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경찰, 엘리자베스 여왕 추모 연주자 체포해 논란

최창근
2022년 09월 23일 오후 12:09 업데이트: 2022년 09월 23일 오후 12:10

고(故)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추모 행사에서 하모니카를 연주한 홍콩인이 체포됐다 석방됐다. 홍콩 경찰이 적용한 혐의는 ‘선동죄’였다.

영국 BBC, 미국 CNN 등의 보도에 따르면 9월 21일, 홍콩 경찰은 주홍콩 영국총영사관 인근에서 하모니카를 연주하던 팡 모씨를 ‘선동적 의도를 가진 행동을 한 혐의’를 적용하여 체포했다. 팡씨는 조사 끝에 보석으로 석방됐다.

팡씨은 추모행사에서 ‘영광이 다시 오기를(Glory to Hong Kong)’을 하모니카로 연주했다. 추모객들은 휴대전화 손전등을 흔들며 연주곡을 따라 불렀고, 일부는 “홍콩, 해보자(Hong Kong, add oil)” 구호를 연발했다. 영광이 다시 오기를’은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를 상징하는 곡이다. 홍콩 교육사는 2020년 7월 홍콩 입법회 의원의 질의에 ‘글로리 투 홍콩’은 강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고 폭력·불법적 행동과 밀접히 관련됐다며 학교는 학생들이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답변한 바 있다.

홍콩 경찰이 엘리자베스 여왕 추모 행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하나는 영국이 과거 홍콩의 식민 모국(母國)이었기 때문이다. 1840년 제1차 아편전쟁, 1856년 제2차 아편전쟁 결과 당시 청(淸)제국은 홍콩섬과 주룽(九龍)반도를 영국에 ‘영구할양’했다. 이후 1898년 영국은 ‘홍콩조차연장조약’을 체결하여 신제(新界) 지역을 1997년까지 99년간 조차(租借)하여 홍콩섬, 주룽반도, 신제를 아우르는 ‘영국령 홍콩’의 판도가 완성됐다.

홍콩은 중국에 있어 ‘치욕의 역사’가 남긴 상징이다. 중국 공산당은 홍콩 시민이 영국 식민지 시기를 잊기를 원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영국 식민지 시기 홍콩 역사 지우기도 시도한다. 최근 홍콩 당국은 교과서에서 “홍콩이 식민지였던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홍콩인의 반응은 상반된다. 1960년대에 태어난 ‘은퇴자’라고 소개한 홍콩 시민은 9월 21일 CNN과 전화 인터뷰에서 “홍콩 정부가 여왕에게 어떤 존경심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홍콩 정부는 중국 정부를 두려워하지만 우리는 영국 식민지의 일부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984년 체결한 중영공동선언(홍콩반환협정)에 따라 신제 지역의 조차 기한이 만료되는 시점인 1997년 7월 1일부로 홍콩(홍콩섬, 주룽반도, 신제) 주권은 중국에 일괄 반환됐다. 이를 중국 정부는 ‘홍콩 조국 회귀’라고 정의했다.

1997년 7월 1일부로 종전의 ‘영국령 홍콩’의 주권은 중국에 반환됐고 홍콩 총독부를 대신하여 홍콩특별행정구 정부가 수립됐다. 반환 시 영국은 일국양제(한 나라 두 체제) 원칙에 의거하여 향후 50년 동안 홍콩에 ‘고도자치’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문제는 중국 정부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국 정부는 ‘범죄인 인도법안(송환법)’ ‘홍콩 국가보안법’을 연달아 제정하는 등 홍콩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언론 검열도 강화됐다. 결과적으로 영국 속령(屬領) 시절 ‘민주’는 없었으나 세계 최고 수준의 ‘자유’는 누렸던 자유무역항 홍콩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주권 반환 이후 하락세를 거듭하고 있는 각종 자유 지수가 이를 증명한다.

‘국경 없는 기자회(RSF)’가 2022년 5월 3일 발표한 ‘2022년 세계 언론자유 지수’에서 홍콩은 전 세계 180개국 가운데 148위를 기록했다. 전년도 80위 대비 무려 68계단이나 떨어져 가장 가파른 하락세를 보였다. 홍콩 반환 6년 차인 2002년 첫 발표 당시에는 18위였다.

이러한 형편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홍콩인 들은 ‘식민지 시절’을 더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 시 홍콩인들은 중국 공산당 1당 지배에 저항한다는 의미로 식민지 시절 홍콩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영국 국기 ‘유니언 잭’과 영국 왕실 윈저 왕가 문장이 들어간 식민지 시절 홍콩기. | 연합뉴스.

여왕 애도 시위에 홍콩 경찰이 예민한 또 다른 이유는 망자(亡者) 추모를 명분으로 권력에 저항하는 중국의 전통이다. 1976년 저우언라이 총리 사망 후 그해 청명절에는 저우언라이 추모를 명분으로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몰려든 학생, 시민들이 “저우언라이 총리 추모” “문화대혁명 4인방 타도” 구호를 외쳤다. 제1차 톈안먼 사건이다.

1989년 후야오방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 사망 후에도 베이징 시민들은 후야오방을 추모하며 덩샤오핑 등을 비판했다. 중국 공산당의 무력 진압으로 대규모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역사에 제2차 톈안먼 사건(6·4 톈안먼 사건)으로 기록됐다. 이 속에서 홍콩인들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한 기회로 인식했다.

결과적으로 홍콩인들의 영국 여왕 추모 행사는 중국 당국에는 중국 공산당의 홍콩 통치에 반대하는 행위로 비춰졌다.

한 가지 더 아이러니한 점은 홍콩 경찰이 팡씨 등 홍콩 시민에게 ‘선동법’을 적용했다는 것이다. 선동법의 연원은 식민지 시절 홍콩이다. 홍콩 총독부는 친중국 단체, 친중국 출판물을 제한하기 위해 1938년 ‘범죄조례’를 제정했고 선동법은 그 일부이다. 법에서는 주권자인 영국 국왕(여왕), 왕위 계승자, 홍콩 총독부에 대한 증오나 경멸을 담은 발언을 할 경우 처벌할 수 있게 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