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권 통치자 간의 특별한 교류, 루이 14세와 中 황제 강희제

류시화
2023년 01월 10일 오후 8:06 업데이트: 2024년 01월 19일 오후 5:31

“가장 높고, 뛰어나고 용감하고 관대한 친애하는 황제시여. 신이 당신의 위엄을 행복한 결말로 더하시길 기원합니다.”

“유럽의 과학에 정통한 학자를 가까이에 두길 원하셨기에 과학, 천문학 분야의 6인의 수학자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당신의 가장 소중하고 좋은 친구, 루이-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 ‘루이 14세’는 유럽 군주의 완벽한 모델이었습니다. 그런 루이 14세는 동양의 모범적인 통치자 ‘강희제’를 알게 되어 1688년 서로 간의 발전을 도모하자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동양과 서양, 중국과 유럽이 가까워지며 문화적 교류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많은 발전을 이룩한 것은 바로 루이 14세와 강희제가 서로 알게 된 이후입니다.

고대 중국의 철학과 예술의 풍부함에 매료되어 많은 영감을 받은 루이 14세는 1685년 고대 중국을 탐험하기 위해 6명의 예수회 선교사를 보내 역사의 흐름을 바꿨습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2인의 통치자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 있는 이 두 명의 군주는 17세기 후반에 세계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루이 14세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일가로 72년 동안 프랑스를 통치했으며 유럽을 가장 오랜 기간 통치한 군주입니다.

동양의 강희제는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의 가장 오랜 기간 황제로 재위한 인물로, 약 62년 동안 중국을 통치했습니다.

신의 통치권

루이 14세와 강희제는 각각 동서양 신학을 통해 나타난 신권으로 통치한 인물입니다. 루이는 자신을 지상의 신의 대표자로 여겼고, 강희제는 자신을 천자, 즉 하늘의 아들로 여겼습니다.

루이는 자신을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 아폴로에 비유했고, 아폴로의 ‘태양’을 자신의 상징으로 택했습니다. 당시에 제작된 루이 왕의 그림과 조각들은 군사적 승리를 거둔 로마 황제나 아폴로 신을 투영해 그의 권력과 신성함을 강조했습니다.

중국의 강희제는 유교, 도교, 불교의 세 가지 전통을 인정하며 세 종교의 주요 사원이 있는 태산을 방문해 하늘의 아들이자 황제로서의 위엄을 굳건히 했습니다. 고대 중국인들은 산이 신들의 신성한 거처라고 믿었습니다. 강희제의 태산 등반은 하늘로부터의 통치를 확인하고 황제로서의 정통성과 신성을 연결하는 의미였습니다. 이 특별한 등반은 청대 화가 왕휘에 의해 그림으로 남겨졌습니다.

서양의 학문에서 배우다

강희제와 루이 14세는 직접 만난 적은 없습니다. 이들은 중국에 파견된 프랑스인 선교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이에 중국과 프랑스는 서로의 예술과 문화를 탐구하면서 상호 간의 발전과 영감을 촉발했고, 본격적인 교류의 물결이 시작되었습니다.

강희제는 프랑스 왕이 보낸 사절단을 환영했고 그들이 가져온 과학적 지식에 매료되었습니다. 특히 천문학, 수학, 의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강희제는 청나라가 새로 정복한 영토의 국경 통제를 원활히 하기 위해 지도 제작 관행을 개선하길 원했습니다. 사절단은 유럽의 측량 도구를 선물하며 서양 학문을 열심히 공부하는 강희제에게 큰 도움을 줬습니다.

루이 14세와 중국 도자기

루이 왕의 선교사들은 강희제의 선물을 가지고 프랑스로 돌아갔습니다. 그 선물에 매료된 루이는 중국의 예술과 문화를 모방하는 데에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도자기는 중국 예술이 프랑스 궁정에 도입된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였습니다. 루이 14세는 중국 도자기 3,000점 이상을 수집했고 그 도자기를 식기로 애용하곤 했습니다.

또한 중국 도자기에 대한 열풍은 프랑스의 미술과 건축에서도 나타났습니다. 프랑스식 건물 지붕과 내부에 도자기 타일을 사용하거나 도자기의 주요 색상인 청백의 빛깔을 사용해 프랑스와 중국 문화의 융합을 보여줬습니다.

중국-프랑스 교류

강희제와 루이 14세. 이 두 인물은 비범한 통치자였을 뿐만 아니라, 한 세기 이상 이어진 동서양 간의 특별한 관계의 시작을 만들어낸 이들이기도 합니다. 이들의 교류는 동서양의 문화, 학술적 발전에 도움을 줬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통치를 마감한 후에도 그들의 후계자들은 이후 계몽주의 시대의 지식인들이 성찰하는 데에도 많은 영감을 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