리가 된 처칠은 체임벌린 전 총리를 다우닝가 총리관저에 잠시 머물게 하고 다시 내각으로 끌어들였다.

체임벌린은 평화만 강조하다가 오히려 전쟁을 불러온 인물로 역사에 남겨졌다. 뮌헨 협상으로 평화를 가져왔다고 했지만 그 평화는 1년만에 깨지고 말았다.

맞서 싸우고 선한 대의를 견지하라. 처칠의 모교였던 해로우 스쿨에서의 연설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건져 올린 감동 어린 연설이었다.

“절대 굴복하지 마십시오. 절대, 절대, 절대로.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중요한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그 어떤 것에도 절대로 굴복하지 마십시오. 명예와 양식에 반하는 신념 외에는.”

보통 마지막 한 구절 ‘명예와 양식에 반하는 신념 외에는’이 생략되기도 하지만, 이 부분이 핵심이다. 처칠은 해로우 스쿨의 소년들과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원칙을 위해 싸우라고. 다만, 자신이 상식선을 넘는다면 그건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롤모델은 풍요로운 삶을 낳는다

세상에는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는 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은 우리 주변에도 있다. 6명의 아이를 입양하는 삼촌과 이모, 가족을 위해 일주일에 6일을 일하는 계약직 노동자, 남몰래 선을 베푸는 많은 사람들.

자신을 희생하고 덕을 실천하는 모범적인 인물을 찾아 우리 자녀들에게 선의 아름다움을 실천하도록 격려할 때, 우리는 자녀들의 인격과 미덕의 창고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마차와 증기기관차의 시대에 태어난 윈스턴 처칠은 모험으로 가득 찬 긴 삶을 살았다. 그의 업적, 그가 우리 세계를 형성한 방식, 그리고 그의 실패는 너무 많아서 여기에 다 열거할 수 없다.

아래는 처칠의 업적과 행적 일부를 연대별로 정리했다.

  • 1874년 11월 30일: 윈스턴 레오나드 스펜서 처칠은 블레넘 궁전에서 랜돌프 처칠 경과 그의 미국인 아내 제니 제롬 사이에서 태어났다.
  • 1888년: 해로우 스쿨에 입학하지만, 그의 성적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군 역사를 공부하는 걸 좋아했고 시 암기에 탁월했다.
  • 1893년: 두 번의 낙방이 있었지만, 처칠은 결국 샌드허스트 왕립군사대학에 입학한다. 입학은 어려웠지만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제복을 입은 19세의 윈스턴 레너드 스펜서 처칠. |Hulton Archive/Getty Images
  • 1895년: 아버지 랜돌프 경 사망. 아들에게조차 애정을 표현하는 일이 거의 없었던 아버지였지만, 처칠은 평생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 1895–1899년: 쿠바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하고, 그곳에서 정부와 반군 간의 싸움을 취재하며, 런던의 데일리 그래픽에 기사를 보냈다. 이 기간 처칠은 수단에서 벌어진 옴두르만 전투에 기병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그곳에서 포로로 잡힌 처칠은 극적으로 탈출해 영국인들의 영웅이 됐다.
  • 1900년: 하원 의원 당선.
  • 1908년: 클레멘타인 호지에와 결혼. 이들은 슬하에 다이애나, 랜돌프, 사라, 메리골드, 메리 이렇게 다섯 자녀를 두었다.
  • 1915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동맹국인 터키를 공격하려던 처칠의 계획은 갈리폴리에서 처참하게 실패했다. 이 실패는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 1916년: 서부전선 복무.
  • 1940년: 영국의 총리로 선출. 나치에 대항하기 위해 노력했다.
  • 1943년: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만나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무조건 항복 원칙’ 발표.
  • 1945년: 루즈벨트, 조셉 스탈린과 얄타에서 만나 유럽의 전후계획 논의.
  • 1945년: 독일과의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그해 처칠은 총리직을 잃었다.
  • 1947년: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철의 장막’ 연설을 하며 소련의 침략과 그 지배하에 있는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폭정을 경고했다.
  • 1951년: 총리에 재취임.
  • 1955년: 총리직은 사임했지만, 하원 의원으로 남았다.
  • 1963년: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처칠에게 미국 명예 시민권을 줬다.
  • 1964년: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났다.
  • 1965년: 아버지 랜돌프 처칠의 70번째 기일인 1월 24일 처칠은 세상을 떠났다.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추모하러 왔고 처칠은 나흘 동안 관에 누워있었다.
윈스턴 처칠의 국장 행렬. | Photo by Central Press/Getty Images

제프 미닉(JeffMinick)은 자녀가 네 명이고 손자 손녀를 여러 명 두고 있다. 20년 동안 뉴욕주 애쉬빌 홈스쿨링 학생들을 위한 세미나에서 역사, 문학, 라틴어를 가르쳤다. 현재 버지니아주 프런트 로얄에 살며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