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집권 3기 지도부…어떤 인물들로 채워졌나?

차이나뉴스팀
2022년 10월 24일 오후 4:36 업데이트: 2022년 10월 24일 오후 6:17

23일 중국공산당 제20기 1중전회에서 시진핑 3기 지도부의 중앙정치국 위원과 정치국 상무위원이 ‘선출’됐다. 새로운 상무위원 7명이 드러남에 따라 중국 공산당의 새로운 지도부가 안팎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공식 발표된 20기 상무위원은 시진핑, 리창, 자오러지, 왕후닝, 차이치, 딩쉐샹, 리시이다.

시진핑은 예상대로 당 총서기직을 유지했고, 왕후닝과 자오러지는 정치국 상무위원에 유임됐으며, 4명의 신진 상무위원에는 리창, 차이치, 딩쉐샹, 리시가 포함됐다.

연령대를 보면 시진핑 69세, 리창 63세, 자오러지 65세, 왕후닝 67세, 차이치 66세, 딩쉐샹 60세, 리시 66세다.

시진핑(習近平)

시진핑은 1953년생으로 베이징에서 태어났고 본향은 허난(河南)성 덩저우(鄧州)이다. 그는 정식으로 총서기의 3번째 임기에 들어섰다.

중국계 경제학자 리헝칭(李恆青)은 23일 에포크타임스에 “시진핑은 향후 정치적으로 좌경화로 갈 것”이라고 했다. 그는 시진핑이 경제적으로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고, 3분기 경제 데이터 발표가 지연된 것은 데이터가 너무 안 좋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4분기 데이터는 더 나빠질 것으로 믿는다”며 “이후 어려움은 해가 갈수록 커질 것”이라고 했다.

리창(李強)

리창(李強)

리창(李强)은 1959년 7월생으로 저장(浙江)성 루이안(瑞安) 출신이다. 그는 시진핑이 저장성 당서기로 재직할 당시 비서장을 맡은 인물로, 시진핑의 저장성 인맥인 ‘즈장신쥔(之江新軍)’의 핵심으로 꼽힌다. 그는 19차 당대회 이후 상하이시 당서기에 부임했다.

리헝칭은 지난 3월 말부터 2개월여 동안 상하이를 봉쇄해 아사자가 속출하고 의료 지원을 받지 못해 사망자가 속출했고, 봉쇄 여파로 2분기 경제성장률이 -13.7%로 추락했다고 지적했다. 리헝창은 리창이 상하이를 봉쇄한 것은 치명적인 과오라고 지적했다.

4월 5일, 상하이가 봉쇄되는 동안 곳곳에서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 STR/AFP via Getty Images

자오러지(趙樂際)

자오러지(趙樂際)

자오러지(趙樂之)는 1957년생으로 칭하이(青海)성 시닝(西寧)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산시(陝西) 시안(西安)이다. 그는 칭하이성 당서기와 산시성 당서기를 지냈고, 18차 당대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중앙조직부장을 역임했고, 19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기율위원회 서기를 역임했다.

자오러지는 1000억 위안(약 16조5000억원)이 넘는 규모의 ‘산시(陝西)성 광산권 계약권’ 사건과 산시성 친링(秦岭)산맥 지역 호화별장촌 불법 건설 사건에 깊이 연루됐다. 이 두 사건에 연루돼 낙마한 현지 관리들 중 상당수가 자오러지가 발탁한 부하들이다. 홍콩 매체 명보는 ‘2019년 시진핑이 이 두 사건과 관련해 자오러지에게 경고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중국중앙방송(CCTV)에 따르면 친링(秦嶺) 지역에 조성한 호화 별장촌이 불법 건축물로 밝혀져 2018년 7월 이후 1194채가 모두 철거됐다. | 영상캡처

왕후닝(王滬寧)

왕후닝(王滬寧)

왕후닝(王滬寧)은 1955년 상하이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산둥(山東)성 라이저우(萊州)이다. 그가 상하이 푸단대학 교수로 재직할 당시 1989년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에 반대하는 문서에 서명했고, 이를 계기로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의 측근 쩡칭훙(曾慶紅)의 신임을 얻어 정계에 진출했다.

그는 15년간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으로 재직하면서 장쩌민의 ‘3개 대표론’, 후진타오의 ‘과학발전관’, 시진핑의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 등 역대 주석의 지도사상을 정립했다. 그래서 그는 ‘3대국사(三代國師)’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시진핑을 만난 뒤에야 공산당 최고위층에 진입했고 19차 당대회에서 상무위원에 올랐고 이번에 연임하게 됐다.

시드니 과학기술대학의 핑충이(馮崇義) 중국학 교수는 에포크타임스에 이렇게 말했다.

“왕후닝은 뼛속까지 전체주의자로, 위로 올라가 상부의 표창을 받으려고 한다. 그가 배운 최고의 기술은 바로 상부의 심기를 헤아려 적절하게 아첨하는 것이다. 그는 중난하이에 입성한 후 지금까지 자신 명의의 글을 한 편도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책사로 정했고,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펑 교수에 따르면 시진핑은 자신의 이론을 확립할 수준이 안 되기 때문에 왕후닝을 필요로 했다. 물론 이는 왕후닝이 갈망하던 바다. 펑 교수는 “왕후닝은 자신이 더 크게 기여할 전체주의 통치자를 찾고 있었기에 자신이 누구에게 충성하는지를 말하지 않았다. 그는 공산당에 유용한 문인이다”라고 말했다.

차이치(蔡奇)

차이치(蔡奇)

차이치(蔡奇)는 1955년생으로 본관은 푸젠성 유시(尤溪)이고, 1983년 푸젠성 당서기 천광이(陳光毅)의 비서로 일하면서 정계에 들어섰다. 그 후 푸젠성 정치개혁판공실 부주임, 당건설판공실 부주임을 지냈다.

차이치는 1993년부터 1996년까지 푸젠성 당위원회 판공청 부주임, 싼밍시 부서기, 시장을 역임하는 등 푸젠성 관료계에서 16년간 활동했다. 1999년 이후 저장성에서 15년 동안 저장성 당위원회 상무위원과 상무부성장으로 재직했다. 2014년 비밀리에 중앙국가안전위원회에 진입했고, 2년 후에 베이징 시장으로 발탁됐다. 차이치도 즈장신쥔의 일원으로 꼽힌다.

그는 베이징을 통치하는 동안 한겨울에 이른바 ‘디돤런커우(低端人口·하층민)’를 몰아내 논란을 일으켰다.

중국 베이징 당국은 2018년부터 2년 연속 ‘하층민’을 몰아냈다. 사진은 베이징 당국의 ‘하층민’ 추방 시책에 따라 살고 있던 집에서 쫓겨나는 주민들. | FRED DUFOUR/AFP/Getty Images

딩쉐샹(丁薛祥)

딩쉐샹(丁薛祥)

딩쉐샹(丁薛祥)은 1962년생으로 장쑤성 난퉁(南通) 출신이다. 딩쉐샹은 시진핑이 2007년 상하이에서 잠시 근무할 때 시진핑의 정치비서를 지냈다. 그 후 그는 중앙판공청 주임, 중앙직속기관 공작위원회 서기를 역임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가기관공작위원회 서기는 중난하이의 대내총관(大內總管)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시진핑이 해외 순방때 항상 수행했다.

리시(李希)

리시(李希)는 1956년생으로 간쑤(甘肅) 량당(兩當) 출신이다. 량당은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習仲勳)이 1932년 군사폭동을 일으킨 곳이다. 리시는 고향 량당을 붉은 명소로 개발하는 데 힘을 쏟았다.

리시는 2004년 12월 산시(陝西)성 당위원회 상무위원, 비서실장, 옌안시 당서기를 지냈다. 그는 시진핑이 문화대혁명 시기 지식청년으로 하방(下放·지식인을 노동현장으로 보냄)됐던 산시성 옌안시 옌촨(延川)현의 산골 마을 량자허(梁家河)촌을 ‘혁명 관광지’로 만들었다. 그 후 리시는 상하이시 조직부장과 부서기, 랴오닝성 당서기를 역임했고, 19차 당대회 이후 후춘화의 뒤를 이어 광둥성 당서기를 지냈다.

시진핑이 4년간 살았다는 토굴에는 그가 당시 썼던 침상과 침구, 책상, 낡은 셔츠, 어린 시절 모습이 담긴 기념사진 등이 가지런히 보관돼 있다. | 인터넷 이미지

20차 당대회 이후 내부 투쟁 더 치열할 것

23일 20차 당대회 폐막식에서 시진핑의 왼쪽에 앉은 후진타오 전 총서기가 회의 도중 갑자기 자리를 떴다. 관련 동영상을 본 해외 언론들은 후진타오가 ‘끌려 나가듯 퇴장당했다’고 보도했다. 여러 학자들은 에포크타임스에 후진타오 강제 퇴장당한 것은 그가 속한 공청단파가 지도부에서 완전히 제거된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후진타오 전 중국 국가주석이 2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당 대회) 폐막식 도중 갑자기 퇴장하고 있다. | 연합뉴스

리헝칭은 시진핑이 20차 당대회에서 ‘투쟁’을 강조했다면서 그가 지난 10년 동안 권력의 정점에 있었고 또 3연임이라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투쟁의 결과라고 했다. 이는 모든 인민에게 섬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다시 중국은 ‘운동’이 끊이지 않는 섬뜩한 시대로 접어들 것이다. 향후 중국 공산당의 내부에는 더욱 잔인하고 더욱 거센 피바람이 몰아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