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들이 본 베이징 올림픽, “슬프고 적막하고 무섭다”

하석원
2022년 02월 14일 오후 3:45 업데이트: 2022년 02월 14일 오후 6:54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무서운 적막 속에서 선수들에게 좌절감을 주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기사에서 베이징 올림픽이 “더 슬프고 더 조용하며 더 무섭다”고 보도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라는 올림픽 모토를 패러디한 것이다.

WSJ은 동계올림픽은 세계적인 스포츠 축제로 예정됐지만, 베이징에 머무는 각국 대표선수들에게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좌절감을 주고 있다고 꼬집었다.

당초 무관중으로 계획됐던 이번 올림픽은 제한적으로 관중 입장이 허용됐다. 그러나 함성 응원이 금지돼 관중석은 조용하다. 일부 경기에는 중국인 관객들이 적잖게 보였지만 대부분 경기는 거의 빈 경기장에서 진행된다.

경기나 훈련 때를 제외하면 항상 마스크를 착용하고 매일 중공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검사를 받아야 한다. 양성 판정이 나오면 격리시설로 보내져 지난 4년간의 훈련이 헛된 노력이 될 위험에 빠진다.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부담감과 긴장감에 짓눌리는 선수들은 팬데믹과 공산주의 중국 특유의 방역 통제로 고통이 증폭되고 있다. “질식당하는 기분”이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나온다.

쇼트트랙 여자 500m 메달 유망주였던 폴란드의 나탈리아 말리스체프스카 선수는 베이징 도착 후 양성 반응으로 격리됐다가 예선 전날 밤에야 음성이 나와 격리가 해제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폴란드 여자 쇼트트랙의 나탈리아 말리스체프스카. | 로이터/연합

그러나 경기 몇 시간 전, 최종 검사에서 다시 양성이 나와 검역소로 이송됐다. 결국 4년간 준비한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말리스체프스카는 숙소에 있다가 새벽 3시에 중국 공산당(중공) 당국에 의해 격리시설로 다시 보내졌다. 중공 당국은 그녀의 검사 결과가 잘못됐다고 했다가 다시 양성이 맞다며 격리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녀는 트위터에 폴란드어로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들의 검사를 못 믿겠다”며 더 이상 몸과 마음이 견딜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WSJ은 지난 10년간 치러진 모든 올림픽이 경기장 바깥 상황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면서 러시아 소치 동계올림픽 때는 테러 위협이 고조됐고, 브라질 리우 하계올림픽은 지카 바이러스 위협의 직격탄을 맞았다고 했다.

2018년 한국의 평창 동계올림픽 때는 북한의 핵 위협이 고조됐고 2021년 일본 도쿄 하계올림픽은 코로나19가 덮쳤다.

그러나 베이징 동계올림픽은 코로나19 외에 철저한 방역수칙과 통제, 지정학적 긴장에 편파 판정 논란까지 겹치면서 최악의 올림픽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올림픽은 세계 각국에서 모인 선수단과 코치, 방문단이 그 나라의 사회와 문화를 경험하는 민간 교류의 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은 버스 창문을 통해서만 베이징 주민들의 일상을 볼 수 있다. 취재진 역시 경기장 사이를 이동할 때 튜브터널이 설치되지 않았다면 길을 걷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선수들 사이에서는 생활환경과 식생활에 대한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고 호텔에 격리된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의 바이애슬론 대표팀 선수인 발레리아 바스네초바는 지난 5일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5일 연속 아침·점심·저녁으로 먹고 있는 음식”이라며 도시락 사진을 올렸다.

코로나19 양성 판정으로 호텔에 격리된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의 바이애슬론 대표팀 선수인 발레리아 바스네초바가 ‘도저히 못 먹을 음식’이라며 올린 사진 | 바스네초바 인스타그램

바스네초바가 5일간 동일한 메뉴로 제공받고 있다는 도시락에는 파스타 약간, 소스, 반으로 자른 알감자 다섯 알, 검게 그흘린 고기 등이 담겼다.

그녀는 “다른 음식은 먹을 수가 없어 파스타 하나로 버틴다”며 “배가 아프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눈가엔 다크서클이 생겼다. 몸무게가 줄어 뼈가 드러나고 있다”고 괴로움을 호소했다. 이어 “너무 힘들다.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다”고 덧붙였다.

바스네초바는 같은 호텔의 다른 층에 묵고 있는 러시아 선수단 의사가 받은 식단이 확진자 식단과 뚜렷하게 다른 점도 지적했다.

그녀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선수단 의사가 받은 음식 사진에는 포도와 키위, 오렌지 등 삼색 과일과 샐러드, 도마토 계란볶음 등이 포함돼 있었다. 바스네초바는 선수라서 차별 대우를 받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녀의 계정은 곧 폐쇄됐다.

허베이성 장자커우에 마련된 올림픽 선수촌에 머물고 있는 핀란드 크로스컨트리 대표선수 카트리 라일린페라는 지난 9일 소셜미디어에 영상 하나를 게재했다. 영상에는 선수촌 숙소 스프링클러가 모두 터져 물이 새고 있는 믿기 힘든 현장 모습이 담겼다.

핀란드 크로스컨트리 대표로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카트리 라일린페라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선수촌의 물 새는 영상 | 화면 캡처

바닥은 수영장처럼 물이 차올랐고 다른 선수는 빗자루로 물을 쓸어냈다. 라일린페라는 ‘도와달라(Help)’는 글귀와 함께 인스타그램에 계정에 올렸고, 영상은 삽시간에 널리 공유되며 국제적 관심을 끌었다.

라일린페라는 “대회 관계자가 영상을 지워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덧붙였다. 이후 영상은 삭제됐지만 이미 네티즌에 의해 영상과 사진으로 퍼진 뒤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중공 당국이 선수촌의 부실함을 수습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영상 삭제’였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연이은 선수들의 불만을 접수한 후 격리 환경을 개선했으며, 선수위원회와 전화 통화로 논의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공교롭게도 선수위원회 위원장 역시 격리 상태였다.

호주의 컬링 혼합복식(믹스더블)팀인 탈리 길과 딘 휴잇의 ‘중국 여행’은 더욱 기이했다. 지난 5일 탈리 길이 여러 차례 테스트를 해도 여전히 양성이 나오자 이들은 경기를 포기하고 호주로 귀국할 예정이었다.

호주올림픽위원회는 중국에서 격리하는 것보다 호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중국 보건당국은 두 선수가 경기를 계속 치를 수 있다고 통보했다. 경기 시작 15분 전이었다.

길은 “내 인생에서 가장 미친 24시간이었다. 여행 가방을 아직 다 풀지도 못했다”고 말했다.